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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수사견(一水四見)
한 가지 물을 네 가지로 본다는 뜻으로, 같은 대상이지만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각각 견해가 사뭇 다름을 비유하는 말이다.
一 : 한 일(一/0)
水 : 물 수(水/0)
四 : 넉 사(囗/2)
見 : 볼 견(見/0)
(유의어)
일경사견(一境四見)
일경사심(一境四心).
같은 물이지만, 천계(天界)에 사는 신(神)은 보배로 장식된 땅으로 보고, 인간은 물로 보고, 아귀는 피고름으로 보고, 물고기는 보금자리로 본다는 뜻이다. 곧, 같은 대상이지만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각각 견해가 사뭇 다름을 비유하는 말이다.
이 성어는 중국 당나라의 현장(玄獎)이 번역한 법상종(法相宗)의 중요 성전이라는 유식학(唯識學)에 나오는 말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식불교에서는 "같은 물이라도 천상의 사람이 보면 유리로 장식된 보배로 보이고(天見是寶嚴地), 인간이 보면 마시는 물로 보이며(人見是水), 물고기가 보면 사는 집으로 보이고(魚見是住處) 아귀가 보면 피고름으로 보인다(餓鬼見是膿血)는 것이다"고 했다. 이것이 일수사견(一水四見)이다.
즉 물은 똑같은 물이지만 보는 주체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된다는 것이다.
부처가 8만 4천의 법문을 펼친 이유도 서로 다른 8만 4천의 중생세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물을 놓고도 이렇듯 서로 다르게 볼 수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이나 가치관 앞에서는 얼마나 서로 다르게 바라볼까?
그러므로 "내 생각이 맞다, 내가 말하는 것이 최고다"라고 우기는 것은 스스로 어리석음을 표출함과 다를 바 없다. 상대가 문제가 있게 보인다는 것은 곧 내가 문제 있는 사람인 것이다.
상대가 원수 같아 보인다면 내가 그만큼 문제가 있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를 미워하는 사람, 원망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증오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자신부터 돌아보아야 한다.
아! 모르겠습니다. 제 눈에 안경이라 했나요.
■ 일수사견(一水四見)
한 가지 물을 네 가지로 본다는 뜻으로, 사물을 모두 똑 같이 인식할 수 없다를 이르는 말이다. 한 가지 사안을 두고 생각하는 것이 천차만별인 것처럼 구체적인 물건을 보고도 받아들이는 것이 다른 경우가 많다.
아는 만큼 보이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여긴다는 좋은 비유에 군맹무상(群盲撫象)을 든다. 큰 코끼리를 두고 앞이 보이지 않는 장애인들마다 뱀으로, 무로, 평상 등으로 자기가 만진 것을 진짜로 여긴다. 잘 보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주관이나 선입견에 얽매여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한다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불교에 같은 사물을 보는 주체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좋은 가르침이 있다. 한 가지의 물(一水)을 가지고 네 가지로 본다(四見)는 성어가 그것이다. 같은 물인데 그 물이 환경에 따라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니 한 가지만 절대적으로 옳다고 고집하면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일경사견(一境四見), 일경사면(一境四面), 일경사심(一境四心) 등도 비슷한 말이다.
중국 당(唐)나라의 고승으로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남겨 잘 알려진 현장(玄奘)법사는 법상종(法相宗)의 주요 성전 '유식학(唯識學)'도 번역했는데 성어는 여기에 나온다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 각자의 능력인 근기(根機)에 따라 진리를 얻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고 해도 같은 물을 보는 주체에 따라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내용을 보자.
天見是寶嚴池(천견시보엄지)
천상의 사람이 보면 보배로운 못으로 보이고
人見是水(인견시수)
인간이 보면 마시는 물로 보이나
魚見是住處(어견시주처)
물고기가 보면 사는 집으로 보이고
餓鬼見是膿血(아귀견시농혈)
아귀가 보면 피고름으로 보인다
이처럼 각기 달리 보이니 인용한 경전에 따라 조금씩 차이난다. 하늘이 볼 때 유리(琉璃), 귀신이 볼 때는 불을 생각한다(鬼見水思火/ 귀견수사화)는 것 등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한 가지 물도 네 가지로 보인다는 것은 한 가지로 분명히 할 수 있는 경지는 있지 않다(一水四見 明境非有/ 일수사견 명경비유)"는 것으로 보기도 한단다.
일체의 모든 것은 각자가 인식하는 마음의 나타남이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연상하게도 한다. 모든 사물을 모두에게 똑 같이 생각하고 느끼도록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재미있는 말이 또 있다.
불안돈목(佛眼豚目)은 부처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자애롭고, 돼지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추하다는 뜻이다. 자기 위주로 색안경을 끼고 본다면 나 아닌 전부가 잘못이고 불만이다. 모여 살아가는 사회에서 시각에 따라 평가가 다르니 최대한 공통되는 생각을 도출하고 결과를 인정해야 발전한다.
■ 일수사견(一水四見)
탐욕으로 점철된 중생심으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각자의 관점(業)에서 헤아리기(思量) 때문입니다. 교리에서 비슷한 일례를 들자면 똑같은 물이라도 천신은 보배로 장식된 곳, 인간은 물, 아귀는 피고름, 물고기는 보금자리로 여긴다고 하였습니다(一水四見). 하나의 대상이지만 견해에 따라 시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對於同一境界 由於見者心識之不同).
그렇다면 공동의 정의나 개념도 사회적 약속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약속들이 모여 체계를 갖추고 학습되는 과정에서 커다란 관점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가운데 '있다(有, 常見)'와 '없다(無, 斷見)'를 들어서 '중도'의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있다는 상견'은 세계가 상주불변하고 자아도 불멸하여 사후의 자아 역시 소멸되지 않고 재생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상속된다는 상주론입니다(世界爲常住不變 人類之自我不滅). 이같은 주장은 '모든 것은 인연의 성품을 따른다(一切法空)'는 이치에 배치됩니다. 즉 영원이나 상주는 과거, 현재, 미래에 항상 존재하여 생멸하거나 변화하지 않는다(常存在 永不生滅變易)는 뜻이므로 무상의 이치에 반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없다는 단견'은 세상과 나는 단멸로 돌아간다는 단멸론입니다(偏執世間及我 終歸斷滅之邪見). 이것은 나와 세간이 한 번뿐이라는 것으로 인과상속(因果相續)의 이치를 거스릅니다. 이처럼 '영원'이나 '단멸'로는 일체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거나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혹자는 또 만물에는 정해진 성질, 즉 자성(自性)이 있다고 합니다. 달리 말하면 변하지 않는 본성이나 어떤 고유한 성질을 말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물이 액체가 되었다가 고체나 기체로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정된 자성이 없기에 물이 얼었다 녹기를 반복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다면 곧 인연을 인정하는 것이라서, 자성의 부정이며 무자성의 긍정이 됩니다. 달리 말하면 인연의 긍정은 자성의 부정인데 이것을 '공(空)'이라고 합니다.
공이란 '일체의 존재는 실체가 아니다'는 것으로 '실체(實體)'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인연성의 부정으로써 마치 일층과 이층 없이 삼층이 홀로 존재한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3은 2와 1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에 1을 더하면 1은 사라지고 2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1이 1이라는 자성을 가졌다면 1을 더하더라도 2가 되는 것이 아니라 1하고 또 1이 될 뿐입니다.
일체는 이러한 인연을 따르기에 실체가 없다는 측면에서 달리 '공'이라 하지만, 그렇다고 또 없는 것도 아니기에 잠시 존재한다는 의미로 '유(假)'라 합니다. 즉 '유'라 하더라도 절대의 '유'가 아니며, '공'이라 하더라도 절대의 '무'도 아닌데 '반야심경'의 표현을 빌리면,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입니다. 요약하면 무자성이라서 실체가 아니므로 인연을 따르기에 '공'이라 하고 그 의미는 '중도'인 것입니다.
중도란 전체를 아우르는 견해로써 크게 보면 직관적인 것과 분석적인 표현방식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해를 돕기 위한 양식의 차이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먼저 '유무', '인연', '공', '중도' 등의 용어를 쓰지 않고서도 동시에 나타내는 직관적인 표현은 다음과 같습니다. "산을 보면 산이고, 물을 보면 물이었다. 그러다 뒷날 산을 보니 산이 아니고, 물을 보니 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마음이 쉰 자리에서 전처럼 산을 보니, 단지 산이고 물을 보면 단지 물이다(老僧三十年前未參禪時 見山是山 見水是水. 及至後來 親見知識 有個入處 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而今得個休歇處 依前見山只是山 見水只是水)." (오등회원)
산이나 물이나 할 것이 없이 모두 인연이 화합된 것입니다(凡山河大地皆由四大假合而成). 이것을 다시 '인연', '공' 등의 불교 술어를 빌린 분석적인 표현은 이렇습니다. "인연으로 존재하니 그것을 공이라 하나, 이 또한 가명이며 중도의 뜻이다(衆因緣生法 我說卽是空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중론)
■ 일수사견 (一水四見)
몇 해 전만해도 달라이라마의 활동이나 근황 등이 다큐멘터리로 자주 방영됐다. 내용 중에는 티베트에서 인도로 온 이들이 라마를 친견하는 장면이 있다. 죽음과 맞바꿀 만큼 고통을 인내하고 히말라야를 넘어온 이들의 목적 중의 하나는 달라이라마를 친견하고, 라마가 상주하는 지역(다람살라)에 머무는 일이다.
라마와 망명객이 만나는 날, 라마는 남녀노소 심지어 승려에게도 마정수기를 하고, 어깨를 두드려주며, 손을 잡는 것으로 그들을 맞이한다. 고달픈 중생에게 백 마디 말보다 따스한 정서가 온누리에 퍼지는 듯하다.
달라이라마도 비구승인데, 여기에 계율이라는 잣대로 "어찌 비구가 여자의 손을 만지고, 마정수기를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고국을 등지고, 타향 땅에서 만나는 동족에게 연민을 쏟는 라마의 모습은 자비의 화신이다. 라마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할 때가 있다. 소납도 '라마처럼 자비로운 모습으로 사람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맹세도 하면서….
그런데 과연 이 한국 사회에서 비구니가 달라이라마처럼 행동한다면 사회 관념상 통용이 될까? 마치 토종닭이 우아하게 헤엄치는 백조의 모습을 보고, 똑같이 해보겠다고 호수에 들어갔다가 익사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곧 누가 하느냐에 따라 자비의 화신도 될 수도 있지만, 해프닝이 될 수도 있다. 해프닝인 경우 '사회에 통용되는 부작용이라는 칼을 들이대는 모양새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사회 전반적으로 진실이 왜곡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보는 자의 견해에 따라 현상에 대한 평가가 다른 것은 아닐까? 유식에 '일수사견(一水四見)'이 있다. 천인(天人)은 물(水)을 보석으로 치장된 연못으로 보고, 인간은 단지 물로 보며, 아귀는 피로 보고, 물고기는 자신이 사는 공간(住處)으로 여긴다. 이렇게 한 현상도 견해에 따라 천차만별로 해석된다. 어리석은 중생세계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진실만을 믿으라. 누군가 그대의 행동방식을 부정적으로 본다면, 상대방의 인격 문제이지, 그대의 '업(karma)'이 아니지 않는가?
■ 세상을 보는 눈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는 두가지가 있다고 한다. 바로 긍정적이고 좋은 마음으로 세상이나 남을 바라보는 '청안'과 눈의 흰자위가 나오도록 남을 업신여기거나 부정적으로 흘겨보는 '백안'이 바로 그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의 일화를 꼽을 수 있다. 무학대사가 기거하는 도봉산의 절을 찾은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곡차를 마시며 격의없이 지내자고 말한 끝에 문득 대사에게 농담을 걸기 시작했다.
이성계가 말했다. "요즘 대사께서는 살이 뚱뚱하게 쪄서 마치 돼지 같소이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소승이 돼지처럼 보이십니까? 전하께서는 언제 보아도 부처님처럼 보이십니다." "아니, 격의없이 서로 농을 즐기자고 해놓고, 대사께서는 과인을 부처님 같다고 하면 어쩝니까?"
무학대사의 설명이 정곡을 찌른다. "돼지 눈으로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은 오직 돼지로 보이고, 부처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오직 부처로 보이는 법이지요(豕眼見惟豕 佛眼見惟佛/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 이 태조는 크게 한방 먹었다며 껄껄껄 웃고 말았다는 얘기다.
불교 경전에는 일수사견(一水四見)이란 말이 나온다. 같은 물이라도 천계에 사는 신은 보배로 장엄된 땅(天見是寶嚴地)으로 보고, 인간은 마시는 물(人見是水)로 보고, 물고기는 보금자리(魚見是住處)로 보고, 아귀는 피고름(餓鬼見是膿血)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보고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보는 시각대로 세상을 보고 살아간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을 둘러싼 평가가 엇갈리는 것 역시 사람들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다는 좋은 사례다. 탄핵을 외친 사람과 죄가 없다며 탄핵기각을 주장한 사람의 견해는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 박 전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의한 탄핵심판을 통해 대통령직을 잃고, 영어의 몸이 된 지금도 광화문 태극기모임에 나오는 수만명의 지지자들이 몰려나와 박 전 대통령의 석방을 외치고 있는 것을 보면 무언가 다시한번 되짚어봐야 할 이유가 있지않나 생각을 해보게 된다.
최근 전 청와대 민정수석실 특별감찰반인 김태우 수사관과 청와대간에 벌어지고 있는 진실게임 역시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청와대는 이 사건에 대해 처음부터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평소 냉정하고 차분한 논평을 내오던 청와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청와대 민간인 사찰 의혹 관련 언론보도를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말미에 "문재인 정부의 유전자에는 애초에 민간인 사찰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청와대의 결백을 강조하려 했는지 몰라도 낮은 자세로 소통해야 할 사안에 오만하게 대응한다는 반발을 샀다.
이에 앞서 국민소통수석은 기자들에게 보낸 메시지를 통해 "궁지에 몰린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개울물을 온통 흐리고 있다"고 말해 논란을 부추기기도 했다. 이후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이같은 논란에 대해 "더 이상 대응하지 않겠다"면서 "언론도 이제 더이상 급이 맞지 않는 일 하지 말자"고 목청을 높여 언론의 눈총을 샀다.
이에 대해 김 수사관은 "내 첩보 보고서에 대한 청와대의 해명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재반박했다. 그는 민간인 사찰논란이 되는 첩보를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특감반원들도 청와대 첩보양식에 맞춰 많이 썼다고 주장했다. 이제 공은 검찰에 넘어갔지만 진실게임의 승패가 가려질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눈은 내가 옳고, 상대가 그르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다만 똑같은 사안을 놓고 서로 다른 의견을 보일 때, 둘 중 하나가 틀린 게 아니라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치가 아닐까.
▶️ 一(한 일)은 ❶지사문자로 한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젓가락 하나를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하나를 뜻한다. 一(일), 二(이), 三(삼)을 弌(일), 弍(이), 弎(삼)으로도 썼으나 주살익(弋; 줄 달린 화살)部는 안표인 막대기이며 한 자루, 두 자루라 세는 것이었다. ❷상형문자로 一자는 '하나'나 '첫째', '오로지'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一자는 막대기를 옆으로 눕혀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막대기 하나를 눕혀 숫자 '하나'라 했고 두 개는 '둘'이라는 식으로 표기를 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그래서 一자는 숫자 '하나'를 뜻하지만 하나만 있는 것은 유일한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오로지'나 '모든'이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一자가 부수로 지정된 글자들은 숫자와는 관계없이 모양자만을 빌려 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一(일)은 (1)하나 (2)한-의 뜻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하나, 일 ②첫째, 첫번째 ③오로지 ④온, 전, 모든 ⑤하나의, 한결같은 ⑥다른, 또 하나의 ⑦잠시(暫時), 한번 ⑧좀, 약간(若干) ⑨만일(萬一) ⑩혹시(或時) ⑪어느 ⑫같다, 동일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한가지 공(共), 한가지 동(同),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무리 등(等)이다. 용례로는 전체의 한 부분을 일부(一部), 한 모양이나 같은 모양을 일반(一般), 한번이나 우선 또는 잠깐을 일단(一旦), 하나로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음을 고정(一定), 어긋남이 없이 한결같게 서로 맞음을 일치(一致), 어느 지역의 전부를 일대(一帶), 한데 묶음이나 한데 아우르는 일을 일괄(一括), 모든 것 또는 온갖 것을 일체(一切), 한 종류나 어떤 종류를 일종(一種), 한집안이나 한가족을 일가(一家), 하나로 연계된 것을 일련(一連), 모조리 쓸어버림이나 죄다 없애 버림을 일소(一掃), 한바탕의 봄꿈처럼 헛된 영화나 덧없는 일이란 뜻으로 인생의 허무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일장춘몽(一場春夢), 한 번 닿기만 하여도 곧 폭발한다는 뜻으로 조그만 자극에도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상태를 이르는 말을 일촉즉발(一觸卽發), 한 개의 돌을 던져 두 마리의 새를 맞추어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한 가지 일을 해서 두 가지 이익을 얻음을 이르는 말을 일석이조(一石二鳥), 한 번 들어 둘을 얻음 또는 한 가지의 일로 두 가지의 이익을 보는 것을 이르는 말을 일거양득(一擧兩得), 한 사람을 벌주어 백 사람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한 가지 죄와 또는 한 사람을 벌줌으로써 여러 사람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킴을 일컫는 말을 일벌백계(一罰百戒), 한 조각의 붉은 마음이란 뜻으로 한결같은 참된 정성과 변치 않는 참된 마음을 일컫는 말을 일편단심(一片丹心), 한 글자도 알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일자무식(一字無識), 한꺼번에 많은 돈을 얻는다는 뜻으로 노력함이 없이 벼락부자가 되는 것을 이르는 말을 일확천금(一攫千金), 한 번 돌아보고도 성을 기울게 한다는 뜻으로 요염한 여자 곧 절세의 미인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일고경성(一顧傾城), 옷의 띠와 같은 물이라는 뜻으로 좁은 강이나 해협 또는 그와 같은 강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 접해 있음을 이르는 말을 일의대수(一衣帶水), 밥 지을 동안의 꿈이라는 뜻으로 세상의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일취지몽(一炊之夢), 화살 하나로 수리 두 마리를 떨어 뜨린다는 뜻으로 한 가지 일로 두 가지 이득을 취함을 이르는 말을 일전쌍조(一箭雙鵰), 한 오라기의 실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질서나 체계 따위가 잘 잡혀 있어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일사불란(一絲不亂), 하루가 천 년 같다는 뜻으로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함을 이르는 말을 일일천추(一日千秋), 그물을 한번 쳐서 물고기를 모조리 잡는다는 뜻으로 한꺼번에 죄다 잡는다는 말을 일망타진(一網打盡), 생각과 성질과 처지 등이 어느 면에서 한 가지로 서로 통함이나 서로 비슷함을 일컫는 말을 일맥상통(一脈相通), 한 번 던져서 하늘이냐 땅이냐를 결정한다는 뜻으로 운명과 흥망을 걸고 단판으로 승부를 겨룸을 일컫는 말을 일척건곤(一擲乾坤), 강물이 쏟아져 단번에 천리를 간다는 뜻으로 조금도 거침없이 빨리 진행됨 또는 문장이나 글이 명쾌함을 일컫는 말을 일사천리(一瀉千里), 하나로써 그것을 꿰뚫었다는 뜻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음 또는 막힘 없이 끝까지 밀고 나감을 일컫는 말을 일이관지(一以貫之), 기쁜 일과 슬픈 일이 번갈아 일어남이나 한편 기쁘고 한편 슬픔을 일컫는 말을 일희일비(一喜一悲), 한 입으로 두 말을 한다는 뜻으로 말을 이랬다 저랬다 함을 이르는 말을 일구이언(一口二言) 등에 쓰인다.
▶️ 水(물 수)는 ❶상형문자로 氵(수)는 동자(同字)이다. 시냇물이 흐르고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물을 뜻한다. 본디 물 수(水)部는 시내의 뜻이었다. 부수로 쓸 때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로 쓰는 일이 많다. ❷상형문자로 水자는 ‘물’이나 ‘강물’, ‘액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水자는 시냇물 위로 비가 내리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水자의 갑골문을 보면 시냇물 주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물’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水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대부분이 ‘액체’나 ‘헤엄치다’, ‘범람하다’와 같이 물과 관련된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참고로 水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氵자나 氺자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水(수)는 (1)오행(五行)의 하나. 방위(方位)로는 북쪽, 계절로는 겨울, 빛깔로는 검정을 나타냄 (2)수요일(水曜日)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물 ②강물 ③액체(液體), 물과 관련된 일 ④홍수(洪水), 수재(水災), 큰물(비가 많이 와서 강이나 개천에 갑자기 크게 불은 물) ⑤수성(水星: 태양에 가장 가까운 별) ⑥별자리의 이름 ⑦물을 적시다, 축이다 ⑧물을 긷다, 푸다 ⑨헤엄치다 ⑩물로써 공격하다 ⑪평평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내 천(川), 강 강(江), 물 하(河), 바다 해(海), 시내 계(溪), 바다 명(溟),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메 산(山), 큰 산 악(岳), 뭍 륙/육(陸), 불 화(火),빌 공(空)이다. 용례로는 물 속에서 몸을 뜨게 하고 손발을 놀리며 다니는 짓을 수영(水泳), 축축한 물의 기운을 수분(水分), 물속에 잠김을 수몰(水沒), 물을 보내는 통로를 수로(水路), 물의 겉을 이루는 면을 수면(水面), 홍수로 인한 해를 수해(水害), 물에 의해 발생하는 힘을 수력(水力), 물의 깊이를 수심(水深), 저수지에 설치하여 수량을 조절하는 문을 수문(水門), 물의 양을 수량(水量), 물 속에서 자라는 풀을 수초(水草), 물과 물고기의 사귐이라는 수어지교(水魚之交), 깊고 넓은 물에는 큰 고기가 깃듦을 수관어대(水寬魚大), 물이 흐르면 자연히 개천을 이룬다는 수도거성(水到渠成), 물이 흐르면 고기가 다닌다는 수도어행(水到魚行), 흐르는 물과 하늘의 뜬구름이라는 수류운공(水流雲空), 물이 빠져 밑바닥의 돌이 드러난다는 수락석출(水落石出), 물과 물고기의 사귐이라는 수어지교(水魚之交), 물과 불은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수화불통(水火不通),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수적천석(水滴穿石) 등에 쓰인다.
▶️ 四(넉 사)는 ❶지사문자로 亖(사)는 고자(古字), 罒(사)는 동자(同字)이다. 아주 옛날엔 수를 나타낼 때 가로 장대 네 개의 모양으로 썼으나 三(삼)과 혼동되기 쉬우므로 전국시대 무렵부터 四(사)를 빌어 쓰게 되었다. 四(사)는 코에서 숨이 나오는 모양을 본뜬 것이었으나 그 뜻으로는 나중에 呬(희)로 나타내고, 四(사)는 오로지 수의 넷을 표시하는데 쓴다. ❷상형문자로 四자는 숫자 '넷'을 뜻하는 글자이다. 그런데 四자의 갑골문을 보면 긴 막대기 4개를 그린 亖(넉 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갑골문에서는 막대기 4개를 나열해 숫자 4를 뜻했던 것이다. 그러나 亖자가 숫자 三(석 삼)자와 자주 혼동되었기 때문에 금문에서는 '숨 쉬다'라는 뜻으로 쓰였던 四자를 숫자 '사'로 쓰기 시작했다. 四자는 사람의 콧구멍을 그린 것으로 본래는 '숨쉬다'라는 뜻으로 쓰였었지만, 숫자 4로 가차(假借)되면서 후에 여기에 口(입 구)자를 더한 呬(쉴 희)자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四(사)는 ①넉, 넷 ②네 번 ③사방(四方)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네 사람을 사인(四人), 네 곱절을 사배(四倍), 넷으로 가르거나 갈라짐을 사분(四分), 사방의 경계를 사경(四境), 사방의 둘레를 사위(四圍), 사방을 돌아보아도 친척이 없다는 뜻으로 의지할 만한 사람이 도무지 없다는 말을 사고무친(四顧無親), 사방에서 들리는 초나라의 노래라는 뜻으로 적에게 둘러싸인 상태나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고립 상태에 빠짐을 이르는 말을 사면초가(四面楚歌), 주위에 사람이 없어 쓸쓸함을 일컫는 말을 사고무인(四顧無人), 길이 사방 팔방으로 통해 있음이나 길이 여러 군데로 막힘 없이 통함을 일컫는 말을 사통팔달(四通八達), 이리저리 여러 곳으로 길이 통한다는 뜻으로 길이나 교통망이나 통신망 등이 사방으로 막힘없이 통함을 일컫는 말을 사통오달(四通五達), 사면이 봄바람이라는 뜻으로 언제 어떠한 경우라도 좋은 낯으로만 남을 대함을 이르는 말을 사면춘풍(四面春風), 사해란 곧 온 천하를 가리키는 말로 천하의 뭇사람들은 모두 동포요 형제라는 뜻을 이르는 말을 사해형제(四海兄弟), 네 갈래 다섯 갈래로 나눠지고 찢어진다는 뜻으로 이리저리 갈기갈기 찢어짐 또는 천하가 심히 어지러움 또는 질서 없이 몇 갈래로 뿔뿔이 헤어지거나 떨어짐을 일컫는 말을 사분오열(四分五裂), 네 가지 괴로움과 여덟 가지 괴로움이라는 뜻으로 인생에 있어 반드시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온갖 괴로움을 이르는 말을 사고팔고(四苦八苦), 사철의 어느 때나 늘 봄과 같음으로 늘 잘 지냄을 비유하여 일컫는 말을 사시장춘(四時長春), 사주의 간지로 되는 여덟 글자 또는 피치 못할 타고난 운수를 이르는 말을 사주팔자(四柱八字), 천하의 풍파가 진정되어 태평함을 이르는 말을 사해정밀(四海靜謐), 갓마흔에 첫 버선이라는 뜻으로 뒤늦게 비로소 일을 해 봄을 이르는 말을 사십초말(四十初襪), 404 가지 병이라는 뜻으로 인간이 걸리는 모든 질병을 이르는 말을 사백사병(四百四病), 네 마리 새의 이별이라는 뜻으로 모자의 이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사조지별(四鳥之別), 천하를 제 집으로 만든다는 뜻으로 천하를 떠돌아 다녀서 일정한 주거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사해위가(四海爲家), 사궁 중의 첫머리라는 뜻으로 늙어서 아내가 없는 홀아비를 이르는 말을 사궁지수(四窮之首), 사방의 지세가 견고하고 험한 자연의 요새로 되어 있는 땅을 이르는 말을 사색지지(四塞之地), 사방으로 흩어져 서로 따로따로 떨어짐 또는 그렇게 떼어놓음을 일컫는 말을 사산분리(四散分離), 어떤 주창에 응하여 모든 사람이 함께 행동함을 이르는 말을 사방향응(四方響應) 등에 쓰인다.
▶️ 見(볼 견, 뵈올 현)은 ❶회의문자로 见(견)은 간자(簡字)이다. 안석궤(几; 책상)部는 사람을, 目(목)은 눈을 뜻한다. 見(견)은 눈의 기능으로, 보는 일을 말하는데, 이쪽으로 부터 보는 것을 視(시), 저쪽으로 부터 나타나 보이는 것을 見(견)으로 나누어 썼다. ❷회의문자로 見자는 ‘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見자는 目(눈 목)자와 儿(어진사람 인)자가 결합한 것이다. 見자의 갑골문을 보면 人(사람 인)자에 큰 눈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사물을 보는 눈을 강조해 그린 것으로 ‘보다’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다만 한자에서는 目자가 주로 ‘눈’과 관련된 뜻으로 쓰이고 있다면 見자는 ‘보다’와 같이 보는 행위에 주로 쓰이고 있으니 차이점을 알아두는 것도 좋다. 또 예전에는 見자가 現(나타날 현)자 대신 쓰인 적이 있기에 ‘나타나다’나 ‘보이다’와 같은 의미도 있다. 이때는 ‘현’으로 발음한다. 다만 見자의 기본 의미는 ‘보다’이기 때문에 부수로 쓰일 때는 ‘보는 것’이나 ‘보이는 것’과 관련된 뜻을 전달한다. 그래서 見(견, 현)은 ①보다 ②보이다 ③당하다 ④견해 그리고 ⓐ뵙다(현) ⓑ나타나다(현) ⓒ드러나다(현) ⓓ보이다(현) ⓔ소개하다(현) ⓕ만나다(현) ⓖ현재(현) ⓗ지금(현) 등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타날 현(現), 볼 시(視), 뵐 근(覲), 볼 관(觀), 뵐 알(謁), 나타날 현(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숨을 은(隱)이다. 용례로는 보고서 깨달아 앎을 견해(見解), 듣거나 보거나 하여 깨달아 얻은 지식을 견문(見聞), 남에게 거절을 당함을 견각(見却), 실지로 보고 학식을 넓힘을 견학(見學), 남의 일을 보고 배워서 실지로 연습하는 것을 견습(見習), 사물을 관찰하는 입장을 견지(見地), 남에게 미움을 받음을 견오(見忤), 얼른 스쳐 봄을 별견(瞥見), 분실이나 유실을 당함을 견실(見失), 책망을 당함을 견책(見責), 마음에 생각하는 점을 의견(意見), 미처 찾아내지 못하였거나 알려지지 아니한 것을 찾아냄을 발견(發見),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편견(偏見), 서로 다른 의견을 이견(異見), 남의 일에 간섭함을 참견(參見), 사물을 식별하고 관찰하는 능력을 식견(識見), 무슨 일이 있기 전에 미리 짐작함을 예견(豫見), 보고 헤아리는 생각이나 올바로 인식하거나 올바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소견(所見), 신분이 높은 사람이 공식적으로 손님을 만남을 접견(接見), 지체 높은 사람을 찾아 뵙는 일을 알현(謁見), 임금께 나아가 뵈옴을 진현(進見),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다는 뜻에서 지나친 욕심을 절제함 또는 대의를 위해서 부귀영화를 돌보지 않는다는 의미의 견금여석(見金如石), 눈앞에 이익을 보거든 먼저 그것을 취함이 의리에 합당한 지를 생각하라는 견리사의(見利思義), 모기를 보고 칼을 뺀다는 뜻으로 보잘것없는 작은 일에 지나치게 큰 대책을 세운다는 견문발검(見蚊拔劍),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는 견위수명(見危授命), 항상 잊지 않음을 이르는 견요어장(見堯於墻),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는 견물생심(見物生心), 나라의 위급함을 보고 몸을 바친다는 견위치명(見危致命) 등에 쓰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