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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를 마주하고 있는 반대편의 아파트의 1702호는 언제나 어두웠다.
나는 항상 불이 꺼져 있는 1702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겨울이 지났지만 아직 차가운 바람이 불던 그 날까지.
그 날은 어머니의 기일이였다.
아버지의 폭행에 이기지 못하고 혼자 도망을 가시던 어머니였다.
도가 지나친 폭행의 고통에 찌든 그 빛 잃은 초점없던 눈동자는
아버지와 내가 도망치다 교통사고로 차갑게 식은 시신을 발견 했을 당시
핏기없는 얼굴 사이로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부릅 뜬 그 눈동자에 서린 것은 미련이였을까 끝 없는 구렁텅이에선 해방된 것에서 비롯 된 희열이였을까.
그 후, 평소에도 잦은 음주가무에 젖어계시던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가되어 매일 같이 무의미한 세월을 보내다 생을 마치셨다.
죄책감을 지우려 자신의 몸을 자해하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난 어머니는
현실을 지우려 하던 그 공허한 눈으로, 아니면 원망어린 눈으로 그를 보고 계실까,
빛 나던 그 눈동자로 한 때나마 사랑했던, 평생을 약속했던 남자를 보고 계실까.
반대편의 1702호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줄만 알았다.
집안에서 그 누구도 입 밖에 내려 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의례적인 행사를 치르고
집에 돌아 왔을때는 마치 높은 굽이 발바닥을 짓누르듯 뻐근했고
몸은 마치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나는 구두를 벗자마자 거실에 드러 누웠다.
해가 저물어가는 약간은 어두운 집안에선 어딘가 계속 불편하던 마음을
가라 앉혀 주는 적막이 곳곳히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베란다의 문을 통해 보이는 도로와 아파트 사이의
붉게 물든 하늘을. 상당히 피곤했지만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마치 하늘을 연모하는 사람처럼.
다홍빛으로 선명하게 빛나던 하늘은 어느새 빛을 읽고 어두워 지기 시작했다.
곧 하늘은 아름답던 선연한 색을 잃고 검붉은 빛으로 변하였다.
베란다의 큰 문을 뜷고 들어온 노을녘은 온 거실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그 때쯤이였다. 단 한번도 켜지지 않던, 아니, 켜졌을지도 몰랐지만 관심을 갖지 않았던
도로를 끼고 서로 베란다를 마주하고 있는 반대편 아파트의 1702호의 불이 켜진 것은.
곧 1702호의 베란다 문이 열리더니 덥수룩한 모습의 남자가 나왔다.
핏빛의 하늘은 마치 산소에 닿은 선혈처럼 빠른 속도로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 어둠 사이를 뚫고 빛나는 붉고 작은 불빛. 숨을 내 쉬는 그의 입에서
하얀, 그러나 살짝 쟂빛을 띄는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안경 사이 얼핏 비친 그의 눈동자를 잊을 수 없었다.
초점을 잃은 탁한 눈빛. 마치 이유 없는 폭행을 마른 몸으로 모두 받던 어머니의 눈동자 처럼.
아마 그 날 부터 였을 것이다. 나의 시선은 집요하게 그의 베란다를 쫒았다.
그의 집에선 자주 불이 켜지지 않았다. 거의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불이 켜졌다.
그의 집에서 불이 들어 올때마다 그는 어김없이 베란다로 나와
몆시간이고 약간 센 듯한 바람을 맞고 있었다.
몇 번씩 불규칙 적이긴 했지만 그의 집은 거의 매주 토요일 6시에서 7시 사이에
불이 들어오곤 했다. 그는 항상 붉게 하늘이 물들때 쯔음 나와서
빛을 잃고 흐릿한 어둠이 찾아올때까지 몇시간이고 베란다에 머물렀다.
볼 때마다 변함없는 초점 없는 눈동자를 한 그는 언제나 약간은 덥수룩한 모습이였다.
하지만 머리를 조금 자르고 좀 더 깔끔한 옷을 입는 다면 상당히 말쑥한 모습일 것이다.
점점 더 많이 그에 대해 알고 싶었다.
몇 달이 지나도록 같은 모습만 보여주는 그의 다른 모습을 알고 싶었다.
나는 매일 아침 출근하기 전 그의 아파트 앞에서 30분간 서 있었다.
마치 약속 시간에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듯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지만 혹시라는 마음에 자리를 뜰 수 없는 너절한 미련 처럼.
10분만 더, 5분만 더 하며 그를 기다리다가 종종 회사에 지각하곤 하였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 그에게 집착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나에게 있어 마치 끈이 끊어진 신처럼 늘어지는 미련이였다.
사건은 일상속에 스며들에 그저 굴레를 따라 움직이고 있을 뿐이듯이
항상 아침의 해는 어김없이 일상의 시작을 나타냈다.
그 날도 같은 하루였다. 어쩌면 오늘도 발을 잡아 끄는 미련만 남긴채로.
아침에는 항상 저기압인 나는 언제나 처럼 빵과 커피로 간단하게 아침을 시작했다.
또 언제나 처럼 나의 발걸음은 반대편 아파트에 머물렀다.
막연한 그의 공간과 집착 어린 나의 공간 사이의 차가운 시멘트의 온도가
봄이 지만 쌀쌀했던 추운 날씨에 비해 얇은 옷사이로 스며 들었다.
30분이 다 되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오늘도 지각이다.
나는 오늘도 마찬가지로 주저하며 시간을 끌었다.
오늘따라 더 미련이 남았다. 더 이상의 지체는 위험했다.
할 수 없이 그냥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닫혔던 유리문이 열렸다.
그는 내가 항상 베란다에서 지켜 본 약간은 너저분한 모습과는 달리
깔끔하면도 가벼워 보이는 흰색 와이셔츠와 브라운톤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는 한 순간 시선이 나에게 머물렀다.
그의 시선에 나는 그제야 내가 그를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나는 차를 타고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서둘러 차에 탔다.
그의 따라 차를 몰며 왼손으로 플립을 열었다.
단축키 8번을 꾹 누르자 낮익은 여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어? 혜연씨, 무슨일 있어요?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하고..."
"미안해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은 회사에 못갈 것 같아요.
내일 사유서 직접 제출한다고 말씀드려 주실수 있어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그럼 부탁할께요. 바빠서 먼저 끊을께요."
나는 플립을 닫으며 시선으로 그의 차를 쫓았다.
그는 멀지 않은 근처의 출판사에서 차를 세웠다.
혹시 글을 쓰는 사람인가...
나는 출판사까지 그를 따라 갈 수 없어서 결국 차를 돌렸다.
그의 아파트는 비어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아파트로 다시 갔다.
처음 들어와 보는 낮선 모습이였다.
17층을 누르고 엘리베이터의 벽에 기대어 말없이 기다렸다.
곧이어 엘리베이터가 작고 맑은 기계음을 냈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계단에 있는 창가을 통해 맞은편의 아파트에 있는 나의 집이 보였다.
색다른 풍경이였다. 항상 나는 반대편의 아파트에서 이 곳을 보았는데...
1702호라고 쓰여진 철문은 처음 보는 것이지만 왠지 낮설진 않았다.
그때 엘리베이터의 맑은 기계음이 다시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그'가 있었다.
나는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했다.
"저..."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나의 온 신경을 그에게 곤두세웠다.
전신의 피가 혈관을 타고 머리로 쏠리는 기분이였다.
"오늘 아침에 아파트 밑에 계시던 분 아닌가요?"
"아, 예... 죄송합니다. 저, 그게 전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지금 나의 상황은 그가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했다.
사실 베란다에서 본 그의 모습만으로 그를 기다렸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였다.
내가 계속 말을 잇지 못 하고 버벅대자 그가 바람새는 듯한 작은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를 마주 볼 수 없어서 시선을 돌리며 그를 피하고 있었다.
"제가 지금 얘기를 나눌 상대가 필요한데 바쁘지 않으면
들어와서 커피라도 한 잔 할래요?"
"네? 아, 예..."
그가 나의 반응에 웃음을 지우지 않은채로 철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파란 불빛을 내는 버튼이 몆번의 기계음을 내자 그는 능숙하게 문을 열었다.
그가 먼저 신발을 벗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시 문 밖에서 머뭇댔다. 정말 들어가도 되는 건가...?
"안 들어와요?"
"아뇨, 잠시만요."
그가 나를 부르는 말에 나는 문을 닫으며 그의 집에 들어왔다.
특이한 점은 그의 거실에 있는 불은 선명한 하얀 형광등이였지만
곳곳에 켜져있는 불들은 모두 황색을 띄는 형광등이였다.
나는 몆 켤레 없지만 가지런한 신발장에 신발을 벗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부엌에 있는 듯 했다. 나는 베란다 사이로만 얼핏 비추었던 집을 둘러보았다.
그다지 넓지는 않았다. 원룸인 듯 했다.
혼자 사는 우리 집의 평수와 크게 차이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도 혼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집은 대체적으로 심플했다.
쇼파와 텔레비젼. 그외 탁상과 필요한 것들은 모두 있는 듯 했지만
그 이외의 다른 장식품은 그다지 찾아볼 수 없었다.
"왜 계속 서 있어요? 거기 앉아요."
"아, 네."
그가 가르킨 탁상 옆의 방석위에 앉았다.
유리로 된 탁상 위에는 노트북만 하나 있었다.
그는 탁상의 맞은 편에 앉으며 커피를 내 쪽으로 하나 내밀었다.
뿌옇게 흐려지지 않은 맑은 빛을 띄는 커피는 헤이즐넛 특유의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향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 근처에 사세요?"
"네. 사실 저는 반대편 아파트 1704호에 사는 사람인데요."
"아, 그래요? 바로 맞은편이네요?!"
나는 어색하게 그를 향해 웃었다.
그는 하얀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사실 얼마전에 베란다를 보다가 우연히 그 쪽이 담배피는 모습을
보았는데 눈동자가 저희 어머니를 많이 닮아서요..."
"그 쪽이라니 너무 딱딱한데요? 윤지훈 입니다."
"아, 전 한혜연입니다."
"예쁜 이름이네요."
나는 그를 향해 살짝 웃으며 헤이즐넛을 한 모금 마셨다.
헤이즐넛은 깔끔하면서도 상당히 중독적인 커피였다.
"감사해요."
"저는 제가 쓴 글의 팬 이신줄 알았어요."
"아, 역시 작가님이세요?"
"작가라는거 티가 나나요?"
나는 그에게 내가 그를 미행 했다는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잠깐 멈칫 했다가 자연스럽게 말을 넘겼다.
"그냥 분위기가 좀 그래서요."
"하하, 그래요? 전 아직 무명작가라서요. 아마 잘 모르실 꺼예요."
"어떤 책을 내셨는데요?"
"아, '아지랭이'랑 '꽈리 피는 여름'이라는 소설인데요, 혹시 읽어 보신적 있나요?"
'꽈리 피는 여름'은 잘 모르는 소설이였지만
'아지랭이'는 대학 시절때 읽어 보았던 기억이 났다.
대체적으로 잔잔하지만 여운이 남는, 그런 이야기였다.
"'아지랭이'는 대학 시절때 읽었던 것 같아요.
그거 혹시 지현이라는 여자아이의 이야기 아닌가요?"
그는 내 말에 기뻐하며 마치 평소에 갖고 싶어하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맞아요! 그게 제 대뷔작이였어요."
"그때 상당히 여운을 남기는 소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여기서 그 소설을 쓰신 작가님을 뵙게 되네요."
"하하, 그런가요?."
어느새 식어가는 커피는 반 이상 사라져 있었다.
좀 더 그와 얘기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우물대는 나의 심정을 알았는지 그는 자연스럽게 다음 화제를 입에 올렸다.
"혜연씨는 올해 몇 살 이예요? 저랑 비슷해 보이는데...
아, 여자에게 이런 걸 묻는 것 실롄가요?"
웃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난 덩달아 옅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전 올해 27입니다. 독신으로 살기엔 아슬아슬한 나이죠."
"아, 그래요? 제가 조금 더 많네요. 저는 올해 32입니다.
저는 이미 독신으로 살기엔 늦어버린 나인가요?"
그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의 농담에 편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 정도는 긴장이 풀린 것 같았다.
그와 계속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오후가 되어 있었다.
그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것 같았다.
"아, 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시간 너무 많이 뺏아서 죄송합니다."
"아니예요. 전 무명작가라서 많이 바쁘지도 많고
오늘 원고 제출하고 와서 한동안 시간이 남아돌 것 같아요.
다음에도 시간나면 커피 한 잔 하러 오세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오히려 영광이죠."
"감사합니다."
그의 집에서 나온 나는 내가 살던 아파트로 돌아갔다.
베란다로 나가 문득 습관처럼 맞은편의 베란다를 보았다.
마침 베란다에 나와 있던 그가 나를 발견하곤 손을 흔들었다.
그 후에도 나는 몇 번씩 그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와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가 말했던 '꽈리 피는 여름'과 이번에 출판사에 투고한 '강 기슭'도 읽었다.
'아지랭이'와 '꽈리 피는 여름'의 잔잔한 이야기에 비해
'강 기슭'은 좀 더 격정적이고 고조되는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매주 토요일은 공허한 눈동자로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곤 했으나
보통때는 그 눈빛이 그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맑았다.
꽤 자주 만난 탓인지 몇 달이 지난 지금 그와 나는 편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나는 나자신이 점점 더 그에게 끌리는 것을 느꼈다.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고 그를 독점하고 싶어졌다.
여름이 끝나갈때 쯤의 일이였다.
이 번주는 한번도 그를 보지 못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그의 집을 찾아 갔을때마다 그는 부재중이였다.
드디어 그를 볼 수 있는 토요일이다.
나는 회사가 끝나자 마자 급하게 차를 몰아 집으로 왔다.
내 예상대로 그는 베란다에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집의 불은 모두 꺼져 있어서 그의 형상이 어둠에 가려졌다.
오늘은 그의 공허한 눈동자를 볼 수 없었다.
그의 눈은 감겨 있었다. 그는 마치 상처입은 자신을 보호하는 어린 동물처럼
몸을 웅크리며 흐느끼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황급히 신발을 신고 문도 잠그지 않은채로
그의 아파트를 향해 뛰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도 못 한 채로 그가 있는 층을 눌렀다.
굳게 닫혀 있을 꺼란 예상을 무시하는 듯 그의 문은
닫히지 않은 채로 열려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조용히 베란다로 다가갔다.
그는 소리를 죽이며 오열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뒤로 다가가서 조용히 웅크린 그를 안았다.
그는 잠깐 멈칫 한 듯했으나 곧 힘없이 몸을 나에게 기대왔다.
한동안 계속되는 그의 울음에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안고 있었다.
수십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는 결국 진정 할 수 있었다.
그는 서서히 진정하면서 두서 없이 말을 꺼냈다.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어. 작가가 꿈이였지만 항상 혹평만 듣던 나는
그녀 덕분에 포기 하지 않을 수 있었어. 그런데 어느날 그녀가 나한테 헤어지자는 거야.
그 후 그녀는 내가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나버렸어.
그녀가 이 곳에 볼일을 보러 토요일에 올 때마다 그녀를 찾아갔어.
그런데 오늘 그녀가 내게 결별을 선언 하면서, 곧 유학을 가겠대..."
그가 드문드문 잇는 말에는 그의 슬픔이 어려있었다.
그가 힘들어 하고 있다. 나라면 항상 이 사람의 곁에 있을 수 있을 텐데.
"나는 안돼요?"
"..... 그게 무슨..."
"지훈씨에게 나는 안 되냐구요. 예전부터 지훈씨를 사랑했어요."
그는 내 말에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그는 내가 그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쏟아지던 뜨거운 눈물이 마른 그의 눈동자와는 반대로
축축히 젖어들어가는 나의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저는 지훈씨를 결코 떠나지 않을 거예요."
"나는 계속 너를 힘들게 할 지도 몰라."
"상관 없어요. 제가 함께 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의 굳은살 박힌 엄지 손가락이 젖어 들어가는 나의 눈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는 나의 얼굴을 잡고 미련이 남을 정도로 짧은 미소를 지었다.
"... 내 옆에 있어줄래?"
"네. 언제까지나..."
그는 결국 흐느끼는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체온을 느끼며 나는 행복과 안도를 느꼈다.
그를 만나면서 부터 생겼던 갈증이 사라지는 기분이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그렇게 그와 사귀게 된 후에 시간은 마치 흐르는 시냇물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그는 그 후엔 단 한번도 토요일의 그 초점없는 눈빛을 내게 보여주지 않았다.
어느새 가을이 끝나가고 성큼 겨울의 문턱에 와 있었다.
날씨는 이미 한 겨울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매서웠다.
곧 그와 만난지 1년이 다 되어가는 날이였다.
나는 회사일이 끝나고 기분 좋게 집에 돌아왔다.
조금있다 그의 집에 가 볼 생각이였다.
오랜만에 그에게 저녁초대를 할 것이다.
그럼 그는 약간은 수줍은 미소를 띄며 고개를 끄덕이겠지.
나는 옷을 갈아입으며 오랜 습관처럼 그의 베란다를 보았다.
"..... 어... 째서...?"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나의 시선은 그에게 고정되어 버린 것 같이.
나는 대답 없는 물음만을 계속하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제까지만 해도 전화로 사랑을 고백했던 그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에게 웃어주던 그였다.
들고있던 새하얀 옷가지가 발 위로 떨어졌다.
싫어, 나를 만졌던 그 손으로 다른 여자를 안지 마.
싫어, 나를 안았던 그 팔로 다른 여자를 안지 마.
싫어, 나에게 키스했던 그 입술로 다른 여자에게 키스하지 마.
왜... 왜 나말고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거야?
나에게 주었던 그 미소를 왜 그녀에게 주는 거야?
나는 그의 거실에 켜진 불이 꺼진 후에도 멍하니 그 곳을 바라보았다.
이제 나는 필요 없는 걸까? 왜 그는 나를 버린 걸까?
나에게 사랑을 속삭였으면서, 내 곁에 있어주겠다고 약속 했으면서.
손이 주체하지 못하고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안 되는 거야? 나로는 안 되는 거야?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아니 흐르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마치 꺼진 아파트의 불빛처럼 절망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어둠은 시야를 가리지만 곧 익숙해 진다. 하지만 절망은 끝없는 침식으로 시야를 덮어버린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 했다.
"기다리지 말아요- 내가 지금 갈께요-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께요- 언제까지나-"
흩어진 옷가지를 밟고 걸음을 옮겼다.
옷장에는 사 놓고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원피스가 쇼핑백 안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대를 만나던 날의 하늘을 가지고 갈께요-"
나는 옷을 마저 벗어서 붉은 원피스를 입었다.
선명한 붉은 원피스는 그를 만났던 하늘의 색처럼 아름다웠다.
나는 노래를 끊임없이 흥얼거리며 그를 위한 선물을 들었다.
문을 열고 나가 그의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까지 노래에 맞춰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에게 줄 하늘은 그를 놀래키기 위해 나의 등 뒤에 숨겼다.
그가 가르쳐준 비밀번호를 파란 버튼으로
하나 하나 입력하자 굳게 잠겼던 문이 열렸다.
나는 그가 있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방에 들어서자 그는 나를 보고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그의 곁에 있던 여자도 그의 시선을 따라 나를 보았다.
놀란 듯 한 흐트러진 그녀의 모습에 비해 그는 하얀 와이셔츠에 비교적 말끔한 모습이였다.
"우리가 만날 날의 하늘을 주러 왔어요-"
"꺄아아아악!"
어둠은 시야를 가리지만 곧 익숙해 진다. 하지만 절망은 끝없는 침식으로 시야를 덮어버린다.
그의 하얀 와이셔츠가 그와 우리가 만난 날의 하늘색인
나의 원피스와 마찬가지로 선명한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아아, 이제 우리는 하나야.
우리의 약속은 영원해.
나는 늘어진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는 저항 없이 나에게 안겨왔다.
"우리의 하늘이예요. 어때, 내 선물이 마음에 들어요?"
".........."
"마음에 드는 구나, 다행이다."
어둠은 시야를 가리지만 곧 익숙해 진다. 하지만 절망은 끝없는 침식으로 시야를 덮어버린다.
"사랑해요, 이제 내 곁에 있을꺼죠?"
".........."
"그래요, 가지 말아요. 당신 곁에는 항상 내가 있을테니."
내가 그에게 선물 한것은 하늘이였다.
우리가 만났을때 처럼 붉은 하늘.
정말로 내가 그에게 준 것은 하늘이였다.
아름다운 선연한 색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던 그 날 처럼.
산소에 닿은 우리의 하늘은 금새 검게 변하였다.
나는 의미 없는 웃음을 지었다.
"아하... 아하하하하..... 아하하하하!!!"
나는 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당시 보았던 그 빛나는 눈동자를.
나는 드디어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것은 희열도 미련도 아니였다.
광기.
그 것은 광기였다.
거울에 비친 나의 빛나는 눈동자에 서린 그 빛은 광기.
"..... 내 하늘도 곧 검게 물들어 가겠죠."
노란 테이프가 얽힌 입구 안에는 하얀 장갑을 끼고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책임자인 듯한 수염을 기른 넓은 어깨의 남자가 중얼거렸다.
"지독하구만.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는지."
"반장님,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여자는 예전에 어머니을 잃은 후 정신 착란으로
일가족을 살해하고 도망친 한혜연씨가 맞습니다."
"증거 하나 남기지 않고 도망친 여자가
이런 곳에 있을 줄이야. 이제는 망상증이라니.
거기, 옆집에 사시는 아주머니라고 하셨죠? 정확한 증언을 부탁 드려도 될까요?"
넓은 어깨의 남자는 수첩을 꺼내들며 의자에 앉아 있던 40대 후반 정도의 여자에게 말했다.
"평소에도 지훈씨가 누군가 스토킹 하는 것 같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거의 매일 집으로 찾아 오더군요.
지훈씨가 나가라고 소리를 질러도 계속 웃으면 혼자 대화하고...
지훈씨는 나중엔 신경쇠약으로 병원에 다닐 정도였다니까요.
문제 될만한 행동은 안 하길래 내버려 뒀는데 결국 이렇게 될 줄이야..."
"보고에 따르면 망상증 이라더군요.
거기 남자가 살해 당했던 당시 같이 계셨던 여자분도 증언 해주실수 있겠습니까?"
"... 그... 그 여잔 미쳤어요! 그 번뜩이는 눈동자로 칼을 꺼내드는 순간
있는 힘껏 도망 쳤어요. 매일 밤 그 여자가 쫒아와요! 칼을 들고 저를 죽이려 한다고요!!!"
증언을 하던 젊은 여자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를 질렀다.
공포로 물든 그의 얼굴을 본 남자는 다급히 그녀를 진정시켰다.
"자, 자, 진정하세요. 한혜연씨는 윤지훈씨를 살해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진정 시킨 후 수첩을 주머니에 넣으며 노란 테이프를 넘어갔다.
더 이상 조사 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이 것은 반환점 없는 비극이다. 어디서 부터 잘못 된 것인지 모를.
그는 베란다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붉게 불들어가는 선연한 빛의 하늘을 보며.
어둠은 시야를 가리지만 곧 익숙해 진다. 하지만 절망은 끝없는 침식으로 시야를 덮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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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쿠로입니다.
음... 가장 최근에 완성시킨 단편작이네요...
예전에 비해선 나아진 것 같지만
이건 기분내키는 대로 새벽6시까지 걍 써본거라서
뭔가 장르가 애매하달까...
뭐, 그럼 모두들 이쁜하루 되세요~
첫댓글 헉....반전이네요 ㅠㅠ 순간 오싹 ㅋㅋㅋ
ㄳ해요 지루하셨을텐데 끝까지 읽어주셔서...
우...우와;;; 진짜 끝에 오싹... 정말 잘쓰시는거 같아요 0ㅁ0
꺅... 그런 호평을... 완전 감사해요 ㅠ_ㅠ
헐...소름돋아요~~ 네코님~~
ㄳ해요 ㅋㅋ 친구들한테 혹평만 들어선지 감동적...
거부감 없이 줄줄 읽어내릴 수 있었어요 오랜만에 댓글까지 달고 가네요 건필하세요~
우왓 감사해요~!!! 님도 좋은하루되세요~^^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ㅠㅠㅠㅠㅠ 이런 소설 너무 좋아, 근데 저기 저 하얀 티 붉게 물들이는거 어디서 들었는데.. 사운드 호라이즌의 스타더스트 라고 그애 이야기하고 똑같네요.ㅎㅎ;; 아니면 죄송하구요..ㅠ;
아아 그러고 보니 그 얘기 안 적었네요 ㄷㄷ 이거 Star Dust모티브로 한거 맞아요!! ㅋㅋ 워낙 그런걸 좋아하다보닛... 표절이라면 죄송합니다;;
아아, 그렇구나.ㅋㅋㅋ 어쩐지 조금 비슷해서.. 그래도 전혀 다른 소설 같아요! ㅎㅎ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ㄳ하구요... Stardust노래가 좋아서 생각난 김에 만든거라서요...
헐 진짜 대박 으와 소름..꺄
꺅~ 감사해요!!! 칭찬... 맞죠? 칭찬으로 들을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