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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중앙박물관 구석기실
구석기실은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구석기실의 도입부에서는 석기의 제작에 필요한 석재와 돌을 떼어 내는 방법을 소개하였다. 또 인류의 진화에 따라 석기 만드는 기술이 발전했음을 보여 주기 위해 한반도 각지에서 출토된 석기를 종류와 형식에 따라 구분하여 전시하였다. 크고 거칠었던 석기가 작고 정교하며 규격화된 석기로 발전, 변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구석기인의 예술과 정신세계를 보여 주는 자료, 구석기시대가 끝나 갈 무렵 새롭게 등장한 간석기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구석기시대는 인류 최초의 문화 단계로, 유인원과 구분되는 고인류가 처음 등장한 때부터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에 이르는 긴 시기이다. 빙하기와 간빙기가 반복되어 환경의 변화가 심했던 이 시기의 인류는 식량이 풍부한 곳을 찾아 옮겨 다니며 사냥과 채집 생활을 하였다. 주로 동굴이나 강가에 살면서 다양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는 70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1천 곳이 넘는 구석기시대 유적이 확인되었다.
전시실 소장품
주먹도끼 : 주먹도끼는 끝부분이 뾰족한 타원형 석기로, 뭉툭한 부분을 손으로 쥐고 여러 용도로 사용했던 구석기시대 도구입니다. 돌의 한쪽을 떼어 낸 뒤 반대편을 다시 떼어 내 지그재그 모양의 양면 날을 만들었습니다. 구석기인들은 미리 전체적인 모양을 생각하고 계획을 세워 원하는 형태의 주먹도끼를 제작했습니다. 주먹도끼는 서유럽, 중동, 아프리카, 영국, 인도, 동아시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며, 대략 170만 년 전부터 10만 년 전까지 사용되었습니다. 주먹도끼를 만든 고인류는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주먹도끼는 연천 전곡리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1940년대 초반 미국 고고학자 모비우스(H. L. Movius)는 구석기문화를 유럽의 주먹도끼 문화권과 아시아의 찍개 문화권으로 분류하고, 동아시아 지역에는 주먹도끼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학설은 동아시아 지역이 주먹도끼가 발견되는 유럽・아프리카・중동 지역에 비해 문화적・인종적으로 뒤처졌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1978년 전곡리에서 동아시아 최초로 주먹도끼가 발견되자 세계 고고학계는 크게 놀랐고, 이러한 이분법적 이론은 폐기되었습니다.
되맞춘 몸돌 : 석기는 몸돌에서 돌조각을 떼어 내면서 점점 크기가 작아지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집니다. 따라서 몸돌과 몸돌에서 떼어낸 돌조각인 격지가 서로 붙어서 한 덩어리로 복원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몸돌과 격지의 분포 범위를 보면 유적이 얼마나 변화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또한 되맞춘 몸돌의 복원은 구석기의 제작 과정을 알려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가로날도끼 : 가로날도끼는 주먹도끼와 비슷한 모양이지만 넓적하고 날카로운 날을 가지고 있습니다. 날은 몸돌에서 떼어 낼 때 자연적으로 생긴 것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도끼의 끝부분을 몇 차례 내리쳐서 만듭니다. 날 부분은 거의 잔손질하지 않으며 몸통과 아랫부분을 주로 가공합니다. 명칭은 도끼지만 날의 각도를 볼 때 자르는 데 더 적합합니다.
찍개 : 찍개는 자갈돌의 한쪽 가장자리를 몇 차례 내리쳐서 거칠고 강한 날을 만든 석기입니다. 한쪽 면만 뗀 것을 외날찍개, 마주 보는 양쪽 면을 뗀 것을 안팎날찍개라고 합니다. 찍개는 구석기 시대 전반에 걸쳐 널리 사용되었으며 보통 어른 주먹보다 약간 큽니다. 찍개는 나무를 다듬거나 사냥한 동물을 부위별로 크게 자르고 뼈를 부수는 데 적합합니다.
여러면석기 : 여러면석기는 돌의 모든 면을 깨뜨려서 둥글게 만든 석기입니다. 여러 번 때려서 으스러진 자국이 모든 면에 뚜렷합니다. 구석기 시대 전반에 걸쳐 사용되었으며 지름은 약 5~10cm입니다. 크기가 작은 것은 줄에 묶어 사냥용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표면에 망치로 사용한 듯한 자국이 남은 것도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여러면석기는 큰 것이 많은데 사냥돌이나 망치, 식량 자원을 잘게 부스러뜨리는 도구 등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긁개 : 긁개는 몸돌에서 떼어 낸 격지의 가장자리를 잔손질하여 날로 만든 석기입니다. 긁개는 구석기 시대 유적에서 흔히 발견되며, 날의 모양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누기도 합니다. 긁개는 밀개에 비해 날이 좀 더 예리한 편입니다. 날의 각도, 모양, 사용 흔적 등을 볼 때 주로 나무나 동물 가죽을 다듬는 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슴베찌르개 : 슴베찌르개는 후기 구석기 시대에 돌날 기법의 출현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돌날의 두터운 부분을 슴베로 만들고 얇은 부분을 뾰족하게 만든 석기입니다. 슴베는 양옆을 오목하게 하거나 경사지게 좁고 길쭉하게 손질하여 자루에 장착하기 쉽게 만든 부분입니다. 슴베찌르개는 길이가 대부분 5~10cm 정도이며 자루에 결합하여 창처럼 던지는 도구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슴베찌르개와 같이 먼 거리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인류가 변화된 자연 환경에 적응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이러한 도구의 발전은 인류의 생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돌날 : 몸돌에서 떼어 낸 격지 중에서 길이가 너비의 두 배 이상이고 양날이 평행을 이루는 것을 돌날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좀 더 작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석기가 등장했습니다. 돌날도 이러한 석기들 중 하나입니다. 약 3만 년 전 무렵부터 혼펠스, 규질혈암(셰일), 흑요석 등 고운 입자의 돌로 돌날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돌날은 하나를 따로 쓰기보다는 나무 등에 여러 개를 붙여 긴 날처럼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돌날은 돌감(석재)을 거의 버리는 부분 없이 매우 효율적으로 이용한 유물입니다.
톱니날석기 : 톱니날은 몸돌에서 떼어 낸 격지의 가장자리에 작은 홈날이 연속으로 두 개 이상 있는 석기로, 마치 톱니처럼 보입니다. 홈의 크기는 홈날에 비해 작은 편입니다. 홈날은 몇 차례 손질하여 오목한 날로 만들며, 톱니날은 연속적인 가공으로 만드는 것이 특징입니다. 날의 반대편은 상대적으로 뭉툭하여 손으로 잡거나 나무 등에 장착할 수 있습니다.
밀개 : 밀개는 몸돌에서 길게 떼어 낸 격지나 돌날의 끝부분을 90°에 가까운 가파른 각도로 잔손질하여 만든 석기로, 후기 구석기 시대의 특징적인 유물입니다. 후기 구석기 시대에 돌날 기법으로 만든 밀개는 일정한 모양으로 만들어졌는데, 긁개에 비해 날이 훨씬 정교하게 손질되어 있습니다. 날의 각도로 볼 때 밀개는 동물의 가죽 등을 다듬는 데 적합한 도구로 생각됩니다.
[촉각전시물] 주먹도끼
주먹도끼는 초기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 우리나라의 거의 전 지역에서 발견됩니다. 위쪽의 끝부분은 뾰족하고 아래쪽으로 갈수록 넓어져 손으로 쥐고 사용하기 쉬운 형태입니다. 찢고, 자르고, 찍고, 땅을 파는 등 다양한 기능을 할 수 있는 이 주먹도끼의 가장자리를 만져보면 지그재그 형태의 날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발해연안문명의 여명을 밝히다
구석기 유적의 발견
한국사를 이야기할 때 어떤 이는 우리나라 고대 사회의 활동 무대를 지금의 한반도에 국한시켜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고조선시대의 우리 민족은 지금의 만주(滿洲) 지방과 한반도에서 살았고 부여국과 고구려도 만주 지방과 한반도에서 살았다. 부여국과 고구려의 경우 만주 지방을 중심으로 건국되었지만 한반도에 걸쳐서 영유되었고, 또한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국도 7세기 말에 나타나 10세기 초에 망할 때까지 만주 지방과 한반도에 존재하였으므로, 우리 민족은 적어도 3000년 이상을 지금의 만주 지방과 한반도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셈이다. 적어도 이 시기는 이 지역이 중국 역사와는 거리가 먼 시기이다.
여기에서 ‘만주’라고 하는 것은 17세기 청(淸)나라 건국 이전에 붙여진 종족명이나 지명일 뿐, 고대나 중세 사회에서 ‘만주국’이나 ‘만주사’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었다. 이곳, 고대의 역사는 오로지 우리나라의 역사였을 뿐이다.
우리의 국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대상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고고학이나 고대사는 마땅히 만주 지방을 주요 영역으로 삼아 서술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래서 인류학적으로 현생인류와 직접 연결시키는 것은 이르다 하겠지만 구석기시대의 문화영역으로서 만주 지방과 한반도를 함께 동일선상에 놓고 서술해야 하는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흔히 우리의 역사를 반만년 혹은 5000년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에 인류가 처음 출현한 것은 50만 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1960년대 초,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 의하여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이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지만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만주 지방에서도 1963년에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안도현(安圖縣) 석문산촌(石門山村) 동굴 유적에서 후기 구석기시대의 포유동물 화석이 조사된 것도 주의를 끌지 못했다.
그러나 그 후 만주 지방에서 10여 군데에 이르는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고, 한반도에서는 지금까지 100여 군데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됨에 따라, 우리나라의 고대 인류 발달사를 연구하는 데 획기적인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이로써 만주 지방을 포함한 우리나라 구석기시대 문화의 존재가 뚜렷해졌으며, 따라서 우리나라 고대 인류의 활동이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해왔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1966년 평양시 상원군[구, 평안남도 중화군] 흑우리[일명 검은모루] 동굴유적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기 구석기시대의 29종의 포유동물 화석과 당시 그들이 만들어 사용한 흔적이 있는 석기들이 함께 출토되었다.
평양시 상원군 검은모루[흑우리(黑隅里)] 구석기 유적에서는 가장 원시적으로 제작된 석기와 29종의 동물 화석이 발견되었다. 지금으로부터 60만~40만 년 전 원인(猿人) 단계의 우리나라 최고의 전기 구석기시대 유적이다.
특히 검은모루 동굴유적에서 출토된 석기의 제작 수법은 석회암과 차돌[석영(石英)]을 이용하여 모루돌 위에 몸돌[석핵(石核)]을 내려쳐 만든 내리쳐 깨기 수법과는 다른, 돌로 몸돌을 때려내는 이른바 때려내기 수법이 함께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하여 발굴 보고자는 “검은모루 유적의 자료는 우리나라 제4기 구석기시대에 관한 종합적인 연구에서 하나의 기준을 잡을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조선의 구석기시대』의 저자는 검은모루 동굴유적의 연대를 지금으로부터 60만~40만 년 전으로 추정했다.
만주 지방에서 가장 오랜 시기의 인류화석이 발견된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요동반도 영구현 금우산(金牛山) 동굴유적[아래층]과 본계시 묘후산(廟後山) 동굴유적이 있다. 금우산 동굴유적은 1974년 북경대학 고고학 팀에 의하여 발굴되기 시작하여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이 유적의 맨 아래층인 전기 구석기시대층에서 두개골과 사지골 등 한 사람분의 완전한 인류화석이 발견되어 동북아시아 고인류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층에서 포유동물 화석을 비롯하여 당시 인류가 사용하던 석기와 불을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금우산 유적의 포유동물 화석은 검은모루 유적의 동물상과도 매우 비슷하다고 한다. 또한 석기 제작방법도 이들과 서로 일맥상통한 면을 보여준다. 우라늄함량년대측정법(Uranium series testing)에 의한 금우산 유적 아래층의 지질연대는 구석기시대 초기인 28만 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만주 지방으로는 가장 이른 시기인 대략 40만 년 전 전기 구석기시대의 직립원인 화석과 지인(호모 사피엔스) 화석이 출토된 석회암 동굴유적이다.
요동반도 묘후산 동굴유적은 1978년 묘후산 남록 석회암 채석장에서 발견된 이래 요녕성박물관과 본계시박물관 팀에 의해서 3년간에 걸쳐 발굴되어, 1986년에 『묘후산』이란 보고서가 발간되었다. 묘후산 유적에서는 이른바 곧선사람인 직립원인[Homo erectus] 단계의 견치(犬齒) 화석 1과와 이보다 한 단계 뒤의 이른바 슬기사람[지인(智人)]인 고인(古人, Homo sapiens) 단계의 어금니 화석 1개와 팔뼈 화석 한 토막이 발견되었다. 직립원인 단계의 견치 화석이 출토된 동일 퇴적층의 우라늄함량년대측정 결과 24만 7000년이라고 하는 연대치가 나왔다. 이것은 동북아시아 고인류화석 중에서 가장 빠른 시기의 유적 중 하나이다.
한편, 묘후산 유적의 구석기문화는 여러 층에서 검출되었다. 대체로 포유동물의 동물상은 북경 주구점(周口店)의 동물상과 비슷하며 석기의 제작방법은 중국 산서성 정촌(丁村) 유적의 석기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한다. 보고자는 이들 석기들이 1979년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全谷里) 유적6)에서 발굴된 석기의 제작 수법과 같은 계통에 속한다고 밝혀 우리 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묘후산』의 보고자인 정진홍(鄭鎭洪)은 “요동반도와 조선반도가 지리상으로 산수가 서로 이어져 있는 점을 고려하면 양 지역간에 초기 인류문화의 교류가 매우 밀접한 관계로 존재하였음은 마땅히 우리들의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보고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묘후산 문화는 우리나라 구석기시대 문화 연구는 물론 고인류 발달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구석기시대 유적은 노천 유적으로 그곳에서 많은 구석기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연대에 대해서는 25만 년전 설, 5만 년 전 설 등 여러 설이 있다.
북한에서는 1973년에 평안남도 덕천군 승리산 동굴[아래층]유적에서 처음으로 인류의 어금니 화석 2과와 어깨뼈 화석 1점이 나왔는데, 이는 고인 단계의 ‘덕천사람[덕천인(德川人)]’ 화석이라고 한다. 이 시기의 인류는 이른바 슬기사람이라고 하고 지인(智人)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시기는 대개 지금으로부터 10만 년 전에서 4만 년 전까지로 보고 있다. 고인류와 원숭이는 뇌의 용량에 따라 구별하는데, 원숭이의 뇌용량이 500cc 이하인데, 고인의 뇌용량은 1,200cc 정도로, 이른바 신인(新人, Homo sapiens sapiens)의 뇌용량인 1,500cc에 아주 근접하고 있다.
현생인류의 직접 조상인 신인의 출현은 지금으로부터 약 5만~4만년 전에서 시작하여 대략 1만 4000년 전까지 계속되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 시기를 후기 구석기시대라고 한다. 후기 구석기시대의 인류 화석으로 요동반도에서는 1981년에 발견된 요녕성 해성현 소고산(小孤山) 선인동(仙人洞) 동굴유적이 있다. 이 유적에서는 어린이의 이빨 화석과 다리뼈 화석이 다량의 포유동물 화석과 석기와 함께 출토되었다. 그리고 짐승의 이빨에 구멍을 뚫어 만든 장식품이 처음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이 밖에 요동반도에서는 금우산 유적[위층]과 묘후산 동동(東洞) 유적에서 후기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된 바 있고, 1978년에 압록강 하구의 요녕성 동구현 전양동(前陽洞) 유적에서 후기구석기 유적이 발견된 바 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안도현 석문산촌 유적에서도 1963년 포유동물 화석이 발견된 데 이어 1978년 후기 구석기시대 인류의 이빨 화석 1과가 발견되었다.
평안남도 상원읍 룡곡 동굴유적 제1호 문화층에서 출토되었다. 3면을 때려내기 수법으로 가공한 후기 구석기시대의 석기이다.
북한에서는 주로 대동강 유역에서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지인 단계의 덕천인 화석이 발견된 덕천군 승리산 유적의 위층에서 또 하나의 신인 단계의 승리산인(勝利山人) 화석이 발견되었다. 1977년부터 1980년 사이에는 평양시 승호구역 만달리 동굴유적과 화천동 동굴유적에서 신인 단계의 인류화석이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 북한의 구석기시대 연구가 김교경에 의하면 승리산인의 연대는 4만~3만년 전에 해당한다고 한다. 1980년, 평양시 검은모루 동굴유적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상원군 룡곡동굴[제1호 동굴]유적의 후기 구석기시대의 제 2~5문화층에서 고대 인류화석과 석기가 발견되어, 우리나라 고대 인류의 진화(進化) 발전을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특히 룡곡동굴유적은 맨 아래층에서 신인 단계의 후기 구석기시대 인류화석[룡곡인]이 출토되고, 맨 위층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인류화석이 발견되어 우리나라 고대인류의 진화·발전 단계를 분명하게 밝혀주었다. 만주 지역과 한반도에서 발견된 현생인류의 신인 단계 인류화석은 한민족의 뿌리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에 앞선 시기의 원인 단계 인류화석과 고인 단계 인류화석은 이들 고인류(古人類)가 우리나라에 생존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우리 인류의 발달 과정에서 큰 줄기를 찾아내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북한의 구석기시대 유적의 발굴 성과를 하루빨리 수용하여 한민족의 큰 줄기를 재구성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국립 중앙박물관 구석기실이 위치한
1층 시설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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