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가 철령위는 함경남도까지 이어졌다고 주장했고 그의 주장을 따라서 국사교과서에 철령을 함경도로 표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철령위는 함경도가 아니라 요동에 있었습니다.
鐵嶺衛 在遼陽城北二百四十里 古有鐵嶺城 在今衛治 東南五百里接高麗界. 洪武二十一年 置衛于彼 二十六年徙今治.
철령위. 요양성 북 240리에 있다. 옛날에는 철령성이 지금의 철령위 치소 동남 500리에 있엇다. 고려와 경계를 접했다. 홍무 21년에 철령위를 그곳에 설치하여 26년에 지금의 치소로 옮겼다. 遼東志(요동지)
또 다른 의문은 "(고려 땅이 아닌) 요동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는데 왜 고려가 발끈해서 정벌에 나선거지?"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요동은 원래 고려땅인데 그곳에 명이 군사기지(철령위)를 설치하려고 하니까 출정했다'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입니다. 지금부터 그 증거를 찾아보겠습니다. 위화도 회군이 일어날 때까지의 과정입니다.
요동 반환을 요구한 명의 주원장
1387년, 명 태조 주원장은 우왕에게 국서를 보냅니다.
“철령 북쪽과 동서의 땅은 예부터 (원나라) 개원로(開元路)에 속해 있었으니 (명나라) 요동에서 다스리게 하고, 철령 남쪽은 예부터 고려에 속해 있었으니 본국(고려)에서 다스리라. 서로 국경을 확정해서 침범하지 말라.”(‘명사’ ‘조선열전’)
철령 북쪽은 원나라 땅이었으니 명이 다스릴 것이고, 철령 남쪽은 고려 땅이었니 그것으로 국경을 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우왕은 이렇게 국서를 보냅니다.
조종으로부터 전해내려온 데에 구역이 정해져 있으니, 철령(鐵嶺) 이북을 살펴보면, 역대로 문주(文州)·고주(高州)·화주(和州)·정주(定州)·함주(咸州)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公嶮鎭)에 이르니, 원래부터 본국의 땅이었습니다. 요(遼)의 건통(乾統) 7년(1107)에 동여진(東女眞)이 난을 일으켜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빼앗아 점거하니, 예왕(睿王, 예종)이 요(遼)에 고하고 토벌할 것을 청하여 병사를 보내어 쳐서 회복하고서, 함주에서 공험진 등까지 성을 쌓았습니다.
철령 이북은 원래 고려땅이었으니 불가하다고 반박한 것입니다. 주원장은 다시 고려의 경계를 철령 이남보다 더 내려간 압록강 이남으로 못 박으려 합니다.
고려에서 국서를 보내, 요동의 문 · 고 · 화 · 정 등의 주는 모두 고려의 옛 영토이므로 (고려에서) 철령에 군영을 설치해서 지키겠다고 주청했다.
이원명은 “그 몇 주는 모두 원의 옛 판도에 들어 있어서 요동에 속해 있고, 고려의 영토는 압록강을 한계로 하고 있으며 지금 이미 철령위를 설치했는데 다시 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다시 청함이 있자, 황제는 그 나라를 달래어 정해진 땅을 지켜 헷갈리지 말라고 하였다. -《명사》 권136, 열전제24, 이원명
이원명이 '고려의 영토는 압록강을 한계로 하고 있다'고 하자 주원장은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고는 "고려는 거짓말쟁이다”하며 한층 강경하게 바뀝니다. (철령 이남마저 빼앗길 위기)
“고려가 예로부터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다고 하여, 이제 철령에 관해 그럴 듯하게 말을 꾸몄지만, 거짓되고 속이는 게 분명하다. 이런 뜻을 짐의 말로 효유하여, ‘본분을 지키게 하여 흔단을 만들지 말라고 유시한다.” - 《명사》列傳 第208 外國1, 태조 21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