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 Klux Klan(약칭 KKK)는 인종증오집단의 원조격으로 무려 130년 동안 온갖 살인, 방화, 테러, 약탈, 폭력 등을 휘두르며 미국사회에 기생해왔다. 오늘날 KKK단은 계속된 내부분열과 단원들의 이탈로 그 힘이 매우 약화된 것으로 분석되지만 여전히 악명을 떨치고 있다. KKK단의 증오와 폭력으로 점철된 역사를 알아보자.
제1기- 1865년, 남북전쟁이 남부 패망으로 귀결되자 남부백인들은 극심한 위기감에 시달렸다. 남부는 폐허로 변하고 북부군은 계엄군으로 남부에 주둔하게 된다. 그리고 흑인노예들은 해방되고 연방 민권법이 제정된다. (물론 이 민권법은 불과 몇 년 후 아무 쓸모도 없는 종이쪽지로 전락한다) 남부 백인들은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누려왔던 지배적 위치를 상실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 연방정부(북부)에 향한 적개심 그리고 해방된 흑인들에 대한 공포감, 분노 등이 맞물리면서 자연스럽게 KKK단과 같은 비밀조직을 결성한다.
테네시주에서 소규모로 시작한 KKK단은 남부 기마군의 '영웅'이었던 네이튼 포레스트 장군을 총책으로 영입하면서 조직의 세를 확장하게 된다. 네이튼 포레스트에게는 'Imperial Wizard'(제국의 마법사라는 뜻인데 KKK단의 모든 직책은 이렇게 의도적으로 중세적 분위기가 물씬 나게 했다)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주어지고 'KKK의 보이지 않는 제국'(The invisible Empire of KKK)이라는 공식명도 얻게 되면서 파죽지세로 남부일대를 장악한다. 하얀 두건을 쓰고 중무장한 KKK 기마단은 단순 무력시위에 그치지 않고 시민기본권을 얻으려는 '건방진 흑인들'과 이들을 돕는 '백인 자유주의자들'을 폭력으로 '응징'한다. KKK단이 남부일대를 명실공히 무력통치하는 시대가 도래된 것이다. 이 당시 약 55만명에 이르는 KKK단의 구성원들을 보면 정치인, 판검사, 공무원, 언론인, 교육인, 사업가, 농장경영인 등등 웬만한 지방 유지들을 총망라했다.
그러나 KKK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극심한 파벌 싸움과 1871년에 연방차원에서 제정된 반-KKK법으로 말미암아 조직이 크게 와해되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KKK단이 종말을 고한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백인 우월주의 세력이 남부를 '합법적'으로 완전히 다시 장악했기 때문에 KKK단과 같은 지하조직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2기- KKK단의 악명이 일반인들의 기억에서부터 거의 사라져 갈 무렵 이들은 헐리우드의 대작영화 '국가의 탄생'(Birth of Nation, DW 그리피쓰 감독, 1915년작)을 통해 '백인영웅'으로 다시 세상에 태어났다. 그리고 마치 '20세기의 신화'처럼 KKK단은 부활하였다. 1920년대의 KKK단은 지난 시기의 파워를 훨씬 능가하는 4백만 단원의 막강 집단으로 급성장하였다. 이러한 성장의 원동력은 새롭게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공포와 증오였다. 1920년대 미국사회는 약 2천3백만명에 달하는 이민자 유입을 경험하였는데 이들은 지난 시기 이민자들과는 달리 주로 동유럽과 남유럽에서 온 캐톨릭과 유태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 새로운 이민자들은 흑인들과 더불어 곧바로 KKK단의 증오대상이 되었다.
조지아주 아틀란타 근방의 스톤 마운틴에서 십자가를 불태우면서 재결성된 KKK단은 흑인, 유태인, 아시아인, 캐롤릭교도, 신규 이민자, 비기독교인, 독립여성 등등을 '적'으로 설정하고 맹렬한 기세로 기승을 부렸다. 제2기 KKK단의 활동 영역은 1기처럼 남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국적이었다. KKK단의 폭력과 테러에 모른척하거나, 아예 공공연히 지지의사를 표명하는 정치인들과 유력자들은 수없이 많았다. 텍사스주에서는 아예 KKK단원이 연방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4개 주(조지아, 알라배마, 캘리포니아, 오레건)에서 KKK단을 지지하는 주지사들이 선거에서 승리하였으며 최소 5개 주(콜로라도, 알칸소, 오클라호마, 인디아나, 오하이오)의 지방 의회와 주정부의 상당 부분을 KKK단이 좌지우지했다. 놀라운 점은 KKK단원 중 개신교 목사들이 자그마치 4만여명으로 조직내 최대 파벌을 형성했다.
KKK단의 힘과 자신감은 1925년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 KKK단은 우선 본부를 남부 아틀란타에서 수도 워싱턴으로 옮겼으며 4만여명의 단원들이 두건을 쓰고 연방의사당 앞길을 행진하면서 위세를 자랑했다. 반이민법을 통과시키고 캐톨릭 교도들을 혼내준 '애국단체'라고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던 KKK단은 1925년을 정점으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930년대에 파벌싸움, 들통난 범죄행각, 재판패소, 공금횡령, 세무사찰 등 각종 악재에 휩싸이게된 KKK단은 대공황과 2차대전이란 연타를 맞고 시들어 버렸다.
3, 4기- 40년대 이후의 KKK단은 공산주의자를 주적으로 삼고 재기를 모색했다. 그러나 사법당국의 인종폭력에 대한 적극적 처벌방침으로 인해 KKK단 간부들은 연이어 수감되었고 조직은 내부분열로 큰 타격을 입는다. 50년대에 등장한 극우 파쇼 인종주의 집단 미국 나치당(American Nazi Party)은 KKK단원들에게 정체성 혼란을 야기 시켰다. 단원들 중 상당수는 행동강령이 비슷한 미국 나치당에 가담했으나 다수는 KKK단이 '애국단체'임을 고집하면서 이들을 거부하였다. 결국 KKK단의 조직세는 50년대 말 약 1만 명 수준으로 초라하게 감소하였다.
파도와 같은 흑인민권운동에 나름대로 대응하고자 KKK단은 폭탄테러와 방화로 맞섰으나 이는 오히려 KKK단의 야만성만 더욱 부각시켰을 뿐이다. 흑인민권운동이 최고조에 달했던 61년대 중엽에 신입 단원들이 급격하게 늘었으나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치고 말았다.
현재- 1, 2기 당시의 중앙집권적 형태는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각 지역에 분산된 소규모 독립 KKK단들만 존재할 뿐이다. 조직원수는 다 합쳐 불과 수 천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으며 그나마도 젊은 층은 거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미국에서 KKK단이 극우인종주의자들의 인적자원을 독점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요즘 젊은 극우인종주의자들은 신나치, 스킨헤드, 사이비 집단인 크리스챤 아이덴티티 등에 더욱 매력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종종 들려오는 KKK단에 의한 증오범죄 뉴스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어둠 속에 항상 도사리고 있다. 과거에 미국사회가 변화를 겪을 때마다 이들은 급팽창했기 때문에 결코 안심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