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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0: 22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 고전 10: 24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 10: 22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
우리가 우상숭배에 빠진다면 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크게 노여워하실 것이다.
그는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만 섬기며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과 다투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1]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노여워하시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젤루멘'(*)은 '질투하게 하다'(to provoke to jealousy)는 뜻으로 '질투하다'에 해당하는 '젤로오'(*)와 '곁에'라는 의미의 전치사 '파라'(*)의 합성어이다.
'젤로오'는 좋은 의미로는 '부러워하다'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어서(TDNT) 하나님의 열심에 대해 묘사하기도 한다.
* 겔 39: 25 -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사랑을 베풀지라.
이 '질투'는 사랑과 신뢰에 대한 배신을 당하여 유발되는 감정으로 인간이 갖는 분노 중에 가장 강렬한 것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는 분노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적절하다(Hendriksen).
구약 시편에서도 '질투하다'에 해당하는 '카나'(*)가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 시 78: 58 - 자기 산당들로 그의 노여움을 일으키며 그들의 조각한 우상들로 그를 진노하게 하였으매
신 32: 16, 21에서는 다른 신으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키게 하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 신 32: 16, 21 –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2]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본 절은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수사적 의문문을 사용하여 반어적 표현으로 당연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절대적이므로 그 어떠한 것보다도 강하시고 그 무엇도 그분을 굴복시킬 수 없다. 본 절의 질문은 둘 중에 하나를 택하여야 한다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린도 교인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인정하고 있음을 단정하고 질문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이 이미 정한 마음을 거슬려서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Grosheide).
바울의 이러한 질문을 통해 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결정한 것을 확고히 하고 그들이 지은 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3. 자유와 자비 ( 10 : 23-33 )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고전 10 : 23 모든 것이 가하나 -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
사도 바울은 8장에서 신약성도들이 우상제물에 대한 지식과 자유함이 있음을 말했다(1, 7, 9, 10, 11절).
그러나 비록 우상제물에 대해 자유함이 있다 할지라도,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고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1] 모든 것이 가하나
본 절의 논의는 바울이 이미6: 12에서 언급한 내용의 반복이다. 본 절에서는 개인적인 차원의 자유보다는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자유의 개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바울은 이미 8장에서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러한 개인적인 자유가 교회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게 될 때 그것은 제약(制約)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본절에서 두 가지를 제시하여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분명한 원칙 가운데 시행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2]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쉼페레이'(*)는 개인의 영적인 유익을 말하는 것으로(Godet) '이익이 되는'(beneficial)이라 번역할 수 있다(NIV). 이에 대한 자세한 주석은6: 12을 참조하라.
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도메이'(*)는 특별히 이웃들의 유익을 위한다는 의미의 '건설적인'(constructive)으로 번역할 수 있다(NIV).
바울은 본 절을 통하여 기독교인은 우상의 제물을 능히 먹올 수 있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는 자신의 영적인 유익과 이웃들의 신앙적 유익을 위하여 제한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4] 이 시대를 향한 선지자적 음성을 듣자.
몇 해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한번 정독해 보았다. 정말 이 시대를 향한 ‘선지자적 음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저자는, 현대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점이 ‘도덕주의, 율법주의’라고 한다. 한 마디로, 기독교에 ‘사랑’과 ‘은혜’가 빠진 것이다. 그리고 ‘외적인 도덕’만 남았다.
이렇게 바리새化 되어서, 전혀 힘을 못 쓰는 형식적 기독교로 전락했다고 한다. 또한 종교라는 특성상 도덕주의를 앞세우지만, 그것 때문에 자만해서 더 중요한 문제에 실패한다.
(1) 바리새인들 그들은 외적으로 매우 도덕적이었으며, 율법을 잘 지켰다.
한 마디로 흠을 찾기 어려운, 외적으로는 책망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 이렇게 충고하셨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justice)와 인(mercy)과 신(faithfulness)은 버렸도다!
* 마 23: 23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우리가 외적 도덕 생활을 해야 하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말고, 그것보다 더 중한 바(more important thing)도 있다. 바리새인의 도덕주의 뒤에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자비를 버리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남들 눈에 도덕적 삶을 살았지만, '더 중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2) 히틀러식 도덕주의의 함정
1930년대, 1차대전의 패배로 파탄한 독일에 히틀러와 나치가 나타났다. 그들은 대대적인 도덕주의를 표방했다. 즉, 음란물을 판매할 수 없고 그런 서적들을 엄청나게 모아서 소각했으며 지저분한 영화나 갱 영화를 상영하지 못하게 했으며 히틀러 자신부터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 여자들도 복장을 단정하게 입도록 했다. 기독교 국가인 독일 국민들은 이런 히틀러와 나치당의 도덕주의에 환호했다.
그런데 정작 더 중요한부분에 이르러 그들은 십자가 훈장을 가슴에 달고 유태인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재산을 갈취했으며 십자가 마크가 선명하게 그려진 비행기를 몰고, 2차대전을 일으켰다. 그래도 당시 많은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와 나치당에 성원을 보냈을 것이다. 사회의 도덕을 끌어올리는 히틀러를 하늘이 보낸 사자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3) 오늘날 미국의 도덕주의
클린턴의 부도덕을 비판했던 많은 미국 기독교인들이 (아직도 클린턴을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하고 있다면 그들은 바리새인들이다.) ‘낙태 반대와 동성연애 금지’를 내세운 부시 후보에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냈다.
사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낙태 반대와 동성연애 금지’를 공공연하게 떠들면... 그는 의인으로 인정되고 그 문제에 약간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면... 소돔과 고모라의 시민이 된다. 이제 그런 자칭 ‘의인’들이 힘의 횡포를 전 세계에 자행하고 있다.
기독교 국가 미국이, 그래서 낙태와 동성연애를 반대하는 도덕주의를 표방하지만, 그 이면에는 중동 아랍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주고 있다. 물론 한 해에 미국에서 백만 명 이상이 죽어간다는 낙태도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도덕, 율법 이상의 종교다. 사랑의 종교요, 은혜의 종교다. 사랑과 은혜가 빠진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바리새교이다. (‘은혜’가 무엇인가는 책을 직접 읽어보시기 바란다.)
(4) 우리도 마찬가지다.
유엔 보고에 의하면, 오늘도 세계에서 매일 만 명 이상 굶어 죽는다고 한다. 그리고 중동에서는 비참한 전쟁과 죽음의 소식이 매일 들려온다. 아프리카 대륙 전체는 에이즈로, 거대한 흑사병의 대륙으로 변하고 있다. 그런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무관심하고 아무 액션도 취하지 않은 채, ‘낙태 반대와 동성연애 금지’에만 찬성하고, 옹호자들을 비난하면 자기는 보수 정통 그리스도인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슬프다.
그래서 어떤 크리스천 사업가는, 자기 회사 직원은 불신자를 뽑겠다고 하고 어떤 크리스천은, 자기는 개인적으로 낙태와 동성연애에 반대하지만 누구와 저녁 식사할 기회가 있으면, 그것에 유연한 입장을 가진 자와 하겠다고 한다. 한국 크리스천들도, 누구와 저녁 식사할 기회가 있으면 차라리 술 담배 하는 사람과 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술 담배는 안 하지만, 도덕주의에 빠진 바리새적인 교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5) 살인마와 고전음악
비록 현실은 아니지만, ‘한니발’ 같은 희대의 살인마가 주인공인 영화에는 그 주인공 살인마는 매우 고상한 클래식 음악(↔헤비메탈)을 즐겨 듣는다. 특히 살인의 절정 장면에 매우 고상한 고전음악이 영화 분위기를 압도한다. 아마 추악한 살인(최고 악)과 고전음악(최고 고상)이라는 어떤 상반된 두 요소가 한 인간 속에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의도 같다.
도덕주의라는 최고의 고상한 가치는 동시에 얼마든지 상대를 죽이고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기독교는 도덕적, 율법적이지만(下位法) 그 상위법으로 사랑의 법, 은혜의 법이 있다. 사랑과 은혜가 빠진 도덕과 율법은... 기독교가 아니다. 바리새교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 고전 10: 23 )도덕주의도 가(permissible)하고 좋은 것이지만 그것도 ‘덕을 세우도록’ 주장하라는 것이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건물을 건축해서 세워나가듯이 차츰 차츰 무엇을 세워나감을 뜻한다.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낙태와 동성 연애’ 문제의 도덕주의에 빠져 그 보다 더 중요한 일(은혜, 사랑)에 등한시하게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기독교 국가라지만, 거대한 ‘율법주의적 기독교 세력’이 전국에 걸쳐 만만치 않음을 보여 준다. 또한 한국도, 기독교인 아무리 많아도 그 주류가 율법주의나 도덕주의(윤리주의)로 흘러가 버린다면 도리어 기독교가 사회적 암초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이런 복음적 영향력들이 점점 미약해지고 도덕, 율법, 정화... 이런 말들만이 난무하게 될 때 그렇다. 나 자신부터 조심해야 하겠다. 최근 한국 기독교의 쇠퇴 원인을 분석할 때, 도덕 부재의 이유가 단연 앞선다. 그 도덕 수준만 위로 끌어올린다고 과연 다시 부흥할까? 물론 그렇게 주장하는 분들은 은혜와 사랑을 바탕에 깔고 있기는 하다...
고전 10: 24 남의 유익을 구하라. -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
우상 제물은 다른 이들의 유익과 덕을 위해 먹지 않는 것이 좋다. 성도가 우상 제물을 먹어도 되니 먹으라는 교훈이 아니고 먹을 수 있으나 먹지 말라는 교훈이다.
성도가 우상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상 제물 자체의 불결함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유익과 덕을 위해서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희생하셨다. 우리가 그를 아는 자라면, 우리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 살지 말고 다른 이들의 구원과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
1]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참된 자유와 사랑의 실천 원리를 제시한다.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삶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가능하며 모든 이기적인 욕심을 배척하여 구원을 완성하는 삶이다.
타인을 위하여 자유를 사용하는 것은 공동체를 위해지켜야 할 원리이자 그리스도인이 덕을 세우는 방법이다.
* 롬 14: 7 -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 롬 15: 2 -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 고전 13: 5 -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 갈 6: 2 –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인간에게 귀중한 자유가 타인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며 그러한 유익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그 사회는 참으로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요일 1:7).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내가 건강함에 감사하고,오늘 내가 숨 쉴 수 있음에 감사하고,
오늘 내가 누군가를 만남에 감사합시다.
모든 일을 감사하고,감사하다 보면 감사 못할 일이 없으며,
감사가 넘치다 보면 우리의 삶도 저절로 행복해질 것 입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