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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펜타곤 페이퍼’ 보도와 베트남전 실상
“1964년 8월 북베트남의 어뢰정이 미국
구축함을 먼저 공격해 베트남전쟁이 촉발
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게 사실이
아니라니…” 또한 “미국이 이에 대한 보복
으로 북베트남에 대량의 폭탄을 떨어뜨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니….”
1971년 6월 13일자 뉴욕타임스를 펼쳐
든 미국인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1945년부터 1968년까지 23년간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기만과 속임수의 실상을
그대로 까발린 이날 기사의 1면 제목은
‘펜타곤 페이퍼로 본 미국의 군사 개입
확대과정 30년’이었다.
기사는 오랫동안 비밀의 장막에 갇혀
있던 전혀 새로운 사실을 미국인들에게
알려주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베트남 내전의 개입에 반대하는 군
상층부의 경고를 무시했고,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11월 남베트남 고 딘
디엠 정권의 전복을 승인했으며, 존슨
대통령은 1964년 8월 통킹만 폭격을
결정하기 전 예상되는 대량의 민간인
사상자에 관한 보고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모두 6면에 걸쳐 보도된 이 엄청난 고발
은 대니얼 엘스버그(1931~)라는 군사
전문가의 고뇌와 용기의 산물이었다.19
67년 그는 1961년부터 7년 동안 베트남
전쟁을 지휘한 맥나마라 국방장관의
요청으로 1945년부터 1968년까지
베트남에서 행해진 미국의 의사결정에
관한 1급 비밀을 한데 모아 맥나마라
보고서 이른바 ‘펜타곤 보고서’를 만드는
작업에 관여했다.
맥나마라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진
행된 전쟁에 의문을 품고 1967년 6월
베트남 전쟁사를 재검토하는 프로젝트에
엘스버그를 합류시킨 것이다.
폭로 기사는 1971년 6월 13일의 첫날
보도에 이어 10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
었다. 그러나 닉슨 행정부가 “미국 국방
상의 이익에 심각한 손해를 끼쳤다”며
보도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법원이 3
회분 기사가 실린 후 신청을 받아들여
연재는 중단되었다. 시리즈가 중단되자
이번에는 엘스버그로부터 4,000쪽
분량의 보고서를 입수한 워싱턴포스트가
6월 17일 기사화했다.
전국적으로 많은 신문이 진실보도 억압
에 항의하면서 국가안보에 무해하다는
정당성과 논리를 앞세워 닉슨에 도전
하는 가운데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
되었다.
닉슨과 측근은 ‘배관과’라는 별칭이 붙은
특별 부서를 설치해 엘스버그의 집을 도
청하고 병원치료 기록을 빼내는 등 그를
인격적으로 파멸시키기 위한 공작을 폈
다. 하지만 ‘배관공’들은 엘스버그를 곤란
하게 할 어떤 의료기록도 찾아내지
못했다.
문제는 의료기록을 찾고 못 찾고가 아니
었다. 이러한 범법행위로 무감각해진
닉슨 정부의 도덕성이 1년 뒤 정적의
선거자료를 찾아 워터게이트 빌딩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침입하는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을 일으키는 데
아무런 고민 없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움직임 속에 1971년
6월 30일 미 연방대법원의 역사적인 판
결이 있었다. 6대3으로 대법원이 언론
자유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는 국가
기밀이란 이유로 수정헌법 1조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를 억압할 수 없다는 판례를
남긴 역사적 판결이 되었다. ‘펜타곤
페이퍼’는 내부 폭로자 시대를 연 기념비
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2015년 공수부대 중사 출신 최원창씨
인터플로라 월드컵 1위 수상
▶2015년 영국서 사상
최고령 신혼부부 탄생
▶2010년 일본의 우주탐사선
하야부사호가 60억km를 비행하고
7년 만에 귀환.
▶2009년 중국, 진시황 병마용 발굴
중단 24년 만에 재개.
▶2009년 서태지(37), 서울 공연서 8집
신곡 첫 공개. '더 뫼비우스(The
Mobius)'라는 타이틀로 전국투어.
▶2006년 'DJ 가택연금' 19년만에 유죄
당시 마포서장에 집유 2년
▶2006년 한국 축구대표팀,
토고 꺾고 월드컵 사상 첫 원정 승리
한국 축구대표팀이 2006년 6월 13일 프랑크푸르트 월드컵스타디움에서 열린 토고와의 2006독일월드컵 G조 첫 경기에서 이천수와 안정환의 연속골로 2대1 역전승을 거뒀다. 이날 승리는 한국이 해외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거둔 사상 첫 승리였다.
안정환의 통렬한 결승골을 앞세운 태극
전사들은 짜릿한 역전극을 연출하며
월드컵 무대를 밟은지 52년만에 처음
으로 원정 마수걸이 승리를 건졌다
한국은 2002년 이전까지 4무 10패로 단 1승도 올리지 못했다. 이로써 통산 7번째 월드컵에 진출한 한국은 월드컵 역대 전적 22전 4승 6무 12패를 기록했다.
한국은 경기 초반 박지성·조재진·이천수를 최전방에 포진시킨 3-4-3 포메이션을 구사했다. 하지만, 전반 31분 토고의 카데르에 어이없는 선제골을 허용했다.
한국은 후반 들어 안정환을 공격형 미드필드로 투입하고, 4-3-3 포메이션을 구사했다. 활기를 되찾은 한국은 후반 7분 박지성이 상대 미드필드를 돌파하며 토고 아발로의 퇴장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이천수의 환상적인 프리킥 동점골이 이어졌다. 후반 9분 이천수가 아크 서클에서 감아 찬 공은 상대 골키퍼가 전혀 손 쓸 수 없는 빈틈을 향해 아름다운 궤적을 그렸다.
주도권을 잡은 한국은 파상공세를 펼쳤고, 후반 27분 안정환이 역전골을 뽑아냈다. 안정환은 미드필드에서 연결한 공을 이어 받아 페널티 지역 바깥 오른쪽에서 통렬한 중거리 슛으로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https://youtu.be/LmtRsdkfNUg
▶2006년 ‘DJ 가택연금’ 19년만에
유죄, 당시 마포서장에 집유 2년
2006년 6월 13일 대법원3부(주심 박재윤 대법관)는 1987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이던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을 가택연금한 혐의를 받고 있는 당시 서울 마포경찰서장 김모(72)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김씨의 불법감금 행위는 상급기관의 지시에 따른 것인지 여부를 불문하고 위법성이 있다”고 밝혔다.
김씨는 1987년 4~6월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 전 대통령의 집 주위에 경찰관 수백명을 배치해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김 전 대통령의 외출에 비서나 가족이 동행하지 못하게 한 혐의다.
▶2004년 영화계 대표적 감초배우
김일우씨 별세
▶ 2002년 태양계와 유사
새 행성군 발견.
▶2002년 중국, 한국 영사관 진입한
탈북자 강제연행
13일 오후 베이징시의 한국 총영사관 정문앞 경비초소에서 중국 경찰과 외교단지 보안요원들이 탈북자 원모씨를 강제 연행하는 과정에서, 이를 말리는 한국 외교관들에게 폭행을 가하며 완력을 행사하고 있다.
중국 공안이 13일 베이징(北京)주재 한국 총영사관에 무단진입해 앞서 진입한 탈북자를 강제로 연행했고, 나중에 탈북자를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과정에서 이를 제지하는 한국 외교관 등을 집단폭행, 한·중(韓·中) 간 심각한 외교문제를 일으켰다.
베이징 공안국 소속 경찰들은 이날 오후 4시(현지시각)쯤, 앞서 한국 총영사관 안에서 끌려나와 정문 앞의 중국측 경비초소에서 중국 경찰의 조사를 받던 탈북자 원모(56)씨를 연행하면서, 이를 저지하는 한국 영사와 서기관, 영사부 직원, 한국 기자 등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며 집단폭행을 가했다. 이 때문에 한국 대사관 직원 등 5명이 다리와 어깨·머리 등에 상처를 입었다.
폭행에 가담한 중국 경찰 10여명 중 일부는 만취한 듯 짙은 술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한국 대사관(대사 김하중·金夏中)은 즉각 중국 외교부에 대해 공관 불가침권과 외교관 신체불가침권의 침해를 강력히 항의하고 원씨를 한국측에 되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중국 경찰에 연행된 원씨는 이날 아들(15)과 함께 택시를 타고 오전 11시(한국시각 낮 12시)쯤 한국 총영사관 부근에 온 뒤 영사관 민원인 출입구 반대편의 차량 출입구를 거쳐 영사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직후 중국 보안요원 2명이 허락 없이 영사관 안으로 쫓아들어와 원씨를 강제로 끌고 나갔다. 원씨의 아들은 이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직원 사무실까지 뛰어들어가 연행을 피할 수 있었다.
원씨를 끌고 나간 보안원들은 중국 외교부 인원복무국 산하 외교아파트 임대·관리회사인 ‘방옥공사(房屋公司)’ 소속 직원들로, 준(準)공무원 신분이다.
▶2002년 미군장갑차에 치여
여중생 2명 사망
`신효순, 심미선 양 미군장갑차살인사건`
관련, 광화문 촛불시위 1주년 범대위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미대사관 앞에서
열고 규탄구호를 외치고 있다.
2002년 6월 13일 오전 10시45분쯤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도에서 친구 생일을 축하하러 가기 위해 갓길을 걷고 있던 이 마을 신효순, 심미선양 등 2명이 미군의 가교 운반용 장갑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러나 미군측은 6월 19일 사고조사 결과 발표에서 “선임 탑승자가 피해 여중생들을 30m 전방에서 발견, 운전병에게 경고하려고 했지만 소음이 심해 제때에 경고할 수 없어 발생한 고의성 없는 사고”라고 말했다. 미군은 적법한 작전수행 과정에서 일어난 사고이기 때문에 미군측의 과실 책임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의정부경찰서가 미군으로부터 넘겨받은 사고 차량 운전병의 진술서에 따르면 운전병이 선행하던 중대장과 무전교신을 하고 있어 선임 탑승자의 경고를 못 들었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경찰조사 결과 탑승자들의 헬멧에 장착된 무전교신기가 동시에 두 곳과는 교신이 불가능, 유사한 사고의 발생 위험성이 높다는 점도 드러나게 됐다.
법무부는 미군 당국을 상대로 장갑차 탑승 군인에 대한 1차 재판권포기를 요청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1월 20일 관제병 페르난도 니노 병장이 무죄 평결을 받은 데 이어 20일에는 운전병 마크 워커 병장도 무죄 평결을 받아 파문이 확산됐다. 이후 국내에서 촛불시위를 비롯해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있었다. 파문이 점차 확산되자 부시 미국 대통령은 토머스 하버드 주한 미국 대사를 통해 사과를 표명하기도 했으나 반미감정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12월 13일에는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로 직접 사과했다. 불평등한 소파(SOFA)협정 개정에 관한 전 국민의 관심이 뜨거운 사건이었다.
▶2002년 6·13 지방선거 한나라당
압승, 민주·자민련 참패
▶2001년 대한항공 노사협상 타결.
▶2001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일단 휴전.
▶2000년김대중 대통령 평양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 첫 회담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6월 13일 분단 55년만에 처음으로 직접 만나 두손을 맞잡았다. 김대통령은 전용기로 오전 10시27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고 공항에는 사전예고없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환영나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비행기 승강구에서 내린 김대통령은 트랩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위원장에게 가까이 다가가 역사적 첫 남북정상간 악수를 나눴다.
두 정상이 두손을 맞잡고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나누자 환영행사에 나온 평양시민들은 노도처럼 `결사옹위 김정일` `만세` 등을 외치며 뛰면서 열광했다. 이날 환영나온 인파는 60만으로 남북정상회담에 거는 북한의 기대를 짐작케 했다. 김위원장은 김대통령의 승용차에 함께 타 백화원 영빈관까지 가는 동안 약 50분간 `차중 회담`을 해 눈길을 끌었다.
양 정상은 이날 낮 김대통령의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에서 27분간의 1차 회담을 갖고 남북 정상간 직통전화의 개설 필요성에 대해 의견을 같이했다. 김대통령은 이어 오후에는 만수대 의사당으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예방하고, 만수대 예술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한 뒤, 저녁에는 김영남 위원장이 베푼 환영만찬에 참석했다.
▶1997년 미연방배심원,
티모시 맥베이 사형평결
▶1993년 캐나다 총리에 캠블 선출
▶1991년 옐친, 러시아공화국 초대
대통령(직선) 당선
러시아 사상 처음 실시된 대통령
직접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보리스 옐친 대통령.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이 러시아 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대통령 직접선거에서 60% 이상을 득표하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1931년 우랄산맥의 스베르들로프스크 지방의 부트가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1985년 직후 고르바초프에 의해 개혁추진 인물로 발탁돼 모스크바시 당중앙위원회 건설담당자로 기용되었다.
이때부터 모스크바 시민들로부터 인기를 얻어 대중 정치가로 부상하면서 1987년 개혁이 미온적이라며 고르바초프를 비판해 당직에서 해임되기도 하였으나 1989년 3월 실시된 인민대회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인민대표회의 의원으로 당선돼 고르바초프의 최대 정적으로 부상했다.
1990년 5월에는 소련내 최대 공화국인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됐고 소련이 해체된 후 이날 처음으로 실시된 러시아공화국 직접선거에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86년 `스윙재즈의 킹` 베니 굿맨 사망
1930~40년대 재즈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키며 일명 ‘스윙재즈’로 재즈 역사를 새롭게 장식한 베니 굿맨이 1986년 6월 13일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클라리넷 연주의 명인일 뿐 아니라 부다페스트 사중주단과 모차르트를 협연할 만큼 클래식에도 조예가 깊었다.
1909년 시카고의 가난한 양복재단사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밥벌이를 위해 미시간 호수 유람선 밴드를 드나들며 연주를 했다.
그러던 1935년 8월 21일 팔로마 보룸에 출연한 것이 계기가 돼 미국과 전세계를 들끓게 한 ‘스윙재즈’ 붐을 일으켰다. 당시 그의 나의 26세였다.
‘스윙재즈’의 열풍이 일기까지 재즈는 소규모 밴드, 술집 그리고 거리축제 등에서 연주되던 흑인 음악에 불과했다. 그러나 ‘스윙재즈’가 나오면서 재즈는 더 이상 흑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스윙재즈’... 말 그대로 재즈 연주 특유의 몸이 흔들리고 있는 듯한 리듬감을 표현한 이 음악은 대공황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내 ‘스윙재즈’ 열풍을 타고 재즈는 온통 거리를 휩쓸게 되었고 이로써 약 10년 동안 베니 굿맨의 스윙 황금시대가 계속됐다.
이제 베니 굿맨의 몇몇 앨범은 전문 수집가들조차 구하기 어려운 희귀음반이 되어 버렸다. 그의 명곡들로는 ‘sing sing sing’ ‘Let`s Dance’ ‘Body And Soul’ 등이 있다.
▶1984년 런던서 시크교도 망명정부
칼리스탄국 창설
▶1982년 할리드 사우디국왕 사망
▶1982년 제12회 월드컵 스페인서 개막
▶1974년 중국,
비림(批林).비공(批孔)운동 전개
▶1974년 제10회 월드컵 서독서 개막
▶1971년 뉴욕타임스(NYT)지
베트남전 기밀문서 게재 정치문제화
▶1968년 정부, 가이아나와 국교 수립
▶1966년 `미란다 원칙`
고지 의무화 판결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으며..." 1966년 6월13일, 범인체포시 이 `미란다 원칙` 고지가 의무화되도록 한 판결이 처음 내려졌다. 경찰로부터 묵비권과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사전에 듣지 못한 피의자에게 미 연방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미란다는 1963년 3월,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시의 한 극장 앞에서 10대 소녀를 납치ㆍ강간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23세의 멕시코계 청년 어네스토 미란다의 이름이다. 미국인들에게는 `미란다 대 애리조나`로 더 잘 알려져있다. 경찰조사에서 자신의 범행사실을 자백하고 진술조서에까지 서명을 마친 미란다가 돌연 재판과정에서 강요된 자백이라며 진술을 번복함으로써 재판이 잠시 차질을 빚긴했으나 법원은 미란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최고 30년의 중형을 내렸다. 주(州) 대법원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란다의 무죄를 주장하는 `미국 자유시민 연맹`이 연방 대법원으로까지 사건을 끌고가자 연방대법원은 5대4로 원심을 뒤집고 미란다의 손을 들어줬다. 판결 후, 인권에 대한 획기적인 판결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비난의 목소리도 적지않았다. 공교롭게도 판결이후 강력범죄가 급증했다.
미란다는 그뒤 동거여인의 증언 등으로 다시 유죄가 확정돼 옥살이를 하다가 1972년 가석방됐으나 1976년 술집에서 싸움 끝에 죽었다.
▶1961년 언커크,
한국의회제도 부활을 촉구
▶1959년 민판수호총연맹,
언론수호대회 서울서 개최
▶1958년 스위스 의회,
부인참정권 가결
▶1958년 일본, 한국에 반환할
문화재목록을 제공
▶1956년 영국군 74년 만에
수에즈운하서 철수
▶1955년 일본-북한 어업협정조인
▶1953년 콜롬비아 육군 유혈쿠데타
▶1948년 미국 뉴욕 양키즈팀,
베이브 루스의 등번호 3번을
영구 결번으로 발표
미국의 번영과 함께한 베이브 루스
1921년 3월 4일 워런 하딩이 제29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때 미국은 경제공황의 여파가 최고조에 달해서 국민소득은 전년도보다 20%나 감소했고 실업자는 500만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경제 한파도 1922년에 종지부를 찍고 번영과 풍요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 탄생한 이가 ‘전설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다.
애초 루스는 타자가 아닌 투수로 주목 받았다. 메이저리그 데뷔 2년째인 1915년 16승을 올린 것을 시작으로 해서 1916년에는 23승을, 1917년에는 24승을 거뒀다. 특히 1916년에는 1.75로 평균자책점 1위에 올랐다. 타자와 투수를 거의 반반씩 한 1918년에도 13승을 올리는 등 통산 163경기(선발 148경기)에 등판해 94승 46패, 평균자책점 2.28을 기록했다. 리그 최고 투수를 눈앞에 뒀을 때 그의 타격 재능을 알아본 에드 배로 보스턴 감독은 전설의 홈런왕을 창조해 내며 데드볼 시대도 막을 내렸다.
1918년 11홈런으로 첫 홈런왕에 오른 루스는 1919년 당시로는 한 시즌 최다인 29홈런(그전까지 기록은 네트 윌리엄스가 기록한 27홈런)을 기록하며 야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아무리 홈런 타자라고 해도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는 게 고작이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듬해 1월 또 한번 루스는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로는 천문학적인 금액인 12만 5천 달러에 뉴욕 양키스로 현금 트레이드 됐기 때문이다. 베이브 루스가 그런 가치가 있는 선수라는 것을 인정받는데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적 첫해 믿기지 않는 54홈런을 기록한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듬해는 59홈런을 치며 미국의 번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존재가 됐다. 1927년에는 60개의 공을 외야 담장 너머로 날리는 등 한 시즌 50홈런 이상을 4회나 기록했고 통산 홈런 수는 714개에 이르렀다. 꽃이 피면 지는 게 자연의 이치. 1929년 10월 24일 미국 뉴욕 증권시장에 암흑의 목요일이 닥치며 미국의 번영도 베이브 루스의 영광도 어둠 속으로 사그라졌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한 1933년 루스의 홈런 수는 34개로 격감했고 1935년 2월에는 보스턴 브레이브스(현 애틀랜타)로 이적해서 6홈런만을 남기고 쓸쓸히 유니폼을 벗었다.
전설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 <출처: wikipedia>
[월드시리즈 3차전뉴욕 양키스VS시카고 컵스와의 대결
5회까지 4:4의 스코어, 베이브 루스가 타석에 들어서자, 시카고 컵스 팬들은 루스에게 야유를 보냈고,
한 관중이 던진 레몬이 루스에 얼굴에 박히자 루스는 센터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다음 공 낮게 깔리는 카브를 정확히 센터 쪽 홈런으로 날렸다.]
라는 전설이 있네요. 이 경기를 지켜보던 한 기자가 별 생각 없이 전설이라고 말하자, 진짜 전설이 되었습니다.
‘전설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
▶1938년 학교 근로 보국대
실시요항 발표
▶1938년 휘발유 및
중유판매취체령 공포
▶1938년 경성제대 강당에서
육군지원병훈련소 입소식 거행
▶1918년 광화문선 전차 운행 개시
▶1917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개교
▶1915년 1938년 최초로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미국의 테니스
선수 버지 출생
▶1903년 소련 압록강목재회사 설립
▶1903년 소련,청나라 전선연접
조약 성립
1890년 양화진에 외국인 묘지 허가(1890.06.13 음력)
조선조 말, 외국인이 숨지면 주로 제물포항 언덕에 묻혔다. 정부가 성내 매장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이다. 1890년 헤론이 전염성 이질에 걸려 숨진 것을 계기로 외국인들은 한강변에 가까운 양화진을 공동묘지로 불하해 줄 것을 정부에 요청했다.
헤론은 1885년 의료선교사로 파견돼 불철주야 한국인을 위해 의료사업을 펼쳐온 사람이었다.
6월13일(음), 정부가 묘지설립을 허가하고 헤론이 이 곳에 처음 묻히면서 이후 양화진은 베델, 언더우드, 아펜젤러, 헐버트 등 면면이 한국인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의 안식처가 됐다. 묘비도 감동적인 문구로 가득해 베델의 묘비에는 “내가 한국을 위해 싸우는 건 소명”, 헐버트의 묘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 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적혀있다. 현재 4000여평의 공간에 500여명이 묻혀있다.
▶ 1879년 핀란드의 육상선수 누르미 출생 - 1920, 1924, 1928년 올림픽서 6개의 금메달 획득
▶ 1871년 런던 상해간 전신 개통
▶ 1865년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 출생
▶ 1831년 영국 물리학자 맥스웰 출생
▶ 1790년 베네수엘라의 초대 대통령 파에스 출생
▶ 1402년 명나라 율문제, 정강의 변으로 폐위
▶ 1398년 목화 전래자 문익점 사망
▶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망
역사상 유례없는 세계 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원전 323년 6월 13일 원정지 바빌론에서 사망했다. 끊임없는 정신적-육체적 과로, 국사에 대한 엄청난 중압감, 장기간의 행군과 심각한 부상 등으로 원기가 소진되어 걸린 열병이 원인이었다. 만 33세가 되지 못한 나이였고 마케도니아 왕위에 오른 지 12년 8개월만의 일이었다.
동방원정 기간동안 1만 7,600킬로미터를 행군한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이자 정복자였으며, 전술 및 전략의 새로운 준거를 확립한 지휘관이었다. 그의 정복으로 거대한 세계의 문은 활짝 열렸고 통합되었으며 헬레니즘 문화는 꽃을 피웠다. 기원전 356년 마케도니아 수도 펠라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로스는 부친인 필리포스 왕에게서 군사적 재능과 냉철한 합리주의를 이어받았으며 모친 올림피아스에게서는 신비주의, 낭만성, 격정적인 기질, 카리스마 등을 물려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는 지식에 대한 사랑, 특히 과학적 탐구와 의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갑작스런 부친의 살해에 그가 부친의 왕국, 군대, 아시아 원정계획 그리고 코린트동맹군 지휘의 임무를 떠맡은 것은 그의 나이 약관 20세때였다. 동방 정복에 나선 이후로 단 한번도 전투에서 패하지 않은 그가 갖는 중요성은 단순히 군사적 천재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만민의 평등과 협조에 바탕을 둔 세계국가 이념이야말로 그의 업적이 갖는 진정한 역사적 의의라 할 수 있다. 젊고 자부심에 찬 정복자가 착안한 이 정치적 비전은 그가 사망하고 그의 제국이 사라진 후에도 지속되었으며 당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알렉산드로스가 군대를 지휘하고 있다. 갑옷에는 메두사의 머리가 그려져 있다.(로마시대 모자이크 작품의 세부)
https://youtu.be/14VF5EEjc_I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