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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중앙박물관 청동기/고조선실
청동기·고조선실은 발달된 농경 기술을 기반으로 한 청동기시대의 생활 모습과 청동이라는 금속 제품이 유입되면서 변화하는 문화상을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농사를 짓는 데 사용한 간석기와 논과 밭에서 수확한 곡식을 조리하고 저장하는 데 쓰인 다양한 토기에서 당시 농경사회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대표 유물인 동검을 중심으로 요령식 동검 문화遼寧式銅劍文化와 한국식 동검 문화韓國式銅劍文化를 비교하여 전시하였다. 기원전 4세기 무렵에는 철기가 나타나면서 계급 분화가 촉진되는데, 단단하고 예리한 철제 농기구와 무기의 사용, 토기의 변화로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청동기시대는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를 주 무대로 기원전 15세기 무렵 시작되었다. 신석기시대에 쓰던 빗살무늬토기 대신 민무늬토기를 사용하였다. 청동기는 권위의 상징물이나 의기儀器로 일부 계층만 소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벼농사를 비롯해 농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낮은 언덕이나 평지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으며, 고인돌, 돌널무덤, 독무덤 등 새로운 형태의 무덤이 나타났다. 이 시대에는 집단 안에 사회적 계층이 성립되었으며, 문헌에 등장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이 한漢을 비롯한 주변의 여러 세력과 공존하며 패권을 다투기도 했다.
전시실 소장품
반달돌칼 : 반달돌칼은 곡식의 이삭을 따는 데 사용했던 농사 도구로, 점판암과 같이 편편하고 얇은 돌에 홈을 그어 적당한 크기로 잘라 낸 뒤 문지르고 다듬어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반달돌칼은 발달된 석기 제작 기술의 수준을 보여 줍니다. 반달돌칼에 있는 구멍은 끈을 꿰어서 손으로 쥐기 편리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반달돌칼은 벼농사를 짓기 시작한 청동기 시대에 널리 사용되다가 철기가 생산되면서 점차 사라졌습니다. 지역에 따라 반달 모양, 긴 사각형, 삼각형 등 여러 가지 모양의 돌칼이 사용되었습니다.
도끼 : 인류는 오랜 기간 동안 땅을 파거나, 나무를 베거나, 사냥하거나, 싸움을 할 때 뗀돌도끼·간돌도끼·철도끼 등 다양한 도끼를 사용했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간돌도끼는 주로 나무를 베거나 땅을 파는 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된 돌을 가는 기술은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더욱 발달했습니다. 간돌도끼도 그 쓰임새에 따라 다양한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청동기 시대에는 지배 계층의 꾸미개나 무기, 제사 등의 의식에 사용되는 도구 등과 같은 특별한 물건은 청동기로 만들었지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생활 도구는 대부분 돌을 갈아 만들었습니다.
새김 돋은띠무늬 토기 : 아가리 바깥쪽에 진흙띠를 붙이고 그 위에 빗금무늬 또는 찔러서 볼록 튀어나오게 한 자돌무늬 등을 새긴 토기를 새김덧띠무늬토기라고 합니다. 남한 지역에서는 바리모양토기의 아가리에 새김덧띠무늬를 새겨 넣은 토기가 많이 출토되지만, 북한 지역에서는 바리모양토기와 항아리모양토기의 아가리뿐만 아니라 몸통에도 새김덧띠무늬를 새긴 토기가 출토됩니다.
붉은간토기 : 붉은간토기는 토기 표면에 붉은색을 덧칠하고 매끈하게 갈아서 광택이 나도록 만든 토기입니다. 적색마연토기 또는 홍도라고도 부릅니다. 몸체가 둥글고 목이 긴 것이 기본이지만 지역에 따라 특색 있는 형태도 있습니다. 가지무늬토기와 함께 청동기 시대의 무덤인 고인돌과 돌널무덤에서 주로 출토되어 껴묻거리나 의례용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동북 지방의 붉은간토기는 주로 완과 바리모양토기인 반면, 중부 이남에서는 바닥이 둥근 단지 모양의 붉은간토기도 나타납니다. 집터 유적에서는 바닥이 둥근 단지 외에도 실생활에서 사용된 바리, 단지, 완, 굽다리형 등 다양한 모양의 붉은간토기가 출토됩니다.
검은간토기 : 고운 바탕흙으로 형태를 만든 뒤 표면에 흑연 등의 광물질을 바르고 문질러서 광택을 낸 토기입니다. 중국의 요령식 동검이 출토되는 유적에 기원을 둔 것으로 보입니다. 목이 긴 항아리가 많으며 쇠뿔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토기도 있습니다. 대부분 무덤에서 발견되며 가끔 집터에서도 발견됩니다.
가지무늬 토기 : 토기 몸통의 어깨 부분에 가지 모양의 검은 무늬가 장식되어 있어서 가지무늬토기라고 부릅니다. 토기 형태나 바탕흙 등이 붉은간토기와 비슷하여 같은 계통으로 보기도 합니다. 가지무늬토기는 간혹 집터에서도 출토되지만 주로 고인돌과 돌널무덤 등에서 출토되기 때문에 껴묻거리나 의례용 토기였다고 여겨집니다.
간돌검 : 간돌검은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로 특히 우리나라에서 발달했으며 일본의 규슈 지방에서도 발견됩니다. 간돌검은 비교적 규모가 큰 주거지나 무덤에서 출토되므로 특별한 지위의 사람들만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길이가 40cm 이상이거나 손잡이 부분이 사용하기 불편할 정도로 크고 그 안에 무늬가 새겨진 간돌검은 제사와 같은 의식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별도끼 : 별모양도끼는 도끼날의 끝이 톱니 또는 돌기처럼 날카롭게 나뉘어 있어서 톱니날도끼 또는 다두석부라고도 부릅니다. 가운데에는 막대기를 꽂는 큰 구멍이 있고 그곳에서 돌기 사이로 바퀴살처럼 뻗어 나간 방사형으로 홈을 파놓았습니다. 별모양도끼는 지배 계층의 권위를 상징했던 유물 또는 막대기 끝에 꽂아서 무기로 쓰던 곤봉 머리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돌기의 형태는 별 모양, 수레바퀴살 모양, 부챗살 모양 등 여러 가지입니다.
농경문 청동기 : 농경문 청동기에는 청동기시대의 농사짓는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기원전 15세기를 전후해 한반도는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경農耕 사회가 되었습니다. 농경이라는 새로운 생계 경제가 등장하면서 마을의 규모나 입지, 생활 도구, 의례 등 사회 전반에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동안 청동기시대 농경의 구체적인 모습은 유적의 입지나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의 기능으로 살펴보는 간적접인 방법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전 지역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농경문 청동기는 문자 기록이 없던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농경문 청동기의 고리가 달린 면에는 나뭇가지 위에 새가 마주 보고 앉은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반대 면에는 오른쪽에 머리에 긴 깃털을 꽂고 벌거벗은 채 따비로 밭을 가는 남자와 괭이를 치켜든 사람, 왼쪽에는 곡식을 항아리에 담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봄에 농사를 시작해 가을에 수확하기까지의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농경문 청동기는 벌거벗은 채 농사짓는 모습과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가 의미하는 바를 통해 한 해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의례에 사용된 도구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랫부분이 깨져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으나, 전체적인 형태가 대전 괴정동 유적과 아산 남성리 유적에서 출토된 방패 모양 청동기와 매우 유사해 이 농경문 청동기 역시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경 한국식 동검문화가 발전하기 시작한 단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의 청동기
한국 청동기문화에 관한 연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 원인은 과거에 주로 일본 학자들이 유포시킨 한국 청동기 부재설(不在說)과 그 영향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까지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제작된 청동기가 거의 발굴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한국에 고고학적 역사시대로서의 청동기시대나 문화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 대신 이른바 ‘금석병용(金石倂用)’이란 이형(異形)적인 혼합시대가 신석기시대와 철기시대 사이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금속(철)기를 사용했다면 그 시대는 이미 석기시대가 아니라 금속(동이나 철)시대인 것이며, 더욱이 근래에 한반도 여러 곳에서 청동기 유물이 발견된 사실을 감안하면 이런 주장은 천부당만부당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북한 지역에서만 청동기가 출토되자 청동기 ‘국부존재설(局部存在說)’, 즉 청동기시대가 북한 지역에서만 잠시 존재했고 남한 지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주장이 대두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남한 각지에서도 청동기 유물이 속속 발견되자 급기야 이상의 두가지 유설(謬說)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고, 한반도에서의 청동기시대 문화의 존재가 인정되었다. 이후 한국 청동기문화의 조형(祖型)과 기원에 관한 문제가 연구되어 점차 그 실체가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한반도 각지에서 세형동검(細形銅劍)을 비롯해 구리로 만든 창(동모(銅鉾)) · 칼 · 단추 · 화살촉 · 긴 손잡이가 달린 창(과(戈)) · 방울(영(鈴)) · 목탁(탁(鐸)) · 도끼 등 다양한 유물이 적지 않게 발굴되었다. 이러한 유물은 주로 지석묘(支石墓) · 석관묘(石棺墓) · 토광묘(土壙墓) · 옹관묘(甕棺墓) 등 여러가지 묘제(墓制)의 분묘에서 나왔는데, 같이 출토된 유물로는 주로 팽이형이나 각형(角形)의 무문(無文)토기와 마제 돌칼이나 반달 모양의 칼(반월도(半月刀)) 같은 석기류가 있다.
한국 청동기의 출현 시기(편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대략 기원전 700년경으로 잡고 있다. 청동기의 기원과 관련 시베리아 미누신스크의 다가르(Dagar) 문화와 관계가 있는 북방계 청동기문화(카라수크 청동기문화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데, 이 시기의 문화를 제1차 청동기문화(혹은 청동기 전기 문화)라고 한다.
이 전기 문화에는 북방 유목기마민족의 초기 청동기 문화의 영향이 뚜렷하다. 그후 기원전 4~3세기에는 중국 청동기문화가 한반도 서북부를 거쳐 반도 남단에까지 파급되었다. 이 시기의 문화를 제2차 청동기문화(혹은 청동기 후기 문화)라고 한다. 이 후기 문화에는 주로 중국 전국(戰國)시대 연(燕)나라 화폐인 명도전(明刀錢) 유물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 중국 청동기문화와 여러가지 상관성이 엿보인다. 명도전은 한반도 북부의 강계(江界)로부터 남단의 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출토된다.
아직 연구가 미흡해서 한국 청동기의 조형(祖型)이나 기원 관계를 명확히 밝힐 수는 없다. 다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외래계 청동기와의 상관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시베리아 카라수크 청동기문화의 특징인 석관묘(石棺墓, stone tomb)가 한국에서 청동제 검이나 단추와 함께 출토되었다. 이것으로 청동기문화의 상호 교류상을 엿볼 수 있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출토된 석관묘와 반출된 청동유물을 살펴보면 1939년 평안북도(平安北道, 현 양강도(兩江道)) 강계군(江界郡) 어뢰면(漁雷面) 풍용리(豊龍里)에서 처음으로 상식(箱式) 석관이 발굴되었는데, 이때 석기와 청동제 단추가 함께 출토되었다. 이어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판곡면(板谷面) 사천리(沙川里)와 평안북도 구성군(龜城郡) 사기면(沙器面) 신동리(新洞里), 황해도(黃海道) 서광군(瑞光郡) 천곡리(泉谷里)의 석관묘에서는 각각 청동제 검이 유물로 나왔다.
이와 같이 한반도 전역에 걸쳐 석관묘가 출토되고 있으며, 출토될 때마다 빠짐없이 청동제 검이나 단추, 화살촉 같은 유물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고대 한민족의 정착지와 활동지였던 중국 경내의 여러 곳에서도 동류의 석관묘와 청동기 부장품이 출토되고 있다.
예컨대 둥베이(東北) 지린시(吉林市) 스다거우(駛達溝) 베이산딩(北山頂)의 석관묘에서는 석기와 함께 청동제 도끼와 단추가, 화베이(華北)의 탕산(唐山) 쇼우관장(小官莊)의 석관묘에서도 솥 · 돌도끼와 함께 구리 가락지(동환(銅環))가, 두만강(豆滿江) 유역의 왕칭현(汪淸縣) 바이초우거우(百草溝)의 석관묘에서는 청동제 단추가 나왔다. 석관묘는 트란스바이칼(Transbaikal)로부터 북몽골과 중국 동북 지방을 거쳐 한반도에까지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서 발굴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청동기문화가 당시의 한(漢)문화와는 직접적 연관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청동기시대 이전, 한민족 문화의 구성은 시베리아나 몽골 쪽과 더 깊은 관계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재미 중국학자 장광즈(張光直, K. C. Chang)도 이 점을 시인하면서 고고학적으로 볼 때 발해(渤海) 지역과 남만주 지역은 은(殷) · 상(商)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으며, 동주(東周)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이 지역에 대한 한(漢)문화의 침투가 보인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카라수크 청동기문화에 나타난 특징의 하나인 석관묘가 한민족이 활동했던 여러 지역에서 청동기 부장품과 함께 출토되어 한국 청동기문화와 카라수크 문화를 비롯한 북방 시베리아 청동기문화 간의 상관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다음으로 한국에서 출토된 조형(鳥形) 안테나식 세형동검(細形銅劍)은 청동기시대 북방 유라시아 동검과 한국 고유의 세형동검의 결합물로 추측된다. 안테나식 검(Antennen Schwert, antennae sword)이란 자루 상단의 양끝이 곤충의 촉각처럼 위로 뻗어 올라가거나, 둥글게 구부러져서 각각 윤형(輪形) 또는 고사리 같은 와형(渦形)을 이루고 있는 형식의 검을 말한다. 이러한 검 형식은 본래 중부 유럽의 청동기시대 말기(기원전 9~8세기)로부터 철기시대에 걸쳐 성행한 검 형식이다.
조형 안테나식 세형동검이란 새 모양(조형(鳥形))의 자루를 가진 한국 고유의 세형동검을 말한다. 중국 · 한국 · 일본 등 동양 각국에서 조형 안테나식 동검이 출토되었지만 그 기원에 관해서는 아시아에서 발생했다는 설과 유럽의 할슈타트 문화에서 발생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정설로 인정된 것은 없으며, 막연하게 ‘북방식 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에서 출토된 대표적인 조형 안테나식 동검 유물로는 평양(平壤)에서 출토된 동검자루(銅劍柄頭)와 대구(大邱) 비산동(飛山洞) 와룡산(臥龍山) 기슭의 분묘에서 출토된 유물이 있다.
평양의 동검자루는 자루 상단의 길이가 3.2cm로, 두마리 오리가 머리를 돌려 서로 등지고 있고, 부리가 등에 닿아서 경부(頸部)가 부정형환(不整形環)을 만들고 있다. 또한 좌우에 작은 삼각형 투공(透孔)이 두 개, 중앙에 소공(小孔)이 한 개 있다. 대구의 동검자루 끝에는 사실적으로 표현된 오리 두 마리가 있다.
고대 한민족이 활동하던 랴오닝성(遼寧省) 시펑현(西豊縣) 시차거우(西岔溝)의 밀집토광묘군(密集土壙墓群)에서도 전장 57cm의 조형 안테나식 동검이 출토되었고, 이웃인 일본 쓰시마섬(對馬島) 미네무라미네(峰村三根)와 규슈(九州) 북단의 사가현(佐賀縣) 당진시(唐津市) 백기(柏崎)에서도 길이가 각각 15.1cm와 26.5cm의 조형 안테나식 동검이 발굴된 바 있다. 한국 · 중국 · 일본에서 발굴된 이상 유물의 실제 연대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의 약 300~400년간에 걸친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검의 기원지는 유럽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2000년경 에게해 지방에서 처음으로 장검(長劍)이 무기로 사용되기 시작해 기원전 15세기에 이르러서는 북 · 중유럽의 여러 지역에 장검이 성행하다가 청동기시대 후기에 독일로 남전(南傳)되어 크게 발달하였다. 독일의 가장 오래된 장검은 기원전 13세기(Bronze D기)에 발생한 리그시(Riegsee)식 장검(둥근 원판에 꼭지가 달린 형식의 병두(柄頭))인데, 이것이 기원전 12세기(할슈타트 A1기)에 와서는 손잡이에 3개의 테가 달린 삼결절식(三結節式, Dreiwulst)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검형이 기원전 10세기(할슈타트 B1기)에 이르면 병두가 넓은 접시 모양을 한 살렌크나트(Schalenknat)식으로 변형되고, 같은 시기에 이 접시 모양의 병두가 점점 커져서 양단이 위로 뻗어 올라가는 뭬리게르(Möriger)식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안테나식 검병(劍柄)의 조형(祖型)이다. 이 조형은 다시 기원전 9세기(할슈타트 B2기)에 와서는 병두 양단이 고사리처럼 감겨서 완전한 안테나식이 된 이른바 취리히(Zürich)식 검형으로 고착되었다.
이렇게 북부 독일에서 출현한 안테나식 동검이 변해 중앙아시아에 이르러 그 병두가 스키타이의 아키나케스식 단검의 병두로 채용된 후 다시 이 안테나식 검병과 결합한 아키나케스식 검이 몽골 · 중국(화북) · 일본에까지 유입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동검은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를 거치는 과정에서, 그곳에서 유행되던 동물장식의 영향을 받아 병구(柄口)에 조형(鳥形)을 채용하였다. 또한 랴오닝(遼寧)으로 이동해 한국을 중심으로 한 세형동검 문화권에 들어와서는, 그 영향을 받아 신부(身部)가 세형화(細形化)되어 마침내 특유의 조형 안테나식 세형동검을 창출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형의 동검이 일본에까지 전파되어 중국의 동북부와 한국 · 일본을 포괄하는 이른바 조형 안테나식 세형동검 문화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동검의 전파 과정을 통해 한국과 북유라시아 간에 있었던 청동기문화의 교류상(交流相)을 확인할 수 있다.
고조선 (古朝鮮)
목차
정의
개설
명칭 유래
고조선에 관한 연구 및 학설
문헌을 통한 고조선의 역사
정치
사회
정의 :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국가.
개설 : 처음 사서에 등장할 때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고조선이란 명칭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이때 고조선(왕검조선(王儉朝鮮))이라 한 것은 기자조선(箕子朝鮮)이나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단군조선을 ‘전조선(前朝鮮)’, 기자조선을 ‘후조선(後朝鮮)’이라 하였다.
고조선이란 명칭이 널리 쓰여진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이씨조선과 구분되는 고대의 조선이란 의미이다. 구체적으로 고조선이 포괄하는 범위에 대해서는, 서기전 2세기 초에 일종의 정변을 통해 등장한 위만조선 이전 시기에 존재한 조선만을 칭하는 경우와, 위만조선까지를 포괄해 고조선이라 하는 경우로 나누어진다.
정치사적인 측면에서는 전자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위만조선의 사회와 문화가 그 앞 시기 조선과 이어지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사회문화적인 면에서 고조선이라 할 경우 위만조선 시기까지를 포괄해 사용하고 있다.
명칭 유래 : 조선이란 명칭이 ‘땅이 동쪽에 있어 아침 해가 선명하다(地在東表 朝日鮮明)’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이는 조선이란 한자의 뜻을 새긴 풀이에 불과하다.
또 만주어에서 관할구역을 나타내는 ‘주신(珠申)’에서 비롯되었으며, 조선·숙신·여진 등이 모두 같은 어원을 지녔다는 설이 있고 단군신화에서 나오는 ‘아사달’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가장 이른 시기에 제기된 설로, 위나라 사람 장안(張晏)은 습수(濕水)·열수(列水)·산수(汕水)라는 강 이름에 조선이란 명칭의 연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현재까지로선 조선이란 국호의 어원은 명확치 않다.
고조선에 관한 연구 및 학설
고조선이 역사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언제인가에 대해, 『삼국유사』에서는 건국 기년을 서기전 2300년대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기년은 우리 선인(先人)들이 고조선을 어떻게 인식했는가 하는 각 시기의 역사의식을 반영한다는 면에서 사학사적인 의의는 크지만, 고조선사 자체에는 실제적인 의미가 없다.
고조선이라고 할 때, 그것은 ‘조선’의 고대역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고조선의 역사에 대해 말할 때 이에서 논급될 수 있는 최대한의 범위는 한 사회가 국가 형성단계로 접어들기 위한 기본적인 역사적 조건이 마련되기 시작했을 때부터이다. 그것은 농경과 금속기의 사용이 어느 정도 진전된 이후부터이다.
한반도와 만주 일원에서 농경과 금속기가 보급된 시기를 볼 때 가장 빠른 지역인 요서(遼西)·요동(遼東) 지역에서도 그것은 서기전 천수백 년을 넘지 못한다. 그보다 이전 시기인 신석기 단계의 사회에 있었던 어떤 집단을 고조선과 연관시켜 논급할 수는 없다.
농경과 청동기가 보급되기 시작한 이후 어느 시기에 고조선이 역사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을 것이고, 고조선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으로 흔히 『산해경(山海經)』과 『관자(管子)』를 들고 있다.
『산해경』의 해내북경(海內北經)에서 조선의 위치에 관해 “조선은 열양 동에 있고 바다 북쪽 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에 속한다(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라 기록하였다. 이 기사에 의거해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의 위치를 비정하는 고찰들이 있어 왔다.
그런데 『산해경』은 고대 중국의 지리서로서, 춘추시대에서 전한대에, 즉 서기전 8세기에서 서기전 1세기에 걸쳐 여러 지역에서 쓰여진 것들을 모은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조선이 어느 때의 상황인지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관자』의 경우, 경중갑편(輕重甲篇)과 규도편(揆度篇)에서 춘추시대의 제(齊)와 조선간의 교역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관자』는 서기전 7세기 제의 재상인 관중(管仲)의 저술이라지만, 실제 주된 내용은 전국시대(서기전 402∼서기전 221)의 제나라인들의 저술로서, 이를 관중의 이름에 가탁한 것이다.
따라서 『관중』에서 언급한 제와 조선과의 교역에 관한 언급은 기원전 5세기 이전부터의 어떤 전승에 의거했을 수도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에 의거해 조선이 언제부터 제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졌는지를, 바꾸어 말하자면 조선이란 실체가 언제 역사상에 등장했는지를 추정하기는 어렵다.
조선에 관해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한 기록은 『사기(史記)』와 『전국책(戰國策)』 등 한(漢) 초의 사서이다. 『사기』 소진전(蘇秦傳)에 의하면, 소진이 연(燕)의 문후(文侯: 서기전 361∼서기전 333)에게 당시 연의 주변 상황을 말하면서 “연의 동방에는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누번이 있으며.”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조선이 연의 변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며, 연의 국세와 대외관계를 논할 때에 주의할 만한 세력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늦어도 서기전 4세기 중반에는 조선의 실체가 북중국 지역 사람들에게 뚜렷하게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국책에서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그런데 고조선에 관한 사실을 그 중 많이 기술한 『사기』 조선전의 기사도 주로 위만조선에 관한 것이다. 이를 통해 앞 시기의 고조선의 역사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문헌자료의 한계로 인해 고조선의 역사상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고조선 중심지에서 출토되는 고고학적 자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위해서 우선 고조선 중심지의 위치 자체가 분명해야 하는데, 이 역시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그 동안 고조선사에 대한 연구는, 단군신화에 대한 고찰을 제외하고는, 주로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이 중심을 이루어왔다.
고조선의 중심 위치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논고에서 재요령성설(在遼寧省說), 이동설(移動說), 재평양설(在平壤說)이 제기된 이래, 논란이 거듭되어 오고 있다.
현재 남한학계에서는 이 세 가지 설이 모두 제기되고 있다. 북한학계에서는 그 동안 고조선 중심지가 남만주 지역에 있었다는 재요령성설이 정설이었다.
그런데 돌연 1993년 가을 평양에서 ‘단군릉’이 발굴되었다면서, 고조선의 중심지는 평양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평양에서 발굴된 ‘단군릉’에서 나온 인골의 연대측정을 통해, 그 기년이 서기전 3011년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평양의 ‘단군릉’은 모줄임고임 천장의 석실무덤이고, 그 곳에서 출토된 금동관도 삼국시대의 것임을 볼 때, 이 무덤의 주인공 역시 고구려 때 사람으로 보인다. 아무튼 갑자기 기존의 설을 바꾸었으므로, 앞으로 고조선사와 단군에 대한 이해체계를 어떻게 새로이 내세울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렇듯 논란이 계속되는 것은, 이에 관한 문헌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그나마 남겨진 단편적인 기록이 매우 추상적이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대의 지명 중에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보통명사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 많다.
가령 고조선 중심지의 위치를 규명하는 논고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지명 중의 하나가 패수(浿水)이다. 그런데 역대의 사서에 등장했던 패수는 일찍이 정약용이 지적했듯이 여러 개였다.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백제 초기의 북쪽 경계인 패하(浿河)는 예성강이었으며, 고려시대에도 예성강의 일부가 패강(浿江)으로 불렸다. 고구려의 수도가 평양에 자리잡았던 시기의 패수는 대동강이었다. 또한 요동의 개현(蓋縣) 지역에 흐르는 어니하(於泥河)를 패수라 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패수라고 비정될 수 있는 강은 여러 개 상정된다.
이런 현상은 패수가 원래 고유명사였다기보다, 강을 만주어에서 ‘畢拉’, 솔론(索倫)어에서는 ‘必拉(벨라)’, 오로촌어에서는 ‘必牙拉(삐얄라)’라고 했던 예에서 알 수 있듯, 강을 뜻하는 고대 조선어의 보통명사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밖에 고대사회에서는 주민 이동에 따라 같은 지명이 여러 군데에서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문헌상에 보이는 지명의 위치 비정에 다양한 설들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실증상의 문제에 덧붙여 각 시대마다 고조선사에 대한 인식에 차이가 커 상반된 견해들이 제기되어 왔다. 이와 같이 논란이 분분한 고조선 중심지 위치를 비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적으로 보다 구체적인 자료가 전해지는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 또한 요하 유역으로 보는 설과 평양으로 보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선 실물 유적으로 남아 있는, 진·한대의 만리장성의 위치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요동의 양평(襄平)이라고 하였다.
이 때의 요동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도 이견이 분분해, 오늘날의 북경(北京) 북쪽에 흐르는 난하(灤河)가 당시의 요하이고 난하 동편이 바로 『사기』에서 전하는 요하(遼河)라는 주장이 재요령성설을 주장한 논자들에 의해 견지되어 오고 있다. 그래서 이 입장에서는 진·한대 장성의 동쪽 끝은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 부근의 갈석(碣石)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만리장성은 후대의 것으로, 진·한대의 장성은 지금의 장성보다 훨씬 북쪽에 있었다. 실제로 오늘날 요령성 서북부 지역 일대에서 진·한대 장성의 유적 일부가 뚜렷이 남아 있다.
구체적으로 요령성 지역의 장성의 유지는 두 개의 줄기를 이루며 동서로 길게 뻗쳐 있다. 북쪽 성벽의 유지는 화덕현(化德縣) 동쪽에서 영금하(英金河) 북안을 거쳐 부신현(阜新縣) 동쪽에 이르며, 남쪽 성벽은 객라심기(喀喇心旗)와 적봉(赤峰) 남부를 거쳐 북현(北縣)에 이른다.
능선을 따라 전개되는 긴 장성의 자취는 사진을 통해서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장성의 자취가 이어지는 군데군데에 요새가 존재했고, 그곳에서 연·진·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장성의 유지가 요하에 이른다면, 『사기』에서 전하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요동은 현재의 요동이며, 자연 요동군의 동쪽에 있었던 낙랑군은 서북한 지역에 자리잡았을 것이다. 이러한 면은 『수경주(水經注)』에 반영된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에 관한 고구려인의 증언과 그대로 부합된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북위 사람 역도원(酈道元)은 『수경(水經)』이라는 지리서에서 전하는 패수의 흐름에 관한 기사에 의문을 품고, 마침 그 무렵에 북위의 수도를 방문했던 고구려 외교사절에게 패수의 흐름에 대해 질문하였다. 이를 통해 얻은 지식에 의거해 그는 패수에 관한 기술을 『수경주』에 남겼다.
이에 의하면 고구려 수도는 패수의 북쪽에 있었으며, 그 곳에서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 조선현 자리를 지나 서쪽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당시의 패수는 대동강을 지칭하며, 그 무렵 고구려의 수도는 지금 평양시 동쪽의 대성산성 아래에 있는 안학궁터 일대였다.
이곳에서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오늘의 평양시를 지나게 되는데, 강의 남쪽 남평양 지역에 한대(漢代)의 중국계 유적과 유물이 집중적으로 존재한다.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는 이 곳이 분명하다.
낙랑군 조선현은 서기전 108년 한이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 중심부에 설치하였다. 낙랑군은 서기전 108년 이후 고구려에 의해 소멸되기까지 위치에 변동이 없었다. 조선현의 위치도 평양지역이었으므로, 자연 위만조선의 왕검성과 앞 시기의 고조선의 수도도 이곳 평양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고조선의 중심지는 시종 평양 일대였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문헌을 통한 고조선의 역사
여기에서 우선 문헌상으로 보이는 조선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자. 조선에 대해 언급한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가장 이른 기록은 『전국책』 연책(燕策)과 『사기』 소진전이다.
즉 연나라 문후(서기전 361∼서기전 333)에게 소진이 당시 연의 주변 상황을 말하면서, “연의 동쪽에는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 누번이 있으며.”라고 했다. 이를 통해 서기전 4세기 중반에는 조선이 연의 변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주요 세력으로 당시 북중국 지역의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위략(魏略)』의 조선에 대한 기사와 통한다. 또한 『위략』에서는 조선이 연과 각축을 벌이다가, 연의 소왕(昭王: 서기전 331∼279) 때에 진개(秦開)의 침공으로 서쪽 영토 ‘2,000리’를 상실했다고 하였다.
이에서 ‘2000리’는 논란을 안고 있는 문제이지만 『사기』 조선전에서도 고조선이 연에 영토를 상실당했다고 전하므로, 고조선은 이 무렵 서쪽 영토를 상실하고 연과 청천강을 경계로 마주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청천강 서쪽의 요동 지역은, 적어도 일부는 고조선의 영역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과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의 왕검성이었다는 점을 결부시키면, 서기전 4세기 이전의 고조선은 세력을 서쪽으로 뻗쳐 요동 지역을 세력하에 포괄하고 있었으며, 연과 각축을 벌였던 상당히 강한 세력이었다는 추론이 일단 가능해진다.
그런데 서북한 지역의 대표적인 청동기 유물은 에임부분(決入部)을 지닌 세형동검이다. 이 전형적인 세형동검의 상한은 서기전 3세기로 여기거나, 근래 이를 서기전 4세기 후반까지 올려보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전형적인 세형동검의 발생과정 및 초기 발생지에 대해서는 좀더 논의할 문제이지만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전형적인 세형동검의 분포상의 북한계가 서기전 3세기 초 이후 고조선과 연의 요동군과의 경계였던 청천강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서북한 지역에서의 세형동검 이전 단계의 주요 금속기 유물로는 비파형동검을 들 수 있는데, 출토된 수가 매우 적고 함께 출토된 유물 또한 빈약하다.
출토된 유물에서 보이는 이 두 가지 사실은 앞에서 가정해 본 추론과 부합되지 않는다. 서북한 지역에서 출토된 빈약한 비파형동검 문화단계의 금속기 유물로는, 서기전 4세기 이전 시기에 요동 지역에 세력을 뻗쳐 연과 각축을 벌였던 정치세력의 존재를 이 지역에서 상정하기 어렵다.
비단 유물의 양적인 면뿐만 아니라, 만약 고조선의 중심지가 평양이라면 요동 지역은 그 변방이므로, 적어도 몇몇 유물의 양식상,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인 서북한 지역의 것이 구식이고 그 영향을 받아 상대적으로 신식인 유물이 요동 지역에서 출토되는 것이 순리이다.
그런데 비파형동검 등 금속기 유물양식은 반대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전형적인 세형동검의 분포상의 북한계가 청천강이라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 동검을 특징적인 유물로 하는 금속기 문명을 영위했던 서북한 지역의 정치세력은 서기전 3세기 초 이후에 성립된 것이 된다. 평양에 중심지를 둔 고조선이 그것이다.
따라서 서기전 4세기 이전부터 존재했고, 요동 지역을 포괄했던 고조선은 중심지가 평양이 아니었던 것이 된다. 이에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일단 세형동검의 원류인 비파형동검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남만주 요령성 지역에 있었을 것이라고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요령성 일대의 비파형동검 문화의 상한은 서기전 10세기 전후 무렵으로 여겨지는데, 이 문화는 다시 요령성 내에서 지역별로 일정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비파형동검은 양식에 따라 공병식(銎柄式), 비수식(匕首式), 단경식(短莖式)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이 가운데 공병식과 비수식은 요동 지역에서는 출토되지 않았다.
토기 양식에서도 대체로 요하선을 경계로 미송리식 토기와 변형 미송리식 토기는 요하 이동지역에서 출토되고 있고, 삼족기(三足器)는 요서지역에서는 풍부하게 출토되나 요동지역에서는 소수만 확인된다.
무덤양식에서도 고인돌[支石墓]이 요동지역에서만 보고되고 있어 참고가 된다. 문헌상으로 볼 때도 앞에서 말했듯이 요동 지역은 고조선의 영역이었다. 한편 비파형동검 문화기 때에 요서 지역에서 활약했던 족속은 산융(山戎)과 동호(東胡)였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요하 이동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추정을 좀더 진전시켜 보면, 서기전 3세기 초 고조선과 연과의 첫 충돌 당시 연군의 진출선이었던 만번한(滿潘汗), 즉 오늘날의 해성현(海成縣) 서남쪽과 개현(蓋縣)을 잇는 일대 지역으로 비정해볼 수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이 요하 하류 동편에 중심지를 두었던 서기전 4세기 이전 시기의 고조선 사회의 성격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해 고조선 사회를 노예제사회로 규정하는 견해가 일각에서 견지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주요 논거의 하나로 삼고 있는 요동반도 남단 여대시(旅大市) 구역에 있는 강상묘(崗上墓)와 누상묘(樓上墓)의 성격에 대한 기본적인 해석에서조차 이견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어, 수긍하기 어렵다.
단지 심양시의 정가와자 구역에서 서기전 6∼5세기 무렵의 무덤떼가 발굴되어, 그 중 제6512호와 같이 비파형동검과 동경 등을 위시한 청동기와 가죽제품 및 구슬 등 부장품이 풍부하게 출토된 큰 무덤이 있는가 하면 같은 구역 내의 무덤 중 부장품이 거의 없는 작은 것들도 있어서, 당시 사회상의 일면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즉 사회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고, 정치적으로 우세한 집단이 성장해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고조선 사회의 구체적인 면모와, 정치체로서의 고조선의 성격과 구조 등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의 진전을 기다려 보아야 한다.
한편 서기전 4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고조선은 서쪽의 연과 대립하게 되었다. 연후(燕侯)가 ‘왕’이라고 칭하며 동으로 팽창할 기세를 보이자, 고조선의 군장(君長)도 왕이라고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양국간의 대립은 고조선측이 사절을 보내 외교적 절충을 벌여 일단 해소되었다. 그러나 이어 서기전 3세기 초 연의 국세가 강성해져, 남으로 제(齊)를 공략하고, 북으로 동호(東湖)를 정벌하고, 이어 고조선에 대한 침공을 해왔다. 양국간의 전쟁에서 고조선이 패배해 영토를 크게 상실하게 되었다. 이 때 고조선은 중심부를 요동에서 평양으로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에 중심지를 둔 뒤, 고조선은 성능이 개선된 세형동검과 청동창 등을 만들고 철제공구와 무기도 사용해 금속기문명을 진전시켰다. 그리고 이 시기 무덤과 출토 유물은 이전 시기 이래 한반도 서북부 지역의 팽이형토기 유적에서 보이던 매장 풍속의 전통이 강하게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중심지 이동 후 한반도 서북부 지역의 토착주민과 공고히 결합해 나갔음을 뜻한다.
이어 진(秦)이 서기전 221년 중국을 통일하고, 이어 만리장성을 쌓으며 요동에 세력을 뻗쳐 오자,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외교적으로 복속의 뜻을 표하면서 한편으로 자체의 방어에 주력하였다. 그에 따라 고조선은 진의 요동군과 청천강을 경계로 현상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 후 서기전 3세기 말 진이 망하자 내란상태에 빠진 중국을 한이 재통일하였다. 곧이어 한 조정과 지방 제후들 간에 분쟁이 벌어졌다. 그런 와중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북중국 방면에서 동으로 이주해 왔다.
이들은 주로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의 이른바 ‘진고공지(秦故空地)’에 정착했고, 이 지역은 고조선의 영역으로 귀속되었다. 1천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해 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고조선의 준왕(準王)은 위만에게 박사의 지위를 주면서 규(圭)를 내리고 ‘진고공지’ 지역에서 거주하면서 중국으로부터의 유이민을 통괄해 국경 방면을 진수하는 직임을 부여하였다.
그런데 위만은 차츰 유이민집단을 휘하에 결속시켜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다가 서기전 194년경 한이 조선으로 침공해 오니 수도를 방어해야겠다며, 군사를 끌고 올라와 정권을 탈취하였다. 일종의 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이 때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탈주해 그 곳에서 자리잡아 ‘한왕(韓王)’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새로운 위씨왕조는 유이민 집단과 토착 고조선인 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대외적으로는 한(漢)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유이민 집단과 함께 전래된 일부 중국문물을 수용해 군사력을 강화해 나갔다.
한편 한반도 남부 여러 소국 및 부족들과 한의 교역을 통제하면서 중계무역의 이득을 취하였다. 이렇게 해 강화된 힘을 바탕으로 인근의 임둔·진번 등의 집단을 복속시켰고, 압록강 이북에까지 세력을 뻗치는 등 신흥국가로서의 활기찬 모습을 나타냈다.
위씨왕조의 성격에 대해, 한인(漢人)의 정복왕조 또는 식민정권으로 보는 견해가 있어왔다. 한편 위만을 사정이 있어 연나라에서 살게 되었던 고조선계 사람으로 봄으로써, 위의 견해를 부정하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 문제에서 더욱 본질적인 면은 위씨왕조의 정치적 구조에 있다. 위씨왕조는 유이민과 토착민의 연합정권적인 모습을 보였다. 토착민 출신의 유력자들도 위씨왕조를 이끌어나가는 지배세력의 주요 부분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는 낙랑군에서 ‘호한초별(胡漢稍別)’, 즉 고조선인과 한인들을 차별하는 족속별 이중구조를 보인 것과 뚜렷이 차이가 난다.
그리고 위만이 패수(이 경우 압록강임)를 건너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옷을 입고 왔다는 사실은, 조선인의 입장에서 미래를 추구하겠다는 의지와 자세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집권 후 국호를 계속 조선이라 했던 것도 그러한 면을 나타낸다. 곧 위씨왕조의 성격은 이전 왕조의 계승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서기전 3세기 이래의 평양 지역의 토광묘문화의 성격이 위만조선 시기에도 이어진 것은 이와 부합하는 바이다.
한편 위씨왕조가 한창 성장해 나갈 무렵 서쪽으로부터 한 세력이 동진해 왔다. 한은 위만조선과 흉노와의 연결을 차단하고, 동북아 지역을 석권하고자 하였다. 그에 따라 양국간에는 긴장이 고조되어 갔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양국간의 외교적 절충이 실패하자, 서기전 109년 한은 5만의 육군과 7,000의 수군을 동원해 수륙 양면에 걸친 대규모 침공을 감행해 왔다.
한의 침공에 맞서 고조선인은 1년여에 걸쳐 치열하게 저항했으나, 마침내 서기전 108년 왕검성이 함락되었다. 이후 한은 고조선의 영역에 4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이 때 많은 수의 고조선인들이 남으로 내려갔고, 그들은 삼한사회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정치
고조선 후기와 위만조선 때에 박사(博士)·경(卿)·대부(大夫)·상(相)·대신·장군 등의 관직명이 보이고 있어, 구체적인 성격은 확실하지 않지만 당시 중앙통치 조직의 형성이 어느 정도 진전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관직을 차지하고 있던 이들 중에는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지닌 이들이 있었다. 한에 대한 외교정책에서 위만조선의 우거왕(右渠王)과 의견이 맞지 않자 휘하의 2,000여 호를 이끌고 남한지역으로 내려간 조선상 역계경(歷谿卿)과 같은 이들이 그러한 예이다.
한과의 전쟁중에 전선을 이탈해 왕검성이 함락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던 조선상 노인(路人), 니계상(尼谿相) 참(參), 상(相) 한도(韓陶[陰]) 등도 그러한 인물로 여겨진다. 상(相)은 일정한 세력집단의 대표로서 중앙정부에 참여했던 이들의 관명으로 여겨진다.
위에 열거한 인물들은 토착 고조선인들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들 집단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일정 범위에서 작용했겠지만, 각 집단은 내부적으로 자치적이었을 것이다. 역계경 등의 집단적인 이탈행위가 가능했던 것은 그러한 면을 말해준다.
중앙정부의 왕실도 기본적으로는 그러한 집단들 중에서 가장 큰 집단의 장이었다. 이러한 집단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토대는 당시 각 집단이 지니고 있던 공동체적 관계였다.
이런 측면은 삼국 초기의 부체제(部體制)하의 정치구조와 연결된다. 고구려의 경우, 왕실인 계루부는 5부 중의 하나였으며, 각 부는 대외적인 외교와 무역 및 군사 면에서는 왕실의 통제를 받았으나 내부적 일에서는 자치력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소로부가 ‘영성사직(靈星社稷)’과 ‘종묘(宗廟)’, 즉 농업신과 지역수호신 및 조상신에 대한 제사를 독자적으로 행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각 부는 제사·의례 공동체로서의 면모를 일정 정도 지니고 있었다. 그에 따라 제사와 의례의 주관자로서 각 부의 장은 제사장적 성격도 일면 지녔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가령 송양(松壤), 즉 소로부의 장인 ‘선인(仙人)’의 후예라고 칭한 데서 볼 수 있듯이, 신인(神人)의 후예임을 내세웠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중 가장 우세한 집단의 장인 왕은 권력의 정통성을 근저로 자신이 천신 또는 태양의 자손임을 내세웠다.
나아가 왕실의 조상신인 천신에 대한 제사에 휘하 각 집단의 장들을 참례시키고 자신이 주제자가 되어 의례를 거행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휘하 제 집단에 대한 통제와 통합력을 강화하였다. 고구려의 동맹제가 대표적인 예이며, 동맹제의 제의(祭儀)의 내용은 주몽신화와 밀접한 연관을 지닌 것이었다.
고조선에서도 유사한 면모를 상정할 수 있다. 고조선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의 요체는 하늘신의 아들과 웅녀의 결합에 의해 단군이 태어났고 조선이 세워져 왕위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고조선 왕실의 내력을 밝힌 일종의 ‘본풀이’라고 할 수 있다.
고조선왕의 정통성과 존엄성의 근저를 천손이라는 신성한 핏줄에서 찾아 강조함으로써, 당시 사회에서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였다. 단군신화는 왕의 즉위식이나 일 년 중 일정한 날에 거행하는 제의에서 그 시기 나름의 연희로 재연되었을 것이며, 그 제의에 고조선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자치체의 장들이 참여했을 것이다.
천손(天孫)임을 자부하는 왕이 집전하는 제의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왕의 권위에 순종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집단적인 제의를 통해 고조선인들간에 정서적인 일치감이 함양되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단군신화는 정치적 사회문화적 통합기능을 발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사회
한편 당시 고조선 사회는 이미 상당한 정도의 계급분화가 진전되고 있었다. 8조금법 가운데 현재까지 전해지는 3개 조에서, 노비제도의 존재와 사유재산에 대한 법적 보호조처 등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화려한 부장품들은 계급분화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시기의 사회구성은 일단 노비, 촌락의 일반민, 귀족으로 크게 대별해 볼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 일반 촌락 구성원이나 친족집단들 간에는 공동체적 유제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귀족은 노예와 토지, 재화 등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따로 지니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촌락 공동체를 대표하는 수장으로서의 면모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이 시기 노비는 상당수 존재했으나, 많은 수의 노비를 사역하는 대규모 노비경영은 발달하지 않았다. 노예제 경영이 발달된 사회에서 보이는, 상품화폐 경제의 진전, 도시의 발달 등의 면모는 확인되지 않는다.
순장은 많이 행해졌을 것으로 여겨지나, 일반적인 순장의 예로 미루어보아 순장된 이들은 죽은 이의 가내노예, 신하, 처첩 등이었다. 그러므로 고조선 사회에서 순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곧바로 노예제 사회의 징표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당시 고조선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산활동을 담당했던 이들은 촌락 공동체의 일반민이었다. 이들 각 촌락 공동체 구성원의 존재양태는 지역간의 불균등에 따른 차이가 상당했고, 고조선 국가구조 내에서의 정치적 위치에 따른 차이도 있었다. 그에 따라 현실적인 촌락 공동체 구성원의 경제적 상태와 피수탈 정도에서도 차이가 나타났다. 그러한 면모는 삼국 초기 사회로 이어졌다.
고조선사에 대한 연구는 아직 원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 걸음 진전된 이해를 얻기 위해서는 앞으로 남만주 요령성 지역의 고대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요구된다. 낙랑을 포함한 서북한 지역의 문화유적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 및 동북아 지역 각 집단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제 방면에서의 광범한 비교연구가 절실히 요망된다.
국립 중앙박물관 청동기/고조선실이 위치한
1층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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