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렇게 해병대전략연구소 세미나에 참석해 주신 전 해군참모총장 이성호 제독, 김영관 제독, 전 공군참모총장 장지량 장군 또 전직 여러 해병대 사령관들 감사합니다. 그리고 바쁜 시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리를 빛내주신 한국 해병대 후배 및 미 해병대, 그리고 내외 귀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먼저 요즘 우리나라 사정을 보면 밤잠을 자기 어려울 정도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이 워싱턴에 가서 잠깐 동안 미국 부시대통령을 만나고 온다는데 거기서 무엇이 논의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단히 불길한 예감이 솟구쳐 옵니다. 그 동안 우리나라가 말로는“한미동맹 이상 없다... 이상 없다...”하는데, 우리들이 그동안 보아온 여러 가지로 보아서 한미동맹은 이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결별 이전 단계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정도로 갈등이 많은 부부가 별거하고 있다가 이제는 이혼신고서에 서명만 남겨놓은 단계에 와 있는 것과 같이, 마치 그 정도로 한미동맹은 위기 국면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외무부 차관이 어느 모임에서 한미동맹이 이상 없는 것처럼 이야기해서 내가 나가서 좀 야단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위험한 국면이 지금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는데 우리가 다시 나라의 앞날을 생각해 봐야 되겠고, 또한 한국의 안보는 어떻게 될 것인가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이 시기에, 여러분이 국가 안보관련 세미나에서 같이 고민하기 위해 이렇게 많이 참석해 주셔서 다시 한번 더 감사 드립니다.
그럼 오늘 주제에 있는 바와 같이,“ 한미해병대, 연합 해병대의 앞으로 작전운용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이 있을 줄 알지만 그와 관련해서 몇 가지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저는 6.25 전쟁 때 전투에 참가해서 미국 해병대를 제일먼저 만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미국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를 이 시간에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950년 8월 6일 마산 진동리 낙동강 방어선 제일 서단에 한국 해병대가 미 육군 25사단의 작전 지휘를 받으면서 북한군 6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일진일퇴 상황에서, 정말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최선을 다해 방어선을 지키고 있을 때, 미 해병대 제1임시여단이 부산에 상륙해서 진동리까지 걸어서 들어왔습니다. 제가 처음 느꼈던 미 해병대에 대한 놀라움은 이루 다 형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미 육군과 같이 전투를 해오다가 미 해병대를 처음 만났는데, 나도 해병대였지만 미 해병대가 신기하고 관심도 많았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한국 해병대는 창설 된지 불과 1년밖에 안됐고, 해병대가 어떤 부대인지 전혀 관심도 없었고, 경험도 없었으며, 해병대에 대해 알려준 사람도 없어서, 단지 해군에 소속된 육군 부대로 생각해서 편성도 그렇게 했었습니다. 무기도 없어서 일본군이 쓰다가 버리고 간 99식 소총을 이용해서 훈련받고, 진동리까지 수 많은 전투에 임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미 해병대를 보니 그들 500명의 전투력은 육군의 500명과 전혀 달랐습니다. 육군의 500명은 그들이 갖고 있는 화력, 기동력이 전부지만, 미 해병대가 갖고 있는 전투력은 지상의 500명 외에 근접지원하는 전투기가 따라와서 하루종일 공중에 따라다닙니다. 해만 뜨면 공중으로 날아와서 해질 때까지 공중에 대기하고 있다가 진격하는 부대가 앞에 저항하는 적이 있어서 진격이 어렵다고 요구하기만 하면, 공중에 떠 있는 전투기가 바로 들어가서 때려줍니다. 네이팜, 로켓, 폭탄, 기관총 등 무지막지한 화력으로 지원하기 때문에 북한군들이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미 육군의 500명은 500명이지만 미 해병대의 500명은 1500명도 될 수 있고, 2000명도 될 수 있는 화력을 발휘해서 간단하게 적의 진지를 점령하고 진격해 나갑니다. 나는 이것을 보고 몹시 놀랐습니다. 이러한 미 해병대가 진동리에서 우리와 같이 싸우게 되었습니다.
우리 앞의 적은 인민군 6사단으로, 이 부대가 바로 중국 대륙에서 모택동의 군대에 소속되어 용맹성을 떨치던 한국인 부대로, 이들를 중국 국민당 장개석 군대를 대만으로 밀어냈던 주력부대로서 전투 경험이 우수한 부대입니다. 이들을 김일성이 한국전쟁 발발 3개월 전에 모택동에게서 돌려받아서 편성한 것이 인민군 6사단입니다. 김일성은 다른 사단들은 38도선에서 곧장 김천을 거쳐 대구로 진격시켰으나, 6사단은 충청도, 전라도, 광주, 여수, 목포, 진주 등 서남방을 우회해서 진동리까지 내려왔는데, 진동리에서 마산을 점령하고 밀양을 거쳐 부산에 들어가려고 6사단이라는 최강의 부대를 진동리에 투입했는데 미 해병대가 와서 분쇄했습니다. 이어서 미 해병대는 영산, 창녕 등지로 도하해 온 인민군을 격퇴시키고, 그 부대가 다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게 됩니다.
우리 해병대도 초대사령관 이셨던 신현준 사령관께서 제주도에서 주둔하고 있을 때 제주도 학도병 3000여 명을 모병하게 됩니다. 전쟁당시 타군은 절반 이상이 문맹자 인데 해병대는 제주도에서 학생들을 뽑다보니 타군과 학력차가 대단히 컸습니다. 그들 모두가 학교 선생이거나 고등학교 학생들로서, 해병 3기생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런 신병들을 데리고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게 되는데, 상륙 함선에 승선하는 그날까지 학도병들은 훈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학생복 입은 그대로이고, 또 그들을 지휘하는 장교들도 제대로 해병대 훈련을 받은 자들은 없고 해군에서 군함을 타던 해군 장교들이 해병대 중대장이고 소대장이다 보니 미 해병대들과 같이 도저히 작전을 수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미 해병대에서 오버레이(투명도)로 내려온 작전 명령을 받고 보니 군대부호가 나와 있는데 보병, 포병, 공병, 탱크 등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고, 또 부대 전투지경선도 모르는 등 작전명령을 보고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미 해병대는 오버레이(투명도) 명령서만 받으면 그것을 지도위에 올려놓고 어떻게 전투임무를 수행하는지 일목요연하게 아는데 우리 장교들은 전혀 몰랐습니다. 공격 할 때 공격개시시간이 몇 시라고 하면 그 시간에 공격을 개시해야 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공격시간이 지나서 왜 움직이지 않느냐고 물으면 대대장이 하는 말이“밥을 먹어야 가죠.”라면서 밥을 안 먹으면 작전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즉 명령 하달과 그 명령을 행동에 옮기는 것을 다른 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 해병대의 모든 장교들이 그런 상태이니 정말 한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 해병대는 그런 한국 해병대를 전방에 보내면 전사하고 피해를 많이 받는다고 자기들의 후방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켰습니다. 전투는 앞에서 자기네가 하고 한국 해병대에게는“아직어리니까... 엊그저께 들어온 너희가 뭐 알겠느냐? 후방에서 따라다니며 배워라.”고 해서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들은 우리 연대에도 고문단 약 70여명 이상을 보냈고, 대대본부에도 전투에 나가야 할 장교들을 고문으로 10여 명씩 보냈으며, 심지어 중대까지도 파견했습니다. 이들 미군에 의해 하나씩 하나씩 전장에서 배워서 조금씩 알게 되고, 이런 전투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해서 알게 되고 배우면서 전투경험을 쌓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서울 탈환작전을 마치고, 다음에는 북한지역으로 진격해서 싸우다가 1.4 후퇴 때 어쩔 수 없이 후퇴했다가 다시 중동부 전선으로 나가서 싸우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한국 해병대의 우수성이 발휘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몇 개월 되지 않은 그사이에 중동부 전선에 나가 싸울 때는 미 해병대와 조금도 다름이 없이 싸웠습니다. 당시 미 해병대가 말하기를“한국 해병대가 우리 옆에서 싸워주면 그 쪽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 안해도 된다. 마치 우리 미 해병대가 있는 것 같이 마음 든든하게 싸울 수 있다”고 할 정도로 그렇게 미 해병대가 한국 해병대를 신뢰했습니다. 그 단계까지 가는 기간이 불과 6개월로, 그 짧은 기간에 그렇게 수준이 올라가게 된 것이 우리는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이것은 미 해병대가 우리 한국 해병대를 마치 부모가 강보에 쌓인 아기를 젖 먹이고, 목욕시키고 하면서 키운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역사적으로 보면 미국은 다른 나라 해병대에 대해서는 그렇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한국 해병대에 대해서만 부모가 자식을 키우듯이 오늘날의 한국 해병대로 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우리 해병대는 그것을 잊지 마라. 절대 잊어서는 안 돼. 거기서부터 출발했던 한국 해병대다. 어찌되었던 운명적으로 그와 같이 되었으니 은혜를 잊지 말고 미 해병대와는 각별한 애정과 우정으로 대해야한다”고 하면서 오늘날까지 지내오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 해병대가 포항에 내려간 것도 미 해병대가 거기에 꼭 가야한다고 했었던 것입니다. 지금 미 해병대 주력은 오끼나와에 가있지만 포항이라는 지역은 상륙작전 하기에 아주 적합한 지역입니다. 넓은 해안이 있고, 한국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는 포항, 그래서 만약 한국에 전쟁이 발발하면 미해병대가 포항으로 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기는 어떤 북한군이 밀고 오더라도 해병대 1사단이 거기 있기 때문에 뺏기지 않습니다. 거기에 미 해병대가 한반도에 도착해서 한국에 대한 반격작전을시작하는 곳 입이다. 한국 해병대는 거기에서 훈련도 하고, 상륙작전 시 미 해병대 교두보 역할도 하고, 한미 연합 해병대가 되어서 전쟁 발발 시 북한으로 공격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포항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박정희 대통령 시절 최초 포항에 제철소를 만들겠다고 해서, 해병대가 사용하던 해안을 포항제철에 내주었기 때문에 포항제철이 생겼습니다. 그러던 중 2만 5천 톤의 철강을 생산하려고 했던 포항제철은 공장을 더 확장해야하는데 부지가 부족해서 해병대에게 영덕의 더 넓은 지역을 주겠다고 하면서 해병 1사단이 나가달라고 했으나, 전략적 이유 때문에 해병대가 안 된다고 해서 포항제철은 할 수 없이 제2공장을 광양에 설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한국 해병대의 전략적 중요성이 한국 안보에 절대적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귀한 시간, 미 해병대 슈크 대령의 발표도 있을 것이고, 전문가들의 토론도 있겠지만 아무쪼록 이 나라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다시는 유린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죽을힘을 다해서 떨쳐 보입시다. 우리가 죽을 고생을 하면 하늘도 도와 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면 하늘이 우리에게 감동해서 이 나라를 도와줄 것으로 믿습니다. 끝으로 다시 한 번 더 어려운 시간을 내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여러분의 경청에 감사드립니다.
2005년 5월 31일
해병대전략연구소
이사장 김성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