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센터 미학강좌로 서울 왔다가 시간이 남아서 잠시 청계광장에 들렀습니다. 명색이 미학강좌를 이끄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제 미감이 엉망인지, 아무리 봐도 정이 붙질 않는, 저 우뚝 선, 비례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울긋불긋한 고둥껍질 앞에서, TOMNTOMS라는 다국적 커피샾에 앉아서, 아마 제3세계의 척박한 삶을 살고 있는 농부들 손에 의해 재배된, 전혀 착하지 않는 냉커피(아이스아메리카노라고 해야 알아듣는)를 한 잔 앞에 두고, 또 다른 다국적기업이 만든, 손에 익은 빨간 노트북을 꺼냈습니다.
이만하면 주장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전형적인 언행불일치, 지행불일치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셈이지요?
지금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도 이럴 겁니다. 익힌대로, 생각한대로, 정당하다고 생각하는대로 살려면 늘 이런 불일치의 혼란에 빠질 겁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걱정을 하는 게지요. 남을 생각하면서, 남을 짓밟지 말고, 서로 손을 잡고 연대의 힘을 익히게 키우고 가르치는 것은 좋다만 그렇게 해서 나중에 아이들을 어떻게 세상에 적응시킬 거냐고.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위기에 접했을 때 어떤 기준으로 판단을 하고 그 위기에 대응하십니까?
그리고 지금이 위기라고 생각하십니까?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은 처음의 생각을 까맣게 잊고 그 순간의 유불리로 상황을 판단하더군요. 가치기준이 아닌, 어떤 것이 내게 유리하고 어떤 것이 내게 불리할 거냐는 상황판단. 사실 그건 기준이라 할 수도 없는, 일종의 본능 같은 것이겠지요? 그렇게 본다면 촛불은 정말 쓰잘데없는 짓거리일 뿐입니다.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닌걸요.
그렇습니다. 위기라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순간적으로나마 유불리로 상황을 판단합니다만 곧 그런 즉각 반응보다는 가치부터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 아니냐. 옳은 것이냐 아니냐는 가치기준입니다. 사람들이 동물과 다른 부분이 이것일 겁니다. 가치기준이 현상대응보다 우위에 있는 것. 이것이 역사를 만들고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들었지요.
그런데 왜 이렇게 세상은 어지러울까요?
청계광장 오는 길에 시청 옆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일군의 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이 혹서의 거리에서 무엇을 얻고자 모여 있는 것일까요? 아니,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짓인가요? 그렇다면 대체, 누가 저들로부터 그 무엇인가를 빼앗으려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대체, 왜 가진 것 없는 저들로부터 더 빼앗으려 하는 걸까요?
한때,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면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사람들이 꿈꾸었습니다. 성실한 노력이 아무런 소용없다는 것을 일제의 36년간, 그리고 전쟁, 그 이후의 야바위난장판을 통해 알게 되었고, 그것이 너무나 억울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이것저것 따질 틈도 없이 오로지 쌀밥에 고깃국을 향해 달렸더랬습니다. 성실하게만 일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 와중에 일제부역청산, 역사정비, 새로운 출발을 위한 정지작업은 스르르 사라져버렸습니다. 민주라는 단어의 원칙을 세우는 일도 마찬가지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위에 난데없이 한국형민주주의라는 요상한 용어가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가로 잘 먹고 잘 살게는 되었습니다만, 지금 우리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날, 역사청산위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역사 청산은 나라발전의 걸림돌이 된다는 허무맹랑한 요설이 오가고, 과거에 나쁜 짓을 한 자들의 후손은 그 덕에 잘 먹고 잘 살고 있고 나라와 백성과 자신을 위해 투쟁했던 이들의 자손은 쪽방에서, 일터에서 사회의 뒷골목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내몰림에 동조하고 앞장섰던 이들이 저들로부터 상을 받기는커녕 혹서의 거리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주먹을 울끈불끈 쥐고 있습니다. 배신당한 거지요. 그렇게 하면 난 혹시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 헛된 욕심에 헛짓거리를 한 탓이지요.
우리들은 지금, 역사청산이 뭐야, 그저 내 배 부른 게 제일이지! 라고 원칙을 걸레처럼 내팽개친 결과를 보고 있는 겁니다. 당장은 힘들더라도 원칙을 지켜서 일제 36년의 역사를 제대로 정리하고 다시 출발을 했더라면 지금 우리가 힘겨워하는 많은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자본을 쥔 자들은 역사와 민중이 겁이 나서 함부로 자본의 권력을 휘두르지 못했을 것이고, 그 수십년이 지난 지금, 비정규노동자란 이름의 현대판 노비는 탄생하지 않았겠지요. 짓밟으면 짓밟힌다는 것을 알게 해줬더라면 난곡 재개발 결과 원주민 재정착률 8.8%라는 기막힌 수치는 없었겠지요. 권력이 국민의 손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해줬더라면 물대포에 최루액을 섞겠다는 황당무계한 조치발표는 할 수가 없었겠지요.
이이제이란 말이 있습니다. 오랑캐의 힘으로 오랑캐를 무찌르는 것. 손안대고 코푸는 것. 권력과 자본이 가장 잘하는 짓입니다. 정규직으로 비정규직을 압박하고 박탈감과 무력감을 심어주는 것.
분리통치란 말이 있습니다. 서구제국주의자들이 식민통치를 위해 잘 써먹는 수법입니다. 일제가 36년간 조선을 지배하면서 써먹은 결과, 아직도 이 땅에는 그 당시에 권력의 부스러기를 움켜쥔 자들이 권력과 자본을 장악하고 이 땅의 민중을 코너로 내몰고 있습니다. 르완다에서는 벨기에의 분리통치 결과, 전 국민의 10%가 학살당하는 엄청난 비극을 치렀습니다. 자본은 일터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가르는 분리통치를 완료했습니다. 비정규직의 비통과 외침을 듣고 보면서 정규직들은 함께 공분하는 것이 아니라 저런 꼴이 안돼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자본에 밉보이지 않는 길을 찾고 있습니다. 이들 정규직들과 일제시대 조선인 순사는 뭐가 다를까요? 이것이 아이들에게 물려주고싶은 세상인가요?
이것이 다 우리가 원칙이 뭔지, 가치가 뭔지, 어떻게 해야 제대로 사는 건지를 외면한 결과입니다. 그렇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만들어진 겁니다.
이런 세상에 우리의 소중한 아이를 적응시키고 싶으십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 아이가 어떤 인간이 되는 상관없이, 제 배 부르고 제 몸뚱아리 건사하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십니까? 그래서 아이의 세상 적응을 염려하고 계시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까?
정말 아이의 미래가 염려되신다면, 그래서 내 삶을 바쳐서라도 아이의 미래를 만들어주고 싶으시다면, 정말 그런 각오가 있으시다면, 난곡원주민을 다 쫒아내고 시세차익을 노리고 아파트 청약을 할 게 아니라, 이웃을 비정규직으로 내몰면서 주식, 펀드투기를 할 게 아니라, 이웃의 아이를 벼랑 끝으로 내몰면서 사교육 시장판에 수십조원의 돈을 퍼부을 것이 아니라 원칙을 세우십시오. 어떻게 해야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인지의 원칙을 세우고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십시오. 그 다음에, 내 아이의 세상적응을 생각하십시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놓고 아이를 그 세상에 적응시키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것이 부모가 할 일입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이렇게 원칙이 섰다면, 그 원칙대로 살면 됩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면 됩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사는 게 힘들다면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라도 함께 모여서 작은 평화와 아름다운 가치를 만들면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험한 세상 다 떠나서 너희들끼리만 잘 살려고 하는 것이냐, 그렇게 도망치면서 떳떳하냐, 비겁하다. 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합니다. 참으로 생각이 짧습니다. 이것은 우리끼리 아름다운 섬을 만드는 행위가 아닙니다. 섬을 만들면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게 되고, 이 고립의 약한 고리를 끊기 위해 자본은 작업을 시작합니다. 절대로 섬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연대가 필요합니다.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것이 지금 세상의 법칙이라면 양화가 악화를 소멸시키는 것도 법칙이 될 수 있습니다. 공동체만 만들면 섬이 됩니다. 공동체란 섬과 섬을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다리를 만들면 섬은 고립이 아니라 연대의 그물로 들어갑니다. 공동체와 연대. 이것이 21세기의 세상을 살아가는 화두가 된다고 모든 이들이 말하는, 코뮨의 가치이고 역할입니다. 이 양화가 악화를 몰아낼 것입니다. 세상이 거꾸로만 가는 거라면 그런 세상, 뭣하러 살아요. 세상은 절대 거꾸로만 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제정신만 차린다면요. 어쩌면 제정신 차리라고 세상이 짐짓 거꾸로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렵다구요? 쉽지 않다구요? 그러면, 아파트 투기로, 주식투기로 돈 만들어서 아이들을 위해 사교육 시장에 쑤셔 박는 것은 쉬우신가요? 땀 흘려서 번 돈이 아닌 검은 돈을 뒷주머니에 슬쩍 꽂아 넣는 것은 쉬운가요? 그러면서도 가책 없이 잘 견뎌지시던가요? 이웃의 어려움은 안중에도 없이 나 혼자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농촌으로 산골로 슬쩍 스며드는 것은 쉬우신가요? 쉽지 않을 겁니다.
다시 원칙을 생각하십시오. 어떤 세상을 내 아이에게 물려주어야하는가. 이것이 원칙입니다. 원칙이 있다면, 그 다음에 해야 하는 것은 행동입니다. 그 다음에, 그렇게 만든 세상에 아이들이 적응하자면 아이들이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그것을 실행하십시오.
다시 한 번 되풀이해서 말씀드립니다만, 이것이 원칙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신다면, 지금 당장 한 발을 떼십시오. 그래야 우리의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아름다운 세상에서 아름다운 꿈을 꾸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아름다운 청년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굼뜨게, 혹은 망설이면서, 혹은 차마 욕심을 버릴 수가 없어 미적거리는 동안 아이들은 자라고, 어른이 되고, 저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서 무한소멸의 게임장에서 죽음의 게임을 하게 될 겁니다. 재수 좋게 살아남으면 다른 이들의 삶을 짓밟다가 자신도 짓밟혀서 사라지는 삶을 살게 되겠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유리 너머 청계광장에는 데이트 나온 연인들의 사진찍기와 엄마 손을 잡고 나들이 나온 아이들의 까르르 웃음과 시원한 차림새의 여인네들, 이 더위에도 불구하고 넥타이로 목을 졸라 맨 남자들, 무표정한 순찰행군을 하고 있는 전의경들, 광화문대로 쪽을 막고 있는 닭장차가 함께 만드는 초현실 풍경 위로 8월의 태양이 화살을 내리 꽂고 있답니다. 이 풍경 속에서 2008년의 시간은 흘러가겠지요.
2018년의 풍경은 어떨까요? 2018년의 풍경은 누가 만들까요? 여러분들인가요? 아니면 지금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일까요? 다행히도, 그 선택권은 여러분들 손에 있습니다.
쉬워 보이지만 실상은 어려운 것. 어려워 보이지만 실상은 쉬운 것.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긴 호흡으로 세상을, 시간을 엮어나가시길 바랍니다.
출처 에듀코빌리지 홈페이지 http://educovillage.com/
첫댓글 오? 미학강사세요?
건축가입니다^^ 영주에서 생태마을을 만들고 있는데, 삼청동에 문화게릴라집단서식처를 만든 것이 서울센터구요, 거기서 매주 미학을 도구 삼아 세상보기 강좌를 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