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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듯이 붉은 사랑을 하고 싶다. 내 심장을 잃어도 좋을 만큼 충분한 사랑을.
그리고 어느 날 그런 사랑이 나에게 왔다.
청명고등학교 3학년 11반 이산해. 올해로 만 열여덟. 이제 수능을 앞둔 나이로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나를 제외한 모두가).
중학교 때부터 이어온 술과 담배는 나에겐 끊을 수 없는 벗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들과 친구를 맺는 시간은 오로지 나 홀로일 때 뿐.
누군가와 함께 있다면 난 철저히 위장을 한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나의 그런 거짓됨이 필요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생겼다. 어느 날 문득, 바람처럼 나에게로 왔다.
“산해야! 이거 좀 먹어 봐.”
“고맙습니다.”
“응. 다 먹고 그릇은 나중에 줘도 돼.”
우리 옆집에 사는 여자. 깍듯이 존댓말 써줘야 좋아하고, 주는 음식 거절 안해야 기뻐하는 여자.
이미 결혼은 했지만 또한 이미 이혼도 했다.
“오빠, 오빠네 학교 안 좋아? 자꾸 애들이 막 구리대! 시설 좋지?”
“훗- 누가 그런 소리해? 우리 학교 좋아. 왜, 오게?”
“몰라. 그래도 이 근처에선 신설이니까. 3년 뒤까지 새로 안생기면!”
그리고 옆집 그 여자의 딸. 이제 막 중1이 된 열네 살짜리다.
내가 사랑하는.. 아니, 그냥 단순한 호기심일지도 모르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여자의 딸.
별로 문제될 건 없다고 본다. 난 그냥 그 여자를 그 여자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니까.
그리고 또한 그것이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하나가 되기 전에 사그라들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여자다. 그 사람은.
“잘 먹었어요. 여기요, 그릇.”
“응, 그래. 맛있었으면 다음에 또 해줄게. 혼자서는 먹을 것도 잘 챙겨먹지 않지?”
“괜찮아요.”
“괜찮긴.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 좋다는 말 몰라? 우리 푸름이하고 잘 지내줘서 고맙지,
시간도 없는데 푸름이가 이것저것 물어봐도 싫은 소리 하나 안 하고 설명해주잖아. 고마워서 그래.”
이 사람에게 난, 그저 옆집 아는 학생. 그 정도다. 더 보태자면, 자기 딸과 잘 지내는 오빠 동생사이.
이 사람에게 난, 그 아상도 이하도 아니다. 단지 그 뿐이다..
그 뿐인 줄 알았다.
후-
뿌연 담배연기를 가을바람 속으로 날리면 어김없이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다.
“또 피워?”
돌아보면 역시나 예상대로, 옆집 그 여자.
걸어오더니 내 옆에 앉는다. 그리곤 자기 주머니에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문다. 익숙한 라이터 사용.
아마 이 여자도 한두 번은 아닐 거라고 나 혼자 생각한다.
“좀 줄이지 그래? 나중엔 진짜 후회해.”
“자기도 피면서..”
“그러니까, 내가 아직까지 이걸 못 끊고 이러는 게 아마도.. 네 나이 때부터 펴서?”
“그보다 더 빨리 아니구요?”
“얘가!”
존칭을 쓰다 이럴 때, 나란히 앉아 똑같은 걸 하고 있을 때. 이 사람과 내 나이 차이를 잊어버릴 때,
우리의 경계는 무너져 내린다.
“고마워, 그래도.”
갑자기 고맙다는 말을 하는 여자.
“그래도 우리 푸름이 앞에선 피고 싶어도 참아줘서. 푸름이, 아마 너 담배 피는 거 알면 난리를 칠 걸.
걔, 내가 피는 것도 너무 싫어해서. 끊어야 되는데.. 어렵다..”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잖아요. 푸름이 앞에선 절대 안 피면서 대신 나와서 피잖아요.”
“하긴, 그렇네. 나 좋은 엄만가?”
가을 하늘은 맑다. 꼭 소박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이 사람과 같이. 소박하지만, 뭔가 깊다.
“훅-”
“학생!”
담벼락에 기대 앉아 담배 한 대를 여유롭게 필 때였다. 아마도 올해 봄의 시작. 막 신입생 환영회를 끝마친 때가 아닌가 싶다.
“학생이 무슨 담배를 피워요? 얼른 끄지 못해요?”
지그시 한 번 잔소리 쟁이 아줌마를 올려다봤다. 그리곤 다시 담배를 피웠다.
“이 학생이! 부모님 연락처 뭐예요? 어디 이 동네에서!”
“없어요.”
“뭐라구요?”
“없다고.”
“에?”
잠시 동안의 침묵이었다. 그 말을 진짜로 믿는 것인지. 바보 같았다. 나이 많이 먹었다고 별 거 아니구나 했다.
“학생이, 이산해 맞아요?”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을까.
“난 며칠 전에 302호로 이사 왔어요. 그리고 학생 얘기는 101호 아주머니한테 들었구요. 부모님, 두 분 다 안계시다고.
잘 챙겨주라고. 맞죠..?”
뭐라고 대답할까 잠시 고민했다. 아까 그건 그냥 거짓말이었다고? 아니면, 그게 뭔 상관인데 참견이냐고?
“....”
“음, 그러니까. 악의는 없고 단지 아들 같아서.. 교복입고 여기서 이러다가 학교에 연락이라도 가면 징계 받을까봐.
사실, 우리 딸이랑 별로 나이 차이도 안 나고. 그냥 편하게 나를 엄마처럼? 아니면 이모처럼 생각해요.”
“이모? 엄마? 그딴 거 없이도 잘 살았으니까 신경 꺼요.”
담배를 지져 끄고 일어나 지나쳐갔다.
“저기, 미안해요! 피워도 되고 안 되고, 그런 걸 내가 말할 자격은 없는데. 하지만, 담배는 몸에 안 좋잖아요.
그러니까 조금 줄이면 어때요? 나도 우리 딸 때문에 조금씩 줄이려고 하는데 같이하면 어때요?”
잠깐 멈춰 섰다, 무시하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늘 한결같아서 좋다. 지금처럼 웃는 모습도, 때로는 화내는 모습도.
“담배.. 끊을 생각 없어요?”
“응?”
“없냐구요.”
곤란한 듯 하늘을 한 번 보더니 머리를 쓸어 올리곤 다시 나를 본다.
“아예 끊는 건 너무 고달픈데. 근데 그건 왜?”
“그쪽이 끊는다면, 나도 한 번 그래 보려구요.”
“진짜? 진심이야?”
놀란 듯 몇 번이나 되묻는다.
“싫음 말구요.”
“아니, 싫은 게 아니라. 아무래도 난 너보다 훨씬 오랫동안 피웠으니까 불리하지. 시간을 좀 줘. 응?”
“에이, 안 되는데..”
“이산해!”
담배를 저 멀리 물 고인 웅덩이에 던지고 일어나면 이 여자도 나를 따라 일어선다.
“오늘 저녁 먹으러 올래?”
“아니오.”
항상 이런 식이다. 이 여자가 마음 내키는 대로, 저녁 식사에 초대를 하고. 그러면 난 언제나 아니오,란 대답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지 말고, 오늘만. 맛있는 거 많이 해놓고 기다릴 테니까 8시 반에 별이 학원 끝나는 거 기다려줬다가 같이 와.”
“결국 목적은 딴 데 있으면서, 착한 척 하지 마요.”
“착한 척? 착한 엄마인 척이야. 이따 봐!”
이 여자에게 첫 번째는 그녀의 딸에게 있었고. 두 번째도, 세 번째도 그녀의 딸의 존재, 그 자체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의 딸과 연관된 한 사람일 뿐이며, 그 사람 자신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왜인지. 그것 또한 기분이 좋다. 그녀의 소중한 딸을 부탁하는.
그로인해, 나 역시 그 여자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이 된 거 같다.
“오빠! 오빠가 왜 나왔어?”
“너 데리러.”
“나?”
열네 살. 뭐가 그리 즐거운지 모를 나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그것은 이 아이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웃음만 가득한 열네 살이었다면. 하지만 그것은 아로 인해 깨어졌다. 열네 살, 난 최고의 슬픔을 맛보았다.
부모님의 죽음. 그 앞에서 한 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던 나. 그래서 때때로 이 아이가 부럽다.
이 아이의 평범하지만 특별한 행복이 부럽다.
“엄마가 또 시켰지?”
“어.”
“엄만 맨날 그래. 귀찮지 않아? 안 나와도 되는데.”
“풉”
그냥 살짝 웃어줬다.
“왜 웃어!”
나를 올려다보며 왜 웃느냐고 묻는 아이. 그 모습이 귀엽다. 동생삼고 싶다고나 할까.
“뭐가 안 나와도 되는데야. 혼자서는 무서워서 오지도 못하는 게.”
“아니거든!”
짧은 다리로 나를 따라오는 모습이 귀여웠다.
“푸름아! 푸름아!”
창문으로 밖을 내려다보니, 옆집 여자와 그녀의 딸. 무언가 큰 일이 일어난 듯 보였다.
분명 그녀의 딸은 울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딸을 쫓아가는 그 여자 또한 울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물었었다. 무슨 일 있느냐고.
“아무 일도.”
하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여자. 놀라고 말았다.
“이혼했어.”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서 있었다.
“나, 우리 푸름이한테 상처를 준 거야.”
그러면서 내 어깨에 기대어 울었다. 거기에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었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난 받아주고만 있었다.
이 어깨라도 빌려줘야 할 거 같아서..
“그쪽 잘못이 아니잖아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작은 위로 뿐. 그 이상은 내가 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당장 그 여자를 껴안아 줄 수도 없었고, 더 이상의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나조차도 나약한 인간이었기에. 아마 그때쯤이었을 거다. 그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버릇이 생긴 것이.
그로부터 5개월이나 흘렀다.
“나? 나, 서른하나.”
“서른하나라구요?”
“응. 근데 그건 왜?”
“그럼, 애를 도대체 몇 살에 난 거예요?”
열네 살짜리 딸이 있는 여자가 서른하나라고 했다.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숫자 아닌가.
내가 그렇게 놀라서 되물었음에도 그 여자는 뭐가 그리 태연한지 느긋하게 대답했다.
“열일곱에?”
“진짜요?”
“하하. 뭐야, 왜 그런 얼굴이야!”
거기다 대고 아무 말도 못했다. 내가 너무 순진했나, 아무리 그래도 열일곱에 애를 낳았다는 말을 믿는 내가 바보였나.
그치만 그 여자의 얼굴은 사실을 말하는 듯 한 얼굴이었다.
나중에야 들었지만 친 딸은 아니라고 했다. 전남편의 자식이고, 그럼에도 이혼하면서 남편과 그의 전부인 사이의 아이를
기꺼이 자신이 키우기로 했다는 것이다.
“왜? 그럼 안 돼?”
여자는 오히려 나에게 되물었다.
“솔직히 이해가 안 돼요.”
“이해하려고 안 해도 돼. 어쨌거나 푸름이는 내 딸이야.”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가버린 그 여자. 나만 그 자리에 한참을 남아 있었다.
“산해, 학교 가? 오늘 몇 시쯤에 와?”
아침 일찍, 등교하려 집을 나섰을 때다.
“바로와도 11시는 넘을 거예요.”
“그래? 그러면 끝나면 전화 좀 해줘. 너 공부 방해하는 건 알지만, 내가 가르쳐주고 싶어도 오랫동안 안 쓰던 머리가 어디 갈까나 몰라.
수학책 보는데 토 나오겠더라. 푸름이 좀 가르쳐줘.”
말하면서도 조금 미안해진걸까, 겸연쩍은 웃음을 보이는 여자.
“너무 밑지는 장산가? 그럼, 과외 아르바이트 할래?”
“아르바이트요?”
“응.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푸름이 수학 봐주고 한 달에 30만원이면. 어때? 꽤 괜찮지?”
딱히 시원한 대답을 주진 못했다. 아무리 공부에 신경 쓰지 않는 나라고 해도, 앞으로 수능까지는 두 달 하고도 조금 남짓.
막상 대학을 가더라도 상상 못할 등록금 때문에 학교를 다닐 수 있을 진 모르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아예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조금 생각해 볼게요.”
“그래, 그럼. 미안, 늦었지? 얼른 가봐.”
어쩐지 조금 실망한 표정을 하는 여자.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부탁하는 주제에 저렇게 대놓고 자기 감정에 충실하면
어쩌자는 건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시간을 보니 학교까지 빠듯할 것 같아 서둘러야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엔 계속 그 여자만 떠올랐다.
교실의 칠판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앞에서 수업하는 선생도, 엎어져 자고 있는 놈들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로지 나 혼자만의 세계에라도 갇힌 듯, 공상에 빠져든다. 몽롱한 담배 연기와, 그것들과 함께하는 그 여자의 웃음.
담배는 나쁜 것이라 말하지만, 그렇다고 끊을 용기는 나지 않는다는 그 여자. 그런 모습이 좋다.
인조인간 같지 않고 진짜 사람 같아서 믿음이 간다.
중고등학교를 모두 친척들 도움 아래 다녔던 나라도, 어마어마한 대학 등록금까지 거기에 기댈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돈을 마련할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란 놈이, 장학금 받아가며 대학을 다닐 일은 아마도 없을테고.
난감한 상황이다.
딱히 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목표나 의지가 있은 것은 더더욱 아닌데, 맹목적으로 대학에 가야한다는 필요성도 못 느낄뿐더러,
가봤자 인생을 낭비하는 식으로 살아가진 않을까 망설여진다.
그러나 문제는 꼭 대학을 가지 않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할 수 없다는 거다.
“이 문제 한 번 풀어봐.”
내 말에 문제 푸는 척 몇 번 끄적이더니 이내
“오빠 좀만 쉬었다 하자. 엄마한테 먹을 것 좀 달라고 할게.”
아무래도 열네 살은 열네 살인가보다. 금방 실증내고 지루해하는 나이.
“김푸름! 산해 시간 없어. 얼른하고 끝내야지 뭐하는 거야?”
“됐어요. 나도 막 지루하려던 참이었으니까.”
막 화를 내다 멈칫하는 여자.
“지루하려던 참?”
되묻더니 웃는 여자. 그러더니 넌 너무 배려가 많아, 지루하면 했지 하려던 참은 뭐야, 하고 묻는다.
“할래요?”
“응? 뭘?”
“지난번에 말했던 거요. 과외.”
“진짜? 잠깐만.”
무슨 얘기를 하려는 지, 귀에 대고 속삭이는데
“그럼 나 담배 끊어볼게. 너랑 나랑 같이 하는 거다?”
푸하하 크게 웃은 이 여자 앞에선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잘해낼 자신은 없다.
담배. 근 5년간 나의 벗이었기 때문에 단번에 끊는다는 것은 어쩐지 조금 무섭달까.
“표정이 왜 그래?”
“자신이 없어서요.”
“괜찮아, 나도 자신 같은 거 없어. 응?”
내 어깨를 토닥이는 여자.
“뭔데 뭔데? 나도 말해 줘!”
“됐어, 공부나 해.”
“엄마!”
언제나 시끄러운 집이다. 식구는 단 둘 뿐이지만, 이 집엔 항상 생기가 넘쳐흐른다.
우리 집에선 미처 느끼지 못했던 특별한 게 여기엔 있다.
떨어지는 빗물에 담배 연기가 묻혀버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우울해진다.
이유엔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그런 날이면 평소와는 다르게 담배 맛이 아주 비리다는 거.
두 번째, 비린 맛이 나는 데에는 빗길에 차가 미끄러져 목숨을 잃은 두 사람, 사랑했던 나의 부모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마음을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여자가 있다.
언제나 그렇듯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서.
“가장 힘든 날 끊을 수 있는 담배가 가장 성공한 거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만 골라하는 이 여자. 못 알아듣겠다는 얼굴로 쳐다보면
“이런 날, 우리가 담배 안 피면 어떻겠냐구. 저번에 네가 말했던 거처럼. 끊어보자구 어떻게 되나.”
“후- 아마도 오늘은 어려울 거 같은데요.”
“아니야, 자.”
하며 먼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때 지져버리는데.
“너도 해.”
나도 가만있을 순 없었다. 나도 똑같이 담배를 지져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도 나를 따라 오면서 내게 어깨동무를 한다.
키도 작으면서 까치발을 든 거 다 안다.
“해냈다!”
크게 웃으며 소리치는 이 여자. 약간 미친 거 같은데도, 입 같은 거 가리고 웃지 않는 모습이 너무 좋다.
“그쪽이 좋아요.”
“응? 나도 너 좋아해!”
“그게 아니고, 그쪽을 여자로서 좋아한다구요.”
그런가. 역시 내 말에 대답이 없다. 내 어깨에 두르고 있던 어깨동무도 슬며시 내려놓는다.
“그렇다고 달라질 거 없어요,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거니까 다른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언제나 이 여자가 나를 위로했는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엄마!”
뒤를 돌아보니 여자의 딸이 서있었다. 내 얘기를 모두 듣고 있었던 건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푸름아, 오해하지 마. 아무것도 아니니까..”
여자는 딸을 달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 사이, 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딸과 비교하면 한참 밑에 서있는 나. 그런 사람이었다. 그뿐인 줄 알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왜 남의 자식을 키워요, 다시 결혼해서 애기 낳고 그렇게 살면 되잖아요.”
“산해야.. 나 불임이랬어.”
“....”
“그게 어떤 건 줄 아니? 텅 빈 느낌이 들어. 그런데 말야, 푸름이는 내 텅 빈 가슴을 채워줘.
나한테 푸름이는 하늘이 준 사람일 거야. 봐, 나랑 푸름이는 이렇게 서로를 필요로 하잖아.”
“아..”
“왜, 나 멋지지 않아? 방금 명언이었어. 크.!”
“풉! 하하.”
“왜 웃어!”
맑은 하늘만큼이나 맑은 웃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다소 무거운 얘기였지만 그 여자와 함께라 즐겁기 때문에.
그 여자는 그런 힘이 있다, 나를 즐겁게 해주는 힘.
학교. 청명고 3-11. 그 팻말 안에 내가 잇다. 학교를 졸업하기까지는 아직 몇 달. 그 동안은 난 이 안에 있을 것이다.
수업시간이지만 거의 모든 과목이 자습으로 대체 된 상황이다. 난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수능은 일단 치르기로 했다. 점수는 아마 형편없이 나올 것이다. 지방 전문대라도 들어는 가야겠지.
그리고 그 다음은 그 이후에 고민하기로 했다. 지금은 현재에 만족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오빠 우리 엄마 좋아해?”
“어?”
“저번에 좋아한다며.”
앞에는 영어 책을 펴놓고 지문을 읽고 해석해보라고 시켰건만 들리는 건, 꼬부랑 영어 소리가 아닌 전혀 다른 소리.
“말해봐.”
다그치는 아이.
“너 들었으면서 왜 묻는데?”
“그거 진심이야?”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열네 살짜리 앞에서 사랑을 고백한다는 게 웃기고 쑥스럽기도 하지만.. 그냥 솔직해지자고 생각했다.
“그럼 내가 허락해 줄게. 오빤 우리 엄마 좋아해 돼.”
“...?”
“오빠도 알지? 엄마가 내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건. 그리고 엄마는 아직 많이 젊잖아, 예쁘고.
내 엄마로만 살게 하는 건 공평하지 못해. 그렇지?”
겨우 열네 살짜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열네 살짜리 작은 꼬마 입에서 나온 말은 상상 이상이었다.
나의 열네 살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달랐다.
“오빠는, 합격이야!”
“웃겨.”
“뭐가?”
“너한테 허락 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당연히 내 허락이 있어야 되는 거 아냐? 오빠 안 되겠다!”
내 말에 펄쩍 뛰는 이 애.
“알았어.”
알았다는 말로 일단 진정시켰다. 막 웃음이 났다.
“자, 공부하자!”
가을의 끄트머리. 이 근처 중학교 대부분이 이미 2학기 중간고사를 끝마친 때다.
“엄마! 오빠! 이거 봐라, 나 잘했지?”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얘기를 나누던 나와 이 여자에게 다가와서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성적표를 내민다.
정말 신기한 건 수학이 100점이라는 거다.
“진짜 엄청 올랐다! 잘했어, 산해야. 너무 고마워!”
성적이 오른 자기 딸을 칭찬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칭찬해주는 여자. 다소 엉뚱한 면이 있는 사람이니까.
“엄마는! 시험은 내가 봤는데 왜 오빠한테만 잘했대?”
“그래, 푸름이도 너무너무 잘했어!”
“치.. 기념 사직 찍어, 미니홈피에 올려야지.”
웃기게도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손에는 푸름이의 성적표를 들고서 사진을 찍었다.
플래쉬가 터지고 찍은 사진들을 확인하는데 난 웃다가 쓰러지는 줄 알았다. 푸름이의 미니홈피에는 이상한 사진이 올라갔다.
나와 이 여자가 나란히 앉아있고 우리 둘 사이에 머리를 삐죽 내민 푸름이가 우리가 들고 있는 성적표를 가리키는 사진이.
표정은 모두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져 나올 거 같은데 간신히 참는 얼굴이었다. 몰랐지만, 이제야 알겠다.
이 둘은 누가 봐도 모녀사이라는 것을.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에.
“무슨 생각해?”
그 여자다.
“아무 생각도요.”
“에이. 거짓말 한다.”
“날씨가 참 좋아요, 그 생각이요.”
내 머리를 헝크러뜨리며 웃는 여자.
“나도야, 동지다. 히히.”
이 여자의 웃는 얼굴은 정말 예쁘다. 진실이 담겨있는 듯 한 웃음.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어’라고 말하는 듯 한 웃음.
“웃는 얼굴이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응?”
“그래서 내가 좋아하나봐요.”
“하하..”
자리에서 일어나 그 여자의 얼굴을 똑바로 봤다. 의외로 높은 눈높이. 지금까지 난 이 여잘 너무 작게만 봐왔었나보다.
눈을 정확히 마주치고. 동공의 까만 그림자가 보인다. 검지만 탁하지 않다, 맑다.
“마음대로 해, 그럼.”
먼저 말을 꺼내는 여자.
“날 좋아하건 말건, 그건 네가 결정하는 거니 내가 하는 건 아니니까. 근데 그 선까지야, 알지?
생각해봐, 네가 우리 푸름이 아빠가 된다는 건 어쩐지 말이 안 되잖아!”
듣고 보니 그랬다. 내가 아무리 이 여자를 좋아한다고 해도, 엄마로서의 이 여자를 받아들이기에는 내가 아직 너무 어리다.
나는 크게 상관없지만, 보는 눈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마음을 머리로 움직인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아니까. 강요하지 않아, 산해야. 나를 좋아해줘서 고마워.”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동자였다. 무슨 말을 꺼내야할까 잠시 망설여졌다.
“고마운 건 내쪽 이예요.”
멋쩍게 웃어넘기며,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두 개피를 피다 만)과 라이터를 꺼냈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 그것들을 던져버렸다. 라이터가 깨진 것이 보인다.
“뭐하는 거야?”
뿌연 담배 연기에 가려 어느 것이 구름인지, 담배 연기인지 구분조차 자기 않았던 지난날들과는 사뭇 다른 날임이 틀림없다.
이제 더 이상 담배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담배가 없이도 충분히 숨 쉴 수 있으니까 말이다.
“끊는다고 했잖아요.”
“하하.. 이산해, 넌 정말..”
이 여자의 웃음이 좋다.
그뿐인 줄 알았지만 그 ‘이상’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제가 쓴 소설 중에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보시는 분들도 좋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댓글주세요~
이 소설을 쓰고 산해 주변의 얘기를 확장시킨 장편을 쓰고 연재도 하려다가 그만뒀어요.
그래서 장편방에서 이 제목 보신분도 있으실 수도 있겠네요.
첫댓글 ㅋㅋㅋ우왕 잼있어요 ㅋㅋ둘이 잘된건가?
잘됐다기보다 둘 한테는 미래가 있을 수도 있는 거죠. 암튼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