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항미원조 서사의 부침과 뒤늦은 귀환
제1장 ‘의도된 망각’에서는 먼저 근래 10여년 사이에 급변한 중국 내 여론을 짚는다. 2020년 BTS의 ‘밴플리트상’ 수상소감에 중국 네티즌이 강력한 반감을 보인 사건은 그 몇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60년대 본격화된 중국과 소련의 갈등으로 시작된 미국과 중국의 화해와 수교는 상호 경제성장으로 이어지는 경제적 밀월관계로 발전했다. 2000년을 전후한 기간에 양국의 밀월관계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 시기 중국 공산당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될 만한 행동에 매우 신중했고 항미원조전쟁 기념 규모와 공적 언급은 점차 축소되었다. 그러나 미국 오바마정부의 ‘아시아 회귀’ 정책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을 겨냥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BTS의 밴플리트상 수상 당시에도 수상소감이 주로 논란이 되었지만, 그 상의 이름인 ‘밴 플리트’가 한국전쟁 시기 미중이 맞붙은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인 상감령 전투의 미군 측 사령관이었다는 점은 한국 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사이 미중 대결 의식과 중국 내 애국주의가 그만큼 강화되었고 그 맥락에 한국전쟁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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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기억의 해빙’에서는 ‘미중 대결’ 이전 항미원조 서사의 궤적을 말한다. 2000년을 전후로 항미원조 영화와 드라마가 각각 한편씩 상영 취소되었다. 영화 「북위38도선」과 드라마 「항미원조」는 출병 50주년을 맞아 큰 기대와 치밀한 준비를 거쳐 제작·상영될 예정이었지만 미중관계의 예민한 파고를 넘지 못하고 방영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당시 미중관계가 최고의 밀월기였던 것을 감안하면 항미원조 서사가 그만큼 주목받았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50주년이라는 특별한 의미도 있었겠지만, 이 시기 민간에서 고조되었던 반미 정서도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당시 중국 당국이 미국을 대할 때 지나치게 저자세를 취한다는 불만이 민간 사이에 있었고, 미국과 싸워 ‘승리한 전쟁’으로 공식화되어 있는 항미원조전쟁 서사가 대중의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항미원조전쟁 중국인민지원군(이하 지원군) 사령관이자 국방부장관이었으나 문화대혁명 시기 숙청된 펑 더화이(彭德懷)가 복권되고 다시금 주목받는 과정은 여기에 중국 현대사의 맥락을 더한다. 1960년대 문화대혁명과 대약진운동으로 국내 정치가 경색되면서 숙청된 펑 더화이와 그 주변 세력은 개혁개방 시기인 1978년 중앙당에서 복권되었고, 이어서 출간된 『펑 더화이 자술』 등 관련 문헌이 크게 흥행하면서 주류 서사에 복귀했다. 1990년을 전후해 제작된 영화 「펑대장군」과 「삼선의 펑 더화이」는 펑 더화이의 삶을 조명하는 동시에 항미원조전쟁 지원군 용사들의 잊힌 기억을 복원하려고 시도한다. 특히 드라마 「펑 더화이 원수」(2016)는 중국의 대중들이 안방에서 항미원조전쟁을 제대로 접한 첫 작품으로, 펑 더화이 복권 서사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상세한 내용을 담았을 뿐 아니라 큰 흥행까지 얻었다. 극본과 연출도 국가의 공식 서사(주선율)에 매몰되기보다는 “항미원조전쟁을 다시금 역사 장으로 불러들이는 과정에서 짚어야 할 문제들을 신중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던지고 있었다”(133면). 그렇다보니 이 드라마의 제작과 방영, 소비 과정에서 드러난 미묘한 곡절들은 2016년 시점에서도 항미원조전쟁이 여전히 당대의 예민한 정국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같은 시기에 제작된 「나의 전쟁」의 흥행 실패 또한 그것을 방증한다.
애국주의 서사가 대두하는 오늘날의 항미원조 서사
제3장 ‘‘승리한 전쟁’의 안과 밖’에서는 2020년을 전후로 격화된 미중 대결 과정에서 대두된 항미원조 서사를 살펴본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항미원조전쟁 서사의 성격 변화다. 당초 마오 쩌둥을 중심으로 항미원조에 의미를 부여할 때 중요시되었던 요소들, 가령 인민전쟁, 사회주의 국제주의, 중조(中朝) 우의, 아시아 인민 연대 등은 2000년 이후 서사에서 거의 사라졌다. 그 대신 ‘정의로운 전쟁’ ‘미중 전쟁’이라는 인식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특히 이때 말하는 ‘정의’의 그 모호한 의미가 궁극적으로 ‘애국주의’와 ‘혁명영웅주의’로 귀착되는 점은 분명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2000년대 이후 공식석상에서 항미원조를 설명할 때 ‘정의’가 과잉 사용되는 원인을 과거 항미원조 서사의 주축이었던 추상적 이념이 애국주의와 혁명영웅주의라는 날것의 이데올로기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그 ‘비린 맛’을 중화시키기 위한 기호가 필요했던 것 아닐지 조심스레 추정한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2020년의 40부작 드라마 「압록강을 건너」다. 「압록강을 건너」는 40부작 전체를 항미원조 서사로 채운 단연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다만 저자는 “「압록강을 건너」는 기술이나 자본, 스케일에서 「펑 더화이 원수」에 비할 수 없는 대작임에 틀림없지만, 여기에는 질문이 없다. 「펑 더화이 원수」가 심혈을 기울여 표현했던 균열들은 대체로 「압록강을 건너」에서 봉합되었다.”(133면)고 말한다. 전쟁 전략을 둘러싸고 지원군 사령부와 베이징 당 중앙 사이에 있었던 갈등, 참전 초기의 선전 뒤에 계속된 고전과 교착상태, 사령부의 패착, 펑 더화이 형상화 등에서 불과 4년을 앞뒤로 하는 두 작품의 결이 매우 달라졌다고 진단한다. 「압록강을 건너」는 전체적으로 정돈되고 기능적인 모습으로 지원군의 참전 과정을 그리고 있고, 국가의 치부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대신 「압록강을 건너」에서 강조된 것은 기층 군인들의 서사다. 특히 전투장면이 많이 삽입되면서 상층의 지휘를 받지만 자신만의 서사를 갖춘 기층의 이야기가 드러난다. 작품에서 이렇게 많은 세부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2000년대 이후 다수 제작된 다큐멘터리의 힘이 컸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이는 「압록강을 건너」에서 주선율 서사가 강화되었음에도 여전히 균열의 가능성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지점이라고 말한다. 제4장에서 영화 「금성천」에 주목해 항미원조 서사의 다층적 분화 가능성을 점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공전의 흥행을 기록한 「장진호」와 「장진호의 수문교」는 기존 서사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동부전선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 그간 사실상 ‘패전’으로 인식되어왔던 동부전선의 전투를 ‘혁명영웅주의’로 재조명한 것이다. 특히 경계 중에 단체로 동사했다는 ‘빙조련’ 서사는 항미원조전쟁이 평범한, 하지만 불굴의 의지를 가진 영웅들의 희생에 바탕을 둔 ‘승전’임을 강조한다. 「장진호」에서 미 해병 1사단장이 빙조련을 향해 경례하는 장면은 그 절정이다.
저자는 한국전쟁 대부분의 전투가 사실상 중공군과의 전투였음에도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존재는 기이할 정도로 지워져 있다”(5면)고 말한다. 최근 항미원조 서사를 포함한 중국 내 애국주의 여론이 한국 내 반중정서를 더욱 고조시키고 여러 논란이 발생하고 있지만, 저자는 70년 동안 아무런 충돌과 대화가 없었음이 기이한 일이었다고 지적한다. “한국전쟁이 우리에게 무엇인지도 여전히 미완의 질문이지만, 적으로 싸웠던 ‘그들’에게 이 전쟁이 무엇이었는지, ‘그들’은 지금껏 이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거나 망각(당)했는지, 또 이 전쟁은 ‘그들’의 현재에 어떤 유산으로 남아 있는지”(8면) 알아보는 것은 뒤늦게 찾아온 이해와 대화의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