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때 오환족은 중국 경내로 들어와 한족과 혼거하면서 선비족,흉노족,예맥 등을 막는 울타리, 용병 구실을 했습니다. 우북평에 살면 우북평오환, 요서에 살면 요서오환...당시 한족들이 이런식으로 구분해 불렀구요. 그러다 후한 말에 중국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직접적으로는 장순의 반란사건을 계기로 오환족이 유주를 휩쓸어버리는데 이를 가까스로 진압한게 공손찬, 유우입니다.그러다 원소가 공손찬을 꺾고 조조와 대립하게 되고 오환족에 대해 유화정책을 펼치지만 그렇다고 상곡,우북평 등을 오환족이 완전히 점거한 것은 아닙니다.
조조가 하북을 평정하자 원소 아들인 원상 형제는 평소 협력하던 요서오환 답돈(삼군오환의 중심세력), 즉 유성으로 달아납니다. 이를 제압하기 위해 207년 5월에 조조군이 우북평군 무종에 집결하고(여기서 초기전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님) 비가 많이 내려 기존의 동쪽 해변길이 막히자 7월에 노룡새, 백단, 평강을 거쳐 선비족 영역을 경유해서 진군합니다. 북쪽이나 북동쪽 방향으로 우회해서 답돈을 습격한 것인데, 이런 조조군의 움직임이 발각되어 8월에 백랑산에서 전투가 이루어져 조조가 답돈을 꺾고 유성 등 요서를 평정합니다.
이때 분명히 대릉하권역 군현의 재정비가 이루어졌을 것이나 양락현이 교치된 정확한 시점이 이때인지 아니면 그 이전이나 그 이후 어느시점인지는 저도 확신은 없습니다. 다만, 그 무렵에 양락현이 교치될만한 사건들이 연이어서 충분히 있었다는 점과, 후한서가 기술하는 양락현이 대릉하유역, 위서가 기술하는 양락현이 난하유역이라면 그 중간 시점에서 교치되었거나 폐지된후 다시 다른곳에 재설치되는 따위의 사정변경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이게 바로 '교치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증거'라는 말이 아마도 더 분명한 직접적인 기술-낙랑군의 교치를 다룬 자치통감의 기사나 창려의 교치를 기술한 구당서 지리지 같은-을 의미하는 듯 한데, 더 분명한 직접기술이 있다면 물론 더 확실하고 좋겠으나 군현의 교치를 사서에서 직접 기술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고 오히려 예외적입니다.
'양락이 교치되었다는 증거가 없는 한 양락은 난하하류'라는 것은 잘못된 논리입니다. '후한서 기술과 달리 후한 때 양락현은 난하유역이었고, 대릉하유역인 것으로 기술한 후한서 기록은 엉터리'라고 주장하는 분이 그에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셔야죠.
첫댓글아! 제가 한가지 깜박 한 것이 있습니다. 후한서 요동속국은 낙양 동북 3260리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서군이 낙양동북 3300리이니 후한서의 거리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면 요동속국과 요서군은 서로 섞여 있었다고 보아야 겠지요? 이것이 바로 작필이라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학이님께서는 유성-양락의 관계 때문에 양락이 대릉하 유역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듯한데, 한대의 유성은 요녕성 조양이 될 수 없습니다. 한서지리지에 柳城,馬首山在西南.參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 라고 되어 있거든요. 우선 유성은 요서군의 서부도위입니다. 해양 비여 영지등과 같이 있던 도시겠지요.
속국도위의 치소인 후한 때의 창요(창려)=전한의 교려는 대릉하 중류 쯤에 해당하고, 주요교통로인 해변길과 대릉하를 따라 올라가는 물길을 고려해보면 후한서 거리기록은 별다른 이상한 점이 없습니다. ('작필'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는데 '조작' 정도의 뜻으로 쓰신거 맞죠? 그렇게 전제하고 얘기해왔으나 혹시나 해서 확인해봅니다.)
유성은 한나라 이래 선비족 등 북방민족을 막고 동방정책의 중심인 요동과 연결하는 주요한 전진거점이어서 관련기록이 많고 현재의 조양시임이 분명합니다. 그 유성이 한나라 때에는 다른 곳-특히 난하유역-에 있었다고 주장하시나, 그렇지 않고 한나라 때에도 역시 대릉하 곁에 있었음은 앞서 말한 조조의 오환(유성)공격 기사로도 뒷받침됩니다. 험한 길을 따라 선비족 영역을 거쳐 500리 길을 가서 유성에 도착하기 전 200리 지점에서 발각되어 그 직후 백랑산에서 전투를 벌여 결국 유성을 평정하니까요.
대릉하가 바로 조양시를 거쳐 흐르며 지도로 확인해보니 그 외에도 크고 작은 하천들이 많습니다. 지금의 맹극하(孟克河)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는데 이게 정설인지는 모르겠고 대릉하의 중상류 일부 구간이나 지류를 參柳水라 일컬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至a入海'의 형태일 때 a를 바닷가도시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며, 이 경우와는 다릅니다.
한서지리지를 자세히 보시면 入海가 있는 현이 바닷가에 있는 도시임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 '至a入海' a가 바닷가의 도시이지 원래의 현은 바닷가의 도시가 아닌 경유지임도 파악하실 수 있을거구요. 작필은 부분적인 조작 (그냥 우리 영토가 이리도 넓었다 하는 정도)의 의미로 생각하고 쓰고 있습니다. 조작은 좀 너무 무시무시해서....
조조가 무종에서 백단을 경유하여 유성까지 간 거리가 700리입니다. 무종(계현)에서 동쪽의 답돈과 대치 중인데 동쪽으로 희봉구(노룡새)를 넘는다는 설정도 이상하고, 노룡새까지 간 후 다시 백단(난평인근으로 추정)으로 돌아 유성으로 향했다는 이야긴데... 지도를 보시면 무종에서 백단까지 간 거리만도 500리는 족히 넘습니다. (수경주를 보고 제가 따라간 길입니다.) 그럼 유성은 어디 있게 될까요? 사실 유성 부분은 어려워서 저도 자신 없습니다. 이런 저런 내용을 보면서 사서의 거리 비정에 어딘가 잘못된 부분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그나저나 학이님 대단하십니다. 처음 역사를 공부할 때 모 사이트에서 세연님이라는 분께 겁없이 덤비곤 하였는데, 그 분의 차분한 답변에 정말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거든요. 지금도 그 분을 역사공부의 스승님으로 마음속에 새기고 있습니다. 다시 그런 분을 대하게 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조조는 동쪽 해변길이 막힌 것을 보고(행로를 숨기고 출기불의하려는 의도도 포함), 노룡새에서 북쪽 새외(지금의 내몽골 동남부)로 빠지는 다른 길을 따라 간 것입니다. 난하를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계곡로인데, 후한 이래로 왕래가 적어서 길이 거의 막힌 것을 다시 뚫으면서 전진했습니다. 삼국지 전주전을 보시면 이에 관한 좀더 자세한 얘기가 나옵니다. 부연해서 정리하면, 무종->노룡새->난하를 따라 북진해 백단->동쪽으로 꺾어서 대릉하 가의 평강->백랑산(백랑퇴)->유성...의 순서입니다.
제 주장의 취지를 오해하신 듯해 다시 부연합니다. '參柳水北入海'는 '參柳水가 北으로 흘러 入海한다'는 뜻일 뿐입니다. 한서 지리지가 말하는 유성은 바닷가가 아니며, 入海라는 대목으로 그렇게 보는 것은 잘못된 논리입니다. 예를들어 鄴 故大河在東北入海 (같은 한서지리지) 인데 여기에 入海가 있다고 해서 업을 바닷가 도시라고 할 수는 없듯이요. 그런 식의 추정은 원문이 가령 '至柳城入海'로 되어 있을 때에나 가능한 추정입니다.
무종->노룡새->난하를 따라 북진해 백단->동쪽으로 꺾어서 대릉하 가의 평강->백랑산(백랑퇴)->유성... 예, 동의합니다. 제 말씀은 무종-노룡새 (현재의 이름으로 계현-번가구)가 약 250리 (계현에서 노룡이 300리이므로), 노룡새에서 백단 (현재 지명으로 번가구-난평, 좀 거리를 줄여서 승덕; 중국학자는 백단을 난평으로 보지요?)이 200리 (노룡에서 임유관이 180리이니 비슷한 거리죠?)라고 보면 벌써 450리를 왔다는 말씀입니다. 이곳에서 50리만 가면 백랑산이 있어야하고, 여기서 200리를 가면 유성이죠. 지도를 보시면서 제 소견을 확인해 보셨으면 합니다.
첫댓글 아! 제가 한가지 깜박 한 것이 있습니다. 후한서 요동속국은 낙양 동북 3260리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서군이 낙양동북 3300리이니 후한서의 거리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면 요동속국과 요서군은 서로 섞여 있었다고 보아야 겠지요? 이것이 바로 작필이라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학이님께서는 유성-양락의 관계 때문에 양락이 대릉하 유역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듯한데, 한대의 유성은 요녕성 조양이 될 수 없습니다. 한서지리지에 柳城,馬首山在西南.參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 라고 되어 있거든요. 우선 유성은 요서군의 서부도위입니다. 해양 비여 영지등과 같이 있던 도시겠지요.
또,
류수는 북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북으로는 오기라고 쳐도, 바다로 들어간다 라는 대목은 유성이 바다 근처의 도시라는 얘기입니다. 현재의 조양에는 바다로 흐르는 강이 없습니다. 한서지리지에서 "入海"라고 언급된 도시는 모두 바닷가의 도시입니다.
속국도위의 치소인 후한 때의 창요(창려)=전한의 교려는 대릉하 중류 쯤에 해당하고, 주요교통로인 해변길과 대릉하를 따라 올라가는 물길을 고려해보면 후한서 거리기록은 별다른 이상한 점이 없습니다. ('작필'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는데 '조작' 정도의 뜻으로 쓰신거 맞죠? 그렇게 전제하고 얘기해왔으나 혹시나 해서 확인해봅니다.)
유성은 한나라 이래 선비족 등 북방민족을 막고 동방정책의 중심인 요동과 연결하는 주요한 전진거점이어서 관련기록이 많고 현재의 조양시임이 분명합니다. 그 유성이 한나라 때에는 다른 곳-특히 난하유역-에 있었다고 주장하시나, 그렇지 않고 한나라 때에도 역시 대릉하 곁에 있었음은 앞서 말한 조조의 오환(유성)공격 기사로도 뒷받침됩니다. 험한 길을 따라 선비족 영역을 거쳐 500리 길을 가서 유성에 도착하기 전 200리 지점에서 발각되어 그 직후 백랑산에서 전투를 벌여 결국 유성을 평정하니까요.
대릉하가 바로 조양시를 거쳐 흐르며 지도로 확인해보니 그 외에도 크고 작은 하천들이 많습니다. 지금의 맹극하(孟克河)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는데 이게 정설인지는 모르겠고 대릉하의 중상류 일부 구간이나 지류를 參柳水라 일컬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至a入海'의 형태일 때 a를 바닷가도시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며, 이 경우와는 다릅니다.
한서지리지를 자세히 보시면 入海가 있는 현이 바닷가에 있는 도시임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 '至a入海' a가 바닷가의 도시이지 원래의 현은 바닷가의 도시가 아닌 경유지임도 파악하실 수 있을거구요. 작필은 부분적인 조작 (그냥 우리 영토가 이리도 넓었다 하는 정도)의 의미로 생각하고 쓰고 있습니다. 조작은 좀 너무 무시무시해서....
조조가 무종에서 백단을 경유하여 유성까지 간 거리가 700리입니다. 무종(계현)에서 동쪽의 답돈과 대치 중인데 동쪽으로 희봉구(노룡새)를 넘는다는 설정도 이상하고, 노룡새까지 간 후 다시 백단(난평인근으로 추정)으로 돌아 유성으로 향했다는 이야긴데... 지도를 보시면 무종에서 백단까지 간 거리만도 500리는 족히 넘습니다. (수경주를 보고 제가 따라간 길입니다.) 그럼 유성은 어디 있게 될까요? 사실 유성 부분은 어려워서 저도 자신 없습니다. 이런 저런 내용을 보면서 사서의 거리 비정에 어딘가 잘못된 부분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그나저나 학이님 대단하십니다. 처음 역사를 공부할 때 모 사이트에서 세연님이라는 분께 겁없이 덤비곤 하였는데, 그 분의 차분한 답변에 정말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거든요. 지금도 그 분을 역사공부의 스승님으로 마음속에 새기고 있습니다. 다시 그런 분을 대하게 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조조는 동쪽 해변길이 막힌 것을 보고(행로를 숨기고 출기불의하려는 의도도 포함), 노룡새에서 북쪽 새외(지금의 내몽골 동남부)로 빠지는 다른 길을 따라 간 것입니다. 난하를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계곡로인데, 후한 이래로 왕래가 적어서 길이 거의 막힌 것을 다시 뚫으면서 전진했습니다. 삼국지 전주전을 보시면 이에 관한 좀더 자세한 얘기가 나옵니다. 부연해서 정리하면, 무종->노룡새->난하를 따라 북진해 백단->동쪽으로 꺾어서 대릉하 가의 평강->백랑산(백랑퇴)->유성...의 순서입니다.
제 주장의 취지를 오해하신 듯해 다시 부연합니다. '參柳水北入海'는 '參柳水가 北으로 흘러 入海한다'는 뜻일 뿐입니다. 한서 지리지가 말하는 유성은 바닷가가 아니며, 入海라는 대목으로 그렇게 보는 것은 잘못된 논리입니다. 예를들어 鄴 故大河在東北入海 (같은 한서지리지) 인데 여기에 入海가 있다고 해서 업을 바닷가 도시라고 할 수는 없듯이요. 그런 식의 추정은 원문이 가령 '至柳城入海'로 되어 있을 때에나 가능한 추정입니다.
저 역시 배우고 공부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별다른 내공이 있는 사람도 아니구요. 의견은 서로 다르지만 덕분에 저도 자료를 찾아보며 공부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무종->노룡새->난하를 따라 북진해 백단->동쪽으로 꺾어서 대릉하 가의 평강->백랑산(백랑퇴)->유성... 예, 동의합니다. 제 말씀은 무종-노룡새 (현재의 이름으로 계현-번가구)가 약 250리 (계현에서 노룡이 300리이므로), 노룡새에서 백단 (현재 지명으로 번가구-난평, 좀 거리를 줄여서 승덕; 중국학자는 백단을 난평으로 보지요?)이 200리 (노룡에서 임유관이 180리이니 비슷한 거리죠?)라고 보면 벌써 450리를 왔다는 말씀입니다. 이곳에서 50리만 가면 백랑산이 있어야하고, 여기서 200리를 가면 유성이죠. 지도를 보시면서 제 소견을 확인해 보셨으면 합니다.
대하=황하같은 큰 강이 아니라 삼류수라는 작은 강입니다. 한서에서 하북과 요동의 현들을 한번 찾아보세요. 입해는 모두 바닷가의 도시입니다. 또, 현재의 조양을 통과하여 바다까지 이르는 강은 대릉하 하나밖에 없습니다. 삼류수라고 생각하시는 강을 제시하실 수 있겠습니까?
답변은 따로 답글로 남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