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외투 외 2편
김은지
낙타의 등 모양이라는 산에서
도시의 측면을 내려다보며
좁고 높은 건물의 옥상을,
올라가는 계단이 보이지 않는 옥상을
옥상이 아니라 하나의 뚜껑처럼 보일 때까지
응시했다
한 마을 하늘을 혼자 쓰는 새
광화문 전광판이 자그맣게 보이는 풍경이
게임보다 더 게임 같아
네온이 다시 유행이라고 하는데
형광이라는 말이 어딘가 촌스러운가 하면
네온사인이란 말은 더 오래된 말 같고
형광이란 단어도 시의 제목에 놓인다면 멋스럽지 않을까
뭘 쓸지 골몰하느라
단어들의 자리를 생각한 건 환승을 하면서였다
나를 놀이동산에 데려가준 사람들에 대해 쓸까
크리스마스카드에 절교하고 싶었다고 쓴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이 나중에 같은 방식으로 상처 준 것에 대해
코감기 약을 먹고 꾼
잠수함 꿈에 대해
너무 늦게 걷는 것도 몸에 안 좋다던데
혼자서는 더 늦게 걷는다
관객석으로 만들어진 데크에 앉아 운동화를 벗었을 때
바람에 꿀이 든 것처럼 쾌적한 날씨라는 것을 깨닫고
당황해서 계단에 등을 기댔다
‘실외기’의 이름을 풀어본다
바깥 기계
대체 어떻게 이렇게 섭섭하게 이름을 지을 수 있는지,
이처럼 특별하고 단정한 이름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고
갑자기 퇴직하고
갑자기 휴일을 보내면서
내가 쓰고 싶은 건
여름 외투
겨울보다 추운 실내에서
어깨를 감싸주는
그런
시
차가운 밤은 참
시청역 근처에서
자전거를 빌리고
혜화역까지 갔다
날이 찼지만 손이 시리지는 않았다
일요일 밤
청계천을 따라 이렇게 가는 길은 처음이었다
신호에 걸려 멈추면
불 꺼진 빌딩들과
셔터를 내린 가게들
팔짱을 끼고 걷는 사람들을 보며 안심했다
잘 모르는 길의 쨍한 밤하늘
차가운 밤은
차가운 밤은 참
깊이 내려앉는 것만 같고
오늘 내 기분은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은데
차가운 밤은 참
이리도 스타벅스가 많다면
아침이면 낮이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 있을 것인데
큰 도시의 집은
멀리 가야 있고
다들 따스한 집에 잘 있는지
추워서 눈에서 물이 나온다
가만있는 나를 찾아와
울지 말라고 말하던 사람이 생각나
웃었다
거리 모퉁이에 하나둘
꼭 누가 지나간다
나와 신호를 기다리던 자전거 탄 사람은
배달 업체 가방을 메고
한적한 도심을
부드럽게
횡단한다
나는 자전거를 반납하고
환한 옷가게에 들어갔다
왜냐하면
매일 마침내
거절당한 친구에게
먼저 놀자고 말할 수 있나요
작은 공원의 삼백육십오 일을
처음 와본 것처럼 살필 수 있나요
집으로 돌아오는 가족을
매일 마침내 돌아온 것처럼 맞아줄 수 있나요
추위가 찾아오면 집에서 가장 따뜻한 바닥에
배를 깔고 누울 수 있나요
각종 천을 모두 이불로 쓰기를 좋아하는 건?
건네는 손가락을
살짝 물었다가 놓아줄 수 있나요
강아지는 그럴 수 있는데
― 김은지 시집, 『여름 외투』 (문학동네 / 2023)
김은지
2016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책방에서 빗소리를 들었다』 『고구마와 고마워는 두 글자나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