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9일(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
좋은 지도자를 만남이 참으로 큰 축복임을 깨닫는 매일이다. 우리에게 세종대왕이 있다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다윗왕이 있다. 그런데 세종대왕이 백성을 사랑했다면, 다윗왕은 하느님을 사랑했다. 다윗은 인간적인 면에서 전임 왕 사울보다 뛰어나지 않았고 아들 솔로몬보다 지혜롭지 못했던 거 같다. 그는 하느님께 충실했다. 그렇다고 그에게 죄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부하의 부인에게 마음을 뺏겨 정을 통했고, 그가 임신하자 그 부하를 전장에서 죽게 하기도 했다. 그 벌로 어린 아들이 죽게 되자 단식하며 하느님께 빌었는데, 결국 그 아들은 죽었다. 그러자 그는 그 즉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기가 죽기 전에는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을 청했지만, 그가 죽은 다음에는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2사무 12,22-23). 그는 비인간적일 만큼 단순했고, 하느님께 충실했다.
이스라엘은 그런 다윗이 다스리던 시대를 그리워했고 그런 시절이 다시 오기를 바랐다. 그 바람은 구세주 메시아 시대가 도래함이었는데, 하느님도 그것을 약속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바람과 하느님의 계획은 달랐다.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약속하신 그 땅과 나라는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라, 하늘나라이다. 이스라엘이 모세를 따랐다면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 그분이 우리의 유일한 선생님이고 지도자고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다(마태 23,8.10). 좋은 지도자는 백성을 섬기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 생각과 다르고 내키지 않아도 그를 믿고 따른다.
오늘은 요셉 성인 축일이다. 복음서에 요셉 성인이 하신 말씀은 하나도 없다. 성모님이 하신 말씀도 몇 마디 나오고 무지렁이 제자들도, 심지어 악령들이 울부짖은 말들도 나오는데 요셉 성인이 한 말은 한마디도 들을 수 없다. 그 대신 천사를 통해 전한 하느님 말씀에 성인이 즉각적으로 순종했다는 이야기만 전한다.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라고 묻지도 않는다. 천사의 지시를 바로 실행으로 옮겼다. 한밤중에 아내와 갓난쟁이를 데리고 이집트로 이민을 가기도 했다(마태 2,14).
요셉 성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예수님을 보고 안다. 그 아버지 그 아들이다. 예수님이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들을 대하시는 모습에서 목수 요셉 아버지가 동네 사람들과 다리가 망가진 의자를 고쳐 달라고 찾아온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을지 상상할 수 있다. 바쁜 중에도 새벽에 홀로 산속에서 기도하는 모습은 성인이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께 기도했을 거라는 걸 알려준다. 예수님이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알고도 피하지 않으셨으니 성인이 하느님께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충실했는지 안다. 요셉 성인은 예수님이 믿고 따랐던 참 좋은 그리고 충실한 아버지였다. 언제나 하느님 뜻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목자, 자기 생각을 좇는 이가 아니라 나라와 국민을 섬기는 지도자를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
예수님, 저는 하느님이 직접 말씀하셔도 천둥인 줄 알고, 제 앞에 나타나셔도 너무 눈부셔서 똑바로 뵐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요셉 성인과는 달리 제 꿈은 저의 인간적인 욕망과 무의식의 사건으로 엉망이니 그 안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는다는 건 상상도 하지 않습니다. 제 사정이 이러니 하느님 말씀을 직접 듣는다는 건 꿈도 꾸지 않습니다. 제 일상이 그리고 충실한 기도 생활이 주님 말씀을 듣는 자리라고 믿습니다. 사실 그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성령으로 임신하거나 갑자기 이민을 떠나는 일도 없고, 십자가에 죽게 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그 대신 요셉 성인처럼 하느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측은지심의 지혜를 따르는 법을 배워 익힙니다.
요셉 성인님, 제 신앙을 지켜주시고 특히 이 세상을 떠날 때 불쌍한 저를 위해 빌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