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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달과 평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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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기 동이전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한나라가 진나라를 치고 일어났으나 이 지방(요동)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패수를 경계삼아 연에 속하게 하였는데, 연나라의 노관이 한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요하를 중심으로 한 요동과 요서지역은 단군조선 시대의 번한 영토였는데, 연나라의 망명자 위만이 그 지역을 점령하면서 한나라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전쟁에서 이긴 한나라가 그 지역에 한4군을 설치한 것이다. 후에는 낙랑군의 범위가 한반도까지 뻐쳤으나 중국인들이 지배했던 지역은 요동과 한반도의 해안지역에 한했었다. 단군조선의 심장부였던 송화강 지역은 결코 점령된 적이 없었다. 단군조선의 마지막에 대한 단군세기의 기록을 보자.
종실(宗室) 대해모수는 몰래 수유(번한에 살았던 기자의 후손)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아사달)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이라 칭했다. 수유후 기비를 권하여 번조선 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옛서울 백악산(아사달)이라 한 것은 44세 단군 구물 때에 내란이 있어 아사달에서 장당경으로 도읍지를 옮겼었기 때문이다. 또 아사달이 그 후에 졸본이라는 지명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또 삼한관경본기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도 있다.
계해년 단군 고열가가 마침내 왕위를 버리고 아사달에 들어가셨다. 진조선(진한)은 오가와 함께 진시황 정(政)에게 복종하게 되더니 끝내 미쳐 회복하지 못한 채 종말을 맞았다.
아사달은 단군조선 3한 중에서 진한의 도읍지였는데, 그 뜻은 '천신께 제사지내는 곳'이라는 이름이라고 환단고기에서는 말한다. 그런데 44세 단군 구물 때에는 우화충이라는 인물이 내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도읍지를 장당경으로 옮겼던 것이다. 새 도읍지 장당경에서 단군의 자리를 내어준 47세 단군 고열가는 옛 도읍지 아사달, 즉 제사지내는 도시로 들어가 수도에 전념했다는 말이다.
단군세기의 기록과 산한관경본기의 기록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전자는 해모수가 수유와 짜고 단군조선의 수도로 진격해서 부여를 세웠다고 말하고, 후자에서는 진시황에게 복종하게 됬다고 했다. 그러나 내용을 따지고 보면 실질적으로 단군조선을 무너트린 것은 해모수와 수유의 연합군이었고 그렇게 된 동기는 진시황의 천하통일 기세였던 것이다. 천하대세를 읽고 있던 단군의 후손 해모수는 진시황의 군대가 단군조선의 심장부를 도륙내기 전에 선수를 친 것이다. 진시황이 군대를 보내 정복할 필요는 없었지만 사신을 보내 조선의 항복을 받아냈을 것이다.
단군조선의 맥을 이어받은 부여와 고구려는 한나라가 설치한 한4군을 되찾기 위해 계속적인 전쟁을 했음이 환단고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따라서 송화강 유역인 현재의 북만주 지역은 단군조선 이래로 중국의 영향권 밖에 있었으며 오히려 그 지역에서 일어난 청나라가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약 3백년 동안 중국을 지배했던 것이다. 중국의 영향권 밖에 있었던 지역이기 때문에 하얼빈(졸본), 장춘(상춘), 서평(서안평) 같은 지명이 아직도 옛적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평양이 곧 아사달이요 단군조선의 중심지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그것이 미덥지가 않아서 좀 더 북쪽으로 올라가 현재의 환인 지역을 옛 졸본이라고 하며 현재의 압록강 유역을 단군조선의 보금자리였다고 가르치는 것도 한참 잘못된 추측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크게 착각되어 전해진 평양이란 지명이 환단고기에서는 어떻게 거론되고 있는지를 알아보자.
해성(海城)을 개축하여 평양이라 부르도록 하고 이궁(離宮)을 짓도록 했다...(단군세기)
위의 문구는 단군세기 중에서도 말기였던 44세 단군 때의 기록이다. 단군조선사에서 처음 등장한 평양인 것이다. 그것도 조선의 도읍지로서가 아니라 이궁을 짓기 위해 개명해야만 했던 한 변방의 성이었다. 해성이 요동반도에 있지 않고 현재의 평양이었다는 분명한 증거는 마한세가의 기록에도 있다. '단군세기'의 기록과 '마한세가'의 기록에는 같은 내용이 많다. 마한은 조선3한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시월에 이궁을 모란봉 중턱에 세워 천왕(단군)이 순수하다가 머무르는 장소로 삼았다. 3월이 될 때마다 마한에 순시하시어 열병하고 사냥도 하게 했다....명을 내려 대시전(大始殿)을 대성산에 세우고 큰 다리를 대동강에 세웠다....(마한세가)
단군조선 시대의 마한은 한반도에 있었고 송화강 유역에 있었던 진한의 천왕은 3년에 한번씩 마한을 순시했는데 그때 머무는 장소로써 이궁을 세운 것이다. 그래서 진한의 역사를 예기하는 단군세기와 마한의 역사를 예기하는 마한세가가 함께 평양에 이궁을 세운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궁이 모란봉 중턱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평양은 해성을 개축하여 평양이라 했다 했으니 현재의 평양이 해성이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해성이 요동지방에 있었다는 사학계의 추측은 잘못된 것이다.
그럼 평양에 관한 다음 기록을 보자.
단군 구물은 국호를 바꾸어 대부여라 하고 수도를 장당경으로 옮겼다. 역시 평양이라고도 한다....
위의 기록은 해성을 개축하여 평양이라 하고 이궁을 짛게 했다는 44세 단군 구물이, 국호를 대부여로 고치면서 수도를 아사달에서 장당경으로 옮겼을 뿐만 아니라 그 새 수도 장당경 역시 평양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해성을 개축하여 이미 평양이라고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44세 단군은 왜 평양(平壤)이란 지명을 그렇게 좋아했을가? 자신이 황인종과는 다른 백인종이라는 사실을 희석시키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43세 단군 때에 우화충이란 사람이 내란을 일으켜 단제는 죽고 뒤이어 일어난 44세 단군 구물은 백민성(白民城) 사람이었다. 한자로 보아서 그는 단군조선 관경에 살던 백인들, 말하자면 우루국이나 수밀이국의 후손이 아니었나 한다. 국가에 내란이 있을 정도로 단군조선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고 마침 백인이 정권을 잡았기 때문인지 44세 단군 구물은 나라이름을 대부여라 고치고 도읍도 장당경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장당경도 역시 평양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평양이 곧 장당경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근거인 것이다.
평양에 대한 다음 기록을 보자.
연타발을 파견하여 평양에 성책을 설치케 하고 도적떼와 위만의 무리에 대비케 했다.....
해성을 평양도에 속하게 하고 황제의 동생 고진을 시켜 이를 수비케 하니, 중부여 일대가 모두 복종하매 그들에게 양곡을 풀어 구제하였다. 10월에 경향분수(京鄕分守)의 법을 세웠으니 곧 서울은 천왕이 직접 수비를 총괄하고 지방은 네 갈래로 나누어 군대를 주둔하도록 했다.....
위의 기록은 단군조선에 이어 일어난 부여 2대 왕 단군 모수리 때의 기록이다. 그때는 요동에서 위만조선이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고 한반도까지 넘보고 있었기 때문에 위만의 무리에 대비케 했다는 것이다. 또한 전 영토를 네 구역으로 나눴는데 그 중에서 현재의 평양 지역에 동생을 보내 수비케 하면서 해성을 평양도에 속하게 했다는 것이다. 해성은 단군조선 말기에 이궁을 짛으면서 평야이라 개명했던 곳이다. 따라서 그 지역 일대를 평양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말일 것이다.
언젠가 TV 다큐멘터리에서 평양의 유적지 발굴에 관한 내용을 본 적이 있다. 대동강변에 있는 현재의 평양에서 더 내륙으로 들어간 곳에 옛 성터가 있다는 것이다. 그 성터가 아마도 단군조선의 마한 시대에는 왕검성이라 불렸던 마한의 도읍지였을 것이다. 그 후 44대 단군 구물 때에 대동강변에 있던 해성(海城)을 개축하여 평양이라 부르도록 하고 이궁(離宮)을 짓도록 한 것이 현재의 평양이 되었을 것이다.
현재의 평양은 그 위치가 바다로부터 들어오는 적들을 방어하는 데 가장 좋은 위치일 것이다. 내륙을 정벌하기 위해서는 강을 타고 들어와 상륙하는 방법이 유리할 것이고 그런 침략군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것이 해성이었을 것이다. 또 대동강 하구에 근접해 있기 때문에 해성이라 불렸을 것이다. 위만조선도 한나라도 고구려와 전쟁을 할 때는 육로보다 발해만을 이용한 해로를 사용한 경우가 많았다. 요하를 건너기 위해서는 2백 여리나 되는 길도 없는 습지대를 지나야 하고 또 수만의 군사와 병마가 강을 건너는 일도 큰 난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로 바다를 건너 요동과 한반도를 침략했던 것이다. 지도를 펴고 보면 산동반도와 대동강 하구의 거리는 서울에서 평양까지의 거리보다 조금 멀다. 동이전에 의하면 그들은 실제로 바다를 건너 해성을 통해 침략한 후 한반도에 낙랑현을 두었다고 주장한다. 환단고기의 기록에서도 해성(평양) 이북 50리가 그들에게 점령되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해성에 대한 다른 기록을 보자.
후한서의 동이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예의 북쪽은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는 진한과 인접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서 끝나며, 서쪽으로는 낙랑에 이른다....
중국의 동이전들이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주로 단군조선이 망한 후 그 지역에 발생했던 동이족의 새로운 나라들, 자신들의 지배권 하에 있었던 단군조선의 후속국가들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들이다. 그 중에서 '예'라는 국가의 위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위의 기록이다. 위의 기록에 의하면 예가 위치했던 지역은 현재의 함경도와 강원도였으며, 북쪽은 고구려와 옥저, 남쪽은 진한, 그리고 서쪽에 낙랑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한4군이 설치된 지역은 주로 한반도와 요동의 서해안지역에 한했던 것이다. 현재의 함경 남북도와 강원도는 '예'라는 동이족의 나라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부여의 군사는 낙랑을 칠 때 일단 예의 영토를 통해 남하한 후 낙랑의 심장부인 해성(평양)을 격파하고 살수(청천강) 쪽으로 도망치는 낙랑의 왕과 군사를 추격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 북부여기의 기록을 보자.
갑자 4년 단제께서 장군을 보내 성(해성)을 공격하였으나 석달 걸려도 이기지 못하였다. 병인 6년 단제가 몸소 정예군 5천을 이끌고 습격하여 해성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르니 구려하의 동쪽은 모두가 항복해 왔다....
위의 기록을 꼼꼼히 읽으면 석달 걸려도 공략할 수 없었던 해성을 습격하는 방법으로 마침내 함락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습격이란 단어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방법을 바꿔서 예상 외의 방향에서, 즉 동쪽의 함경도와 강원도를 차지하고 있던 예의 영토를 이용해 해성을 공략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자 낙랑의 왕은 요동이 있는 북쪽으로 도망치고 그들을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렀을 것이다. 당시의 요동반도는 한4군의 심장부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구려하의 동쪽이란 현재의 요동반도 동북쪽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요동반도 이외의 땅은 모두 회복시킨 것이다.
평양에 대한 다음 기록을 보자. 고구려 장수왕 때의 기록이다.
장수홍제호태열제(장수왕)는 건흥이라고 연호를 바꿨다.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려서 강역을 널리 넓혔다. 이에 웅진(熊津)강 이북이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어 북연, 실위(한반도에 모인 78국 중의 나라들)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속하게 되었다. 또한 신라의 매금, 백제의 어하라와 남쪽 평양 에서 만나 납공(공물을 바침)과 수비 군사의 수를 정했다....
웅진은 현재의 공주를 가리키는 지명이었으니 웅진강은 바로 금강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금강 이북이 고구려의 영토였고 현재의 평양은 북쪽의 평양과 구별하기 위해서 남쪽의 평양이라 불렸던 것이다. 그러니까 위의 기록은 고구려가 현재의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의 기록인 것이다. 신라와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국경분뱅을 피하기 위해 협상을 했는데 남쪽평양에서 만났다 했으니 북쪽평양도 있었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 의하면 분명 장수왕 때에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 했는데, 그 이전 동천왕 때에도 평양으로 사직을 옮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126장 '졸본과 고구려'에서 보다 자세히 다루고 있지만, 현재의 평양 이전에 북쪽의 평양도 있었다는 많은 증거들이 있는 것이다.
단군조선 초부터 강화도에 제천단을 세우게 한 한반도의 마한은 중국 쪽의 번한보다 훨씬 비중을 둔 지역이었다. 그래서 번한은 5년에 한 번 단군이 순시했으나 마한은 3년에 한번 순시했다고 한다. 그런 마한에 한족의 낙랑이 세력을 뻗치자 기어이 내쫓았는데 후에 다시 한나라가 점령해서 낙랑현을 설치한 것 같다.
발해의 역사를 기록한 발해기에 해성이란 성 이름이 한번 거론된다. 복주, 개평, 해성의 성들이 모두 항복하여 명나라에 투항했다는 것이다. 이 때의 해성은 요동에 있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마도 요동의 발해만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해성(海城)이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기의 해성은 평양의 본래 이름이었음이 분명한 것이다.
이로써 현재의 평양이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심장부였다는 지금까지의 역사관은 수정해야 할 부분이 무척이나 많은 것이다.
평양의 첫 유래는 단군조선 개국 때 한반도에까지 그 영역을 넓히면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평양이라 불린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환단고기의 기록에 의하면 현재의 대동강 유역에 있던 달지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소속국으로 하고 그곳을 마한의 도읍지로 정한 것이다. 그리고 진한, 번하의 수도와 함께 마한의 도읍지도 역시 왕검성이라 불렸다고 햇다. 해성(海城)은 그 도읍지를 방어하기 위해 대동강변에 세워진 방어성 정도였던 것을 44세 단군 구물 때에 성을 개축해서 이궁(離宮)을 짓고 그곳을 평양이라 부른 것이 평양이라는 지명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정신세계사' 간 임승국 역해 '한단고기'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