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오랜만에 상록보육원
조카 12명을
만났습니다. 지난봄 3월 28일
조카들이 개학을 하고
난 직후 저녁을
같이 먹고는 무려 5개월 만입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조카들을 못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상록보육원을 후원한 이래
처음 있는 일입니다. 예정대로라면 5월에
야유회를 갔어야 했는데 '그 놈'의 메르스
때문에 아이들 바깥출입이
금지되는 바람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때늦은 봄 야유회를 8월 말에
하게 된 것입니다.
어디를 데리고 갈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여름이라 아무래도 실내를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가기로 하였습니다. 다행히
조카들이 가 본
적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DDP의
그 많은 프로그램
중 어떤 것이
조카들에게 도움이 될지
걱정이었습니다. 조카들은 36개월짜리 꼬마부터 19살짜리 고3까지 연령대가
다양하여 맞추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 어려움은 평소
알고 지내는 DDP의
이진영 팀장이 해결해주었습니다. 어디나 독지가가
있는 법입니다. 이번
야유회 프로그램은 이진영
팀장의 도움을 받아
우리 회사 김선정
대리가 짰습니다. 두
사람이 정성껏 짜준
프로그램을 들고 저는
어제 아침 10시
아내와 함께 DDP 배움터 2층 디자인
박물관 앞에서 조카들을
기다렸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저희 부부와
조카들은 이산가족 상봉처럼
반가워들했습니다.
저희 일행이 제일
먼저 관람할 전시는
<간송문화전 4부 : 매.난.국.죽 - 선비의 향기>였습니다. DDP의
개관 전시로 3년
예정으로 전시하는 간송
전형필 선생님의 컬렉팅
작품 중 4번째
전시였습니다. 저희
일행을 안내해줄 사람은
도슨트 김수정 선생님이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공식적으로 도슨트가 없는데
아이들을 위해 특별히
자원봉사하신 것입니다. 김수정
씨는 아이들의 연령대가
다양한 것을 보고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하나 난감해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군자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
조용했습니다. 김
선생님은 아이들 수준에
맞추어 차근차근 설명하였습니다. "옛사람들은 선비의
모델인 군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설명하기 위해
꽃과 나무를 사용하였대요. 군자의 기질이
꽃이나 나무에 깃들여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초봄에 겨울의
추위를 무릅쓰고 피어나는
매화, 여름날
무더위 속에서도 깊은
산속에서 청초하고 맑게
피어 있는 난초, 늦가을 서리를
이겨내고 피는 국화, 그리고 한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에서 선비의 모습을
연상하였다고 해요. 그러면
지금부터 매난국죽 작품을
보실까요?"

이번 전시에는 유난히
대나무를 그린 그림이
많았습니다. 김
선생님은 어느 눈
쌓인 대나무 그림
앞에서 아이들에게 질문
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유덕장 선생님이
그리신 눈이 덮인
대나무 그림입니다. 이름하여
설죽이지요. 이
그림을 그리기 참
어렵다고 해요. 종이의
색깔이 무엇이지요. 예, 흰색이에요. 그러면
눈의 색깔은? 예, 또 흰색이에요. 그러면 흰
종이 위에 흰
눈을 어떻게 그릴까요? 맞아요. 주변을
좀 어둡게 색칠하고
눈을 그렸답니다. 그런데
이 설죽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중에 어느 계절에
그렸을까요?" 다들
"겨울이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의외였습니다. "여름이에요. 당시에는
에어컨이 없어 이
설죽을 보고 더위를
이겨냈대요. 재미있지요."

김 선생님은 몇
작품을 건너뛰고 특별한
모습의 대나무 그림
앞에 서서는 저에게
"혹시 5만
원권 있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5만 원권을
드렸더니 뒷면을 들고
"여기 매화
그림 뒤에 대나무
그림이 은은하게 배경으로
인쇄되어 있지요. 그
그림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계시는 그림이에요. 이 그림은
여러분이 다 아시는
세종대왕의 고손자인 탄은
이정의 작품입니다. 그는
사군자 중에 특히
묵죽화에 전념하여 한국
회화사상 최고의 묵죽
화가로 평가받습니다.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대나무
그림은 풍죽입니다. 바람결에
대나무 잎이 흩날리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이 풍죽은
그의 묵죽화 중
최고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좀 이상한 점이
있어요. 대나무
줄기는 왼쪽으로 휘어
있는데 대나무 잎은
모두 오른쪽으로 날리고
있어요. 자연의
이치에 따르면 맞지
않는 것이지요. 바람
방향을 따라 모두
오른쪽으로 휘어야 하지요. 이 그림에서
이정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세파가
몰아쳐도 자신은 그에
맞서 꿋꿋하게 서
있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죠. 여러분 5만 원권을
볼 때마다 이
그림을 생각하세요."

대나무가 참 많았습니다. 대나무 대나무
대나무. 아이들이
재미있어할까 살짝 걱정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느라 도슨트의 설명을
놓치고 있었는데 갑자기
김 선생님의 이야기가
귓가를 때렸습니다. "이
난초 그림을 보면
이상한 점이 있는데
무엇인지 아는 사람?" 이제 대나무
그림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난초 그림으로
접어든 것입니다. 이때
공선정이 나섰습니다. "난초
뿌리가 땅에 박혀
있지 않고 드러나
있어요." "그래요. 우리 친구
참 똑똑하네요. 선생님
설명도 열심히 듣고
질문도 많이 하더니
답변도 잘하네요. 이
그림의 난초는 뿌리가
드러나 있어요. 왜
그럴까요? 이
그림은 조선말 민영익
대감의 그림이에요. 조선의
마지막 왕비 명성황후
집안사람이에요. 민영익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나라를
잃었을 당시에 자신의
참담한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였다고 해요. 나라를
잃은 것은 마치
우리 자신의 뿌리가
뽑혀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해서 난초의
뿌리를 드러나게 그렸다고
해요. 특이하죠. 이 그림을
볼 때는 나라
잃었던 아픔을 되새기기
바래요. 저의
설명은 여기까지 입니다."
모두 우뇌와 같은
박수를 쳤습니다. 아이들
눈높이에 꼭 맞는
해설이었습니다. 아직은
아이들의 힘이 남아
있는 듯했습니다. 우리
일행은 간송문화전 말고도
어린이 디자인 체험과
엔디 워홀의 전시회까지
애초 예정한 일정을
모두 마치고 식사를
하였습니다.
아내가 인솔 차
따라온 상록보육원 선생님에게
들었다며 이런 이야기를
건네줍니다. "보육원에
후원하는 사람은 제법
있대요. 그런데
이 아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미래에 대한
꿈이래요. 아이들이
보고 자라는 것이
제한되어 있어 큰
꿈을 가질 수가
없대요. 그래서
아이들이 대부분 대학을
포기하거나 가더라도 법대나
의대 중 보통
아이들이 꿈꾸는 전공을
꿈꾸지 못한대요. 꿈이
작으니 동기부여도 되지
않고 따라서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게
되는 악순환이 있대요. 당신이 아이들을
위해 꿈과 비전
그리고 동기부여를 위한
강의를 좀 해주면
어때요."
몇 년째 상록보육원
조카들을 후원하면서 가진
의문점에 대한 해답을
아내가 해준 것입니다. "이렇게 두
달에 한 번
정도 저녁이나 야유회를
해준다는 것이 아이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어떤 의미를
지녀야 하는데."
그 해답은 바로
<꿈과 비전>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그들이 접하지 못하는
세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아이는
그 세상을 보고
자신의 처지에 감당이
되지 않는다고 좌절할
수도 있지만 어떤
아이는 도전할 것입니다. 저는 그
한 명을 위해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은
이번 DDP 관람을
통해 어떤 꿈과
비전을 배웠을까요. 각자
배우고 느낀 것이
다르지만, 분명히
자극되었을 것입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손을
흔들고 사라지는 조카들을
바라보며 제가 다음번에는
어떤 꿈과 비전을
주어야 할지 고민하였습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5.8.25. 조근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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