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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인생을 위한 가장 중요한 선택(요21:15-18)
동선교회 박재열 목사님이 이렇게 인사하시더라고요.
“한 주간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와서 반갑습니다!”
하루에 지구촌에서 돌아가신 분들이 25만 명 내외라고 합니다. 일주일이면 150만 명입니다. 그런데 안 죽고 만났으니 얼마나 반갑습니까? ^ ^
제가 존경하는 선배 목사님 가운데 인천방주교회 박보영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 분의 간증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피부과 의사로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의사 박보영이 39살에 죽을 고비 중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모아 둔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 치료비 없는 사람들, 작은 교회 등에 다 나눠주고 돈 20만원 들고 쪽방촌에 들어가서 신학교를 마쳤는데 아무도 불러주는 곳이 없었습니다. 산 속 판자촌에서 2년을 성경만 읽으며 살다가 안성 상가를 얻어 개척을 했는데 1년 동안 성도가 한 명도 안 왔습니다. 그러던 중, 아는 전도사님이 11평짜리 아파트를 무료로 빌려 주었는데 집을 비운 사이 10대 3명이 들어와서 술과 부탄가스를 흡입하여 거의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목사님과 마딱뜨렸습니다. 아이들이 강도로 돌변해서 칼로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중에 목사님은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이 아이들과 예배 드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밤새 그 환각 중에 있는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는 용서받은 죄인이고 너희들은 용서받을 죄인인데 나랑 같이 예수 믿고 용서받자.”
밤새도록 복음을 전하고 그 다음 날 아침에 헤어졌는데 며칠 후 수요예배 시간에 이 세 아이가 친구들 15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집 나온 아이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말씀을 아무리 듣고 기도를 가르치고 해도 변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나가서 도둑질 하거나 깡패질해서 돈이 생기면 가출해서 창녀촌이나 술집을 전전했답니다. 그러다 돈 떨어지면 다시 돌아오고, 이 일이 반복되는 중 하루는 목사님이 도둑질하다 잡혀서 피해자 집에 가서 사과하고 술 취한 주인에게 매까지 맞고 오는데도 낄낄 거리며 웃고 잡담하는 아이들을 보고 너무나 화가 나서 아이들에게 자신을 때리라고 했답니다.
“한 사람당 10대씩 힘껏 때려라, 조금이라도 봐주면 다시 처음부터 때리는 거다.”
매를 맞다가 30대 쯤 맞았을 때 엉덩이 꼬리뼈를 잘못 맞아 정신을 잃을 정도였는데 나머지 50대를 더 맞고 80대를 채운 후에 쓰러져서 한 달을 꼼짝 못하고 앓아누웠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을 그 일이 있은 후, 아이들이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아이들에게 물었답니다.
“왜 나를 때리고 나서 너희들이 변하게 되었니?”
“목사님, 세상이 다 가짜인 줄 알았는데... 목사님이 매 맞고 뒹구는 모습을 보고 깨닫게 되었어요.” 하더랍니다.
박보영 목사님이 이렇게 살게 된 데에는 할아버지 박용의(전 종교교회 담임)목사님의 유언이 있었다고 합니다. 박용의 목사님의 소원은 장손자의 목사안수 보좌를 하는 것이었는데, 그만 손자가 안수받기 5일 전에 소천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손자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종의 길을 가르쳐 주세요.”
그 때, 이렇게 가르쳐 주셨답니다.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라,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라, 변명하지 말라, 가장 천한 곳에서 섬겨라”
제가 우리 예수공동체교회 성도님들께 간혹 반복해서 들려드리는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엑기스가 담긴 유언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무엇인가요?
죄로 인해 하나님의 원수 된 저와 여러분이 무한한 사랑과 용서로 은혜 가운데 새 사람의 길, 새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 저와 여러분에게 오늘 단 하루만 남았다면 지금 고민하는 문제가 고민이 되시겠습니까? 오늘 가지지 못하거나 누리지 못해서 없으면 죽을 것 같았던 것이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울까요?
이미 우리들은 그러한 분들이 남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습니다.
지난 7월 5일 기록적인 폭우가 내린 일본에서 규슈에서 수십 명이 사망하고 실종되었습니다. 그리고 복구 작업 중 흙더미에 깔려 죽은 일가족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발견된 시신은 에토 유카리(26) 씨와 그의 아들 에토 유야(1) 군, 여성의 모친 후치가미 레이코(63) 씨로 확인됐습니다. 둘째의 출산을 위해 친정에 잠시 왔다가 이런 참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에토 씨의 시신은 아들을 품에 안은 모습으로 발견됐습니다. 그녀는 집안에 들이닥친 토사와 바위를 온몸으로 막았지만 1살 아들과 곧 태어날 딸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휴대폰에 마지막 말을 남편에게 남겼습니다.
“내가 당신 사랑한 걸 잊지 말아 주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면 여러분은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랑을 할 수 있기에 삶은 의미 있고 인생은 더욱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내일이 아니라 지금 사랑하십시오.
다 같이 따라해 보실까요?
“사랑만하며 살거야!”, “두고 봐 사랑 안 해주나 봐”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믿음, 소망, 사랑은 영원한 것인데 그 중에서도 사랑이 최고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천사의 말을 한다 해도, 예언하는 능이 있다 해도,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또, 구제의 선행을 해도,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면서,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폐하지만, 사랑은 영원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3년여 메시야(구원자)로서의 사역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고 하면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기에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대신 죽으시고, 다시 사셔서 영원한 사랑의 승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성경은 “사랑을 추구하십시오”(고전 14:1, 새번역)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닮은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아무 유익이 없는 인생인 것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으니라.”(고전 13:3)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큰 믿음이 있을지라도 그 바탕에 사랑이라는 터전에 세워지지 않았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13:2)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대표로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15절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16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17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양을 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곁에 있는 가족이나 형제나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나와 다른 이, 나를 억울하게 한 원수까지도 사랑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미 두 번이나 베드로에게 찾아왔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향으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자신만 간 것이 아니라 함께하던 다른 제자들까지 데리고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을 배반한 ‘죄책감’ 때문이겠지요.
‘나 같은 것이 무슨 제자인가? 그것도 수제자 역할은 할 수는 없지. 난 물고기나 잡는 것이 더 맞아’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죄와 허물 많은 자기 자신은 절대로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자라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에게 이 정죄하는 마음을 누가 주는 것입니까?
정말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인가요?
정죄의 주인은 마귀입니다. 마귀는 그 이름 자체가 ‘참소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안타가운 것은 마귀의 참소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무너져 버립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히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생명 값을 주고 너를 살렸단다. 너는 존귀한 내 아들이고 딸이란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정말 사랑하면 낮고 천하고 힘든 일을 하면서도 기쁨이 넘칩니다.
제가 아직도 제 아이들의 똥 싼 뒤를 닦아줍니다.
애들이 화장실에서 똥을 싸고 나서 당당하게 부릅니다.
“아빠! 다 쌌어. 빨리 와”
늦게 가면 큰일 납니다.
부르는 즉시 쏜살같이 가서 휴지를 풀어서 똥을 닦습니다. 똥을 보고 애가 건강하구나 배탈났구나 다 압니다.
그러다가 간혹 아이들이 교회 화장실에서 똥을 쌀 때, 저나 아내가 다른 일을 하다가 아이 똥 닦아 주는 것을 한참 동안 잊을 때가 있습니다.
한 30분 만에 간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 ‘엉 엉’ 울고 있어요. ^ ^ 그러면 엄청 사과를 하지요.
아니 제가 누구의 똥 안 닦아 줬다고 사과하겠습니까?
사랑하니 이런 일도 힘들고 냄새난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이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똥을 많이 쌉니다.
교만으로 죄를 짓고, 연약해서 유혹에도 잘 넘어집니다. 탐욕을 부리다가 낭패도 당하고, 뜻밖의 사고나 질병으로 낙심하기도 합니다. 가족이나 친구, 직장 동료들과 싸우기도 합니다. 또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얼마나 미워하고 정죄합니까? 그게 다 인생의 똥이지요.
주님은 기쁜 마음으로 우리들을 닦아 주십니다. 더럽고 냄새난다고 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아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래서 딱 한 가지만 물으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 본문에서 이 질문을 듣고 있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앞 마당에서 예수님이 심문받고 있을 때, 계집종 앞에서 벌벌 떨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고, 저주했고, 거짓맹세까지 했습니다.
우리들도 때때로 그렇지요. 돈 앞에서, 세상사람 앞에서, 권세 앞에서, 유혹 앞에서
주님 모르는 것처럼 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일로 죄책감에 사로잡혀 믿음에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한결 같이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다 됐다.
이제 죄의 짐을 내려 놓거라! 정죄의 짐을 내려 놓거라. 내가 이미 대신 십자가에서 값을 치르고 용서했단다.
베드로는 죄책감으로 예수님을 떠나갔지만, 예수님은 따뜻한 사랑과 용서로 베드로를 다시 품으십니다.
간음하여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하셨고 정죄의 돌을 든 모든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주여,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0-11)
장발장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너무나도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베드로만 주님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은 날마다 주님을 부인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 나에게 주님이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은 왜 이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실까요?
‘사랑하는 베드로야 너는 나를 부인한 것으로 인해 스스로를 정죄하며 떠나려하지만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그러니 다시 힘을 내렴. 내가 도와줄테니 일어서렴. 우리 다시 한번 시작해 보지 않을래?’
이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 오늘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바로 이것입니다
죄의 짐, 세상의 갖가지 곤고한 짐에 눌려 있으십니까?
도우시는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홀로 짐을지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내 인생의 짐을 대신 지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전능자 하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물어보십니다.
15절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하십니다. 진짜 사랑은 다른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것을 진실한 사랑, 뜨거운 사랑이라고 합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차지도 덥지도 않은 사랑이 아니라 뜨거운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결핍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때때로 얼마나 힘겹고 고달픈가요? 때로는 좌절과 절망에서 허우적거리며, 낙망할 때가 있지요? 그 때 우리 영혼이 목마릅니다. 정신이 몽롱해지기도 합니다.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주실 뿐 아니라 받기를 원하십니다.
크리스토퍼 몰리는 ‘만일 우리 인생이, 단지 5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 모두는,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가,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 것이다. 그리고는 더듬거리며, 그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한 가장 중요한 선택,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뜨겁게 받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내 곁에 있는 이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셨다면 후회하지 마십시오. 내가 사랑한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였더라도 후회하지 마십시오. 사랑한다는 것, 그것 자체가 가장 귀한 것이며, 영원한 것이며, 가장 고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