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학집> 이라는 책명은 처음 듣는데, 알아보니 확실히 단군의 네 아들 이름이 나오는군요.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이 책이 선조 때 서적이 분명하다면, 이미 선조 때에 '단군의 4 아들' 에 대한 전승이 있었다고 보아도 되겠지요. (참고로 말하자면, <청학집> 은 역사책이 아니라 도교/단학 계통의 서적입니다. 광성자-명유-환인-환웅-단군... 으로 이어지는 조선 도교의 선맥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이후 18세기의 <오계일지집> 도 재밌는 내용들이 있더군요. 단군을 '단제'檀帝 라 부르고 있고 <단군내력실기> 를 인용하여 부루우, 부소, 부여 등을 단군의 세 아들로 인식하고 있습니다.(4아들이 아님) 단, 특이하게 이 책에서는 부소가 장자이고, 부루우(부루와 부우가 결합된 이름??)가 둘째이며, 셋째가 부여입니다. / 이상을 종합하면, 단군에게 '여러' 아들이 있었고 그 아들들이 '부' 자 돌림이라는 설화는 이미 조선시대에 전승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도교문학사>, <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 참고)
이종휘의 동사를 보니 '부여의 선조는 단군으로부터 나왔다. 단군이 맏아들 외의 아들을 餘地에 봉하니 후세에 이를 따라 스스로 부여라고 이름지었다. 어떤 사람은 부여는 처음 봉해진 임금의 이름이라고 한다.' 라는 내용이 있군요. 도교에서 말하는 단군의 막내 아들이라는 부여가 떠오르네요. 사서하고는 괴리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건 별론인데....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다' 라는 인식은 근대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이미 조선시대에 형성되어 있던 관념이더군요. 조선시대까지의 '정통론' 은 국왕의 혈통을 중심으로 하는 정통론일 뿐 피지배층의 혈통은 그다지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단군의 자손' 이라 말하려면 고대 한국의 왕가들이 단군과 피가 닿아 있음을 말해야 하는데, 이 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바로 '부루' 더군요. 즉, 논리는 이렇습니다. "단군이 부루를 낳고, 해부루가 온조의 아비가 되고 온조가 주몽의 아비가 되고, 주몽이 다시 온조를 낳으니....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단군의 후손이 아니더냐"
그리고 기준을 매개로 한 마한(삼한)과 조선의 관계 논의는 다들 잘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이런 것이 미수 허목의 <동사> 에 나타납니다. (참고로 미수 허목은 송시열의 최대 정적으로 예송논쟁에서 송시열과 대립) 지금 우리가 보기엔 참으로 조악하지만, 어쨌든 조선 중기에 저런 관념이 존재했다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참나! 누구는 단군이 왕의 호칭이지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여기서는 단군이 누구 누구를 낳았다고 하고...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하는지 누가 설명 좀 해줘요. 그리고 단군이 실존인물이라는 유물이나 유적이라도 소개해주시고...그리고 부소는 진시황의 맏아들 아닌가요?
단군이 군주의 호칭이라 해도 해석에 따라 저 아들들 하고는 크게 상충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보통 기록에서도 군주가 아들을 낳았다라고 할 때 군주의 이름을 쓰지 않고 예를 들어 "왕이 그녀를 가두니 뒤에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라는 표현을 합니다. 단군이 하백녀와 통하여 부루를 낳았다라는 표현도 이와 같은 형태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부소라는 인물이 반드시 진시황의 맏아들만 있다고 볼 수는 없으며 동명이인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Sorgai 님// 지금 논의는 단군의 실존인물성과는 관련이 없는 내용일 텐데요? 명치호태왕님이나 저나 지금 정말로 단군(왕검)이 실존인물이고, 그에게 부루 등의 아들이 있었는지를 확신하는 게 아닙니다. 단군에게 아들이 있다는 전승을 기록으로 확인하는 것 뿐이죠. 명치호태왕님의 애초 질문 취지는 '환단고기류 사서에 나오는 단군의 여러 아들들의 이름의 근거가 뭐냐' 라는 것이고, 그 이름의 출처가 아무리 올라가도 조선중기 이상으로 올라가는 것 같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겁니다. 그 출처들조차도 '도가류 서적' 으로서 역사적 신뢰성은 크지 않은 서적들이지요.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현재 단군의 유적이라 전해지는 참성단이나 삼랑성은 그것들이 가진 상징성이나 종교적 성격 때문에 일종의 건드려서는 안 될 성역과 같아서 적극적인 고고학적 검토를 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문화재청에서 비록 상고시대 때 강화도일대에 강력한 지배세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은 했지만, 고고학적 검토가 이뤄지지 않은 이상 저 설명만으로는 신빙성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고 말씀드린 겁니다.^^;(근거는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고려 때 만든 것 같다는;;)
솔직히 단군이 실존했을 것이라는 심증은 있으나, 근거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대놓고 단군이 실존했다고 단언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 소르가이님과 있었던 토론에서도 '~봅니다, ~것입니다, ~ 수도 있습니다.'라고만 말끝을 애매하게 했던 것입니다. 어찌보면 교활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네요.^^;; 제 요지는 단군이 실존했으리라는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그렇다고 단군을 부정할 만한 확실한 근거 또한 부족하다고 생각하기에 단군 문제는 획기적인 사료가 나오지 않는 이상 누구도 단언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역사는 종교도 아니고, 확신도 아닙니다. 일정한 근거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하는데 단군은 관련기록이나 근거가 전무합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비롯한 선대의 나라에서 단군을 인정했다는 말이나 유물, 금석문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전혀 접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정작 삼국시대에도 단군은 역사인식에서 차지하는 바가 전무했다는 반증이지요. 기껏해야 청나라 때 만든 사고전서에 있는 기록을 가지고 야단법석을 떠는 정도지요. 단군은 국내외, 공식 비공식을 막론하고 증명할 근거가 전혀 없으니 인정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소르가이님/ 전해지고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금석문과 자체 기록들이 얼마나 많다고 그렇게 확신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금석문들과 기록들은 이들 국가들이 실제로 남긴 것들의 민분지일도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왜 삼국사기나 제왕운기, 삼국유사 등 우리측 기록들이 있음에도 전무하다고 무자르 듯 무시하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측 기록들이 있는 한 단군은 쉽게 부정될 수 없습니다. 계속 평행선만 달릴 것 같으니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좋을 듯 싶군요.
明治好太王님/ 저는 특정인을 생각해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단군기사만 보더라도 마늘은 한나라 때 수입한 것이요, 단군의 나이만 해도 기록별로 860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1048년설: 권람의 『응제시주應製詩註』, 권제의 『역대세년가歷代世年歌』,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서거정의 『동국통감東國通鑑』등/1908년설: 『삼국유사三國遺事』, 『동사보유東史補遺』, 『춘관통고春官通考』)
거기다 단군은 정사에 등장한 적이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이는 어느 시대에서도 공인된 역사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1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단군조선의 유물이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겁니다.(출토되지 않았다는 만분의 9999에서도 단군은 없는게 당연한 것이죠.) 그러기에 단군은 민간신앙으로서의 역할은 가능할지 모르나, 역사의 영역에는 포함될 수 없는 것도 당연한 것이지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요?
sorgai 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딱히 반대하지 않습니다만, '마늘' 이야기에 대해서는 좀 집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단군신화> 에 '마늘' 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단군신화에 웅녀가 쑥과 마늘을 먹었다고 흔히 말할 때 마늘이라는 것은 蒜(달래 산) 이라는 한자를 번역한 것인데, 蒜 은 마늘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옥편에는 마늘 산 이외에 '달래' 라는 뜻도 나오지요. 신화의 구조를 생각해 보면 저는 마늘보다 달래가 더 적절하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마늘은 이 땅에서 '자생' 하는 산나물이 아니지만, 쑥과 달래는 우리나라 어디서든 쉽게 채취할 수 있는 산나물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마취약을 추출하는 석산石蒜(수선화과의 식물) 등의 한국 자생 알뿌리 식물도 '蒜' 글자를 써서 표기하는 예도 있는 듯하니, 마늘 도입 이전에 蒜 이라 불리는 식물이 이 땅에 있었다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특히 마늘의 경우에는 종래의 蒜 과 구분하여 따로이 '대산'大蒜 이라 불렸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단군신화> 에 마늘 도입 이전에 蒜 이라 불리는 어떤 자생의 산나물이 존재했다는 것은 이상할 게 없습니다.
단군이 나오는 것을 찾아보니 그렇다는 것인데 뭐 다 부질없는 일이긴 하죠. 어차피 단군이라는 것이 과연 우리의 역사와 관련이 있느냐의 여부인데 정작 단군에 가까운 시기로 올라갈수록 단군은 사라지고 만다는게 문제니까요. 단군에 기록된 시기의 왕조는 정작 단군을 몰랐다고 밖에 할 수 없으니...한편의 개그를 보는 기분이 듭니다. 제가 들은 가장 이른시기의 단군은 '古平檀君'으로 泰康2년 즉 AD 280년경의 벽돌파편이라던가...고평지역의 제후라는 것은 증명되었다지만 우리가 아는 단군과는 2천년 이상의 시차가 있을 뿐 아니라, 한민족의 나라도 아니었던 것으로 압니다.
첫댓글 저도 부루는 많이 들어봤지만, 저 나머지 세명은 처음들어봐서 질문드린 것입니다. 역시 환단고기류 사서였네요.^^;;
현재로써 단군의 아들들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지 않나요...
부루 이외의 단군의 아들이름이 구체적으로 등장한 기록이 최초로 등장하는 기록은 16세기에 조여적이 쓴 청학집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원문 올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불가하시다면 볼 수 있는 곳이라도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청학집> 이라는 책명은 처음 듣는데, 알아보니 확실히 단군의 네 아들 이름이 나오는군요.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이 책이 선조 때 서적이 분명하다면, 이미 선조 때에 '단군의 4 아들' 에 대한 전승이 있었다고 보아도 되겠지요. (참고로 말하자면, <청학집> 은 역사책이 아니라 도교/단학 계통의 서적입니다. 광성자-명유-환인-환웅-단군... 으로 이어지는 조선 도교의 선맥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이후 18세기의 <오계일지집> 도 재밌는 내용들이 있더군요. 단군을 '단제'檀帝 라 부르고 있고 <단군내력실기> 를 인용하여 부루우, 부소, 부여 등을 단군의 세 아들로 인식하고 있습니다.(4아들이 아님) 단, 특이하게 이 책에서는 부소가 장자이고, 부루우(부루와 부우가 결합된 이름??)가 둘째이며, 셋째가 부여입니다. / 이상을 종합하면, 단군에게 '여러' 아들이 있었고 그 아들들이 '부' 자 돌림이라는 설화는 이미 조선시대에 전승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도교문학사>, <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 참고)
이종휘의 동사를 보니 '부여의 선조는 단군으로부터 나왔다. 단군이 맏아들 외의 아들을 餘地에 봉하니 후세에 이를 따라 스스로 부여라고 이름지었다. 어떤 사람은 부여는 처음 봉해진 임금의 이름이라고 한다.' 라는 내용이 있군요. 도교에서 말하는 단군의 막내 아들이라는 부여가 떠오르네요. 사서하고는 괴리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명치호태왕님// 이종휘 <동사> 의 <단군본기> 쪽에는 별 내용이 없었는데, <부여세가> 쪽에 단군 아들들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미처 <부여세가> 는 보지 못했네요. ^^
네, 부여세가 첫 부분에 있더군요. 돈이 없으니, 본문 검색으로...^^;;
이건 별론인데....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다' 라는 인식은 근대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이미 조선시대에 형성되어 있던 관념이더군요. 조선시대까지의 '정통론' 은 국왕의 혈통을 중심으로 하는 정통론일 뿐 피지배층의 혈통은 그다지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단군의 자손' 이라 말하려면 고대 한국의 왕가들이 단군과 피가 닿아 있음을 말해야 하는데, 이 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바로 '부루' 더군요. 즉, 논리는 이렇습니다. "단군이 부루를 낳고, 해부루가 온조의 아비가 되고 온조가 주몽의 아비가 되고, 주몽이 다시 온조를 낳으니....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단군의 후손이 아니더냐"
그리고 기준을 매개로 한 마한(삼한)과 조선의 관계 논의는 다들 잘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이런 것이 미수 허목의 <동사> 에 나타납니다. (참고로 미수 허목은 송시열의 최대 정적으로 예송논쟁에서 송시열과 대립) 지금 우리가 보기엔 참으로 조악하지만, 어쨌든 조선 중기에 저런 관념이 존재했다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참나! 누구는 단군이 왕의 호칭이지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여기서는 단군이 누구 누구를 낳았다고 하고...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하는지 누가 설명 좀 해줘요. 그리고 단군이 실존인물이라는 유물이나 유적이라도 소개해주시고...그리고 부소는 진시황의 맏아들 아닌가요?
단군이 군주의 호칭이라 해도 해석에 따라 저 아들들 하고는 크게 상충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보통 기록에서도 군주가 아들을 낳았다라고 할 때 군주의 이름을 쓰지 않고 예를 들어 "왕이 그녀를 가두니 뒤에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라는 표현을 합니다. 단군이 하백녀와 통하여 부루를 낳았다라는 표현도 이와 같은 형태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부소라는 인물이 반드시 진시황의 맏아들만 있다고 볼 수는 없으며 동명이인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단군 유물이나 유적은 대표적으로 삼랑성과 참성단으로 전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신빙성 여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문화재청 사이트에 나온 설명은 좀 애매한 감이 없지 않아 있기도 하고...^^
Sorgai 님// 지금 논의는 단군의 실존인물성과는 관련이 없는 내용일 텐데요? 명치호태왕님이나 저나 지금 정말로 단군(왕검)이 실존인물이고, 그에게 부루 등의 아들이 있었는지를 확신하는 게 아닙니다. 단군에게 아들이 있다는 전승을 기록으로 확인하는 것 뿐이죠. 명치호태왕님의 애초 질문 취지는 '환단고기류 사서에 나오는 단군의 여러 아들들의 이름의 근거가 뭐냐' 라는 것이고, 그 이름의 출처가 아무리 올라가도 조선중기 이상으로 올라가는 것 같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겁니다. 그 출처들조차도 '도가류 서적' 으로서 역사적 신뢰성은 크지 않은 서적들이지요.
미주가효님의 설명이 제일 설득력이 있습니다만, 댓글을 보면 어느새 단군이 실존인물인 듯 전개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단군 유물도 있다고 하니...기 막히네요.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현재 단군의 유적이라 전해지는 참성단이나 삼랑성은 그것들이 가진 상징성이나 종교적 성격 때문에 일종의 건드려서는 안 될 성역과 같아서 적극적인 고고학적 검토를 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문화재청에서 비록 상고시대 때 강화도일대에 강력한 지배세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은 했지만, 고고학적 검토가 이뤄지지 않은 이상 저 설명만으로는 신빙성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고 말씀드린 겁니다.^^;(근거는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고려 때 만든 것 같다는;;)
솔직히 단군이 실존했을 것이라는 심증은 있으나, 근거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대놓고 단군이 실존했다고 단언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 소르가이님과 있었던 토론에서도 '~봅니다, ~것입니다, ~ 수도 있습니다.'라고만 말끝을 애매하게 했던 것입니다. 어찌보면 교활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네요.^^;; 제 요지는 단군이 실존했으리라는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그렇다고 단군을 부정할 만한 확실한 근거 또한 부족하다고 생각하기에 단군 문제는 획기적인 사료가 나오지 않는 이상 누구도 단언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역사는 종교도 아니고, 확신도 아닙니다. 일정한 근거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하는데 단군은 관련기록이나 근거가 전무합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비롯한 선대의 나라에서 단군을 인정했다는 말이나 유물, 금석문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전혀 접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정작 삼국시대에도 단군은 역사인식에서 차지하는 바가 전무했다는 반증이지요. 기껏해야 청나라 때 만든 사고전서에 있는 기록을 가지고 야단법석을 떠는 정도지요. 단군은 국내외, 공식 비공식을 막론하고 증명할 근거가 전혀 없으니 인정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단군의 실존여부보다 중요한것이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 문화의 개시로서 고조선이며 고조선의 실존과 의미를 파악하는것이 중요한것이며 단군실존여부과 관계없이 고조선에서는 단군시조전승을 국가 개국신화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소르가이님/ 전해지고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금석문과 자체 기록들이 얼마나 많다고 그렇게 확신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금석문들과 기록들은 이들 국가들이 실제로 남긴 것들의 민분지일도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왜 삼국사기나 제왕운기, 삼국유사 등 우리측 기록들이 있음에도 전무하다고 무자르 듯 무시하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측 기록들이 있는 한 단군은 쉽게 부정될 수 없습니다. 계속 평행선만 달릴 것 같으니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좋을 듯 싶군요.
明治好太王님/ 저는 특정인을 생각해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단군기사만 보더라도 마늘은 한나라 때 수입한 것이요, 단군의 나이만 해도 기록별로 860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1048년설: 권람의 『응제시주應製詩註』, 권제의 『역대세년가歷代世年歌』,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서거정의 『동국통감東國通鑑』등/1908년설: 『삼국유사三國遺事』, 『동사보유東史補遺』, 『춘관통고春官通考』)
거기다 단군은 정사에 등장한 적이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이는 어느 시대에서도 공인된 역사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1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단군조선의 유물이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겁니다.(출토되지 않았다는 만분의 9999에서도 단군은 없는게 당연한 것이죠.) 그러기에 단군은 민간신앙으로서의 역할은 가능할지 모르나, 역사의 영역에는 포함될 수 없는 것도 당연한 것이지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요?
sorgai 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딱히 반대하지 않습니다만, '마늘' 이야기에 대해서는 좀 집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단군신화> 에 '마늘' 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단군신화에 웅녀가 쑥과 마늘을 먹었다고 흔히 말할 때 마늘이라는 것은 蒜(달래 산) 이라는 한자를 번역한 것인데, 蒜 은 마늘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옥편에는 마늘 산 이외에 '달래' 라는 뜻도 나오지요. 신화의 구조를 생각해 보면 저는 마늘보다 달래가 더 적절하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마늘은 이 땅에서 '자생' 하는 산나물이 아니지만, 쑥과 달래는 우리나라 어디서든 쉽게 채취할 수 있는 산나물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마취약을 추출하는 석산石蒜(수선화과의 식물) 등의 한국 자생 알뿌리 식물도 '蒜' 글자를 써서 표기하는 예도 있는 듯하니, 마늘 도입 이전에 蒜 이라 불리는 식물이 이 땅에 있었다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특히 마늘의 경우에는 종래의 蒜 과 구분하여 따로이 '대산'大蒜 이라 불렸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단군신화> 에 마늘 도입 이전에 蒜 이라 불리는 어떤 자생의 산나물이 존재했다는 것은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여전히 국민들은 마늘로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이제까지 왜 단군을 주장하시는 분들은 계몽하지 않는지 궁금하군요. 역사에서 1900년 중에서 860년의 오차가 나는 기록을 이해하라는 건 심한 듯하고...
sorgai님/ 세종실록이나 동국통감, 삼국사절요는 국가에서 편찬한 정사이고, 동국통감과 삼국사절요는 시작부터 단군조선이 나옵니다만...
단군이 나오는 것을 찾아보니 그렇다는 것인데 뭐 다 부질없는 일이긴 하죠. 어차피 단군이라는 것이 과연 우리의 역사와 관련이 있느냐의 여부인데 정작 단군에 가까운 시기로 올라갈수록 단군은 사라지고 만다는게 문제니까요. 단군에 기록된 시기의 왕조는 정작 단군을 몰랐다고 밖에 할 수 없으니...한편의 개그를 보는 기분이 듭니다. 제가 들은 가장 이른시기의 단군은 '古平檀君'으로 泰康2년 즉 AD 280년경의 벽돌파편이라던가...고평지역의 제후라는 것은 증명되었다지만 우리가 아는 단군과는 2천년 이상의 시차가 있을 뿐 아니라, 한민족의 나라도 아니었던 것으로 압니다.
흥미롭네요... 좋은 정보 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