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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19:19-28 여러 가지 도덕률1
레 19:19-28
(레 19:19)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레 19:20)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정혼한 여종 곧 아직 속량되거나 해방되지 못한 여인과 동침하여 설정하면 그것은 책망을 받을 일이니라 그러나 그들은 죽임을 당하지는 아니하리니 그 여인이 해방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니라
(레 19:21) 그 남자는 그 속건제물 곧 속건제 숫양을 회막 문 여호와께로 끌고 올 것이요
(레 19:22) 제사장은 그가 범한 죄를 위하여 그 속건제의 숫양으로 여호와 앞에 속죄할 것이요 그리하면 그가 범한 죄를 사함 받으리라
(레 19:23)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레 19:24) 넷째 해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레 19:25) 다섯째 해에는 그 열매를 먹을지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19:26) 너희는 무엇이든지 피째 먹지 말며 점을 치지 말며 술법을 행하지 말며
(레 19:27)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하지 말며
(레 19:28) 죽은 자 때문에 너희의 살에 문신을 하지 말며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19-28 / [혼합하지 말아라] 내가 이르는 규정을 잘 지켜라. 서로 다른 종류의 가축을 교배시켜 튀기를 낳게 하지 말아라. 같은 밭에 서로 다른 종류의 식물을 함께 심지 말아라. 서로 다른 재료의 섬유로 천을 짜지 말아라. 그런 천으로 짠 옷은 입지도 말아라. 20) [여종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라] 남녀가 잠자리를 같이하였다 하자. 그런데 그 여자가 이미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가진 여종으로서 아직 자기의 몸값을 치르지 못하여 자유스럽지 못한 신분이면 그 남자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죽여서는 안 된다. 그 여자가 자유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21) 남자는 자신의 잘못을 보상하는 뜻으로 여호와께서 계시는 거룩한 장막 문간으로 숫양을 가져와 면죄제물로 바쳐라. 22)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가리워 달라는 뜻으로 여호와께 그 제물을 바쳐야한다. 제사장이 이렇게 예식을 올리면 나 여호와가 그의 허물을 벗겨 줄 것이다. 23) [과일의 맏물을 바쳐라] 내가 너희에게 줄 그 땅으로 너희가 들어가 온갖 과실나무를 심으면 3년 동안은 그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아라. 3년 동안 그 나무의 과일은 부정하다. 24) 4년째에 열린 과일은 어떤 것이든지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나 여호와에게 감사제물로 바쳐야한다. 25) 5년째가 되어야 그 밭에서 거두어들인 과일을 너희가 먹을 수 있다. 이렇게 해야만 너희가 그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26) [기타 명령] 너희는 어떤 것이든 피째 먹지 말아라. 또 점을 치거나 복술행위를 하지 말아라. 27) 머리카락 끝을 돌아가며 둥글게 깎지 말고 턱수염을 자르지 말아라. 28) 세상 떠난 사람 때문에 슬프다고 몸에 칼자국을 내지 말아라. 또한 몸에 문신을 새겨 넣어서도 안 된다. 나는 여호와이다.
하나님은 구체적인 상황과 사건 속에서도 자신의 규례를 지키라고 합니다. 거룩함이란 소소한 상황 속에서도 구별되는 행실입니다.
교잡을 금하는 규례(19)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서로 다른 종류의 짐승들을 짝짓기하게 하거나, 두 종류의 씨를 밭에 뿌리지 말아야 할 것을 명하십니다. 또한 서로 다른 종류의 재료로 된 직물을 짜서 옷감을 만들면 안 됩니다. 이 규례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종들이 다른 부류들과 섞여서 그 구별이 모호해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거룩한 것은 정결하고 때 묻지 않고 순수해야 합니다(신 22:9-11; 고후 6:14-16).
정혼한 여종과의 간음에 대한 규례(20-22) 만약 여성이 종이 아닌 약혼녀일 때, 남녀가 자의적으로 음행한 경우라면 둘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여자가 불가항력적으로 당한 경우에는 성폭행했던 남자만 죽였습니다(신 22:23-27). 이스라엘 남자가 아직 해방되지 않은 정혼 상태인 여종과 음행했을 때, 남자는 자신의 정욕을 위해 '간음'을 범했기 때문에 속건물을 바침으로 자신의 죄를 배상하거나 대속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형태로든 '간음'의 죄를 간과하시지 않습니다.
유실수 수확에 관한 규례(23-25) 이스라엘 사람은 새로 심은 과목의 과일에 대해 처음 3년 동안은 할례받지 않은 것으로 여겨서 먹지 않았습니다. 4년째의 과일은 거룩한 것으로 하나님께 찬송드릴 첫 열매입니다. 5년째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이 비로소 먹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같이 순종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소산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미신적 관심에 대한 규례(26-28) 가나안인들은 자신들의 신과 교제할 때에 희생제물의 피를 서로 나누어 마시는 습관이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철저히 생명의 근원인 피의 식용을 금하십니다. 점과 술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장래 일을 미신적인 방법으로 예측하는 행위입니다. 사람의 모발과 온 몸에 대해 하나님은 창조하신 모습 그대로의 온전성을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몸은 어떤 식으로든 고의로 상해를 입히거나 훼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적용: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일에서 작은 일까지 삶 속에서 구별되어 살기를 바라십니다. 당신은 오늘 하루의 소소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어떻게 드러냈습니까?
'천로역정'을 쓴 존 버니언은 어느 날 우연히 할머니 몇 사람이 양지에서 햇볕을 쪼이며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들은 기쁨이 가득 찬 얼굴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존은 그 순간 가슴이 뜨거워져 그 자리에 엎드려 기도했으며 새 사람이 되는 확실한 경험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위대한 신앙의 문학은 바로 그 기쁨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기쁨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 설 교 >
분노를 극복하는 법
레위기 19:23–25 / 윤봉원 목사
1. “지적 재산권”“지적소유권”을 왜 주장할까?
오랜 기간 동안 삼성과 애플은 서로 자신들의 특허를 상대가 침해했다고 소송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들의 특허권을 침해하고 사용할 것에 대한 비용을 몇 조나 청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례는 후진국에서는 좀 덜할지 몰라도 선지국일수록 음악, 미술, 각종 공산품, 예술품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하게 한국뿐 아니라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들의 권리를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자기 권리 확보이다. 그리고 꼭 사용하고자 하면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사용하라는 것이다.
이런 것을 우리 자신들에게 적용시켜 보자. 나의 물질과 소유,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 가족과 지체들을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무단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았을 때 화가 났는지 아니면 전혀 화가 나지 않았는지? 다른 사람이 나의 권리를 침해 했다고 여겨지는 사안에 대해서 지금까지 어떻게 대해 왔는가? 역으로 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할 때 언제 화를 많이 냈던가? 아마도 대 부분은 나의 권리가 침해를 당하고 내가 무단으로 손해를 봤다고 여겨지면 나이와 성별, 교회의 직분에 상관없이 화를 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으로 구원함을 받고 주님은 우리의 주인이시오 우리는 그의 소유가 된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목자시오 우리는 그의 양이 된 우리. 주님은 우리의 신랑이시오 우리는 그의 신부가 된 우리는 우리의 몸과 우리에게 위임시켜 준 물질과 권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오늘 말씀과 “파인애플 스토리”라고 하는 책의 내용인 어느 선교사의 실화를 통하여 모든 것의 주인이요 주권자이시며 주재자이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해 보자. 그리고 그 뜻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킴으로 성경적으로 분노를 정복하는 법을 배워 극복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
2.1. 자신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세밀하고도 정확하게 말씀해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400년간 종살이하던 것을 청산하고 해방을 받아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은 그 나라에 들어갔을 때 이방 풍속을 좇지 말고 여호와의 규례를 지켜야 했다.
하나님은 레위기 18:1-5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방 풍속을 좇지 말고,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라고 하셨다. 우리는 이미 세상과 사망의 세계에서 하나님 나라와 생명 세계로 옮김 받은 새로운 피조물들이다.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예수 믿기 전의 삶이나 예수를 믿어도 성경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야 함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아멘!!
하나님은 레위기 18:6-30에서는 좇지 말아야 할 풍속과 레위기 19장에서는 지켜야할 규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셨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지켜야할 다양한 규례 가운데 일부분이다. 이것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고 하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선악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과 동일한 권위의 말씀이요,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제 사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제 오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찌니’(레 19:23-24)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자로서 생황양식에서도 이방인들과 구별되는 규례들을 지켜야 했다. 오늘 우리도 지켜야 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더하기도 빼기도 하지 말고 다 지켜 행하라고 분명히 권고하고 성경을 마무리 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은 나무를 심었을 때 첫 3년간은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라고 하셨다. 첫 3년간은 아직 깨끗함을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4년째 수확한 것은 거룩하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제물로 드려야 했다. 이때까지도 인간의 입에 들어가면 안 되었다. 그리고 5년째부터 생산되는 과실은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다. 이러한 규칙은 이방세계에서는 유례가 없는 규례이며, 이스라엘은 생업을 포함하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모든 소유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야 함을 교훈해 주는 규례이다.
2.2. 명령대로 순종하는 자에게 풍성한 소산을 공급해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약속에 신실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이 비록 과일 농사를 지어서 수확을 했다 할지라도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대로 수확물을 처리해야 했다. 그리고 그 법칙을 잘 준수할 때 그 소산이 풍성해 지는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이 성경 원리는 오늘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 사례를 “파인애플 스토리”라는 책의 내용을 살펴봄으로 교훈을 얻고자 한다.
의학 연구에 따르면 모든 질병의 70%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한다. 이 스트레스는 MRI 촬영으로도 나타나지 않는다. 단순한 증상 치료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약물을 가지고 치료하다가 많은 부작용의 피해를 입기도 한다. 최선책을 문제를 주신 하나님의 시각(視覺)으로 보고 고통스런 기억들을 변환함으로 해결할 수 있다.
서론에서 제기한 것처럼 우리는 살아가다 보면 대인관계에서 분노가 속에서 치솟아 오를 때가 많이 있다. 그때 그 분노가 잘 참아지던가?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어떻게 지금까지는 극복했는가? 몇 날 몇 일 몇 달 몇 년을 속상해 하지 않았던가?
특히 빌려 준 돈을 못 받았을 때, 보증을 서 주었다가 속상한 일을 당했을 때. 사기를 당했을 때 어떻게 극복했는가? 이제 이런 문제를 “파인애플 스토리”를 통하여 성경적으로는 어떻게 분노를 정복해야 하는지 배워 보도록 하자.
이 “파인애플 스토리”는 파푸아 뉴기니(인도네시아 옆)에서 7년에 걸쳐 일어났던 어느 선교사의 실제적인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 권리를 하나님께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배워 삶에 적용함으로 어떤 갈등을 겪게 될 때 잘 극복할 수 있는지 배워 보자.
파인애플 스토리의 주인공 선교사는 뉴기니의 밀림 속 원주민을 위해서 일하며 선교했다. 그곳에서 파인애플이 먹고 싶어서 100그루의 묘목을 원주민에게 일당을 주고 심었다. 그것이 자라서 열매 맺는데 3년이 걸렸다. 파인애플이 익어서 먹을 때가 되었을 때 수확의 기쁨과 기대는 원주민들이 모두 도둑질해가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서 원주민의 선교사지만 그는 원주민들에게 몹시 화를 냈다. 그러면서 계속 도둑질을 해 가면 병원문을 닫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래도 도둑질은 계속 되어서 선교사는 원주민이 악성폐렴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아내가 운영하는 병원문을 닫았다.
그러다가 다시 병원문을 열자 도둑질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도둑질을 합당하게 여겼다. 자신들이 심었으니 자신들의 입으로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주민들은 무엇이든지 심은 사람이 임자라는 풍속을 따랐다. 화가난 선교사는 파인애플을 다 뽑아서 쓰레기더미에 버렸다.
그러고 나니 또 파인애플이 먹고 싶어서 새로 묘목을 사 와서 심으며 농부들에게 이것은 반드시 선교사가 먹을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러고 나서 3년이 지나 파인애플이 익어가니 기대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그 파인애플을 몽땅 도둑질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선교사는 병원문을 못 닫고 성냥, 소금, 낚싯바늘 같은 물건을 파는 상점 문을 닫았다. 그랬더니 원주민들이 밀림에서 살겠다며 살 수가 없어서 동내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 때 그는 생각했다. “내가 여기 온 것이 파인애플 먹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닌데…”라고 후회하며 상점문을 열겠다고 설득하여 원주민들을 다시 불렀다.
그리고는 그는 생각했다. 파인애플 농장을 지킬 독일산 셰퍼드는 구해서 풀어 놓은 것이다. 그랬더니 원주민들은 도둑질은 못해 갔지만 상점을 닫았을 때처럼 원주민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교사는 개를 없애기로 결단한다.
그러다가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돌아가서 우리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베이직 세미나를 참석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성경대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너를 위해 쌓아 두지 말고 하나님께 드려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신다.”는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는 그는 자신의 파인애를 밭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단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를 보았다.
그럼에도 원주민들은 여전히 파인애플을 도둑질 해 갔다. 그래도 선교사는 원주민들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랬더니 어느날 원주민이 찾아와서 “드디어 그리스도인이 되었군요. 그렇죠?”라고 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파인애플을 훔쳐도 화를 내지 않는 것을 보니까.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화를 내지 않는 이유는 파인애플 밭을 하나님께 다 드렸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해 줬다. 그랬더니 원주민들은 “가만, 그 밭이 하나님 거라면 이제는 훔피면 안 되잖아?”라고 하나님을 무서워했다. 그 이후로 익은 파인애플을 도둑질해 가는 원주민이 없어졌고, 잘 익은 파인애플을 선교사와 원주민이 같이 즐겁게 나눠 먹게 되었다. 동시에 많은 원주민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것을 경험한 선교사는 다른 것도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단한다. 그랬더니 더 많은 원주민들이 선교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면서 예수를 믿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성경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것이요 제 사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제 오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찌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19:23-25)
그제사 깨달았다. 선교사는 파인애플이 익은 첫 해의 것은 선교사 자신이 몫이 아님을 알았 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원주민들에게 주어 그들이 자신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기대하심을....내가 이 말씀대로 했다면 다섯째 해에는 원주민들이 내게 파인애플을 먹으라고 간청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뼈저리게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아이고! 그랬더라면 이런 골치아픈 일을 하나도 겪지 않았을 텐데!”
3. 나의 파인애플은 무엇인가“
“건강, 계획, 직장, 의지, 돈, 재산, 데이트, 활동, 친구, 의견, 명성, 음악, 각종 실력”을 하나님께 드리라.
선교사는 자기 파인애플을 원주민들이 다 먹었기 때문에 화가 났다. 우리는 어떤가? 다른 사람이 내 의견을 존중해 주지 않아서, 어떤 계획을 다른 사람들이 지지해 주지 않아서, 나의 대화 상대, 결혼 상대가 내 의견을 무시해서, 나의 실력을 상대가 인정해 주지 않아서, 내 노력의 결과를 인정해 주지 않아서, 신체장애가 있어서, 돈과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한 환경 때문에 화가 난 경우는 없는가?
선교사는 자신의 자본과 노력을 투자해서 심은 파인애플을 먹을 권리가 있었지만 원주민들은 그의 권리를 존중해 주지 않았다. 우리 의견을 내 세우고, 우리의 활동을 계획하고, 목표를 정해서 열정적으로 추구하지만 무시당하기도 한다. 나의 탁월한 결과를 인정받지 못할 때가 있다. 이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권리를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지 않으신다고 느껴짐으로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이때 선교사처럼 우리의 모든 권리를 모두 하나님께 내려놓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모든 권리를 하나님의 제단 위에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지금 하나님께 모두 드립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이것은 나의 권리다.” 싶은 것까지도 우리 마음대로 처리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그 모든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다. 이제부터는 의지, 재산, 계획, 친구, 의견, 각종 실력과 명성에 대해 “내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라고 선포해야 한다.
“내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 “모든 권리는 하나님께 있다.” 아멘!!
우리의 모든 권리는 몽땅 하나님의 것이다. 아멘!!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감사하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권리 가운데 우리에게 해가 되는 권리는 주시지 않는다. 그럴 때 불평 불만하지 말고 감사만 하라. 하나님께서 알아서 주시지 않는 것으로. 그리고 우리에게 유익한 권리는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 권리를 위임시켜 주심에 대해서 온전히 감사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 그분이 사용하라는 대로만 사용해야 한다.
이렇게 사용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노” 대신 성령의 열매인“온유”를 주실 것이다. 만약 화를 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자신의 권리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지 못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화가 날 때는 하나님께 나의 권리를 온전히 이양하지 않음에 대한 경종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권리를 하나님께 다 드려야 한다.
이것이 아래의 말씀인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눅 9:23-25)
권리를 내어 드리는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본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셨다. 그 권리를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가지셨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영원토록 뛰어난 분으로 높여 주셨다(빌 2:5-11). 할렐루야!!
4. 우리의 모든 권리를 온전히 하나님께 이양하라! 그러면 필요한 권리는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주신다.
우리는 이 시간 이후부터 우리 생각의 기준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거스르고 있지는 않나?를 따져 봐야 한다.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세밀히 생각해 보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내가 마땅히 누릴 권리를 침해 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들을 정리 해보라. 심지어 하나님은 우리가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 권리를 주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 질 때도 있다. 어떤 종류든 이제부터 우리 자신의 당연한 권리, 마땅한 권리라고 여기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제단 위에 내려 놓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각종 실력, 계획, 취미, 의지, 재산, 의견, 명성, 친구 등)을 처분하소서.”라고 넘겨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감사하겠다고 결심하고 감사하라. 왜냐하면 독생자를 희생하기까지 하셔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나에게 해가 되는 것은 절대로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실 때는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합당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종류로 우리가 화가 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기 때문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아직도 하나님께 권리를 이양하지 않은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도 하나님께 완전히 이양해야 한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눅 9:23-25)
마지막으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가 품으신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한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권리를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으로 우리를 구속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역전되었다. 할렐루야!! 우리도 예수님처럼 마음먹고 살아갈 때 나머지 모든 미래와 진로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책임 져 주시는 것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5-11)
어떤 화를 낼 상황이 닥치더라도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김으로 감사와 소망으로 승리하는 자가 되라!!
예수님처럼 나와 나의 생각을 포기하고 주권을 인정하는 길이 분노에 사로잡혀 불행하게 살아가는 삶을 청산하는 길이다!!
신자가 문신을 해도 되는가?
레 19:27-28
질문이 더 문제다.
오래 전 한국의 유명 목사님의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목회 초기엔 도시 빈민을 섬겼고 반독재 투쟁을 해서 투옥도 되어 당시 청년들에게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대학교에서 강연한 후 질의응답 시간에 학생들로부터 거의 매번 신자가 술 담배를 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럼 기독 청년이 기껏 그런 질문 밖에 할 것이 없느냐 신앙을 그렇게 협소하게 접근하지 말라는 꾸중 아닌 꾸중부터 하고는 답변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홈페이지를 통해 비슷한 맥락의 질문을 받으면 답변을 하면서 그 목사님과 같은 언급을 빠트리지 않습니다. 그런 질문들 중에는 신자가 머리에 염색을 해도 되는지, 몸에 문신을 해도 되는지 등이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는 생활 여건과 방식이 아주 단순했습니다. 오늘날은 하루가 멀다 않고 새로운 이슈들이 발생합니다. 신자들의 삶도 복잡하고 다양해진 인간 사회의 환경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명시적 규정이 없는 일들이 자꾸 생기므로 신앙적으로 궁금증은 늘어나지만 주위에 물어봐도 뾰족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신자들이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술 담배를 하거나 몸에 문신하는 것보다 더 문제입니다. 죄송하지만 말씀을 가르칠 책임이 있는 목사들의 잘못이 큽니다. 기독교 신앙을 도덕이나 율법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바람에 신자들도 그렇게 길들여졌습니다.
교회 안과 밖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선한지 악한지 둘 중 하나로만 구분하여 시행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 믿음으로 산다는 의미의 거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그렇고 그것이 전부이지만 기독교 특별히 개신교는 전혀 다릅니다.
신자 본인과 그 행하는 일과 사람들과의 만남과 소속된 공동체는 평생토록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인도를 받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신자의 개인적으로 체험적인 친밀한 관계가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속이려 들지 말라.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명하는 계명을 실천하더라도 정작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가 없다면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장로로 구제와 십일조와 기도와 봉사에 최고로 열심을 내어도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체험이 없고 대신에 자신의 의를 앞세우고 은근히 교인들의 칭찬을 즐기고 사람들이 자기 쪽으로 모이는 것을 이용 내지 방치하는 장로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믿음이 좋은 의인이라고 칭찬을 받으나 구원도 받지 못한 죄인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의 눈은 속일 수 있으나 심령을 꿰뚫어보는 아니 심령을 지으신 하나님을 기만할 수는 절대 없습니다. 그런 자들을 보면 나중에 도대체 주님의 엄중한 심판을 어떻게 감당하려는지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합니다.
성전 중앙에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했던 바리새인은 종교로 자기를 치장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자랑한 위선자였습니다. 예수님께 영생을 물으러 온 젊은 부자 관원은 하나님보다 돈과 친밀한 교제를 했습니다. 그 두 사람 다 하나님이 외면하셨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반면에 사람들 보기에 비천하고 어리석고 도덕적 종교적으로 도무지 수준이 낮아 상대하기 싫은 사람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성전 구석에서 가슴을 찢으며 하나님의 긍휼만 바란 세리처럼 자신의 모든 죄를, 심지어 살인죄라도 내려놓고 진정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기쁘게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예수님은 세리 삭개오의 집에서 유숙하여 교제하면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언했습니다.
성경에 구체적인 지침이 없는 신앙상의 문제나 질문은 하나님과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형성 유지 성숙시키는데 장애가 되는지 아닌지로 따지면 쉽게 정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술 담배는 십자가상의 살인강도의 예에서 보듯이, 구원 받는 데 전혀 문제없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는 술에 취하거나 숙취가 지속되면 기도나 말씀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에 지장을 받습니다. 술 담배로 건강을 잃으면 하나님이 맡기신 소명과 사역에 충성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술에 취하지 말라고 했지 완전한 금주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중독으로 금단현상까지 가지 않는 한 본인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스스로 조절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머리에 염색을 하고 몸에 문신을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술 담배만큼 정신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소명을 수행하는데 직접적인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원칙적으로 신자가 해도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 레위기 율법이 금지하고 있는데 반성경적인 해석이 됩니까? 레위기가 문신을 금하는 이유를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레위기의 구조와 기본 주제를 제대로 아셔야 합니다.
죽은 자를 위해 자해하지 말라.
레위기는 17장까지는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는 제사법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후 18장부터는 여호와 신앙을 삶과 연결하여 실천하는 계명들입니다. 그 실천적인 지침을 말씀하기 전에 전제를 하나 두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를 절대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레18:3)
그들은 종교적으로 음란한 규례를 따랐습니다. 자연히 일상의 생활방식에도 오염이 되었고 죄책감은커녕 죄라는 인식도 없이 예사로 행했습니다. 가나안 족속의 그 더럽고 추한 풍속에 물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레위기가 금지하는 사항들 전부가 가나안 족속들이 예사로 범하고 있는 종교적 도덕적 죄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본문은 먼저 머리를 둥글게 또 수염도 그렇게 깍지 말라고 합니다.(27절) 자기들 신을 기념하고 숭배한다는 의미입니다. 개역개정에서 문신으로 번역된 28절 초반 말씀은 원어로는 “몸을 칼로 베지 말라” 즉, 자해(自害)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그것도 죽은 자를 위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가나안 족속들의 장례식의 한 절차라는 뜻은 아닙니다.
열왕기상 18장에 자해의 대표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바알신의 선지자들, 가나안 족속이 아닌 유대인들 450명이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엘리야가 보다 못해 혹시 너희 신이 주무시는지 모르니 깨워야 하지 않느냐고 조롱 섞인 힐난을 했습니다.(왕상18:27)
그러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며, 놀랍게도 규례 즉, 자기들의 공식적인 제사 절차에 따라서 피가 흐르도록 칼과 창으로 몸을 상하게 했습니다.(왕상18:28) 건장한 남자 사제 450명이 동시에 그랬으니 야쿠자들이 집단으로 서약하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끔찍하고 기괴한 모습이었겠습니까? 사탄이 분명히 우롱하며 조종하는데도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오히려 잘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끝내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 그 신이 주무신 것도 아니요 아예 실존조차 않는데 기도 응답은커녕 찍 소리도 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자해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에게 인간으로 최대한의 치성을 바치려는 것입니다. 자녀를 불 태워 바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어떻게든 기도하는 대로 응답해 달라는 뜻입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내용을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뤄달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해줄 수 없다면 제발 훼방만은 하지 말라고 그 신의 심술과 분노를 잠재우려는 것입니다. 어쨌든 내 뜻대로 하고 싶은데 인생을 살다보면 뭔가 방해하는 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힘이 뭔지 정확한 실체도 모르고 알 수도 없으니 일단 아무 형상이라도 만들어 놓고 인간끼리 스스로 결단하여 힘을 내거나 서로 위로하려는 짓거리일 뿐입니다.
레위기 본문에서 죽은 자를 위해 자해하는 의미는 바알 선지자들이 신을 부르거나 기도 응답을 요구하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죽을 자를 위해서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럼 그 죽은 조상 덕에 후손도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뭔가 굉장히 익숙한 생각 아닙니까?
한국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이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을 기념 회상하고 그 유지를 이어받는다는 취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귀신이 후손을 돌보아주기에 때 맞춰 절하고 음식을 바쳐야 한다는 믿음으로 제사 드리기에 반 기독교적이며 신자는 참여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또 문신하지 말라는(28절) 것은 가나안 족속들은 문신이 악귀를 쫓는다는 미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직폭력배들이 자기들 힘을 과시하여 겁을 주고 자기 단체를 결속하려는 의미와 달랐습니다. 또 젊은이들이 순전히 멋지게 남들보다 튀어 보이려는 의미도 아니었습니다.
이 또한 뭔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많은 신자들이 십자가 목걸이를 부착합니다. 혹시라도 흑암의 세력이 나를 무너트리러 올 때에 나를 지켜줄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 목걸이가 우상이요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완전히 허사로 만드는 죄입니다. 신자에겐 이미 성령이 내주하여 평생을 떠나지 않는다는 기본적 사실도 모르는 탓이라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 믿어 구원 얻었는지 재점검해봐야 합니다.
미국의 스킨헤드 백인 폭주족들이 십자가나 독일 나치 문신을 온 몸에 합니다. 악귀를 막을 수 있다는 인식이 전혀 없는 완전한 무신론자들이라면 그냥 멋으로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신자가 부적의 의미로 십자가 목걸이 하고 다니는 것이 영적으로는 그들보다 훨씬 더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 죽음의 의미와 은혜를 잊지 말겠다는 뜻으로 또 목걸이를 하고 싶은데 이왕이면 십자가 장식으로 택했다는 순진한 의도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요컨대 신자라면 삶의 사소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경의 영적 진리와 연결해서 정확히 해석해서 삶에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 더 고려해야 할 사항
신자가 몸에 문신이나 머리를 염색해도 되느냐는 질문은 정말로 예수 십자가의 은혜와 권능을 안다면 구태여 할 필요가 없는 질문입니다. 질문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신분과 특권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교리를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실제로 매일의 삶에서 말씀과 기도로 교제 동행하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자해(自害)는 피가 생명에 있기에 하나님이 주신 육체를 아름답게 가꿔야 한다는 성경적 진리를 구태여 들먹일 필요도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신자 아니 인간이라면 해선 안 되는 짓입니다. 반면에 문신과, 너무 과하게 해서 자해하는 수준이 아니라면, 염색은 각자의 믿음에 맡기면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성숙한 신자라면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우상은 실존하지 않기에 우상제사에 바쳐진 고기라도 실제로는 더럽혀진 것이 아니므로 신자라도 마음껏 먹을 자유가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진리를 모르고 왜 우상에 바친 고기를 신자가 먹느냐고 따지고 시험에 드는 믿음이 연약한 신자들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자들을 위해서 자신은 평생을 두고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청년들이 염색하고 문신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관계없습니다. 악령을 퇴치한다는 인식이 없이 단순히 치장하기 위해서 즉, 교회 다니는 청년들도 순전히 멋을 내려는 의미라면 해도 됩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신자가 문신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있거나 교회의 분위기를 해칠 우려가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믿음에 바로 선 청년 신자라면 바울처럼 스스로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럼에도 남들이 그렇게 한 것을 두고 비난 정죄는 물로 하지 말라고 금해선 안 됩니다. 이미 문신을 조금 지나치게 한 신자에 한해선 그것도 담임 목사가 예배 시간에만 조금 가려지는 옷을 입고 오시라고 개인적으로 간곡히 부탁하는 정도로 그쳐야만 합니다.
심각하게 따져볼 질문 하나
지금껏 말씀드린 것은 여러분도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대신에 질문을 하나 드려보겠습니다.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 교회 주일예배에 온몸에 문신을 한 조폭 출신이 메탈 체인을 치렁치렁 달고 그것도 얼마 전에 살인죄와 성폭행 죄를 저질러서 전자발찌를 달고 참석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은 아무런 내색 않고 다른 정상인이 처음 교회를 찾아오는 것처럼 새로 신자 한 명이 늘 것을 기대하면서 만면에 미소를 띠우고 반갑고도 따뜻하게 맞아줄 자신이 있습니까? 그 상대가 우리에게서 두려워하거나 싫어하거나 주저한다는 부자연스러운 낌새를 하나도 느끼지 않게 말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나 다른 모임에 갔을 때에 자기들을 쳐다보거나 대하는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까? 생전 처음으로 자기들을 진정한 사랑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인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습니까?
기독교 신앙은 다시 강조하지만 주일 예배 드리고, 기도 간절히 하고,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본질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개인적 친밀한 관계를 맺고서 그런 바탕에서 실제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종교적 의식과 행위를 아무리 많이 해도 예수님의 이름이 삶에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않으면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11:26에는 안디옥 교인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원어의 뜻이 바로 “작은 예수”입니다. 크리스천 즉 신자는 예수님을 닮은 작은 예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당시 아무도 상대도 않았고 혹시 눈에 보이면 멀리 도망갔던 사람들을 먼저 찾아가서 교제 했습니다. 온몸에 추한 냄새가 나고 썩어가는 문둥병자들을 만나 손으로 만지며 고쳐주었습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팔자가 기구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 같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려고 유대인들은 아예 들어가지도 않은 곳을 찾아가 구원해주었습니다. 너무 무서워 근처에 가지도 않은 군대귀신 들린 자도 찾아가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민족의 배반자라고 아예 저주 받던 삭개오는 그 집에서 같이 누어자면서 교제를 나눴습니다.
나중에는 그런 사람들 쪽에서 먼저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열렬히 호응하며 따랐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불치병을 치유해준 기적과 말씀으로 가르침 받는 은혜와 기도해주는 따뜻한 사랑 등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평생 처음으로 정상인 취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것도 당시로선 상상도 못하는 유대인 랍비에게서 말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바란 것은 아주 큰 사랑이 아니라 아무 가식이 없고 진정성이 그대로 전해지는 정상인 대우였습니다.
제가 잘 아는 엘에이에 있는 한 사람은 길을 가다가 히잡(무슬림 여인이 머리를 가리는 수건)을 쓴 여인이나, 터번을 쓴 중동 남자나, 몸에 문신하고 체인을 단 청년이나, 홈리스 들을 보면 꼭 먼저 다가가 전도지를 전합니다. 홈리스들에겐 포켓에 있는 돈을 꺼내 햄버거라도 사먹으라고 전해주고 때론 입고 있는 옷도 벗어줍니다. 그런 자들을 전혀 두려워하지도 않고 싫어하는 기색도 주저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일은 아무도 못합니다. 저는 물론이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소외되고 고달픈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은사가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분도 아주 무섭고 싫어서 쉽게 그럴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오직 예수를 모르는 그들이 너무 불쌍하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각오로 큰 용기를 내서 다가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도리어 자기를 잘 대해준다는 것입니다. 의외로 마음이 아주 여리고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학대당한 사람들이 많은데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술술 잘 털어놓는다고 합니다. 자기들에게 특별히 더 잘해주는 것은 아니라 정상인처럼 대해주는 사람을 처음 혹은 너무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면서 말입니다. 항상 박대 외면만 당했던 사람들이라 진정으로 사람답게 대해준다는 것을 그들은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능력이나 믿음으로 그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와 함께 하는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전도지와 함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전하면 성령의 권능이 역사하여 영과 영으로 교통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들을 마음 문을 열게 만들고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항상 “Jesus loves you!”라는 말을 잊지 않고 건넨다고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바꾸지 못할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문신하라고 미장원에 데려다 주어라.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더러 당장에 그렇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신자라면 최소한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대해주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람들을 판단하는 기준인 돈, 권력, 외모, 가문, 학벌 등으로 더 이상 사람을 차별하지 않을 정도의 믿음은 우리 모두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더 나아가야 합니다.
남들이 싫어하고 미워하여 상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것도 충분히 미움을 받을만한 잘못과 허물을 범했음에도 차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대해야 합니다. 홈리스들이 냄새가 나고 추해도 박대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 잘해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정상인처럼만 대해주어도 됩니다.
솔직히 그것마저 무리일 수 있습니다. 주변의 이웃이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라도 그래야 합니다. 아무리 잘못과 허물이 있어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해야 하고 최소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컨대 여러분의 자녀들이 이제 곧 청소년기에 도달해 머리에 염색하고 몸에 작은 꽃이나 하트 모양으로 문신하고 싶다고 조를 수 있습니다. 그럼 무조건 안 된다고 야단치지 말고 오늘 말씀드린 성경적 원리를 잘 기억해두었다 그대로 가르치고 가능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타이르십시오.
그래도 친구들이 다 하니까 자기도 꼭 하고 싶다면 허락하시고 미장원에까지 직접 아빠가 차를 태워주고 그 돈을 지불하십시오. 그럼 반드시 두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우선 미장원 문 앞에서 아이가 먼저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빠 말이 맞는 것 같아. 나 문신 안 해도 되. 그냥 돌아가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문신을 했다면 바로 아빠의 주님 닮은 사랑 때문에 대학교에 가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교회 출석을 성실히 할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 믿는 신자가 어떻게 문신을 할 수 있어. 하나님도 싫어하고 율법으로 금지했어. 교회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아빠가 장로인데 아빠 체면도 있지 절대로 못해!” 야단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도덕도 종교도 아니라 원죄에 여전히 묶여 있다는 증거입니다.
교회 사람들 앞에서 체면만 가장 앞세운 대표가 바로 성전에서 기도한 바리새인이었지만 주님은 그를 외면했습니다. 구원 받지 못한 것이므로 원죄에 묶여 있다는 뜻 아닙니까? 또 그런 말도 안 되는 종교적 위선을 부모에게서 보았기에 대학교에 가면 교회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정말로 현실적으로 고달픈데다 어렸을 때 말도 안 되는 학대를 당해 온갖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곳은 이민 사회가 적어서 비교적 눈에 안 띌지 몰라도 한국이나 엘에이에는 아주 많습니다.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깝습니다. 이곳도 한국교민이 겨우 삼천 명에 불과한데 교회는 열 곳이 넘고 서로 상종하지 못할 자처럼 멀리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능력을 지녔는지 아는 것이자,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또 주님의 사랑이 필요 없는 자 단 한 명도 없음을 알고 그들에게 먼저 찾아가 자기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실제로 나눠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할 때에 때를 얻든 못 얻든 담대히 전하라고 말합니다. 그 뜻이 가게 영업시간 중에도 쳐들어가 무작정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몸에 문신한 자들이나 홈리스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담대히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볼 때에 도무지 복음을 받아들일 것 같지 않고 도리어 화를 낼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구원의 때를 못 얻을 것 같은데 주님은 하실 수 있다는 즉, 때를 얻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전하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입니다. 정말로 순종 헌신하겠다는 열심만 있으면 됩니다. 그럼 가장 먼저 다른 이를 불쌍히 여기는 긍휼한 마음을 신자에게 심어주십니다. 또 그럼 조직폭력배든 홈리스든 진정으로 먼저 다가갈 수 있게 됩니다.
문둥이들에게 전도하려 문둥이 촌에 들어가 결국 자기도 문둥이가 된 성자 다니엘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또 미국에는 온몸에 문신한 오토바이 폭주족을 전도하려고 일부러 자기 몸에 문신하고 폭주족이 되어서 함께 어울리는 목사도 있습니다. 이 둘이야 말로 예수님을 가장 닮은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 본체이면서도 타락하고 고난 가운데 신음하는 비참하고 연약한 인간을 구원하려고 그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직접 오셨지 않습니까? 신자가 문신을 해도 되는지 따져서 금지시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문신을 한 자들을 먼저 찾아가 주님 사랑으로 섬기는 것, 최소한 그들을 정상인으로 대해주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