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접기
출판사 서평
신간을 알리는 어려움에 대하여
-《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 편집자의 토로
1.
도서출판 푸른역사의 편집자입니다. 출판사에서 일한 지 2년 남짓한 병아리 편집자죠. 그래서인지 담당했던 원고가 막 제본을 마친 책으로 사무실에 도착한 걸 보면 여전히 벅차고 설렙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신생아실에서, 갓 태어난 자식을 보는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스로 지은 책은 아니지만 대견합니다. 모든 편집자가 그렇듯이, 여느 책보다 내용은 뛰어나 보이고, 꾸밈새는 돋보이고……. 책의 저자에 버금가는 자부심과 애정은 솔직히 자아도취가 아닐까 자문하기도 합니다.
이 지점에서 고민이 시작됩니다. ‘이 좋은 책을 가능한 한 많은 독자들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죠. 마케팅까지 고심하는 것은 편집자의 몫이 아니긴 합니다. 책은 책 자체로 독자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말에도 수긍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책을 알리기 위해, 언론과 서점을 대상으로 한 보도자료 쓰는 일은 편집의 연장입니다. 그러니 보도자료를 쓸 때는 절로 긴장됩니다. 이 책이 지닌 가치와 의의를, 이 책의 재미를 어떻게 제대로 알릴 수 있을까 싶어 조심스럽기 때문입니다.
늘 색다른 보도자료를 쓰고 싶었습니다. 책의 특장을 정리하고, 책 내용을 발췌·소개하고, 저자를 알리는 이왕의 보도자료 틀이 ‘국화빵’처럼 여겨져서입니다. 일방적인 자랑 대신 지은이의 고심과 노력, 편집자의 진정을 진솔하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해서 진정어린 편지를 택했습니다. 지난여름, 출판사로 날아든 원고를 접하고는 단숨에 후루룩 읽어냈을 때 편집자로서 느꼈던 여운을 제대로 전할 수 있을지 걱정이긴 합니다만.
2.
이 책은 소설이 아닙니다. 작가가 지어낸, 극적인 이야기가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18세기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였고, 조선 최초의 신부였지만 끝내는 배교자로 참수형을 당한 이승훈이라는 문제적 인물이 주인공입니다. 지은이에 따르면 “그의 삶은 살아서는 처절했고 죽어서는 더욱 처참했던”(6쪽) 인물이지요. 하지만 이야기는 담담합니다.
글은 처형을 눈앞에 둔 이승훈이, 처남이자 신앙의 동지였던 다산 정약용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합니다. 국문장에서 교묘한 처신으로 목숨을 부지한 다산에 대한 서운함과 인간적 고심을 토로한 글입니다. 이어 시간을 돌려 이승훈이 북경에서 천주교에 입문하게 된 사연, 가족의 압박으로 처음 배교한 사연이 나오고 이승훈에게 세례를 준 그라몽 신부, 신부 서품을 둘러싼 유항검과의 갈등 등이 펼쳐집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분히 흘러 1822년 환갑을 맞은 다산이 세상을 떠난 매형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빌려 자신의 삶을 회억回憶하는 것으로 책은 끝납니다.
그뿐입니다. 설핏 비치기는 하지만 권력다툼도, 음모도, 빼어난 영웅도, 철저한 악인도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흔히 소설의 미덕으로 꼽히는 드마라틱한 이야기가 전개될 요소는 없습니다.
이 책은 역사책이 아닙니다. 책 곳곳에 국문鞫問 기록 등 전거를 밝히는 각주가 달리고 등장인물도 하나같이 실재하지만, 그렇습니다. 지난 일을 있는 그대로 정리·복원한 게 아니라 기록의 빈틈을 상상력으로 메웠기 때문입니다. 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승훈과 정약용의 편지는 지은이가 사실과 사실의 틈을 기워낸 겁니다. 각종 기록을 바탕으로 했을 법한 고백, 품었음직한 심사를 그려냈지만 사실史實이 아니란 점에서 이 책은 온전한 역사서를 벗어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VKzSuDDKJ0
3.
그러나 이 책은 문학입니다. 지은이가 작가가 아니라 현역 언론인이지만, 그렇습니다. 정갈한 문장, 인간의 내면을 파고든 차분한 시선에는 문학의 향취가 그윽합니다. “나의 죽음은 아무에게도 위로받지 못하는 죽음이 될 것이네. 역적의 자식으로 살아가야 할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네”(43쪽)라 털어놓는 인간 이승훈을 어느 사료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평창 이씨 집안에 전승되어 온다는 이승훈의 절명시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달려 있고 물이 치솟아도 연못에서 다한다月落在天 水上池盡”는 어떻습니까. 지은이는 이를 두고 “사후에라도 배교자라는 낙인을 지워주고 싶은, 그를 사랑하고 존경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것으로 봐야 할 것”(242쪽)이라고 말합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섬세하고, 웅숭깊은 글을 따라가다 보면, 사실에 바탕한 건조한 글을 써왔을 지은이가 어쩌면 이런 글을 썼을까 싶어 감탄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역사입니다. 눈 밝은 이라면 소설답지 않은 책 제목에서 이미 눈치 챘을 겁니다. 여느 역사‘소설’-팩션이라고도 하지요-에는 이야기를 끌어가기 위한 가공의 인물이 반드시 등장합니다. 때로는 조연이 아니라 주연으로요. 이 책은 다릅니다. 허구의 인물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승훈과 정약용을 비롯한 등장인물 모두 실재했던 인물이며, 그들이 사실과 사실을 이어갑니다. 어머니 신주를 불태운 진산사건의 주역 윤지충에서, 신부 서품을 둘러싸고 이승훈과 갈등을 빚고 결국은 천주교를 믿었다 해서 패가망신한 유항검까지 하나같이 우리 역사에 자취를 남긴 인물들입니다. 비록 그 목소리, 행동거지 하나하나는 지은이가 깁고 보탰지만 말입니다.
당대의 시대상을 충실히 그려냈다는 점에서도 그러합니다. 이승훈의 행적을 통해 당시 일부 사대부 청년 지식인들이 왜 ‘서학’에 빠져들었는지, 어떻게 선교사 한 명 오지 않았음에도 조선에서 천주교가 발흥했는지 등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지은이는 “초기 조선 천주교는 박해 받는 자들의 신앙이었고,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 지하 신앙이었다”(133쪽)고 정리하죠.
이 책은 도발입니다. 책에서 다뤄진 다산의 모습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목민심서》를 비롯한 명저를 여럿 남겨 오늘날 실학의 태두로 꼽히는 다산 정약용. 하지만 지은이가 그려낸 인간 정약용의 민낯은 다릅니다. 친구이자 동지이기 이전에 처남 매부 사이였던 이승훈을 등지고 구명에 성공합니다. 신유사옥 때 의금부 국문장에 선 다산은 저승사자였답니다. “그의 입에서 서학 관련자들의 이름이 한 명씩 나올 때마다 죽을 사람들이 한 명씩 늘었고 …… 정약용은 자신이 알고 있거나 풍문으로 들은 내용을 고발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구체적인 천주교 소탕 방법까지 제시했다.”(216쪽)
소설의 형식을 빌렸지만 다산이 천주교 신부였다는 주장에 이르면 책은 ‘다산 신화’에 대한 이의로 읽힙니다. 물론 이것은 보다 정치한 역사적 평가가 필요한 대목이긴 합니다만.
이 책은 묵직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승훈은 왜 천주교라는 위험천만한 선택을 했을까? 그에게 천주교란 어떤 의미를 갖는 종교였을까? 회개와 배교를 반복할 때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불리는 것이 왜 좋았을까? 왜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여 순교자의 영광을 택하지 않았을까?”(9쪽) 지은이는 이 같은 의문을 나름 찬찬히 파고들어 답을 찾습니다.
결국 질문은 책을 읽는 이들에게 던져집니다. 믿음이란 어떤 무게를 갖는 것인가, 신념을 지키려면 어떤 어려움을 견뎌야 하는가, 인간 이승훈과 정약용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등등. 이런 철학적 물음에 대해선 독자들이 저마다 답할 일입니다.
4.
편집자가 아닌 독자로서 이야기하자면, 물론 아쉬움이 있습니다. 당대 정치·사회상과 연결해 좀 더 폭넓은 그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으면 하는 게 그 첫째입니다. 이승훈과 정약용 말고 다른 인물들의 내면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게 두 번째 아쉬움입니다. 천주교 신도들의 모임 등 ‘지하 신앙’의 실상을 그려냈으면 초기 천주교의 모습이 더욱 생생하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 세 번째입니다. 이 때문에 배경은 희미하고 인물만 도드라지는 그림자극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이는, 지은이가 망원경으로 초기 천구교사를 조망한 게 아니라 이승훈과 정약용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신앙의 의미와 무게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또한 사실과 사료를 얼개로 삼되 상상력 발휘는 최소한으로 줄여 진지함으로 승부하려는 지은이의 의지가 작용한 결과로 보입니다.
5.
책은 넉 달간 공을 들인 겁니다. 초고를 보고 감탄을 했지만 지은이와 상의해 세 번을 고쳐 썼습니다. 덕분에 말초적 재미 대신 진지한 의미와 생각거리가 담긴 책을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부디 널리 알려져서 가능한 한 많은 이들이 신앙과 신념에 대해 한 번쯤 돌아보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