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기 어렵다
요즘 나는 시를 잘 쓰지 않는다. 이유가 많다. 하나는 시 많이 쓰지 말라는 선사의 가르침이 그럴듯하게 여겨져서다. 시는 이 잡답(雜沓)한 현상계의 커튼 너머로 본질계를 엿보는 것이라 하겠는데, 밤낮 시가 보이고 시가 샘솟듯 하는 사람들은 일류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시는 참고, 아끼고, 벼려야 진짜가 되는 법이니, 숱한 문장을 쏟아내고 나면 결국 용액의 농도는 묽어지게 마련이다. 또 하나는 도대체 시가 잘 오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도 옛날과 달리 잘 보지 않는 것은 그게 그것 같아서 구미가 당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듯이 웬만한 시적인 느낌 정도 가지고는 시를 만들기도 싫고, 없는 물감 쥐어짜듯 시를 억지로 뽑아내고 싶지는 않다. 또 다른 하나는 간결하고 리드미컬하고도 선연한 느낌을 간직한 시를 쓰고 싶은데, 최근의 내 상태로는 그런 시를 쓸 수 없다고 체념을 하게 되는 면이 있고, 혹은 그런 만큼 리듬에 대한 간절한 욕구가 함부로 쓸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가 무엇이냐. 길게 써야 하느냐, 짧게 써야 하느냐. 이런 우문에 현답을 내려 보라. 최근에 문학상을 받은, 각광받는 시를 읽다가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는데, 그것은 그 시가 일종의 넋두리에 지나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게 시라고 갈채를 보낸 사람들을 보며 시란 아무리 많이 읽어도 모를 수 있는 법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한편, 세상에는 우상을 만들어 놓고 받들어 모시기 좋아하는 족속들이 많다고 냉소적인 심정에 빠지게도 된다. 시가 읽는 사람을 울릴 수 있는 것은 개체의 목소리가 다중의 목소리로 즉각적으로 상승하여 읽는 사람들 폐부를 찌를 수 있기 때문인 것을, 오로지 자기 문제일 뿐인 시에 무슨 깊은 감동이 있을 수 있겠는지 알 수 없다. 그 시가 넋두리 같은 것은 넋두리는 리듬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리듬 없는 넋두리는 결코 노래가 될 수 없고, 그런 시는 부분 부분 발췌나 하고, 부분 부분의 상징이나 어조에 부족한 찬탄의 마음을 실어 겨우 평가를 해주게 된다. 시가 범람하고 시인들이 그렇게 많아도 많은 경우 재능 없는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딜레탕티즘에 지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좋은 시를 발견하기란 가뭄에 난 콩 찾기만큼이나 어렵다. 무엇이 세상의 문제던가. 시인은 대지의 혼의 전달자라고 누가 말했던가. 한 개체에 지나지 않는 시인이 그런 존재가 되려면 대체 얼마나 자신을 단단히 벼려야 하는 건가. 마음이 편치 못했다고 나는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그러면서 나는 생각한다. 과연 그 시는 그만큼 찬탄을 누릴 값어치가 있었던가. 이것은 우상을 주조하는 이들을 향한, 그들의 힘에 대한 내 불안에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하나의 문장이 태도를 분명하게 만들어 준다. 그것은 시라기보다 넋두리였다. 조사 처리조차 세련되지 않은. 내향성의 한 극점 강신애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은 《서랍이 있는 두 겹의 방》(2002)이었다. 시집은 여성 시인으로서 개성과 재능이 돋보였지만, 나는 왜 시집 제목이 그냥 서랍이 있는 방이 아니고 서랍이 있는 두 겹의 방이 되어야 하는지 여러 번 생각해야 했다. 이 시인은 아주 고립적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두 겹은 문단이나 사회로부터 격절되다시피 한 시인의 삶의 내부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시인의 습성 때문에 세상의 문제들 역시 문제들로 다루어지기보다는, 내향적인 저작의 결과로서, 위에서 소화된 음식물이 본래의 형체를 잃어버리듯이 시인의 소화액으로 용해되어 나타나게 된다. 오랜만에 보게 된 이 시인의 시 몇 편은 한동안의 ‘슬럼프’에서 완전히 벗어난 느낌인데, 실상 이 시인은 늘 슬럼프 상태, 일종의 만성 저혈압, 우울증 상태에 놓여 있어, 시는 그것을 견디기 위한 치료제나 같다고 해야 한다. 알바트로스 어미가 새끼에게 병뚜껑을 먹이고 있다 인형 머리가 물고기를 해변에 토해놓는다 우산 손잡이와 무관한 깃털이 라이터와 무관한 아가미가 발치에 흩어져 날린다 나는 숨이 차고 좌표를 잃는다 소보록하게 폐활량을 가득 채운 내장의 출처는 저 바람과 해류에게 물어야 한다 로프 모니터 야구장갑 노란 오리 파란 염산통 쪽지가 든 표류병 추락한 비행기 무지개 샌들…… 보도블럭과 하수구를 흘러 태평양의 무풍지대에 이른 도시의 부유물들이 잘게 쪼개져 플라스틱 플랑크톤 대륙을 빙빙 돌리고 있다 내가 해를 바로 보지 못하고 그 거대한 환류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것은 바닷새와 무관하다 내 방이 볼리스로 산을 이루었다 몸부림칠수록 그물이 숨통을 조여 온다 ?강신애 〈유령어업〉(《시산맥》 가을호) 왜 유령어업인가. 여기서 나는 또 제목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유령어업이란 말 그대로 고스트 피싱이다. 유령이 고기를 잡는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어부들이 바다에 버린 폐어구 따위에 물고기들이 희생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유령어업이란 죽은 그물, 죽은 어망이 산 물고기를 잡는 역설적인 상황을 의미하게 된다. 이 시를 쓰면서 시인은 어업 문제를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아니다? 그렇지 않고, 이것만을 말할 수 없는 시인의 생리가 유령어업을 집어삼켜 산도 높은 소화액으로 용해시켜 버렸다. 이제 시는 자기가 만든 바닷속에서 살아가는 화자의 모습을 드러낸다. 바다는 이제 저 먼 곳에 있지 않다. 화자가 사는 곳이 곧 유령어업의 터전이 된다. 박성현이라는 평론가가 아주 적절하게 분석해 보여준 이 시의 몽타주는, 저 바다가 아닌 이 도시의 바닷속에 잠겨 있는 폐어구들, 도시의 바다를 떠돌아다니는 그물 같은 것들에 얽혀든 시적 화자의 내면 풍경을 드러낸다. “내 방이 볼리스로 산을 이루었다” 이것은 시적 화자가 경험하는 내향성의 포화상태를 드러낸다. 격리된 자기 바다에 혼자서 토해 놓지 않고는, 자기 영혼의 토사물에 숨이 막혀 하지 않을 수 없는 생명의 위기, 그 질식상태를 가리켜 유령어업이라 한 것이다. 이 깊은 정신의 고통이 유령어업이라는 세계의 문제들과, 안과 밖의 구별 없이 하나의 용액으로 합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분명 만나기 어려운 진경을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견고한 생각을 얻는 어려움 세상에 진짜가 어디 흔하겠느냐만 시인들 가운데 저 사람은 분명 애쓰고 있고 그 노력을 뒷받침할 만한 지성이나 재능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 시에 무슨 지성이며, 그렇다면 또 재능은 무엇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둘 다 놓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지성 없는 시인들, 참 많이 본다. 시인들이 만나서 노는데 야구, 축구 얘기, 돈 버는 얘기, 시정의 가십거리 외에는 나올 만한 진짜 문학 얘기나 삶의 문제들에 관해서는 장삼이사 이상의 잡담이나 몇 분 가지도 못할 자기 취향의 떠벌일 얘깃거리밖에 못 가진 시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도 그 사람들이 다 시인이다. 물론 야구 구락부 만든 시인들 얘기는 아니다. 재능에 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재능이 크든 작든 시를 쓸 수 있고 발표할 수 있음은 당연하고 또 마땅히 권장해야 한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며 휴일에는 저마다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역량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거품 없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여기서 쓸데없는 허세가 없어지고, 불필요한 다툼을 만들지 않고, 남을 위하고 자기에게 냉정한 태도가 갖춰질 수 있다. 문단에서 둘 다 갖추어진 시인 만나기가 어렵지만, 박현수 같은 이는 자기 척도를 설정하고 이 척도에 자기를 맞추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얼핏 강아지인가 했더니 욕실 잎에 뭉쳐진 수건이었다 얼핏 수건인가 했더니 느릿느릿 일어나는 강아지였다 이럴 때마다 흠칫 놀라는 건 얼핏 본 것이 진짜 모습이 아닐까 두렵기 때문이다. 이때마다 형상이란 건 무엇과 무엇 사이의 진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깨달음이 아니길 바란다 사물이란 것은 수건과 강아지 사이에서 흔들리다가 얼핏 볼 때만 제 모습을 들키면서 보고 싶은 대로 꼴을 취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쳐내려 애쓴다 사물의 둔갑술 얼핏 본다는 위대한 관법 이런 말도 다시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가장 견고한 생각만 하기로 하는데, 머리를 감을 때 얼핏 누군가 욕실 문 앞에 서 있어 눈을 닦고 보니 외발로 서 있는 선풍기였다 다시 머리 감다가 얼핏 선풍기이려니 했더니 코앞에서 물끄러미 보고 있는 막내였다 ? 박현수 〈얼핏 본다는 것〉(《시와표현》 가을호) 사물을 바로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말하기 힘들다. 사물을 바로 본다면 그것은 자기를 바로 본다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내 눈에 비친 것이 강아지냐 수건이냐 하는 것은 외계의 것이 아니라 내 감각 지각에 딸린 문제이고, 이 감각 지각을 외부에 맞추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칸트의 물자체에 관해 심하게 고민한 적이 있는데 철학적이지 못한 두뇌로 과연 물자체는 알 수 없고, 우리는 다만 정신의 능력으로써 혼란스러운 외부에 질서를 부여할 따름인지 생각하느라 아주 힘들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유심, 이 일체유심조라는 것은 감각과 의식,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밝히는 데는 영락없어 보이는데, 이 외계가 그렇다면 어떻게 존재하느냐고 하면 그것이 옳다, 하고 딱 잘라 판단할 수 없다. 다 공부가 부족하고 능력이 미치지 못해서일 것이다. 누가 서 있나 했더니 선풍기였고 선풍기였나 했더니 작은 아이더라는 진술에는 유머가 담겼다. 견고한 생각만 하기로 한 화자에게 왜 이런 착시가 오는가. 그것은 전날 술을 마셔서일 수도 있고 육체가 노쇠해감에 따라 시력에 문제가 생겨서일 수도 있다. 견고한 생각에의 의지는 충동과 노쇠 같은 자연의 힘에 침습되어 위기를 겪는다. 시적 화자는 이 위기를 유머러스하게 시 속에 노출시킨다. 하지만 견고한 생각을 향한 의지만큼은 이 시를 쓴 이가 〈세한도〉라는 시로 등단한 사람임을 재확인하게 한다. 겨울을 견뎌야 살아갈 수 있다. 시선을 고정하는 어려움 1980년대 내내 그리고 1990년대 전반기까지의 노동문학이 하나의 ‘유행적’ 사조로서는 시대적 소명을 다 마친 것처럼 보였을 때, 진정성을 둘러싼 진짜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노동자가 일조일석에 사라질 리 없고 노동문제가 한 해, 두 해에 해결될 리 없건만, 이제 잔치가 끝났다고 생각하자 다른 집들 찾아가느라 분주들 했다. 본래 그런 것이라고, 선사께서 벌이 꽃을 찾는 게 다 꿀 때문이 아니냐고 그러시길래, 나 또한 그런 족속의 하나임을 자인하면서도, 어디 그렇지 않은 시대착오적인 사람은 없느냐고, 귀족을 닮은 사람을 알고 싶다고 생각할 때 떠오르는 사람이 몇은 있다. 약삭빠르면 살아남기야 좋겠지만 시는 시대마다 기울어간 자국이 너무 선연해서 보기 싫은 법이고, 비록 금방 드러나지 않아도 자기를 지키며 자기 내부의 논리를 따라 진화해 가는 모습에는 관심이 가게 마련이다. 『이자』가 출간되자마자 경제 경영 부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실용서로 분류한 서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사람들은 이자의 먹이가 되고 말 것이라는 경고와 아울러 이자를 먹는 전략과 이자에게 먹히지 않는 전략을 제시한 책이었는데 먹고 먹히는 문제가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선 것이다// 『이자』의 인기는 하늘을 칠 만큼 높아 『이자전략』 『이자의 비밀』 『이자해법』 『이자이야기』 『이자를 먹는 사람들』 『이자 게임』 『이자 전문가』 등 줄줄이 출간되었다// 이자를 먹는 사람들을 소개한 책도 이자에 먹힌 사람들의 참상을 고발한 책도 이자와 당뇨병의 관계를 쓴 책도 이자와 식생활을 파헤친 책도 있었다 이자와 다이어트의 관계를 쓴 책도 이자를 고민하는 사람들을 상담한 책도 있었다// 이자를 소개한 카페가 등장했고 이자를 상대로 한 게임이 출시되었고 이자를 메뉴로 삼는 식당이 개업했다 어느덧 이자는 새로운 문화를 이끄는 주자가 되었다// 이자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갑갑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성형수술을 하려는 사람들도 이자의 도전기를 읽고 난 뒤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이자』를 구입할 수 없는 사람들 중에서 서점에서 훔치다가 붙잡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서점들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두려워해 고발하지 않았다// 『이자』의 후속편이 곧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여기저기 이자의 전략처럼 흘렀다 ? 맹문재 〈『이자』 이야기〉(《시에》 가을호)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 시가 변죽 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가 안고 있는 본질적 환부까지 파고들어 가는 시를 쓰는 일이 어렵다. 무엇보다 시인 자신이 그것과 대면할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고, 자신의 일상과 의지 사이의 괴리를 감당할 견인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자라는 것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적인 운영 원리라는 것은 텔레비전과 신문에 넘쳐나는 기사들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이 이렇게 이자라는 책의 형태로까지 우리 앞에 대두해 있는 풍경은 자못 흥미가 당긴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이자라는 말이 자칫 산문적 나열에 그치기 쉬운 시에 탄력을 주면서 동시에 그토록 어디서나 출몰하는 이자의 속성에 어울려 보인다. 맹문재 시인만큼 소걸음인 사람도 참 드문데, 느릿느릿 걸어도 황소걸음이라는 것, 이 시인이 나아가는 모습에서 새삼 느낄 수 있다. 여성은 성스럽다 어렸을 때는 《여자의 일생》을 읽고 철 들어서는 《춘희》를 읽고 비평을 하면서는 박경리나 박완서나 공선옥을 읽으면서, 그리고 세상에 여성 없이는 조화도, 사랑도, 평화도 없으리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여성을 떠받드는 종교라도 있으면 입도라도 해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버지니아 울프의 《올란도》처럼 신비스러운 소설을 한 번이라도 더 읽어보고 싶고, 토머스 하디나 D. H. 로렌스처럼 여성의 삶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는 문학이 참 귀하게 여겨졌다. 여성은 아무리 남루하게 버려져 있는 순간에도 더럽혀지지 않는 성스러움 같은 것을 품고 있는데, 그것은 그 남루함 속에 남자들의 죄를 대속하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고속버스 터미널 지하 계단에서 본 노숙자의 새까맣게 때 묻은 발이 왜 그렇게 성스럽게 느껴졌는지 두고두고 생각해 보았을 때, 바로 며칠 전에야 떠오른 답이 바로 이 속죄라는 것이었다.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의 헤스터 프린이, 토머스 하디의 《더버빌 가의 테스》의 여주인공이 성스럽게 보이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속악스러움의 대가를 우리를 대신해서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소녀가 목욕탕에 들어올 때 화분 속의 앙상한 나무 같았다 등을 밀어달라고 이태리타월을 내밀었다 웅크리고 앉은 소녀의 왜소한 가슴 까만 버찌에 물기 맺혀 있었다 큰 잎사귀 뒤에 숨은 검붉은 열매 버찌는 물속에 잠긴 채 익어가고 있었다 소녀의 등은 황색 잎사귀 툭 튀어나온 잎맥들이 오랜만에 물세례 받는다 이렇게 숨어 있었으니 그동안 몰랐었지 토해내지 못한 밀어들이 새까맣게 쏟아진다 나도 원래 나무의 혈통 심장에 부드러운 흙이 쌓여 있다 그러나 너무 깊이 뿌리내리지 말아라 아름다운 꽃은 피우지 말아라 너무 많은 열매도 맺지 말아라 나는 소녀의 등을 열고 들어가 웅크린다 속에는 더 많은 버찌들이 열려 있다 바닥을 짚고 소녀가 자란다 화분이 깨지고 소녀가 자란다 속옷을 파는 곳까지, 정수기가 있는 곳까지 개인 사물함이 있는 곳까지 뻗어나간 나무 한 그루 사방으로 꽃잎 날려보낸다 처음 옷을 벗을 땐 두 손으로 젖가슴부터 가리더니 이젠 늘어진 가슴 당당하게 내놓은 채 체중계 위에 올라가 몸무게를 잰다 맨몸으로 해방된 버찌나무 한 그루 목욕바구니 들고 저녁 어스름 속을 지나간다 ? 박서영 〈버찌〉(《서정과현실》 하반기) 박서영의 이 〈버찌〉는 여성이 어떻게 하나의 일생을 만들어 가는지 섬세하게 보여 주었다. 이 섬세함은 리얼리스틱한 묘사 원리에 따른 것이 아니고, 사물, 대상의 외관을 뚫고 그 내부적 본질에 가닿은 섬세함이다. 그곳에서 시인은 한 그루 나무를 보았다. 이 나무는 마치 이효석의 소설에 나오는 식물들처럼 생장하고 또 노쇠해 간다. 이 나무는 자기도 모를 생명의 원리를 따라 바닥을 짚고 화분을 깨고 한 그루의 초목으로 자라난다. 이 시에서 화자가 바라본 소녀의 모습은 화자 자신의 모습에 오버랩 된다. 그럼으로써 이 목욕탕의 소녀는 모든 소녀가 되고, 또 그렇게 해서 여성 전체가 된다.
방민호 rady@snu.ac.kr
<가져온 곳 : 유심 홈> http://www.yousim.co.kr/news/articleView.html?idxno=6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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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각산의 바람과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흐르는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