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신문에 게재한 원고입니다.
명가를 찾아
전주류씨 무실마을
예로부터 안동은 선비의 고장으로서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고 불리는 곳이다. 안동지역에는 퇴계 이황선생을 비롯하여 수많은 명유석학들이 배출되었고, 조선조 500년 역사동안 면면히 사림의 문향과 선비정신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곳이다. 뿐만 아니라 문중을 중심으로 가학을 이어가면서 경쟁과 협력을 통해 상호발전을 도모하면서 예악을 숭상하고, 선비정신을 계승해 온 명문가가 많다. 안동지역의 허다한 문중 중에서도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문중이 있으니 바로 전주류씨 수곡(무실)문중이다.
전주류씨는 고려 보문각 직제학을 지낸 시조공 류습(柳濕)이 완산백에 봉해졌기 때문에 관향을 전주로 하고 있다. 류습(柳濕)의 상계는 알 수 없으나 류습(柳濕)의 5子 1壻가 모두 문과에 등제(登第)하여 일약 명벌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2세 류극서(柳克恕)는 보문각 직제학을 지냈고, 3세 류빈(柳濱)은 태종 이방원과 동방급제를 하여, 조선 개국에 기여하였으며, 4세 의손(義孫)은 집현전 3선생이라 칭해지신 분으로 예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5세 류계동(柳季潼)은 도승지, 6세 류식(柳軾)은 인천부사 증 이조참판을 역임하면서 대대로 서울 충무로 필동에 거주하면서 잠영지족으로 대를 이어갔다.
전주류씨가 안동 무실에 입향한 것은 9세 류성(柳城 1533〜1560)이 청계 김진(靑溪 金璡 1500〜1580)의 맏사위가 되면서부터이다. 류성은 처향인 내앞마을에서 15리 정도 떨어진 수곡(무실)에 복거하고 아들 岐峯 柳復起(1555〜1617)와 墨溪 柳復立(1558〜1593)을 낳고 28살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으며, 청계의 따님인 아내 김옥정 마저 남편의 3년상을 마치자 곡기를 끊고 순절하고 말아 무실문중은 최대의 위기에 봉착한다.
류복기 형제는 각각 3, 6살의 외간을 당하고 6, 9살에 다시 내간을 당해 천애고아의 신세가 되었으나 10년간 외삼촌인 학봉 김성일에 의탁하여 성장하면서 학봉으로부터 학문적 성취를 이루게 된다. 성년이 된 유복기는 영덕정씨와 혼례하고 무실을 토대로 거처하면서 연로한 조모를 봉양하면서, 학봉으로부터 받은 ‘근신’과 ‘학문’을 신조로 가문을 부흥하고자 힘쓴다. 학봉선생을 좇아 수학해서 사림으로부터 문학과 덕행으로 존경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友潛, 得潛, 知潛, 守潛, 宜潛, 希潛 등 6명의 아들을 두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유복기의 나이 38살 때였다. 유복기는 아우 류복립과 아들 友潛, 得潛, 知潛, 守潛, 宜潛을 데리고 여강서원에서의 창의를 시작으로 예천 송구, 문경 당교, 팔공산, 경주 등지로 다니면서 적을 방비하고, 정유재란에는 망우당 곽재우의 의진에 참여하는 등 맹렬한 의병활동을 통한 구국의 대열에 앞장섰다. 무실문중 남자는 어린아이를 제외하고 모두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큰집으로 출계하였던 아우 유복립이 초유사였던 외삼촌 학봉을 따라 진주성 싸움에서 분사하였다. 기봉 유복기는 말년에 가문을 부흥하고자 기양서당(岐陽書堂)을 세우고 경전을 공부하고 위기지학에 힘쓰며 후세 교육에 매진하였다. 가까운 족친이었던 광해조의 권신 유영경(柳永慶)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가까이 하지 않았음은 기봉의 청렴개결함이 드러나는 일화라고 하겠다. 류의손과 방조인 류숭조와 같은 전주류씨 先代名祖의 명성을 ‘水谷’에서 재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운 것이다.
아들 류우잠, 손자 류직으로 대를 이어가는 동안 전주류문은 동몽교육에 힘을 쏟는다. 동몽교육은 가정교육이다. 전주류문은 대를 이어가는 동안 철저하게 가학을 계승하는데 주력한 결과 수많은 문인달사를 배출하였다. 지면관계로 일일이 다 싣지는 못하지만 檟亭 柳奉時, 慵窩 柳升鉉, 陽坡 柳觀鉉, 醉軒 柳賁時, 蘆厓 柳道源, 三山 柳正源, 東巖 柳長源, 大埜 柳健休, 壺谷 柳範休, 壽靜齋 柳鼎文, 素隱 柳炳文, 好古窩 柳徽文, 定齋 柳致明, 西坡柳必永, 東山 柳寅植 등 퇴계학맥도에 적을 올린 사람이 26명이나 되니 전주류문의 학문적 성세가 어떠했던가는 짐작할 만하다.
정재 류치명(定齋 柳致明1777~1861)은 19세기 영남유림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였다. 대산 이상정의 외증손인 그는 상변통고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동암 유장원(東巖 柳長源 1724~1796)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고 손재 남한조의 문하에 나아가 외증조부 이상정의 호학(湖學)을 계승하여 李滉→ 金誠一→ 張興孝→ 李玄逸→ 李栽→ 李象靖→ 유치명으로 이어지는 퇴계학통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전주류문은 시대적 과제 앞에 적극적으로 나선 가문이다. 구한말과 일제치하를 거치는 동안 전주류문에서 독립운동가로 서훈된 분은 무려 32명이나 된다. 의병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임동 챗거리장터 만세운동, 협동학교를 기반으로 하는 교육운동, 만주에서 무장투쟁 등 화려한 독립투쟁의 선봉에 무실 전주류문이 있었다. 東山 柳寅植(1865-1928)은 척암 김도화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신채호, 장지연 등과 교류하면서 안동에서 협동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고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등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전주류씨 가문이 이렇게 독립운동에 앞장선 것은 아마도 선조이신 기봉, 묵계 형제분의 임란창의 정신이 계승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며, 조선조 중후기를 지내는 동안 영남사림의 주류를 형성하고 시대정신에 충실하며 살아온 가문의 긍지가 베어있는 듯하다.
무실 전주류씨는 수곡(무실)을 근거지로 하여 朴谷(박실) 大坪(한들)․ 馬嶺․ 高川․ 三山등지로 分洞하여 동성반촌을 형성하면서 발전하는 동안 문과급제 10명 , 사마시 30명을 배출하고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 백졸암(百拙庵) 류직(柳㮨),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호고와(好古窩) 류휘문(柳徽文) 등 5분을 불천위로 모시고 있는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임하댐 수몰로 선산의 일선리로 옮겨가고, 안동땅 옛 고향에서는 옛날의 영화를 찾아볼 길이 없지만 다행히 안동시에서 기산충의원을 건립하고 9월 19일 준공식을 거행한다고 한다. 기봉·묵계의 임란창의와 기봉의 다섯 아들의 창의정신을 기리고 이를 계승하고자 함이라고 한다. 다행스런 일이고 또 기대가 큰 일이다.
첫댓글 김정현선생님 고맙습니다.
삼산사랑방에 중요한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