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종일(서일대학 민족문화과 교수)
조말생(趙末生, 1370-1447)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서예가로 자는 근초(謹初), 평중(平仲). 호는 사곡(社谷), 화산(華山). 본관은 양주(楊州). 서운관정(書雲觀正) 의(誼)의 아들이다.
조말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학문을 힘써서, 1401년(태종 1) 중시문과에 장원급제에 뽑혀서 요물고부사(料物庫副使)에 제수되었고, 감찰(監擦), 정언(正言), 헌납(獻納)을 거쳐 이조정랑(吏曺正郞)으로 영전하였다. 1403년(태종 3) 등극사(登極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7년(태종 7) 문과 중시(重試)에 둘째로 뽑혀 전농시부정(典農寺副正)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장령을 거쳐 1411년(태종 11)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가 되었다가 곧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에 임명되었다가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1418년(태종 18) 이조참판을 제수받고 품계를 뛰어서 가정대부(嘉靖大夫)로 가자(加資)되자, 조말생은 사양하여 말하기를, “신이 오래 출납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조금도 계옥(棨沃)한 것이 없사온데, 등급을 뛰어 제수하시오니 성은이 너무 지중하와 진실로 마음에 부끄럽사옵니다”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경을 대신 자리에 두고자 하나 아직 천천히 하려 하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이어 8월에는 형조판서를 제수 받았다가 곧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군정(軍政)에 관한 시종(侍從)을 맡아 태종의 총애가 더욱 융숭해졌다.
1419년 6월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후, 조말생은 병조판서로서 세종의 지시를 받아 ‘대마도는 조선 당이며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속한다’는 서찰을 대마도주에게 전하기도 하였다. 1426년(세종 8) 장죄(臟罪)에 연좌되어 외직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1432년(세종 14)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고, 1433년(세종 15) 함경도 관찰사 겸 함흥부윤 때 우의거(亏狄哈)침입을 격퇴하였으며, 1435년(세종 17)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1437년(세종 19) 예문관대제학을 지내고, 1438년(세종 20) 경상․ 전라․ 충정 도순문사로서 축성을 감독하였다. 1439년(세종 21) 궤장(几杖)을 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임술년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승차 되었다가, 이 해에 세상을 떠나니 이때가 78세이다. 시호는 문강(文剛).
특히 묘비는 귀부와 비신, 팔작지붕의 옥개석으로 되어 있는데 웅장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말생는 죽어 금곡에 안장되었으나 그곳에 고종황제의 능이 들어서면서 수석동 산2-1번지로 이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조말생 묘비는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고산대로 길(석실서원지) 수석리 입구에 있는 문화재안내 표지에는 ‘조말생 신도비’로 되어 있다. [출처] 楊州趙門(양주조문) 조말생(趙末生, 1370-14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