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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갈라디아서 3:15-22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 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먼저 예수를 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안다’의 의미는 들음으로 알고, 보고 알고, 느낌으로 알고, 만져서 아는 오감의 정도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안다’의 의미는 사랑하는 자들 사이의 관계의 언어입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하나 됨의 의미를 가지는 말이에요 쉽게 말해 부부 사이의 하나 됨과 같은 겁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낼 수 있도록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담길 수 있는 그릇을 먼저 만들어주십니다.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피조물로 만들어 가시는 과정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성경 66권을 꽉 짜면 ‘사랑’이 나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 마지막에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16:22)는 말을 하면서 편지를 마치는 거에요.
우리가 흔히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보지도 못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학습이나 훈련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어떤 면에서 출생적인 것이에요. 사랑받기로 작정 된 자들만 그 사랑을 알게 되는 거란 말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대로 보지도 못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벧전1:8)
세상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너희는 알았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주심으로, 또 진리의 영이 찾아오심으로 해서 말씀 안에 있는 예수, 말씀이 가리키는 예수를 바라보게 되고 알게 되고 사랑하기까지 예수님과의 관계가 날이 갈수록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성도는 그 이름을 아는 자들이며 그 이름 앞에 무릎 꿇은 자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담아서 주신 말씀을 통해서 그분을 만나고 사랑하는 교회라는 가족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사랑하는 자녀들과 영원한 가족을 이루는 것인데, 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담으신 것이 약속의 말씀, 성경이고 이 일에 먼저 불려 나온 사람들이 구약의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오해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라고 주신 말씀(율법)을 오해해서 율법행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의 관계에 있도록 하시기 위해 율법을 주셨는데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서 당당해지려고 했습니다. 이런 것은 사랑의 관계가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신 그 사랑의 관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걸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토라’(율법. 모세 오경)는 특정인 누군가를 가리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오해하면서 그들은 실패합니다. 율법이 가리키고 있는 메시아가 오셨음에도 그 아들을 살해해버릴 정도로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기능으로 불리어 나온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다시 해석해주셨는데, 그것이 산상수훈입니다. 새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주신 분의 의도대로 성경을 제대로 아는 것, 즉 말씀의 진의를 아는 것을 두고 요한복음에서는 “네가 나를 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네가 나를 영접했구나, 그러면 너는 영생이다” 라고 표현을 합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셨잖아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새벽부터 모여서 외치는 자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물으면 정작 말을 못하지요, 교회에 열심인 교인에게 교회가 무어냐고 물으면 역시 대답을 못합니다. 다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교회를 모르면서 자기를 위한 열심만 내는 겁니다. 이게 한국교회의 공통점입니다. 절 모르고 시주하는 격이에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한 것이 결국은 자기를 믿고 자기를 섬긴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실패의 원인인 자기 의인 것입니다.
(롬10:3-4)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이유도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또 그분이 주신 말씀의 진의를 알고자 함입니다. 주께서 말씀을 맡긴 자들이 교회이기에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태초부터 계신 말씀을 믿고 말씀이신 예수를 사랑하도록 지어져가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은 우리가 말씀에 의해서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져가고 있으며, 그분의 뜻대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하고 그리스도 안, 성령 안, 믿음 안, 사랑 안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영원한 목적은 하나님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아들들의 생육과 번성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부터 반복되는 말이 생육과 번성입니다. 구약에서는 생육과 번성을 많은 자손, 많은 목축의 소유, 많은 재산 등으로 설명을 했지만, 신약을 가진 우리는 그 생육과 번성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안,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생육과 번성임을 알았단 말이지요. 그래서 성도의 삶의 모든 여정은 이런 한몸으로 생육과 번성의 과정입니다. 어느 누구 하나도 빠지면 그리스도의 몸이 이루어지지 않는 생육과 번성입니다. 에베소서에 나오는 것처럼 돌 하나라도 빠지면 하나님의 집이 지어지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아들 예수를 보내셔서 십자가를 지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자유하게 하셨는데,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말씀( 진리의 영,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로 하여금 말씀이 되게 하십니다. 옛사람의 해체와 새창조가 진행되는 모든 과정으로 인생인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약속의 아들들의 모임입니다
대한 예수교 그런 게 교회가 아니란 말이지요.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작동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만 교회입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에 물을 내는 반석이 따라다녔다고 합니다(고전10:4)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물은 말씀, 진리를 메타포합니다. 반석이 물을 내었다는 말은 단순히 그들이 마실 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교회들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말씀, 진리의 말씀, 그 생수, 생명의 양식이 우리가 아버지 집에 갈 때까지 평생 우리에게 주어질 것을 보여주는 거에요.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우리를 매일 살려내는 양식으로, 주 기도문식으로 표현하면 내일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성도는 그렇게 말씀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의 이 모임도 말씀 사랑 모임입니다. 유튜브도 말씀 사랑이지요. 한마디로 우리는 말씀이라는 공통분모가 아니면 이 자리에 모일 이유가 없습니다. 주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을 이렇게 모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나눔으로 새롭게 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은 곧 말씀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약속이) 먼저 여러분을 사랑한 겁니다. 언제요? 창세 전에. 그래서 말씀이 시도 때도 없이 우리 뜻과 상관없이 집요하게 여러분을 스토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지 인생을 지 맘대로 살수 없어요 . 계시록의 두 증인처럼 말씀이신 주님과 동행하면서 세상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말씀을 증거 하다가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해 큰 성 길가에서 죽습니다. 이 세상은 말씀을 미워하고 말씀을 받을 그릇조차 없다 보니 이땅을 다녀가신 예수님의 운명에 연합된 성도는 그분처럼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해 큰 성 길가로 쫓겨나 거기서 생을 다하게 됩니다.
세상을 그들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하겠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공인 거에요. 세상은 그런 용도로 존재합니다. 아직 이 땅에 남은 소수의 성도를 위해서 세상 역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 한 사람이 그리고 그 성도의 죽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의 시각으로는 불필요한 찌끼로 보이겠지요 없어도 되는 그런 존재.. 그런 인생을 살다간 대표적인 사람이 바울이고 예수님이 천국 갔다고 하신 거지 나사로에요.
이렇게 주님과의 동행은 세상이 보기엔 불행한 삶이지만 그들을 성경은 세상에 감추어진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에 의해 목적지로 끌려가고 있는 성도의 삶은 세상과는 다른 층의 삶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는 그때로부터 이스라엘의 달력을 바꾸셨습니다. 출애굽 한 유월절을 한 해의 첫 날로 삼으십니다. 이스라엘의 시간이 바뀌어버린 겁니다. 이스라엘에는 세상과 질이 다른 시간, 수직적인 시간이 흐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살고있는 시간은 두개의 층입니다. 일반적인 역사의 층이 있고 완료된 묵시의 층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렇게 묵시와 역사를 겹쳐서 살기 때문에 그들 삶이 고난으로 여겨집니다. 쉽게 말해 자기를 위한 인생을 살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우리에겐 주가 계시니까요 그리고 그분과 함께 영원을 살아야 하기에 날마다 별세하는 다른 현실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롬14:7-9)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처음 시작하면서 복음(유앙겔리온. 천사가 가져다 준 기쁜 소식)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었죠? 복음은 분명 기쁜 소식인데 우리가 복음을 접할 때 진정 기쁜 소식으로 들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과 충돌하는 (우리 몸 자체가 자기 중심의 선악을 판단하는 율법의 몸입니다) 복음에 대해 알지 못하면 복음을 오해한 것이란 말이지요 그래서 거짓교사들이 그런 거슬리는 부분들을 삭제한 다른 복음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귀를 즐겁게 하는 복음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세상 교회에서 유통되고 있는 다른 복음, 다른 예수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은 지금부터 약 3천 4백 년 전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66권으로 완성된 것은 약 천 구백년 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의 모형인 3천 4백 년 전의 이스라엘과 2천 년 전의 초대교회 그리고 오늘날 교회가 무엇이 다를까요? 지금의 우리가 그 이스라엘 보다 진화했습니까? 달라진 게 있을까요? 인간들의 속성과 세상의 본질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바뀌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말씀의 진리가 바뀌지 않는 것처럼 세상 역사 세상으로 있어야 하는 겁니다. 사도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지던 초대교회부터 오늘날 교회들까지 복음을 접하게 된 사람들의 반응과 현상들에 대해 기록한 것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3천 4백 년 전의 그 이스라엘과 2천 년 전의 초대교회 때 가졌던 질문과 오해, 시행착오가 오늘날도 똑같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갈라디아서는 오고 오는 모든 세대 교회들에게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복음 안에 있는 자유란 무엇인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라는 말을 사도가 굳이 전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복음이 처음 전해졌을 때 생기게 되는 의문이 무언가 하면 하나님이 처음부터 율법을 주시지 말고 십자가로 시작을 하시지 왜 굳이 율법을 주셨다가 나중에 새 언약을 주시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질문은 복음을 접한 보편적인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반응이란 말이지요. 복음이 전해진 교회에 나타난 자연스런 현상이다 보니 그에 따른 인간 중심적인 해석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반응과 현상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의 수신자들인 갈라디안식 신앙입니다. 이 갈라디안식 신앙에서 나온 것이 교회사에 정죄된 페라기우스, 알미니안 등의 이단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인간의 율법적 행위가 더해져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교리입니다. 그런 페라기우스나 알미니안은 이미 이단으로 정죄되었음에도 이런 갈라디안식신앙이 오늘날에는 거의 대부분의 교파에서 정통교리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할 것 없이 어디나 보편화되어 버렸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런 것들이 보편적 인간들의 이성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다들 자기 구원의 확보를 위해선 자신들의 시간을 투자하고 땀 한방울이라도 들어가야 그게 내 구원으로 챙겨 가질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은혜 은혜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만으로 구원이 주어진다는 게 영 믿기지 않는 거에요. 교회의 입장에서도 그렇게 교인들의 열심을 부추기는것이야 말로 교회확장에 가장 필요한 것이다 보니 교회와 교인들의 필요조건들이 서로 맞아 떨어진 것이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다 이루심 이후엔 신앙생활에 거룩하게 지킨다는 말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흔히 성수 주일이라고 하는데, 성경에는 주일이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계시록에 기록된 ‘주의 날’은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주의 날’은 주의 계시가 나타난 날을 뜻합니다. 완전히 다른 말이에요. 구약의 안식일 대신 일요일을 거룩한 한 날로 지킨다는 말은 인간들이 인식하는 특별히 거룩한 날과 시간이 있다는 말이잖아요. 다른 시간과 달리 새벽기도에 모이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그 새벽이라는 시간도 인간들이 따로 구별한 거지요. 인간들은 이렇게 특정 시간과 공간에다가 임의로 거룩을 부여하고 싶어합니다. 오늘날 세상교회가 모이는 ‘주일’은 아무 근거가 없는 날입니다. 예전에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지하에 있던 기독교가 지상으로 올라왔는데, 그렇게 카타콤에 숨어있던 기독교가 지상에 올라와 햇빛을 보면서 바로 부패했는데 그때부터 로마인들이 태양신을 섬기던 종교에서 일요일을 주일로 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사람들은 매일이 주일이었어요 날마다 모여서 떡을 떼고 말씀을 나누었단 말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일요일 교회와서 주일로 지키고 나머지 날들은 자기 날로 사는 게 아닌 거에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모든 날이 거룩한 날이고 모든 날이 주의 날입니다. 일요일이 쉬는 날이니까 편의상 일요일에 모이는 건 오케이, 그러나 일요일이 특별히 거룩한 날이기 때문에 모인다고 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좀더 얘기하면 시간의 거룩처럼 공간의 거룩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종교인들이 성전이라고 하는 예배당에 모이면 모든 행사가 다 거룩해집니까? 특정 공간에 거룩을 부여하게 되면 그때부터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예배당이라는 공간에서 사용하는 가구나 기구들도 앞에 거룩이 붙지요 목사나 성가대가 왜 가운을 입습니까? 가운을 입는다는 것은 다른 이들과 구별한다는 뜻이잖아요 심지어 예배당이 성전이 되어버리면 하나님을 그 공간에 가두어 두고 제사라도 드리겠다는 건가요?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그런 종교의식에서 벗어나 말씀중심으로 말씀으로 발생되는 교회로 모이기 위해 목사가 가운을 입지 않았고 성가대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가지 못했지요 다시 지금처럼 되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이게 율법의 몸을 가진 인간들이 조작한 종교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라고 하지요 그런 인간들이 하는 놀이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놀이가 종교놀이입니다. 그 다음 순위가 정치라고 하지요. 그렇게 모든 인간은 본성과 거슬러 복음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흔히들 복음을 알고 나니까 힘이 빠진다고 하는데, 그것은 힘이 빠지는 게 아니라 종교의 물이 빠지는 겁니다. 우리 몸 깊이 잠재해 있던 종교라는 물이 빠지는 거예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선악과의 독성이에요 하나님처럼이라는 ...그러니까 십자가 복음을 나누는 교회는 재미가 없고 복음을 알고 나면 인생 살맛이 안 나는 거지요. 그렇게 나의 주체가 주께 차압 당하는 게 진짜 행복인데도 그것 말고 다른 복 달라고 새벽부터 모여서 하나님게 행패를 부립니다.
그렇게 어느날 복음이 우리 귀에 들리기 시작하고 말씀에 의해 내 인생이 점령을 당하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분노가 일어납니다. 가인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분노가 나타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거든요. 가짜 거룩 아래에 감추어져 있던 분노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이자 허탈함입니다. 그러나 그런 현상이 말씀이 능력이며 증거입니다. 주님에 의한 찾음인 거에요
말씀에 이해 찾아짐이 되고 말씀과 동거를 하게 된 것은 엄청나게 큰 사건입니다. 창조의 사건이란 말에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태초의 말씀에 의해 창조의 처음자리로 회복이 된거에요 하나님의 목적대로 새피조물로 지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일을 위해 죄도 사망도 잠시 허락이 될 뿐입니다. 구원이란 그런 것입니다. 물론 성도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대상으로 성도를 새 피조물이라고 하고 그들의 모임을 에클레시아, 곧 세상으로부터 불려나온 거룩한 무리라고 합니다. 창조기사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아들들을 겨냥한 첫창조였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형상이 완성된 사람이 됩니다. 그것을 맨 처음 그림으로 보여주신 것이 남자에게서 여자를 만드시고 그 남자와 여자를 합하여 사람이라 부르신 것입니다. 복수로 일컫지 않으시고 하나의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담을 만드시고, 그 남자에게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유일하게 씨를 가진 남자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출생하는 과정을 아담과 하와라는 그림으로 앞당겨 보여주신 것이지요. 신약에서는 사도 바울이 그것을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친절하게 해석을 해준 것입니다 (엡5:22-33)
그래서 예수를 모르는 사람, 즉 성도가 아닌 자들은 사람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시지 않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을 때, 한몸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사람입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은 그냥 죽은 흙일 뿐이에요. 버려져 불태워지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은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가 창조하신 피조물을 영원히 불태우기 위해 지옥을 만드셨을 리가 없다고 하는데, 성경은 지옥을 하나님께서 사단 마귀를 위해서 예비하신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지옥을 가는 것이 아니라 마귀와 결합 된 죽은 흙들이 가는 지옥입니다. 그리고 그 지옥 역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지옥이기에 그렇습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연결하여 새롭게 지어져 가는 사람들을 교회(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과 역사는 구별된 교회의 정체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잠시 보존해두신 곳입니다. 하나님이 저주하신 세상에서 태어나 세상과 결합되어 살아가는 죄인들은 이 지옥(땅의 감옥)에서 건짐을 받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알게 됩니다. 거기에 동원되는 것이 죄이며 사탄까지도 필요한 악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말씀의 사건으로서의 교회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으시고 단순히 속죄 후엔 니들이 스스로 거룩을 지키라고 점점 성화되는 노력을 하라고 하신 게 아니라 성령(진리의 영)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보혈의 은혜와 영원한 사랑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매일 확인당하면서 살도록 우리 인생에 침 삼킬 틈없이 개입하십니다. 그것까지가 복음이에요. 그것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합니다. 고린도 후서에선 “우리 산 자가 예수를 위해서 죽음에 넘기우는 것은 우리 죽을 육체에도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함이라” “하나님의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증거합니다. 박해를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모든 사건을 통해서 왜 십자가 은혜가 아니면 안되는지 그 은혜의 필연성과 심판의 당위성을 체휼하면서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인 우리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지를 알고 또 살아내게 하십니다. 이렇게 세상과 다른 현실을 살고 있는 것이 우리 구원의 현재성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