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없다의 ‘어이’가 없다는 말
이주하 변호사 글 한번 읽어보고 청원동의도 한 번씩 부탁해
https://petitions.assembly.go.kr/proceed/onGoingAll/562B4A9C51F069C4E064ECE7A7064E8B
길고양이 급식 제한 청원 유감(遺憾)
1. 제 수명대로 살지도 못한다.
집에서 사는 고양이는 보통 열다섯 해를 산다. 잘 돌보면 스무 해를 넘기기도 한다. 그런데 같은 종이, 길 위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경우는 다르다. 흔히 인용되는 통계로 길고양이의 평균 수명은 3년 안팎, 길게 잡아도 3~5년이고, 한두 살을 넘겨 살아남는 개체는 열에 한 마리 정도라고 한다.
지난 7월 16일, 이재명 대통령은 부처 업무보고에서 동물복지진흥원 설립을 “빨리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유기동물 중성화 사업을 두고는 “돈이 많이 드는데도 이견이 없다”라고 했다. 죽이는 대신 중성화로 개체 수를 관리하며 공존하는 것이 정부·지자체의 정책 방향이다.
아이러니하게 비슷한 시기에 이러한 국민적 컨센서스와 다른 내용의 청원이 시작되었다. 며칠 전 내가 언급하기도 했던, 괴기(怪奇)한 사고를 가진 유명 탐조 유튜버가 주도한 ‘소유자 없는 고양이 급식 제한에 관한 동물보호법 개정 청원’.
청원 전문을 읽어보니 요지는 이렇다.
먼저, 사유지·공동주택·공원·하천·학교 주변 등에서 관리주체의 허가 없이 소유자 없는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거나 급식시설을 두는 행위를 금지하고, 위반해 피해가 생기면 철거와 과태료를 부과하자고 한다. 그리고 지자체 공공 급식소를 법정 요건과 재심사 대상으로 통제하자는 것.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길고양이에게 적용해 온 ‘중성화 후 방사(TNR)’ 중심의 관리 체계를 중단하고, 이들을 포획해 일반 유기동물처럼 보호소에 입소시켜 입양 체계로 편입시키자는 것이다.
새덕후는 위 청원이 길고양이를 굶겨 죽이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고양이에 대한 적대감이나 혐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특별히 강조’ 한다.
2. “어이가 없네.”
그는 생태계를 지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정작 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합리적 대안과 현실 인식이라는 ‘어이’는 어디에도 없다.
먼저 세 번째 항목, 보호소 입소부터 현실을 모르고 한 주장이다. 구조 신고가 된 길고양이에 대하여는 이미 ‘구조·보호·입양’ 조치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말은 ‘구조·보호·입양으로의 전환’이지만, 실제 우리 보호소의 현실은 다르다.
최근 정부 실태조사에서, 전국 동물보호센터에 들어온 동물의 약 절반이 보호소 안에서 자연적, 인위적으로 죽는다. 자연사가 약 26%, 안락사가 약 17%인데, 실제는 더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입양은 고사하고 지자체 직영·위탁 보호소에서 수용 중인 많은 개체들이 안락사 위기나 열악한 시보호소 환경에서 제대로 된 보호나 치료를 받지 못해 민간에 의해 구조되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도 셀 수없이 많은 동물이 죽임을 당하고 있다.
고양이는 개보다 훨씬 가혹하다. 원래 보호자에게 돌아가는 유기묘는 100마리 중 한 마리, 1.1%뿐이다. 또한, 대부분의 보호소는 24시간 전담 돌봄 인력이 부족하여 새끼 고양이가 입소할 경우, 단 며칠 만에 저혈당 및 영양 결핍 등으로 폐사한다.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성체 고양이는 입양되지 못해 결국 안락사당한다. 즉, 길에서 자생하던 고양이를 ‘보호소로 구조’ 한다는 것은, 그 대부분에 대한 시한부 수용과 ‘어쩔 수 없는 죽음’을 의미한다.
이런 현실 때문에, 잡아다 가두는 대신 중성화해서 살던 곳에 돌려보내는 TNR이 인도적 표준으로 도입되어 지금까지 진행된 것이다.
청원에서 삭제를 요구한 그 동물보호법 규정은 현재 TNR의 근거이다. 따라서 위 규정을 삭제하면 결국 포획 및 보호소 수용만 하라는 뜻이다.
3. 사유지·공용부·공원 등에서 급식은 원칙적으로 금지하자는 발상 역시 놀랍다.
사유지, 공용 용지, 공원 등을 제외하면 남는 곳은 어디인가? 그리고 이것이 과연 법으로 금지하고 제재할 일인가?
밥그릇의 위치를 옮기고, 시간을 정하고, 사료는 그때그때 치우고, 급식소를 주민 동선 밖에 비치하는 등으로 조율할 수 있는 문제다. 실제로 정부의 길고양이 돌봄 지침이 권고하는 것도 바로 협의와 위생 관리다.
냄새와 해충이 걱정이라면 관리 방식을 정하면 되고, 사유지가 문제라면 동의를 얻거나 당사자 사이 자유로운 협의에 의하여 유료 임대를 하는 방식도 있다. 갈등이 있다면 관리주체와 돌봄인이 마주 앉아 협의하면 된다. 필요한 경우, 지자체의 중재도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타인에게 실질적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얼마든지 조정 가능한 사안을 법으로 금지하고 어기면 과태료를 부과하자는 발상은 처음부터 자기 생각과 반대되는 사안에 대하여는 무조건적 금지와 제재로 다루겠다는 것으로, 결국 한쪽을 없애려는 사고방식이다.
4. 법으로 길고양이에 대한 급식활동을 금지해서 길고양이를 굶어 죽이겠다는 사고는 잔인할 뿐만 아니라 실효성도 없다.
관리되던 급식소가 사라지면 고양이들은 생존을 위해 쓰레기봉투를 뜯게 되고, 돌봄 활동마저 음성화되어 도리어 도시의 위생 환경이 심각하게 악화된다. 오히려 정해진 장소에서의 급식은 흩어진 먹이 활동을 한곳으로 모아 청결을 유지하고 관리할 수 있게 만드는 매우 실효적 통제 장치이다. 무엇보다 밥을 주는 사람과의 연결고리가 끊기면 개체 수 조절이 어려워지고, 진공효과로 인해 무분별한 번식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즉, 급식 금지는 길고양이를 배척하고자 하거나 개체 수에 막연한 우려를 갖는 이들에게 일시적인 심리적 위안을 줄 수는 있겠지만, 실질적인 문제 해결이나 공공의 이익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5. 진짜 목적이 과연 새 보호인가, 길고양이에 대한 혐오인가?
새덕후가 제대로 된 문제 의식을 갖고 있다면, 길고양이 먹이금지 청원을 할 것이 아니라 급식 금지 청원 대신 부실한 국가, 지자체의 동물보호소 운영, 민간동물보호소가 국가와 지자체의 유기·유실동물 보호·관리 책무를 대체해 온 현실적 문제, 부족한 TNR 예산 등을 문제 삼았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현실 인식을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의 조사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는 1991년부터 길고양이 군집과 그들을 돌보는 사람을 법으로 보호하고, 군집의 고양이를 죽이거나 데려가는 행위를 범죄로 다룬다. 독일과 벨기에, 오스트리아는 길고양이의 뿌리인 ‘집고양이의 외출’이 문제되자 반려묘 중성화를 의무화했다. 독일은 동물보호법 제13b조를 두어 지자체가 외출묘 의무 중성화 조례를 제정하도록 했고, 이미 1,000곳이 넘는 지자체가 이를 시행 중이다. 우리와 사정이 가장 비슷한 일본은 정부가 나서서, 중성화하고 관리하며 밥을 주어 함께 사는 ’지역고양이(地域猫, 치이키네코)’를 권장한다. 일본 환경성의 2010년 지침이 그 근거이며, 도쿄는 중성화를 지원한 결과 안락사 수와 민원, 공원의 길고양이가 모두 크게 줄었다.
길고양이 급식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면 금전적 제재를 가하는 국가는 없다.
6. 왜곡된 도덕 감정인가?
새덕후는 청원에서 공중보건과 재산권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이러한 집단적 움직임을 추동하는 기저에는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도덕화(Moralization)’ 현상이 내재된 것으로 보인다. ‘새’ 중심의 생태계를 보호하겠다는 선의가 절대적인 도덕적 당위로 굳어지는 순간, 이견에 대한 관용은 사라지고 ‘도덕적 규범 위반자’를 향한 배타적 처벌 충동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도덕적 확신이 뇌의 보상 회로를 자극한다고 설명한다. 처벌이 의무가 아니라 만족으로 체험되는 이유다.
문제는 이러한 징벌적 충동이 그들 스스로에게는 ‘정의를 실현한다는 성취감’으로 정당화된다는 착각이다. 돌봄 활동가라는 제대로 된 표현은 고사하고 ‘캣맘’이라는 통상적 용어 사용조차 거부하고, ‘음식물 쓰레기 투기꾼’처럼 부정적인 어휘를 선택하고, “그들로부터 권리를 되찾자”라는 구호를 외친다. 그 의도를 충분히 선해하여, 그 나름의 선의에서 출발한 도덕관념이라 하더라도 종국에는 맹목적인 혐오로 변질되는 정확한 임계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누가 누구를 배척하는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이 청원이 내세운 생태계 보호라는 거창한 구호의 바탕에는 길 위의 가장 연약한 생명과, 그들에게 기꺼이 길을 내어준 평범한 시민들을 향한 적대감이 내재하고 있다. 법과 제도는 혐오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아니라, 갈등을 조정하고 공존을 모색하는 장치여야 한다. 정당한 돌봄을 억압하고 생명을 인공적으로 단절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무책임한 발상으로는 생태계의 균형도, 우리 사회의 도덕도 결코 지켜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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