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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중국사 목숨을 걸고 기록을 지킨 사관의 투혼
마법의활 추천 0 조회 934 08.09.11 22:11 댓글 4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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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9.11 22:51

    첫댓글 그러니까 군주를 죽일때는 속 시원하다고 가만 있던 애들이.. 사관 둘이 죽었다고... 너 오늘 맞아볼래? 이런거군요... 그건 그렇고 최저는 어찌됬나요?

  • 작성자 08.09.11 23:21

    그보다는 사관 가문의 눈물겨운 묵묵한 투쟁에 감동받은 바가 큽니다. 그리고...최저는 장기 집권은 한 것같지만, 여튼 타이틀을 지켜내지 못하고 결국 다른 경쟁자에게 당했던 모양입니다.

  • 08.09.12 01:55

    그쪽 동내는 사관의 기록을 들춰볼수 있는 모양이었군요, 그런면에 있어서 조선왕조실록은 정말 엄청난것이었군요^^

  • 08.09.12 21:00

    시기가 많이 차이나죠. 조선왕조실록의 정신이 형성되던 초창기라고 볼 수 있겠죠.

  • 08.09.12 11:31

    조선왕조실록은 왕이라도 함부로 볼 수 없었는데... 그걸 함부로 본 연산군은 결국 쫓겨났고...

  • 08.09.12 14:58

    제가 아는 어설픈 지식으로는 조선의 어떤왕도 실록을 보지 않았다(못본건지 안본건지는...)라고 알고 있는데 정말 연산군이 실록을 들춰봤나요?

  • 08.09.12 21:17

    슬픈눈동자 / 무오사화 당시 김종직 패거리를 날려 버릴때 사초를 가져오게 한 적이 있습니다. 신하들이 말리자 나머지 부분은 삭제하고 문제가 되는 부분만 가져오도록 타협을 하긴 했습죠.

  • 08.09.13 01:29

    무장공비/그건 말그대로 사초일뿐이죠,실록하곤 엄연히 다른 실록이 제작되기 이전에 사관들이 종이에 적어서 자기 나름의 비밀장소에 보관하기 위해 적어논 사초일뿐이죠, 이것이 모여서 실록이 작성되겠지만 반드시 그 사초가 체택이 된다는 보장도 없고 무엇보다 연산군도 이전왕들의 실록을 본적이 없다는거죠

  • 08.09.13 21:38

    눈동자 / 잠깐 착각하셨나본데;; 왕들이 볼 수 없는 기록은 바로 그 '사초'였습니다. 사관들의 기록이 모여 한 권의 'XX실록' 완벽하게 짜여지기 전까지 1차 기록들말이죠. 실록 자체는 국정의 기초자료로 많이 참고 되었습니다. 왕들도 필요한 부분은 많이 골라서 봤고요-.-; 왕이 함부로 볼 수 없는건 '사초' 즉 당대 사관들의 기록이 에디팅 되기 전의 물건이 었습니다요. 그것도 그럴만한게 자기 아버지나 자기 세자 시절 일이 별별 시시콜콜한 일이 기록 되는지라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생기면 제아무리 안된다고 해도 바꾸고 싶은게 사람마음인지라-.-;;;;

  • 08.09.13 21:42

    제일 유명한 경우가 바로 세종입니다. 실록을 보고자 했지만 신하들이 전철이 될 수 있다며 말리는 통에 못봤다는 얘기는 자기 아부지(태종) 돌아가시고 태종실록을 편찬 당시의 일이었습죠.

  • 08.09.13 21:49

    줄이자면 [실록은 OK 사초는 NO]입니다요. 뭐 그렇긴 해도 사관도 인간인지라-.-; 왕권이 아주 강하다거나(맘에 안들면 어전에서 바로 감투를 벗겨서 머리채를 끌고 나가게 하던 세조림하라던가) 권신들이 세도를 부릴 때라던가(예종 ~ 성종 초기) 같은 경우는 알아서 기는 모습도 좀 보여 주긴합니다 -ㅂ-;;

  • 08.09.14 10:24

    왕이 실록의 필요한 부분을 봤다는게 ....... 승정원 일기 아닌가요? 조선의 어떤 국왕도 실록을 본적이 없다는 기록을 찿아봐야겠군요,국왕이 실록을 뒤적거렸다는걸 찿는게 빠를것 같기고 하군요

  • 08.09.14 10:27

    아니 찿아볼것도 없이 선대왕의 실록을 작성시 승정원 일기와 대조하여 사실확인이 가능하고 증명된것만 찿아서 실록을 만드는데 뭐하러 현국왕이 실록을 뒤적입니까? 승정원일기 보면되지

  • 08.09.14 10:29

    물론 승정원일기의 목적과 취지가 실록과는 다른점이 있지만서도.......

  • 08.09.14 10:38

    실록 사이트에서 사초를 키워드로 검색해보니 태조때 고려우왕.창왕을 태조가 죽였다고 사초에 거짓으로 적었다고 국문이 시행된적이 있군요, 태조가 사초를 보고자 했지만 불가하다고 항소가 올라오고 그래도 받치라 명했는데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 모르겠어여, 실록에서 찿아볼려니 키워드를 뭐로 해야하는지 몰라서 검색불가능 ㅠㅠ

  • 08.09.15 11:00

    슬픈/그럼 실록은 뭐하러 만드나요-.-;;; 옛 기록이 필요한 때마다 1차 사료인 사초와 승정원 일기를 산더미 같이 쌓아두고 비교 분석 노가다하면 되겠네요;; 실록의 기본적인 목적중 하나가 그런 불편함을 막고 1차 사료들을 대조 비교 분석하여 에디팅, 왕이나 사관 개인의 감정이 실린 근거 없는 정보(예를 들자면 황희 좀 똘아이인듯 ㄲㄲ, 수홍이랑 자광이는 소인배라능 ㄲㄲ, 율곡은 중놈이네혀 등등)들을 거르기 위함 입니다. 실례로 인조 같은 경우 자기 아부지 정원대군을 추숭하는 문제로 신하들이 삐딱거리자 스스로 실록을 뒤적거려서 [아 ! 왜! 광해군, 연산군때는 추숭도 잘하는데 니들은 지랄이셔?]라는 식으로 썰을 푸셨습죠;

  • 08.09.15 04:08

    왜 실록 작성이유를 본인이 스스로 정의 내리시나요? 그리고 실록이 완성되면 3대서고에 보관하는데 왕실서고에 실록을 따로 보관이라도 했나요? 사초는 실록이 완성되면 개울가에서 물에 씻어 모든글자를 없애서 재활용 하는데 실록작성이후 사초의 존재이유가 없어지며,무엇보다 본인과 다른주장이 있으면 관련서적을 추천해서 읽어보길 권하든가 검색능력이 부족해보인다고 느낀다면 관련자료 주소를 알려줘서 가서 읽어보라고 하든가 해야지 인조때 실록을 뒤적였다는 댓글만 적어놓고선 무조건 믿으라는 건가요? 그리고 닉이 분명이 있는데 술푼은 뭡니까 술푼이......

  • 08.09.15 04:06

    실록사이트에서 추숭과 정원대군 2가지 키워드로 검색해봐도 인조가 실록을 뒤적여서 근거를 제시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혹시 상소중에 실록에서 근거를 찿아 조례를 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보고 인조가 직접 실록을 보고 근거를 제시했다고 이해하고 계신건 아닌지요?

  • 08.09.15 04:29

    무장공비//그거 영조 아뉩니카?

  • 08.09.15 10:42

    괴이불국 / 인조도 자기 아부지 추숭으로 신하들이랑 많이 싸왔숩니다-ㅂ- [야히 시밤 ㅠㅠ 추숭 못하게 하면 명나라한테 이른다!]하는 식으로 말입쥬;;

  • 08.09.15 11:00

    슬픈/그러니까;; 왕이 자기가 직접 가서 자신의 손으로 뒤적 거려야 실록을 '본 것'이 되는검미캉-_-;;; 그런 기준이라면 책벌레 세종을 빼고는 거의 '안 봤다'라고 말해도 무방 하겠습니다만;; 그리고 실록의 작성 이유는 1차적으로 국정자료입니다만. 이게 아니라면 도대체 뭐라고 생각 하시는지 궁금 하지 말입니다?

  • 08.09.15 11:00

    슬픈 / [상참을 받고 경연에 나아갔다. 임금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제주 에는 소[牛]가 많이 생산된다는데, 오늘날 말[馬]만 공납하고 소는 공납하지 않았다. 근래에 《태조실록》 을 보니, ‘ 제주 에서는 해마다 소와 말을 공납했다. ’는 말이 있는데, 어느 때에 와서 소를 공납하는 것을 폐하였는가.] 세종이 실록을 뒤적거리고 "왜 세금 안내냐? 맞을래? 뒤져서 나오면 10원에 1대다?"라고 말한 기록이 되겠스빈다(..먼산)

  • 08.09.15 11:00

    슬픈 / 아 참 '술푼'은 '괴이불국''귀찮싸''꽁비''롹''애란비'등등 호칭과 같이 가볍게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해봤는데; 기분이 나쁘시다면 수정하겠습뮈다아

  • 08.09.15 17:29

    http://www.historychannel.co.kr/Program/Program.asp?P_id=HPG2070003H003&g_name=한국사

  • 08.09.15 17:32

    제가 링크를 걸줄몰라서 주소를 복사했습니다.-_- 무장공비님하고 저랑 기록을 바라보는 시각차가 있는것 같습니다. 국왕이 실록을 보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차이가 있는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디까지를 보지않았다고 봐야하는건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 08.09.15 17:37

    실록의 제작이유는 자신들이 살아온 역사를 있는 그대로 남겨 판단은 후세에게 맡기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였는가 합니다. 국정자료라던가 논쟁이 발생할때 근거자료로 사용코자하는 이유도 있을수 있겠지만 제 생각으로는 전자의 이유가 더 크지 않을까 합니다.(이유의 근거는 아무이유없이 그냥 그렇지 않을까 생각할뿐입니다.-_-)

  • 08.09.15 17:51

    슬픈 / 이 쯤에서 중간 정리로-_-;; 제 주장을 한번 더 정리해 보겠습니다. [1]실록을 기록하는 목적은 유학의 이상, 즉 후대에 기록을 남기고 군주의 모범 내지는 행동규범의 전철을 만든 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부차적인 효과고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국정에 참고 할 수 있는 자료의 의미가 강하다. [2]왕이 볼수없는 내용은 아직 에디팅이 들어가기 이전의 사관들의 1차 사료인 '사초'이고 완성물인 실록 자체는 열람이 가능하다. 앞서 보여드렸다 시피 실록 자체에 [왕이 세금문제로 실록을 열람해보고 자문을 구했다.]라고 '사실'이 나와 있는데 링크하나 덜렁 걸어두시는 의미가 무엇이신지?

  • 08.09.15 17:51

    슬픈 / 간단하게 얘기해서 아무리 유학자들이 유학이상에 목숨을 건다지만 실용적 목적이 없었다면 수십번의 에디팅을 걸치고 완성물을 다시 수 부 복사하고 인력과 재정을 들여서 보존하는 대역사를 500년 동안 꾸준히 하기란 힘듭니다. 실록은 때로는 왕의 주장을 강화하는 논거로 쓰이기도 했고 때로는 대신들이 왕권을 제약하는데 쓰이던 1차적 자료였으니까요-_-;

  • 08.09.15 20:23

    세종때도 실록을 보고자 했으나 그것이 선례가 되어 후대임금들도 모두 실록을 보게 될것이다라는 이유로 못봤고 연산군때도 실록을 보고자 했으나 사관의 반대로 못봤다는 실록의 기록은 안보이시나 보군요, 그리고 인조때 세종때 여러이유로 임금이 실록을 열람해서 주장의 근거를 삼았다는 댓글로 말하시는데 제가 무턱대고 그런가보다 할수 없으니 키워드를 알려주시면 제가 실록 사이트에서 직접 찿아보겠습니다.

  • 08.09.15 20:34

    세종때와 연산군때의 일을 실록을 찿아서 보여드려야 하는데 제가 뭐로 검색해야하는지 몰라서 히스토리채널의 영상을 올렸습니다. 무장공비님이 말씀하신걸 뭐라고 검색하면 알수 있는지 알려주시면 제가 실록 사이트에서 검색해보겠습니다. 같은걸 보고 서로 다르게 느낄수도 있기에 다만 궁금할뿐이지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 08.09.15 20:38

    저의 주장은....뭐 주장이라고 할것까지도 없지만, 조선의 어떤 임금도 실록을 읽지 않았다라고 알고 있기에 제가 알고 있는것이 잘못된것이라면 단순히 댓글로써 실록에 그런기록이 있다는 말보다는 검색어를 알려주시면 실록사이트에서 바로 찿아보고 잘못된 지식(?)을 수정하겠습니다.

  • 08.09.15 21:01

    세종때 소의 공납관련해서 태조실록을 봤다고 했는데 여기서 봤다는 표현을 세종이 실록에서 공납관련 근거자료를 찿으라 명하고 그 명에 의해 올라온 보고서의 내용을 저런식으로 표현한게 아닌가요?(지나친 억측일려나...-_-)

  • 08.09.15 21:13

    오만가지 검색어로 실록사이트를 뒤져보니 세종이 태종실록을 볼수 없다라는 기록과 태조와 정종실록은 들여오라는 기록도 있군요, 그럼 현임금은 선왕의 실록을 보는건 금지되지만 그이전의 실록은 볼수있다라고 해석해야되나요?

  • 08.09.15 21:17

    위의 이해가 올바르다면 조선임금이 실록을 본적이 없다는 선왕에 한해서 그렇다라고 해야겠군요

  • 08.09.15 21:32

    실록을 보지않았다라는 것은 선대왕에 한해서 그렇다라는 저의 결론에 대해 무장공비님의 생각은 어떻신지요?

  • 08.09.16 01:13

    슬픈 / 답글도 달았습니다만 댓글로도 조금 부연하자면 세종의 예에서 원문은 [近見 太祖實錄 -얼마전에 태조실록을 보다-]입니다. 신하들이 뒤적거려서 이렇데요 저렇데요 한게 아니라 세종이 직접 실록을 뒤적거렸다는 얘기입니다-_-; 고로 임금은 절대로 실록을 볼 수 없었다는게 사실이 아닌거죠. 실록에서 검색하시고 싶으시다면 [실록, 상고] 이 두가지 검색어를 함께 사용해 보십시오. 보통 옛 기록을 뒤적거릴때는 상고라는 표현을 많이 쓰니까요.

  • 08.09.16 01:27

    슬픈/그 외에도 이리저리 검색해보시면 신하들이나 왕들이 실록을 뒤적거려가며 옛날에는 이랬데요 저랬대요 하는 기록들이 많이 나옵니다. (확실히 왕이 실록을 직접 열람하는 경우는 책벌래 세종이 좀 별난 케이스긴 하지만; 일단 대부분의 패턴은 왕이 신하들을 시켜서[~~에 대해 알아와]죠. 이런걸 두고 '왕은 볼 수 없다'라고 말하는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리입니다요. 높으신 분들의 특권입죠 아햏햏.) 하지만 일단 분량이 너무 방대한 고로 자세한 설명은 패스하겠스빈다;; 또 다른 의견이나 의문점이 있으시다면 저기 밑의 제 글에 답글을 달아주세요-ㅂ-

  • 08.09.12 12:14

    중국왕조엔 정말 막장왕이 넘 많은 것 같은... 고려 충짜 돌림 왕만큼..

  • 08.09.12 13:43

    충자돌림 왕들이 개인적 능력으로 막장이었다고 보이진 않는데...

  • 08.09.12 14:54

    최저가 사관 둘을 죽였고 막내가 기록을 지켰다는 사실 자체가 전해지는 게 더 놀랍군요. 끝까지 물러서지 않음으로서 형제들의 행적도 역사에 전해지는 성과도 얻은 일이군요.

  • 08.09.12 21:00

    역시 사관들은 대단합니당..

  • 08.09.12 21:31

    <중국인은 한국인보다 무엇이 모자란가?>라는 책의 저자도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와 한, 당, 송나라 때까지는 결연한 기백이 있었는데, 시대가 흐르면서 외침과 반란이 잦아지자 사람들이 점점 그런 성향을 잃어 버렸다고 개탄하더군요.

  • 08.09.13 20:39

    이와 비슷한 일이 옆 진(晉)에도 있었습니다. 진 영공이 자기 할아버지 문공이 쌓아올린 영토와 부를 사치로 다 없애버리자 당시 대부 조순이 간언합니다. 하지만 영공은 듣지 않고 오히려 조순을 암살하려 하지만 첫 번쨰는 실패하고 두 번째는 영공의 주방장 사미명의 누설로 인하여 실패합니다.

  • 08.09.13 20:42

    결국 조순은 도망가고 그의 아우 조천이 도원에서 영공을 살해합니다. 나중에 전의 태사 동호가 "조순은 그의 주군을 시해하였다"라고 기록합니다. 조순의 입장으로서는 어이가 없지만 동호는 "당신은 수석대신으로서 도주를 하였으나 국경을 벗어나지 않았고, 돌아와서도 난을 일으킨 사람을 주살하지 않으니 당신이 아니면 누구란 말이요?"라고 하면서 끝까지 고치지 않습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08.09.13 21:50

    많이 배우고 갑니다요 ㄳㄳ

  • 08.09.15 17:04

    뭘요, 저도 무장공비님에게 많이 배웁니다.

  • 08.09.16 12:13

    어엇, 이런 숨겨진 분도 있었군하 헣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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