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후퇴 후 부산 피난 생활 모습
- 부산에 도착하기까지 -
가장 편하게(?) 피난 간 사람들...부러웠지요....
추운데서 고생했으나, 그래도 걸어가는 것 보다는.....
하염없이 걸어서 정처없이 가고 또 갔습니다.
그래도 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어선을 타고라도 북한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 도착한 곳이 부산(釜山), 경상남도 여러 곳, 濟州島 등... -
처음에는 산기슭에서 땅을 파고, 거적을 깔고, 신문지를 덮고 잠을 청하였지요.
땅을 좀더 깊이 파니 굴이 되었고, 그 속으로 들어가 살림을 차리기 시작하였으며, 미군이 버린 '레이션 박스'를 구해다가] 바람막이를 만들었고, 목재를 구해다가 기둥을 세워 거처를 만들었었는데... '하꼬방' - 그리고 좀더 발전된 것이 '판자집'....
부두노동의 추억 '낙수' 부산으로 간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우선 일꺼리를 찾아 부두로 향하였지요. 대학교수, 교직자, 성직자, 의사, 상인, 학생들.... 신분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하루 일하면 그만큼의 임금을 받아 그 날의 식생활을 해결할 수가 있었으니까요....
그것도 밤일을 하면 더 좋았고요.... 부두에 나가면, 벌써 지역패권이 눈에 보입니다. 서북파, 함경도파, 서울파, 부산파...등등...
특히 제3부두에서는 '노무반'에 들기위한 경쟁이 심했지요. 제3부두는 미군들의 'C-Ration'과 생필품이 들어오는 부두였어요.
산더미처럼 큰 C-Ration을 쌓아놓은 천막친 저장소에는 비밀문이 있는데, 야간작업반에서도 '중진'급 또는 '실력파'에 속해야 그 곳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비밀문으로 들어가면 ... 두 서너평되는 공간이 있고.... 앞에는 '한상' 잘 차려저 있습니다....
맛있는 각종 육류 깡통들과 과일즙, 과자류 등 백화점입니다. 미제 칫솔 치약을 비롯 비누, 쬬꼬렛도 등은 '슬적'의 대상이기도 하였지요.
두 서너달 굶은 배를 기름끼있는 것으로 채우게되면, 아무리 젊은 놈이라 해도.... 설사를 이기는 장사는 그리 없습니다. 새벽에 부두에서 나오다가... 부산 40계단을 오르노라면... 배를 움켜잡고 헤매는 신세가 ....
3부두에서의 제일 어려웠던 작업은 100파운드 감자박스를 배에서 내려지는 하역장으로 부터 약 5- 60미터 거리에 있는 치적장소까지 어께에 메고,,,, 밤새도록 계속.... 걷는 일이었다고 기억됩니다. 그러나 다른 부두에서 일하는 분들은 3부두 노무자를 부러워했습니다.
부산의 국제시장이 차츰 커가면서, 여러차례에 걸쳐 대형 화재가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부산'이 '불산'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지요.
부산 좌천동 뒷산기슭에 '하꼬방'을 짓고 .... (그 전에는 땅굴을 파고 거적을 깔고 살았지요.)
부산 대청동 산기슭에 지은 '상자집' (하꼬방) 들 모습, 1952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