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내렸는데 광릉 숲에 도착하니 거짓말처럼 비가 그쳐 버렸다. 한 줄기 빛처럼 환하고 너그러운 웃음으로 나타난 이수풀씨는 무지개에 대한 단상으로 말문을 열었다. 얼마 전 무지개 꿈을 꾸고 나서 해몽을 찾아보니 무지개의 속성은 참으로 좋지만 순간을 포착하지 못하면 허망해진다는 말이었다. 무지개 세상에 몸을 담은 지도 꽤 되었는데 무지개가 그저 아름다움의 결정체란 생각을 했을 뿐, 곧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고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던 것 같았다. 이수풀씨와의 첫 만남은 이렇듯 신선한 자극으로 시작되었다.
이수풀씨가 숲 해설을 시작한 것은 2001년, 그러니까 이 분야에서는 초기부터 관심을 가져 온 베테랑이다. 평생의 숙업인 詩를 쓰는 모임에서 숲 해설가 한 분을 만나면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산 아래 첫 집에서만 줄곧 살아온 연유가 숲 해설가의 길을 걷게 된 기다란 끈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숲을 사랑하고 벗하는 숲 해설가란 천직을 감사하며 숲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웃음을 나눠주고 있는 것이다.
이수풀씨가 보는 숲은 사생활이 있는 숲이었다. 헛되이 분주하지 않은 나무들의 지혜, 숲의 사생활에 다른 숱한 동물들이 길들여져 있다는 것이다. 마치 조직에서 보스는 한 자리에 있고 부하들만 분주히 움직이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또한 숲이 지닌 신의 속성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낌없이 주는 삶, 베푸는 삶, 그러나 진정 숲은 그것이 희생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담담함에 더욱 품위가 있다. 기다림에 대한 약속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8월부터 겨울눈의 준비를 마치고 봄을 준비하는 게 나무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게 숲인 것이다. 8만개의 도토리가 맺어 떨어져도 다시 나무로 서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보면 인간의 간섭으론 설명하기 어려운 숲의 섭리를 느끼게 된다.
숲 해설가로서 이수풀씨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며 애착을 갖는 숲은 바로 광릉 숲이다. 광릉 숲은 1987년에 삼림욕장까지 완전 개방되었다가 숲의 훼손이 심해지자 1997년 예약제 실시와 함께 일부분 폐쇄를 결정했다. 광릉 숲이 갖고 있는 의미는 학술적으로도 아주 특별하다. 지구촌 북반구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연 그대로의 온대림 숲이기 때문이다. 유네스코에서도 그 보존 가치를 인정하고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자 했지만 규모가 너무 작고 서울과 너무 가까워 언제 훼손될지 모르기 때문에 무산되고 말았다. 이수풀씨는 광릉 숲의 존재조차 특별한 의미로 보았다. 옛 임금의 사냥터였던 광릉 일대가 세조의 능으로 지정하면서 일반인들의 손길에서 보호받기 시작했다. 왕릉이 들어서면 사방 15리 안엔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숲이 보호받기 시작한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도 일본인들조차 광릉 숲의 가치를 인정하여 시험림으로 지정 보존했고 6.25 전쟁 중에도 서울 근교인 이곳만은 폭탄이 피해갔다는 게 숲이 살아남은 이유인데 신의 간섭이 없이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보존되어 온 광릉 숲은 이미 숲의 완성 단계까지 도달했다. 까치 박달나무나 서어나무 같은 극상림들이 군락으로 보이고 장수하늘소와 크낙새 같은 먹이 사슬도 볼 수 있었다. 물론 크낙새는 10년 전부터 보았다는 사람이 없지만 장수하늘소는 여기저기서 보았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신의 속성을 지닌 숲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수풀씨에게 듣는 나무나 꽃의 이야기는 더욱 관심을 모은다. 광릉 숲의 나무들도 그의 대변을 기다리고 있는 듯 성큼성큼 다가서는 느낌이었다. 뒤늦게나마 종자은행이 만들어지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야생화, 보랏빛 벌개미취가 지정되었다는 이야기는 뜻밖이었다. 우리 민족의 깊은 정서와 함께 해 온 소나무가 기후변화와 생태 천이의 과정에서 사라져가고 있고 그 한편에선 소나무를 살리기 위한 많은 노력이 진행 중이란 것도 각별하게 들렸다. 우리나라의 습지, 특히 갯벌이 지구상의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한 많은 철새들의 정거장 역할을 하기 때문에 습지와 갯벌을 지키기 위한 모임들이 곳곳에서 활성화되고 있다는 얘기도 진지하게 들렸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 등장한 브라키오 사우르스가 숲에서 뜯어 먹던 나뭇잎이 바로 메타세콰이어 나무이고 그 나무를 멸종의 위기에서 구한 것이 중국의 한 임업직 공무원이었으며 이는 인간의 간섭으로 구원된 나무의 한 예라는 설명은 감동적이었다. 덕분에 지금 메타세콰이어는 세계적인 가로수로 자리 매김을 하고 스테디 셀러가 된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도 ‘나는 세콰이어 나무를 사랑해, 나이가 들수록 잎사귀가 부드러워져’라고 표현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수풀씨는 이 나무를 통해 특별히 어른이 되어도 잊지 않고 동심을 지니고 싶어한 작가의 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느리게 자라는 회양목은 속이 꽉 차서 도장이나 호패에 쓰였지만 산에서 만났을 땐 그 밑의 물은 먹지 말라고 했다. 석회질이 많은 땅에서 자라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느티나무는 양기가 많아 음기가 센 땅인 괴산에 많이 심어져 있다고 했다. 괴산의 ‘괴’자가 느티나무 괴인 이유가 그것이었다. 꽃이 피어도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느티나무는 에너지 전략에 강해서 1000년 이상을 살 수 있고 밀레니엄 나무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꽃이 많은 벚나무는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써서 50-80년이면 수명이 다한다고도 했다. 자연과의 교감으로 선조들은 지혜로운 대처를 해왔고 나무는 나무대로 자기의 전략을 잘도 운영해왔던 것 같다. 물을 좋아하는 버드나무는 순하고 자기 방어가 없어서 오래 살지 못한다고 했다. 독이 없어서 도마나 소독저로 사용되며 한 나무에 곤충이 460여종이나 살기도 한단다. 버드나무의 껍질에는 아스피린의 성분이 있어 진통효과를 내기 때문에 이순신도 무과에 응시할 때 버드나무 줄기껍질로 상처를 감싸고 출전할 수 있었고 물이 많아 속이 썩은 버드나무 지팡이는 어머니상을 당한 딸들이 죄송한 마음으로 곡을 하면서 지팡이로 사용하기도 했다. 하긴 숲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죽은 나무도 숲의 20-30%는 되야 한다고 한다. 자연의 어김없는 질서와 그에 순응하는 모습들이 우리 사람들보다 앞선 듯하다.
나무들의 번식을 위한 전략도 다양했다. 암수 따로인 나무들이 주변에 나무가 많아지면서 짝 찾기가 어려워지자 한 그루 나무로 변한 채 암수 꽃을 따로 피우더니 그것도 귀찮아 암수 꽃을 함께 피우기도 한다. 꽃도 암술 스스로 수꽃가루를 선택하고 싫으면 거부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봉선은 자기의 꽃에 맞는 벌만을 받아들이고 얼레지의 경우는 아무리 수꽃가루를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자신의 꽃을 오무려 스스로 수꽃가루를 받기도 한다니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이라고 얘기해도 좋을 까 우려가 된다. 나무의 DNA가 사람과 90%나 닮았다고 하니 조상들이 땔감을 팰 때 ‘죄송합니다. 도끼 들어갑니다.’했다는 게 이해가 되기도 한다.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들이 평생에 한 번 움직일 수 있는 순간이 있으니, 바로 씨앗이 되어 엄마나무를 벗어나는 경우라고 한다. 나무들의 전략은 각별해서 신나무 같은 단풍나무들은 잠자리 날개 같은 시과를 이용한다. 프로펠러의 원리로 이용될 만큼 그 비행도 자유롭고 과학적이다. 엄마 나무 밑에 살 확률은 없지만 너무 멀리 떨어지지도 않아야 한다. 살아갈 환경이 너무 다르면 생존할 확률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나무는 씨앗의 크기와 날개 크기로 그 거리를 결정하는 지혜로움을 갖고 있다. 다른 나무에 기생하여 사는 ‘겨우살이’란 나무도 신기하다. 주로 새들이 먹이를 먹고 나무 위에 똥을 싸서 그 씨가 발아된 경우인데, 겨우살이도 그 나무에 뿌리를 내리기까지 5년을 숙고한다고 한다. 본 나무가 죽을 나무임을 판단하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유럽에선 이 신기한 기생나무를 불로초라 여긴다니 그 희소가치에 약효까지 덤으로 얻은 모양이다. 복자기 나무는 수피가 죽은 듯 보이지만 그게 전략이라고 한다. 곤충들을 얼른 떼어낼 수도 있고 ‘나 죽었소’하는 나무라면 새나 곤충들을 피하기 쉽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우리의 나무임에도 식물학의 늦은 발달로 학명이 ‘Japanese red pine'으로 올라있는 소나무와 견주어 우리의 ’Korea pine'으로 당당하게 학명을 부여받은 나무가 잣나무라고 한다. 나무만큼 기록의 명수도 없다는데, 잣나무는 나이테 말고도 마디로 나이를 알 수도 있단다. 한 마디를 1년으로 보고 묘목 시절의 가지 분 5를 더하면 예측할 수 있단다. 2년생 가지에서 잣이 나고 10-12년생부터 잣이 수확되기 때문에 잣은 수확이 어렵기로 유명하단다. 원숭이를 이용하여 잣을 수확한 적이 있었는데 1년차엔 성공했지만 2년째부터는 털이 엉겨붙은 원숭이들이 짝짓기 철에 인기가 떨어지자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아 실패했다는 일화도 있다. 잣나무는 특별히 자기 상처보호를 위한 진이 심하기 때문이었다. 자작나무는 본래 냉대지역에 사는 활엽수인데 수피에 기름이 많고 겹도 많아 태우면 기름이 끓듯 자작자작해서 자작나무라고 했다. 하얀 수피 때문에 나무의 귀족으로, 하늘의 신이 타고 내려오는 나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우리의 광릉 숲은 온대지역이라 가만히 귀를 대보면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하고 노래 부르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자주 씹는 자일리톨 껌이 바로 이 자작나무 수액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니 자일리톨 껌의 광고 한 장면이 생각난다. ‘핀란드 가족의 저녁’모습... 핀란드는 우리보단 확실히 추운 나라니까...
숲을 보는 방법도 다양하다. 숲에는 나무와 꽃 뿐 아니라 곤충과 동물들도 있고 흙도 있다. 완전한 생태계를 위해서는 어느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단다. 부드러운 땅위로 사람들은 길을 만들어 산을 오르며 숲을 누리지만 숲의 입장에서는 단단해져버린 등산로가 하나의 벽이요, 숲의 교란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단단해진 등산로가 부드러운 숲으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200년의 회복기간이 필요하다고 하니 우리는 숲과의 공존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 지 숙고해야 할 것이다. 참나무의 톱 거위벌레는 남다른 모성으로 관심을 모은다. 높은 키의 참나무 아래서는 간간이 열매가 가지와 함께 잘린 채 떨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얼마 전 그 이유가 밝혀진 것이다. 거위벌레 엄마가 도토리에 알을 낳고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잎과 나무를 한꺼번에 잘라 떨어뜨린 것이었다. 애벌레는 겨울에 땅속에 있어야 하니까 낮은 곳으로 옮겨야 하는데 참나무 잎이 프로펠러 역할을 해서 충격을 흡수하고 위장효과도 있기 때문에 잘라주는 것이다. 사람들의 모성도 그 못지않으련만 그 작은 거위벌레의 모성엔 고개가 숙여졌다.
숲에서는 어린 나무들도 간간히 보였다. 물론 그들이 모두 큰 나무로 성장해간다고 보장할 수는 없지만 어린 나무가 없는 큰 나무를 상상할 수는 없다. 나아가 큰 나무들도 원뿌리는 지탱을 위해 존재하고 잔뿌리들이 양분을 흡수하고 전달하는 일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원뿌리가 없이 큰 나무가 존재할 수 없지만 잔뿌리들 역시 작은 역할들이 모여 중요한 생명원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나무를 보며 우리의 잔뿌리같은 일상들에 대한 성실함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무가 자라듯 우리들의 꿈도 일상에 충실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이수풀씨의 나무 철학을 다시 한 번 새겨 본다.
숲의 문화는 이제 목재나 열매의 이용만이 아니라 어떻게 쉬고, 공부하고, 건강에 이용할 수 있는 지로 관심이 옮겨지고 있다고 했다. 산림청에서는 100곳 이상의 휴양림을 조성하여 개방하고 있으며 숲 해설가와 같은 전문인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150억년전 빅뱅에 의해 지구가 생겼을 때 생명의 시초는 나무였다. 모든 생명체의 근원은 나무였고 엽록소였던 것이다. 이제 나빠지는 환경도 엽록소를 지닌 잎사귀밖에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이수풀씨의 생각이었다.
이수풀씨의 숲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다. 인격(人格)이란 말은 사람이 나무를 얼마나 닮았는지를 뜻한다고 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사실 자기가 굳이 주어야한다는 생각도 없이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담담함에 더욱 품위를 느끼게 한다. 사람들도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맡은 바 최선을 다할 때 더불어 사는 생태계의 참 모습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것이다. 작아 보이지만 우리의 광릉 숲은 위대하고 그 숲을 사랑하는 이수풀씨의 모습에선 희망의 빛이 느껴졌다. ‘그 나무가 꽃피는 나무인 것을 그 나무와 사귄 후 알았다’는 이수풀씨의 소박한 고백이 진한 감동으로 전해지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인터뷰 일시 : 2004년 9월 16일 11시 인터뷰 참가자 : 진은정, 김현경, 이미경, 박영미 인터뷰 장소 : 광릉 수목원 작성자 : 박영미
|
첫댓글 수풀님 정말 훌륭한 일을 하시는군요! 언제 한번 광릉에 한번 놀러가고 싶군요...
수풀아 나무의 DNA가 90%나 인간과 일치? 이제부터 우리집 차탁에게 고마움을, 따뜻한 사랑을 보내야겠네. 산에 가는게 미안하겠다. 그 다져지는 등산로에 일조하는 난,분명 숲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으니...
얼굴 보니 반갑네.. 처음 이야기 들은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베테랑이 되었네... 나도 광릉숲 많이 좋아해 가끔 산책도 가고... 숲과 나무를 찐하게 사랑하는 네가 역시 역시나 수풀이다! 마이홈에 펌해 자랑 좀 할란다. 안녕!!! ~
역시 편안하고 푸근한 고향 마을에 위치한 오래된 느티나무 처럼 수풀은 항상 그렇게 해학적인 여유의 미소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