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즐거움을 찾아라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공원을 산책해 보라.
우리가 햇살과 나무와 새 들을 즐기는 동안 아이는 싫증을 낼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쉽게 싫증을 낸다. 텔레비전, 비디오 게임, 전쟁놀이,
시끄러운 음악 등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들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사실은 어른들도 그런 것들로 외로움을 달래려 한다.
그 결과 더 많은 고통을 겪는다.
우리 자신과 아이들에게, 언제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단순한 즐거움을 찾아 맛보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대 사회에서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어린아이와 함께 풀밭에 앉아 풀숲에 숨어 있는 앙증맞은 노란 꽃과
파란 꽃들을 찾아 그 놀라운 기적을 들여다보라. 평화 교육은 이렇게 시작된다.
올해는 오월이 윤달이라 추석이 예년보다 늦은 시월 초순에 들었다.
두둥실 보름달이 뜨는 한가위엔 한해 동안 땀 흘려 정성스레 가꾼 햇곡식과
햇과일을 차려놓고 조상께 차례를 올린다. 제사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제사상에 꼭 올려야 하는 나물과 과일을 살피면서 그 뜻을 새겨 본다.
식물에게 있어 뿌리는 역사요, 줄기는 현세, 잎이나 꽃은 앞날이다.
그래서 뿌리 나물에 어제, 줄기 나물에 오늘, 이파리 나물에 내일을 담아
제사상에 올린다. '이어짐' 이것이 제사상에 나물을 올리는 뜻이다.
나물과 함께 제사상에 빠뜨리면 안되는 세 가지 과일이 잇다.
대추와 밤, 감이 그것인데, 열매는 꽃이 피는 결과로 내세來世이다.
그 열매를 제상에 올리는 까닭은 앞날을 이끌 자손을 옹글게
가르치고 길러 앞날을 희망차게 이어나가겠다는 다짐이다.
먼저 대추는 괜히 피었다가 지는 헛꽃이 없이, 핀 꽃은 꼭 열매를 맺고
떨어진다. 게다가 거센 태풍이 든 해에는 여는 과일들처럼
낙과落果를 해 거둘 열매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여느 해보다 더 많은 열매를 맺는 근성 있는 과실나무다.
그래서 '헛꽃이 없는 대추처럼 반드시 핏줄을 이어, 자손을 어떤 어려움도
거뜬히 넘어서는 튼실한 재목으로 키우겠다.'는 상징으로 제상에 대추를 올린다.
대개 모든 싹들은 틀 때 씨가 갈라지면서
떡잎이 되는 데 유독 밤은 밤알 속에서 따로 싹이 터 올라온다.
그리고 씨밤 껍질은 싹이 다 큰 나무로 자라서 열매를 맺은 뒤에야,
비로소 뿌리에서 떨어져 나간다. 싹이 큰 나무로 자라 열매 맺을 때까지
보살피는 밤처럼, '자식이 다 자라 또 자손을 볼 때까지 잘 보살피고
이끌겠다.'는 다짐으로 밤나무를 깍아 신주를 만들고, 제사상에 올렸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이 세상 이치지만,
감은 임금님에게 올리는 좋은 반시를 심더라도 그냥 두면 떫은 돌감(고욤)
밖에는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무가 3~4년 자란 뒤에 좋은 감나무에서
여린 가지를 떠다가 접을 붙여 줘야먄 그 이듬해부터 제대로 된 감이 열린다.
사람은 같은 포유류인 말이나 소와는 달리,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미숙아로 태어나 사람으로 길러진다.
감나무를 저 혼자 자라게 가만히 두면 쓸모없는 돌감이 열리듯이
사람도 그냥 내머려두면 사람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래서 감나무 생가지를 칼로 째서 접붙이는 것처럼, 자식들을
따끔하게 가르쳐 사람다운 옹근 사람으로 기르겠다는 다짐이다.
이렇게 우리는 제사상에 오른 나물 하나, 과일 하나하나에서
선조들 슬기와 마주 서게 되는 데 그 고갱이는 '이어짐'이다.
사람들이 흔히 헷갈리는 유교의식인 제사와 불교의식인 재齋는 어떻게 다를까.
제사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유교에서 조상 신령에게 음식을 바쳐 정성을 드리는
예절로, 어제부터 이어온 얼과 문화를 오늘에 되새겨 내일로 이어가는 이어짐이다.
재는 제사와는 달리 몸과 말과 생각身口意, 삼업三業을 삼가 맑히는 일로,
본디 재는 부처님 살아계실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중요한 교단행사이다.
몸과 말과 생각이 맗은 삶이란 사람다운 삶이다.
대중이 삼업을 맑히기 위해 정오에 한자리에 모여 공양하는 일을 재식齋食이라
고 한다. 그런데 왜 제사와 재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오해가 생긴 것일까?
그것은 절집에서 사람이 죽은 지 49일이나 백 일째 되는 날 공양을 올려,
죽은 이 삼업을 맑혀 천도하기를 비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의식은 본디 불교 에서는 없었던 것으로
8세기경 중국에서 유교사상과 접목하면서 생긴 풍습이다.
부처님 오신날은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난 뜻을
기리는 데 있지 않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든 뜻을 기리는 데 있다.
싯다르타는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자비심을 바탕으로 꾸준히 정진한 끝에
부처를 이루었다. 우리가 부처님이 열반에 든 뜻을 기리는 속내에는 우리도
부처님처럼 자비심을 일으켜 기필코 보살도를 이루겠다는 열망이 담겼다.
부처님 오신날이면 법정 스님게 이따끔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 이 아니라.
'부처님이 오시는 날'이 되어야 한다. 부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다."
하는 말씀을 듣는다. 무슨 말씀일까?
지금 이 순간 보리심을 내어 보살행을 펼쳐 새 부처님이 나투시는
날로 만들라는 말씀이다. 지난 부처님 오신 날 길상사 법회에서 스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다. "재물을 상속받으려 말고 법을 상속받으라."
사람이 다른 목숨붙이들과 다른 것은 얼, 문화를 이어가는 일이다.
사람들은 다른 동 · 식물들과는 달리 말과 글자와 그림으로 뜻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얼을 이어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성현들 슬기를 오늘에 되살리고 그 얼을 이어, 몸과 말과 생각을 맑히려는
문화행사사가 곧 재이고 제사라고 새로이 정의 한다면
보다 맑고 향기로운 세상이 열리지 않을까 싶다.
재나 제사에 담긴 참뜻은 얼, 진리를 이어가는 일이다.
법정스님 숨결 변택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