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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실절과 오순절
레 23:9-22
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12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을 여호와께 번제로 드리고
13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십분의 이 에바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로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을 쓸 것이며
14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 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15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곡식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일곱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16 일곱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하여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17 너희의 처소에서 십분의 이 에바로 만든 떡 두 개를 가져다가 흔들지니 이는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요 이는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며
18 너희는 또 이 떡과 함께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양 일곱 마리와 어린 수소 한 마리와 숫양 두 마리를 드리되 이것들을 그 소제와 그 전제제물과 함께 여호와께 드려서 번제로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며
19 또 숫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리며 일 년 된 어린 숫양 두 마리를 화목제물로 드릴 것이요
20 제사장은 그 첫 이삭의 떡과 함께 그 두 마리 어린 양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서 요제를 삼을 것이요 이것들은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이니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며
21 이 날에 너희는 너희 중에 성회를 공포하고 어떤 노동도 하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그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22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23:9-22 / [맏물곡식 바치는 날]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줄 땅으로 들어가 살 때 거기서 곡식을 거두거든 가장 먼저 거두어들인 곡식 한 단을 제사장에게 갖다 바쳐라. 11) 제사장은 그 곡식단을 여호와께 특별히 드린다는 뜻으로 흔들어 바쳐라. 나 여호와가 그 예물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제사장은 이 곡식단을 여호와께 특별히 바치되 안식일 다음날 흔들어 바쳐야 한다. 12) 곡식단을 흔들어 바치는 날, 너희는 아무런 흠이 없는 일년된 숫양을 나 여호와에게 번제로 올려야 한다. 13) 그와 함께 고운 밀가루 4.4리터를 올리브 기름에 반죽하여 나 여호와를 흐뭇하게 하는 곡식제물로 살라 바쳐라. 그러면 그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내 마음이 누그러지리라. 또한 포도주 1리터 가량을 전제로 바쳐야 한다. 14) 너희가 나 여호와에게 이러한 예물을 바치기 전에는 떡이나 볶은 곡식은 물론 풋이삭도 입에 대서는 안 된다. 이 규정은 너희가 어디에서 살든지 오고오는 세대마다 대대로 지켜야할 규정이다. 15) [추수절] 너희가 첫 곡식단을 내게 흔들어 바친 그 안식일 다음날부터 일곱주가 지난 16) 그 다음날은 햇곡식단을 바친 날부터 꼭 50일째가 된다. 이날에는 나 여호와에게 새로운 곡식제물을 바쳐야 한다. 17) 이날 너희가 사는 곳에서 고운 밀가루 4.4리터에 누룩을 넣어 구운 떡 두 개를 맏물로 특별하게 바친다는 뜻으로 흔들어 바쳐라. 18) 또한 아무런 흠이 없는 일년된 숫양 일곱 마리와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두 마리를 나 여호와에게 번제로 드려라. 거기에 따르는 곡식제물과 전제물도 함께 바치되 모든 제물을 불살라 향기로운 냄새를 풍겨라. 그러면 내 마음이 흐뭇해지리라. 19) 또한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바친 뒤에 일년된 어린 숫양 두 마리를 화목제물로 바쳐라. 20) 제사장은 맏물로 만든 떡과 함께 이 어린 양 두 마리를 나 여호와에게 특별히 바친다는 뜻으로 흔들어 바쳐라. 이것은 나 여호와에게 바친 거룩한 제물로서 제사장에게 돌아갈 몫이다. 21) 너희가 이러한 제물을 바치는 날 너희는 모두 한자리에 모여 거룩한 모임을 가져라. 이날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가 어느 곳에서 살든지 오고오는 세대마다 대대로 이 규정을 영원한 규정으로 삼아 꼭 지켜야 한다. 22) 너희는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 밭 모퉁이에 있는 곡식까지 모조리 거두어들이지 말고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아라. 그것을 가난한 이들과 너희 가운데 몸붙여 살고 있는 나그네들이 거두어들일 수 있도록 남겨 두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곡물을 거두면, 그 곡물의 첫 이삭 단을 제사장에게 가져가서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초실절(9-14) 초실절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곡식을 거둘 때 수확하여 얻은 곡식에 대하여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렇기에 초실절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는 시작될 수 없었습니다(10). 본래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조상들의 시대에서, 애굽의 400년의 노예시대를 지나, 다시 유목민으로 40년 광야시대를 보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농경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농경사회의 정착은 새로운 문화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질을 변화시켰습니다. 애굽의 노예로 살던 백성이 자유인이 되고, 자기 소유의 땅에서 곡식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에 대해 마땅한 감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초실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추수의 첫 열매를 제사장에게 가지고 가면 제사장은 첫 열매를 들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도록 안식일 다음 날 흔들어 올려드리는 '요제'를 행했습니다(11). 또한 그 날에 일 년 된 흠 없는 숫양을 '번제'로 드리고(12), '소제'와 '전제'(13)까지 드렸습니다. 요제, 번제, 소제와 전제가 행해지기 전에는 수확물을 아무것도 먹지 말아야 했습니다(14). 하나님께 먼저 드리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초실절에 드려진 첫 열매는 예수의 부활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기 때문입니다(고전 15:20-30; 살전 4:13-18).
오순절(15-22) 유월절 후 일곱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하여 50일이 지난 후에 지키므로 오순절 또는 칠칠절로 부릅니다. 또한 모맥을 거두는 시기여서 맥추절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이 절기의 목적은 수확에 대해 감사하며 하나님께 헌신을 결단하는 절기였습니다. 신약의 오순절 사건은 부활 후 50일,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 위에 성령이 임하신 날로 구원의 사건에 대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오순절에는 백성들이 드리는 소제와 화목제물을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에게 돌리게 하셨고(20), 가난한 자들과 거류민들을 위해서는 곡물을 벨 때에 밭모퉁이의 수확물을 남겨두게 하셨습니다(22). 하나님은 초실절과 맥추절 두 절기를 정하여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예배하도록 하셨습니다.
적용: 밭모퉁이의 곡식은 추수하지 말고 남겨두라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절기를 마무리 하는 마지막 단추와 같습니다. 이웃 사랑이 없다면 절기를 온전히 지킨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절기를 통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절기를 통해 우리의 예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 절기를 지켰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하는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습관에 따라, 자기 기분과 상황에 따라 참석하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고 그에 대해 감사를 표현하는 시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 설 교 >
하나님은 진정 축복의 하나님이신가?
레 23:9-21
오늘은 맥추감사절을 앞두고 ‘하나님의 축복’에 대하여 설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설교를 하기 위하여 저는 많은 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설교를 할 때면 늘 마음이 흥분된다고 하였지만, 저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에 대한 마음이 한편의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미국 로버트 슐러 목사의 크리스탈 교회가 파산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긍정의 힘>과 <적극적 사고>를 주장하며 하나님의 축복과 번영과 성공을 강조하던 로버트 슐러 목사의 교회가 파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강조하던 목사님들은 뒤 끝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국 교회의 위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목사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축복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버님이 늦게 개척을 하시고 예배당 건축까지 하게 되면서 어머님의 건강에 무리가 되었고 결국 제가 신학생 때, 어머님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목사이신 아버님의 삶을 지켜보면서 하나님이 정말 축복의 하나님이신가? 믿기 어려웠습니다. 목사들에게도 부자가 있고 가난한 자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축복의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축복의 하나님 보다 공의의 하나님에 더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복받으라 하기 보다 올바로 살라는 것이 제 설교의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축복의 하나님에 대하여 설교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축복의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할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풍족한 삶, 건강한 삶, 성공적인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아니 너무나 간절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며 고생하게 하였지만 속 마음은 복을 주시려는 것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신 8:16…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문제는 그동안 축복의 하나님을 강조하며 설교하였던 것의 문제가 무엇이었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구하라.’고 설교한 것이 문제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이미 복을 주신 것을 믿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너무나 흥분이 되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전할 생각에 어제는 잠을 자기 힘들었을 정도였습니다.
믿는다는 말은 더 이상 축복에 대하여 안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받았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이미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는 염려하지 않고 감사하며 찬송하며 사는 것입니다. 욕심내지 않고 나누어 주며 사는 것입니다. 고생할까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의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경제학자인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과 자본주의 정신]이란 책을 썼는데, 거기서 근대 자본주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려는 정신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종교개혁을 통하여 시작된 영적각성의 결과로 소 자본의 상인들이 그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돈버는 욕심으로 장사하였음을 회개한데서 시작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장사도 성직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직업에 충성하려고 열심히 일하였으며 돈을 번 것은 사치 방탕에 쓰지 않고 근검 절약하였고 생활은 성경적으로 살면서 기대하지 않는 부가 축적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초기 자본가들 중에 목사 집안 출신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정도 축복의 하나님이신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즉시 누구나 다 부자가 되게 하십니다! 믿습니까? 안 믿어집니까? 그리스도인들 조차 예수를 믿고 자신이 부유해졌다고 믿지 못합니다. 부유해지기는 커녕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교인들도 많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부자가 됩니까?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갈 4:6 /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지 않나요?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아버지시면 얼마나 부자입니까?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세상에 어느 정도 부자면 염려하지 않고 살까요? 그런 부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만큼 부자가 된 것입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셨다는 말에 별로 감동이 없습니다. ‘가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성경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지갑을 보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요동치는 것입니다. 고아가 주머니마다 돈이 잔뜩 있다고 염려가 사라지겠습니까? 가진 돈 하나 없어도 아버지 손을 잡고 가는 아이는 염려가 없습니다. 부자집 아들 딸이 가진 것이 많아서 부자입니까? 아버지가 부자니 부자인 것이지요. 우리가 가진 것이 없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눅 6:27-29 /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너무나 사랑하신다.” 는 것이 믿어지는 사람에게는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복이 없는 사람에게는 말도 안되는 말씀입니다. 울분이 가득찬 사람은 욕 밖에 안나옵니다. 싸우고, 통곡하고 부수고 싶은 마음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마 7:24-26 /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같으리니…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여러분은 사업을 하거나 가게를 낼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알기 위하여 성경을 보십니까? 어떻게 직장 생활을 해야 하나 궁금해서 성경을 보십니까? 하나님이 아버지임이 믿어지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복을 믿지 못하니 직장 생활이나 사업, 가정의 재정 지출에 있어서 성경 말씀이 무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경제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은 숨어계신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눅 6:38 /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여러분은 ‘나는 복을 많은 받은 사람이니 주는 사람이지!’ 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내가 줄 것이 뭐가 있어! 나도 힘들어 죽겠단 말이야.’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으로 우리 안에 어떤 영이 역사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고전 2:12 /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성령님은 부유하신 영이고 이 세상의 영은 가난의 영입니다. 가난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돈을 많이 가져도 남을 도울 수 없습니다. 가난의 영은 가지지 못할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게 만드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충분히 가진 자 조차도 여전히 자신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돕고 나누어주고 구제하는 일, 가난의 영이 꺽어지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복을 약속하셨습니까?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더 나누어 주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에게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감사생활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아버지된 자임을 믿는지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세 가지 감사절기를 말씀하셨는데, 첫째는 애급으로부터 구출받은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무교절), 둘째는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드리는 맥추절, 셋째는 연말에 추수한 곡식을 저장하면서 드리는 수장절입니다. 세 감사절기 중에 가장 독특한 감사절이 맥추절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광야 생활 내내 40년 동안 한 가지 만나만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들의 손으로 농사지어 첫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그 감격이 얼마나 컸을까? 낫 알이 달린 이삭을 들고는, 얼마나 먹어보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미리 침을 놓으셨습니다.
10절 ... 너희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14절 ...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찌니
21절 ...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첫 열매를 드리는 때는 풍성한 때가 아닙니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려 보셨습니까? 아무나 초실절 감사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올 한해를 이미 축복하셨다고 믿지 못하면 첫 열매 감사와 십일조 헌금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목마를 때 마시우는 정도의 계획만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하여 생수의 강이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요 7:37-39 /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이 일이 감사생활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주려는 뜻도 있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감사절은 가난한 사람들, 고아와 과부와 이방 나그네들에게 기쁨의 날이었습니다. 성령을 받은 초대교회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자기 소유를 다 나누고 살았습니다.
이번 주일, 맥추감사주일에 특별한 감사헌금을 하려고 합니다. 첫 분립개척 교회를 세우기 위한 헌금으로 드려지게 됩니다.
여러분, 축복의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되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자”가 되었음을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축복의 하나님이 믿어집니다.
재정적으로 정말 어려운 때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축복의 믿음을 바로 가져야 합니다. 눅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교우들에게만 믿음으로 순종하라 하지 않고 교회도 믿음의 실험을 하려고 합니다.
저는 그동안 “주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힘쓰며 교회를 이끌어 왔습니다. 믿음에 있어서 재정에 대한 훈련 보다 더 중요한 훈련은 없습니다. 어려운 교회나 이웃이 있을 때, 돈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도울 수 있어야 정말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동안 여러 번 교회 재정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지출해야 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은행에서 빚을 내어 도왔던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여전히 건축비 부채가 많지만 건축헌금으로만 건축비 상환을 하기로 정하였습니다. 도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정확하게 우리의 믿음과 순종에 응답하셨습니다. 몇년 전부터 추수감사헌금은 전액 재난 구제비로 구별하였습니다. 이제 맥추감사헌금을 전액 교회 개척비로 구별하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재정에 있어서 믿음을 사용할때, “나는 죽었습니다”하고 몇번을 고백하였는지 모릅니다. 그 때마다 예수님은 나의 마음에 실재가 되셨고 언제나 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신가? 그 증거는 너무나 많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이산 간증하라면 하실 분이 많을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저의 고모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할아버지만 남겨두고 이북에서 피난 내려오실 때, 정말 먹고 살기도 비참했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아버지되시는 하나님만 바라고 사셨습니다. 이제 세상 떠나실 때, 너무나 복된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고모님의 복은 자녀들이었습니다. 모두가 다 훌륭한 사명자들이 다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정 축복의 하나님이십니다.
맥추감사주일은 축복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분명히 하는 감사절이 되기 바랍니다.
염려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나누어주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만 하며 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올해도 이미 복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의 첫 열매 감사헌금으로 새 교회가 세워진다는 마음으로 헌금하시기 바랍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맥추절의 신령한 교훈
레위기 23:9-14 / 손상률 목사
성도의 감사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 행위입니다. 그것이 곧 찬송과 기도와 예배로 나타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하나님께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 영역과 직결되는 것입니다(빌4:6-7). 오늘은 우리 교회가 맥추감사절로 지키는 날입니다. 옛날부터 신앙의 선진들은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잠3:9)"고 하신 말씀대로 초여름 보리 추수가 끝난 후에 맥추감사절을 지키고 가을에 벼를 거둔 다음 추수감사절을 지켰습니다.
이와 같은 감사 절기가 농경시대를 살았던 성도들에게는 익숙해 있지만 생활문화가 판이하게 바뀌어진 오늘날에 와서는 그 의미를 찾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성경적인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대한 성도들의 신앙행위로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대나 환경에 상관없이 지켜져야 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실 때 그 백성이 지켜야 될 절기의 규례를 주셨습니다. 본문 말씀은 땅에 심은 곡식의 첫 열매를 거두었을 때 그것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도록 명령하신 제도입니다. 출애굽기 23:16에는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열매를 거둠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34:22에는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맥추절이 유월절을 지난 후 50일 만에 지켜지는 절기임을 뜻합니다. 그런면에서 보면 맥추절은 오순절날 성령강림으로 시작된 신약교회의 그림자이며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상에 전개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젼인 것입니다.
성경이 맥추절의 규례를 정해놓은 것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풀어 주실 축복의 명령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절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신앙을 실천하고 그것이 또한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령한 삶의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Ⅰ. 심고 거두는 진리
예수님의 천국 비유에는 씨를 뿌리고 가꾸며 열매를 거두는 농사의 내용이 있습니다(마13:3-9). 이는 기독교 복음 운동이 심고 거두는 농사와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일러 줍니다.
(1) 자연법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7에는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이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자연법의 원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교훈 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만물을 그 종류대로 지으셨습니다(창1:11).
그리고 그 지으신 종류마다 생명체는 모두 번식하여 종자를 이어가게 하였습니다. 그 과정은 씨가 땅에 떨어지고 다시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게 하는데 그 결과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로 엄청나게 불어나는 것입니다. 심고 가꾸는 농사의 원리도 결국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자연법칙을 따라 진행되는 것입니다.
(2) 기독교 복음의 도리입니다.
예수님의 농사 비유 가운데는 밭의 종류와 씨의 종류를 구별하고 거기 따르는 결과를 말씀하셨습니다. 똑 같은 씨라도 그 떨어지는 밭의 토양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토양이 좋은 옥토에 심은 것이지만 그 뿌려진 종자가 다를 때 결실이 다른 것으로 구별됩니다. 이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마13:24-30).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알곡의 종자로 비유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다른 복음으로 불리우는(갈1:6) 가라지의 종자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원수 마귀는 알곡의 종자인 것처럼 가장하고 복음의 농장인 교회에 덧뿌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허용되고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선악간에 구별되어 하나님의 곡간으로 들어가는 것과 꺼지지 않는 불 속으로 던져지는 것으로 끝을 보게 됩니다.
(3) 행한 대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사람이 영위하는 사업가운데 농사처럼 순수하고 진실한 것은 없습니다. 씨를 뿌린 곳에 싹이 나고 열매를 거두게 되는 너무나 정직한 법칙이 적용됩니다. 오늘날 사회를 요지경으로 만들어 버리는 소위 불로소득이나 일확천금 같은 요행은 통하지 않는 것이 농사입니다. 야고보서 5:7에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씨를 뿌린 자의 비젼이 있고 땀흘려 노력하면서도 거기에 애착을 심으며 때를 기다리는 인내력과 탐스러운 열매를 거머쥐고 더 없는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것이 농사인 것입니다. 시편126:6에는 "울며 씨를 뿌리러 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고 하였습니다.
Ⅱ. 인간의 노력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려 주시는 축복 가운데는 인간의 수고나 노력 따위에 상관없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를 가리켜 주로 「특별 은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임이 틀림없으나 인간의 행위와 관련되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수고나 노력은 사람이 하지만 그 결과가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이 부분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 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고 하였습니다(시127:1-2).
(1) 뜻 있는 일을 할 때 축복하십니다.
성도가 하는 일이면 무엇이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죽도록 수고를 하고도 하나님의 의도에 어긋나는 일을 했을 때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받고 맙니다. 잠언 16:2에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하나님은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물을 창조하실 때 채소나 과일이나 씨 맺는 곡식을 사람의 식물로 주셨습니다(창1:29). 그리고 사람에게 땅이 존재하는 동안 심고 거두는 일을 하게 하시고 거기에 축복을 약속하였습니다(창8:22).
농사하는 일은 양식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농사를 통하여 우선은 자기나 가족의 생계를 꾸려 나가게 되지만 이것이 활발하여 질 때 많은 사람에게 양식을 제공하고 인류의 문화에 번영을 가져오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음과 거둠의 효과적인 사업을 통하여 많은 사람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게 유도하십니다(레23:22).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생명의 양식이라고 하였습니다(요6:48-51).
(2) 하나님의 축복이 귀한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에 비하여 매우 발달한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볼 때는 무력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입니다. 사실상 모든 것을 다 할 수 잇는 것처럼 큰 소리를 쳐도 실제로 아무것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신앙과 불 신앙의 차이는 이와 같은 원리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서 구별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이 선에 대한 의지가 있고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어도 이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고 하였습니다(롬7:18). 그러나 한편으로 자신이 행하는 일이나 이루어 놓은 업적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고백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10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했으며, 빌립보서 4:13에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씨를 뿌리고 가꾸어 열매를 추수할 때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알맞은 비와 공기와 햇볕을 주셔서 풍성한 결실로 이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6-7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3) 감사와 보답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게 되는 것이며 또한 거기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사랑에 대한 감사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성경에 맥추절의 제도를 발표한 것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을 하게 하는 의식입니다. 출애굽기 23:14에 "너는 매년 3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하고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의 제도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와 같은 율법을 선포하실 때는 먼저 그들이 애굽의 종 되었던 집에서 해방되어 나온 출애굽 사건을 상기하게 하였습니다. 십계명의 전문(前文)인 출애굽기 20:1-2에 보면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고 하였습니다. 본래 죄와 죽음 아래 신음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을 때 이것은 평생을 두고 보답해야 될 감사의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감사는 입술의 열매인 찬송과 함께 감사의 제물이 있어야 됩니다.
시편 116편을 기록한 시인은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12절)"라고 감격해 한 나머지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17절)"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10-11절에는 "너희는 내가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식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식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원래 「감사」라는 말 ( )은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과 그 뜻을 표하는 행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Ⅲ. 신비로운 기독교의 원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맥추절을 지킬 때 땅에 뿌린 씨앗의 첫 열매를 가져다가 제물로 드리는 행위와 관련하여 신약적인 의미로 신령한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생명의 신비입니다.
씨앗은 그 속에 생명체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죽은 것 같고 메마른 한 낱의 알갱이에 불과하지만 그 딱딱한 거죽 속에 불멸의 생명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신비로운 일입니다. 거기에서 놀라운 생명력이 발동할 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열매가 맺어지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희생적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고 밝혀줍니다. 요한복음 1:4에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2) 희생의 가치를 교훈합니다.
요한복음 12:24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새로운 열매를 위해서 땅속으로 희생되는 밀알의 가치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땅에 떨어지는 씨앗은 눈이 트고 싹을 내는 동시에 그 자신은 점차적으로 삭아지며 없어져 갑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의 생애를 비유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2:6-8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가는 성도들의 희생적 삶의 가치를 일러주는 말씀입니다. 디모데후서 2:11-12에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3) 영광스러운 부활의 진리를 나타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신비로운 부활의 도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진리를 논증하면서 땅에 떨어지는 씨앗의 비유로 설명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36-38에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땅에 떨어지는 밀알은 죽어 없어지고 새로운 형체의 생명이 부활하듯이 기독교 부활의 도리도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죽을 것으로 심고 죽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신비로운 것입니다(고전15:42-44).
지금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맥추절의 교훈을 살펴보면서 심고 거두는 자연법의 원리에서 깊으신 하나님의 섭리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수고에 복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깨달음을 가지고 감사와 보답의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것이 경건한 예배와 정성어린 제물로 이어질 때 한량없는 축복의 열매로 풍성하게 돌아올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감사의 삶이 지상에서 누리는 육신생활의 축복뿐만 아니라 더 크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것으로 충만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맥추절을 지키라
레 23:9-21 / 이성우 목사
오늘은 금년도 맥추감사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이 맥추감사절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는 구약성경 신명기 16장 16-17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한 고별 설교의 한 대목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16)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17)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한 백성으로 택하심을 입고 구원의 은총 가운데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드시 일년에 세 번씩 하나님 앞에서 베푸신 은혜와 축복을 헤아려 보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려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교절은 유월절과 맞물린 절기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의 대역사와 관련이 있는 절기로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는 절기이며, 칠칠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첫 번째로 수확한 곡식 단을 드리던 초실절로부터 계산해서 칠 주간이 지나서 드리는 절기로 가나안 땅으로의 인도하심과 정착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바로 이 칠칠절이 오늘 드리는 맥추감사절의 유래가 되고 있는 절기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지켜야만 했던 초막절은 연말에 그들이 모든 수확을 마치고 거두어 들여 저장한 다음에 칠일 동안 지켰던 절기로, 광야 40년의 세월에 대한 회고와 더불어서 풍성한 것을 수확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절기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먼저 생각할 것은 신명기 16장의 18-22절을 보면, 이 세 가지 절기를 지킬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를 행하는 일과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것을 동시에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감사의 절기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단순히 물질만 드릴 것이 아니라 지난날에 대한 감사한 마음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삶으로 연결되어야만 함을 보여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순결함을 지켜나가는 것, 다시 말하면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온 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과 함께 드려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드리는 성숙한 감사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진정한 감사의 모습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중요한 사실은 이들 절기들을 지킬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웃을 함께 초청하여 그 기쁨을 나누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칠칠절의 경우에는 과거 애급에서의 종살이를 기억해서 동일한 처지에 있는 불우한 이웃들을 초대해서 그 기쁨을 함께 나누도록 했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가 지키는 감사의 절기가 이웃과 함께 나누는 절기가 되어야 비로소 성숙한 감사요 진정한 감사의 절기가 됨을 잘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레위기 23장 9-21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맥추절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의 중요한 세 가지 절기 중에 하나로써 절기라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여러 명절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의미와 교훈을 가지고 지켜지는 특별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절기를 통해서 중요한 교훈들을 특별히 가르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절기에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성전에 모여 특별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리와 밀을 수확하고 난 후 추수할 수 있도록 날씨를 주관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날이었습니다. 기쁨으로 수확한 보리와 밀을 곱게 빻아 빵을 만들어 하나님께 가져와서 오직 하나님께서 열매 맺게 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맥추절을 지키면서 하나님께서 감사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23장 14절을 보면 ‘영원히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맥추절을 지키기 시작한 것은 매우 오래 전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에서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시내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은 십계명과 함께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등 3대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있는 동안 매일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지냈습니다. 아마 그들의 소원은 하루빨리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서 자기들의 손으로 농사를 지으며, 풍성한 곡식과 과일을 저장해 놓고 안정된 삶을 사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드디어 그들은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파별로 땅을 분배받아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씨를 뿌리고 열심히 가꾸어 첫 번째 곡식을 거두었을 때, 제일 먼저 성막에 모여 하나님께 감사 제사를 드렸습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첫 번째 소출로 감사를 지킨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럼, 왜 맥추절을 지켜야 하는 걸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얼마나 낯설고 생소했을까요? 가나안 땅에는 이미 가나안 일곱 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서 나는 대표적인 농산물인 보리, 밀, 포도, 대추, 야자, 석류, 올리브, 무화과가 농사를 주관하는 신인 바알과 아세라의 뜻에 따라 풍년과 흉년이 결정된다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풍년을 위해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며, 신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온갖 악한 일들을 행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맥추절을 지키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족속을 따라 쉽게 우상숭배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계셨던 하나님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기 전에 맥추절을 지키라는 명령을 주심으로써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라.’는 계명을 다시금 마음에 새겨 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도록 부름 받은 선택된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각종 잡신과 우상들을 섬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며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땅과 안정된 삶 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맥추절을 어떻게 지켰을까요? 맥추절을 지키는 방법까지 하나님은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서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 번째로 추수한 밀을 고운 가루로 빻아 그 가루에 누룩을 넣고 빵을 만들었습니다. 정성껏 만든 빵 두 개를 제사장에게 드리면, 제사장은 그것을 하나님께 흔들어서 드리는 요제 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린 숫양 두 마리를 화목제물로 잡아서 드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들의 제물을 기쁘게 받으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제물을 드리는 사람 사이의 화목과 교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모든 절기와 감사의 고백에 있어서 핵심은 바로 하나님과의 화목과 보다 더 깊어져 가는 교제관계 수립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제대로 된 절기를 지키고 제물을 드리면서 감사를 고백하는 것 같아보여도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화목이 뒤따르지 않거나 교제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 숫양 두 마리를 화목제물로 드림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원했을 뿐만 아니라 제사가 끝나면 성전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다함께 식사를 하면서 서로 간의 화목을 재확인하고 교제관계를 원만하게 만들어 가는 중요한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이 자리에는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들도 함께 했음은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식사가 끝난 후에는 이스라엘 남자들이 ‘할렐’이라고 불리는 시편 113편~118편까지를 노래로 부르고 춤을 추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을 최고로 기쁘시게 하는 신앙고백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맥추절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감사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다가오는 시간 속에서 또 다른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기대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헌신과 사랑을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지키면서 이제까지 살아온 여러분들의 지난날을, 그리고 짧게는 지난 상반기 6개월의 삶을 돌아보면서 그 삶의 순간순간마다에 수놓아져서 여러분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던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 축복을 확인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을 고백하고 표현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은혜의 절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맥추절을 지키라
레 23:9-22 / 한대근 목사
금번 월드컵을 성공적인 개최를 기념하여 정부는 7월 1일, 그러니까 내일을 임시공휴일로 정하였습니다. 선수들은 온 몸을 던지는 투혼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어 온 세계에 대한민국을 크게 알렸고, 국민들은 열광적이고도 질서 있는 응원을 통해 세계에 대한민국을 알렸습니다. 이로써 월드컵 개최사상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이렇게 수고한 모든 사람들에게 휴일을 선물하기 위해 월드컵 기념일을 제정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각 나라마다 어떤 중요한 일과 사건이 있었던 날을 국경일로 정하고 그 날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우리 나라는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을 중요한 4대 국경일로 정하고 그 날의 역사를 기념하는 행사를 갖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국가적인 기념일을 정하고 그날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매년 3차에 걸쳐서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의무적으로 지켜야 할 절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절기가 유월절과 함께 지키는 무교절입니다(4-8절). 이 절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이스라엘 민족의 최대의 명절입니다. 오늘날에는 유월절이 부활절과 비슷한 시기에 겹쳐지는데, 예수께서 유월절이 끝나는 안식 후 첫날에 부활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해방된 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 사는 부활에 참여함으로 영원한 해방을 얻은 축복의 날로 기념하게 됩니다.
두 번째 절기는 맥추절입니다(9-22). 맥추절은 한 해 농사의 첫 열매인 보리와 모맥을 추수한 직후에 거행되는 감사의 절기입니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 땅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께 그 땅에서 첫 번째 생산된 소산물을 돌려드려야 한다는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세 번째 절기는 수장절입니다. 장막절이라고도 부르는 이 절기는 일년 중 마지막 추수를 축하하는 절기로서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의 성격을 띠는 것입니다. 가을 절기인 장막절은 유대력으로 티슈리월 15일에 시작하여 일주일간 지속됩니다. 온갖 곡물과 과일 등을 추수한 후 유대인들은 추수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이 절기를 보내는데,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 40년간 겪었던 어려움을 잊지 않기 위하여 초막을 짓고 광야의 생활을 재현합니다. 레위기의 명령(레23:39-43)을 따라 일주일 동안 초막에서 먹고 자며, 장막절이 시작되는 첫날에 ‘아름다운 과실과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7일 동안 즐거워하라’는 명령대로 축하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년 3차에 걸쳐서 의무적으로 지키는 이 절기가 갖는 특징이 있는데 모두가 감사절기라는 것입니다. 이 세 절기 모두는 하나님이 주신 절기이며, 또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심을 찬양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본문의 말씀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고 하신 명령을 따라 이 세 절기가 되면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며, 생활의 전반에 걸쳐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다음 주일을 맥추절로 정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맥추절을 지키는 의미와 자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림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맥추절은 어떤 절기인가?
10절의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16절도 보겠습니다. “제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새 소재를 여호와께 드리되”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맥추절은 한 해 농사의 첫 열매인 보리와 모맥을 추수한 직후에 거행되는 감사의 절기입니다. 본격적인 추수를 시작하기 전,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가면 제사장은 안식일 이튿날에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드립니다. 그리고 그 날로부터 세어서 50일이 되면 새로운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래서 맥추절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절기인 칠칠절, 즉 오순절과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오순절이라 함은 본격적인 추수를 시작하기 전 곡식의 첫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바치는 유월절 후 첫 안식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로, 이 날은 7주전에 시작한 곡물 추수를 무사히 마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면서 하루를 거룩하게 보내었습니다. 이것이 맥추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던 맥추절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대도시에서는 맥추절의 의미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고, 농촌에서도 밀과 보리 농사를 잘 짓지 않게 되면서 맥추절 지키는 것을 소홀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절기들은 단순히 먹을 수 있는 추수를 끝냈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구원하신 그 은혜를 기념하고 감사하기 위해 지키는 절기였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6장 9-12절에 보면 맥추절, 즉 칠칠절에 대한 규례를 설명하면서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고 덧붙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맥추절이 단순히 추수감사절의 의미로만이 아니라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절기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추수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하나님께 당연히 감사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애굽의 노예에서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어 땅을 일구고 살 수 있게 된 은혜와 축복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것이 맥추절의 참된 가치요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맥추절을 바르게 지키기 위해 맥추절의 의미와 가치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맥추절을 왜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2. 오늘날 맥추절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선 맥추절은 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은 하나님께 첫 열매로 제물을 삼아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첫 열매를 드리는 것은 그 땅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께 그 땅에서 생산된 소산물을 돌려드려야 한다는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역사의 주인, 땅의 주인, 모든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있기 전에 이 세상은 빈들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보시기에 좋은 세상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거기에 두셨습니다. 창세기 2장 8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우리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있고 싶다고 여기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하나님이 준비하신 곳에 두셔야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이 우리를 가져가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잠시 세상에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을 사용하다가 우리의 인생이 끝나면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빈손으로 가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13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우리가 지금 현재 살아있고, 또 우리가 현재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이 삶의 자리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베푸신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 열매의 소산으로 제사 드리는 맥추절을 지킴으로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맥추절은 우리가 구원받음을 확인하는 절기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서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라고 했습니다. 맥추절은 애굽에서 지키는 절기가 아닙니다. 광야에서 지키는 절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거둔 첫 번째 곡물을 드리는 절기입니다. 가나안에서 첫 번째 소산을 거두고 감사의 제사를 드림으로 비로소 그들은 자신들이 애굽이나 광야에 있지 않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애굽의 노예로 살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애굽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에서 노예가 아니라 주권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받은 은혜의 백성으로서 당당하게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서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절기가 바로 맥추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년 3차에 걸쳐서 드리는 절기는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해방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 신약적으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들이 구원받은 것을 의미하는 부활절과 같은 절기입니다. 수장절은 마지막 추수를 끝내고 감사함으로 광야에 나아서 지내는 절기로, 신약적인 의미로는 장차 이루어질 구원의 완성 곧 재림을 의미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이 구원의 과거적인 것을 의미하는 절기라면, 수장절은 구원의 미래적인 것을 의미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맥추절은 구원의 현재를 의미하는 절기입니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즉 죄인의 하나님의 자녀로, 형벌에서 자유함으로, 진노의 자리에서 은혜의 자리로 들어가 살게 된 구원받은 백성들의 확신에 찬 감사의 고백이 맥추절을 통해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맥추절을 지키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맥추절은 성숙한 신앙인의 고백입니다.
여호수아 5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단을 건너 가장 먼저 도착해서 진을 친 곳이 바로 길갈입니다. 그들은 길갈에서 몇 가지 의식을 행하고서 처음으로 땅의 소산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내리던 만나가 끊어졌습니다. 애굽에서는 애굽사람들이 주는 것을 얻어먹었습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신령한 양식인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만나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먹다가 밥을 먹을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은 성장해야 합니다. 성장하지 않는 어린 아기는 부모의 걱정거리이듯이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 성도는 하나님과 교회와 목사의 걱정거리가 됩니다. 성도는 영적으로 날마다 성숙해져야 합니다. 언제나 어린아이로 남아있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영적인 싸움에서 날마다 이기며 살 것을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나만을 고집하거나 애굽에서 주인이 주는 것이나 받아먹으려는 자세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스스로 땅을 개간하고, 곡식의 씨앗을 심고, 김매주고, 물을 주는 등의 땀을 흘리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삶 가운데서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3. 맥추절을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인가?
이제 우리는 어떻게 맥추절을 지킬 것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로 지켜야 합니다(17-20절).
맥추절은 본래 감사의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열매를 거두게 된 것, 가나안에 들어가 살게 된 것, 그리고 땀흘려 농사를 짓고 처음 것을 하나님께 드릴만큼 성숙한 사람이 된 것,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축복입니다. 바로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기 위해 그들은 첫 열매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맥추절에 드리는 제사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곡식으로 만든 떡과 흠 없는 어린양 일곱, 젊은 수소 하나, 숫양 둘로 제물을 삼아서 소제와 전제와 번제로 드려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사로 드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숫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리고, 일년 된 어린 숫양 둘로 화목제를 드려야 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모든 형식이 다 들어 있습니다.
맥추절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우리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감사의 제사입니다. 감사란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들이 감사의 제목이요, 감사의 제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올 맥추절에는 감사의 제목이 많아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가 넘쳐남으로 모든 불평을 삼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우리들이 드리는 맥추절 예배도 감사의 제목이 풍성한 예배를 드리기를 소원합니다.
맥추절에 성회로 모여야 합니다(21절).
거룩한 모임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노동을 금하고 모두 함께 모여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정하신 날인만큼 구별된 날로 삼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쁨으로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께 경배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주일에는 우리 송악교회 모든 성도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축복의 성회에 참석하시기를 바랍니다.
맥추절은 이웃들로 더불어 기쁨을 나누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22절).
땅의 곡식을 벨 때,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고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자와 객을 배려하라는 뜻입니다. 신명기서 16장 11절과 12절에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너는 애굽의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너희도 얼마 전까지 애굽의 노예로 어렵게 살았던 때를 기억해서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초청해서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즐거운 명절을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 지내라는 것입니다.
맥추절은 단지 하나님께만 나아는 절기가 아니라, 이웃과 형제들에게 나아가는 절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도 감사함으로 새롭게 하지만 가난하고 어려운 형제들을 생각하고 섬기는 절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정신적으로 힘겨운 사람들, 육신의 병이 들어 고통받는 사람들, 영적인 어둠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이 맥추절의 축제를 함께 기뻐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베풀어주며 나누어주고 보듬어주는 좋은 축복의 절기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주간 동안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맥추감사절을 어떻게 뜻깊게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예배로 영광을 돌릴 것인지를 생각하며 준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 맥추감사절 아침에 우리의 가슴마다 감사의 축복이 가득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맥추절의 영적 교훈
레 25:9-22 / 임병익 목사
이스라엘에서 3대 절기는 유월절과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구원을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절기입니다. 오순절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음과 가나안 땅에서 곡식을 거둠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광야40년 훈련을 상기시키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은 구약적인 명칭이고 오순절은 신약적인 명칭입니다. 추수. 율법/성령/관계되는 절기이다. 곡식과 말씀과 성령을 보내어 주심을 감사드리는 큰 명절이요 감사의 대축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1. 명칭의 의미
1) 곡식을 추수함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맥추절은(칵 하카칠)벤다/ 획득한다. 수확하다.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여기에서 열매를 거둠. 또 추수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일용할 곡식을 거두어 드림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지으신 천지만물의 흐름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것을 감사하는 날입니다.
2) 율법을 주신 것을 감사는 절기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것을 상기하는 것이 오순절의 독특한 의미입니다. 즉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농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이때에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것을 상기하고 감사하는 절기로 삼은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나온 지 50일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출19:/THEODORE).
3) 신약에 오순절은 성령강림절을 말합니다.
언제 맥추절에서 오순절이라고 명칭이 바뀌어 졌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대체로 마카비시대에 오순절이라는 명칭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봅니다. 구약에 율법을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심을 감사드리는 날에 성령이 강림하시어서 교회를 세우시고 주님의 백성을 모아서 천국창고에 드리는 행위는 참으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성취로서 신약의 성령강림과 교회의 출발은 참으로 언약과 성취라는 아름다운 성경의 이치를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2. 지키는 날
신명기 16:9/절에는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7주를 계수 하여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절기입니다. 즉 유월절 지난 50일째에 드리는 절기입니다. 구속의 절기를 근거로 하여서 50일째 드리는 절기이기에 칠칠절. 오순절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입니다. 맥추절은 절기의 내용을 성령강림절은 신약에 사도시대의 성령 충만을 상기하는 절기입니다.
3. 대상자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대상자는 전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유월절의 의미를 아는 모든 사람입니다. 신약의 용어로 말씀을 드리면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다 가능합니다.
4. 지키는 곳은 성소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이곳은 성도가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광야에서는 회막이 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에 때에는 성막입니다. 이것이 왕정시대에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공적인 장소에서 하나님에게 바쳐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5. 드리는 방법
(1) 성회로 공포합니다.
제사장이 나팔을 길게 불어서 온 백성에게 이날은 복된 날이요 감사의 날이니 하나님의 명령대로 주님께 감사를 드리자고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양각나팔을 길게 불어서 이날을 알리는 것입니다.
(2) 아무 노동을 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일을 일체 하지 않습니다.
(3) 오직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 은총을 사모하고 기립니다(레23:21).
이날은 백성들과 만나서 교제하는 날이라기 보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총을 헤아려보고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4) 제사를 드립니다.
이날에 드리는 제사는 구약의 모든 제사를 총 막라하는 것을 봅니다. 구약의 5대 제사를 다 드립니다. 종합적으로 감사제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가) 속죄제를 드립니다(레23:19)
이 제사는 유월절 구속의 양을 상기하는 제사입니다. 이것은 신약에 십자가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곡식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절기에 날 위하여서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총을 묵상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있어야 먹고 마시는 것도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는 사람은 먹음과 입음 그리고 마시는 의미가 없습니다.
(나) 화목제(레23:18)
성령의 중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나 그리고 이웃 형제와 나 사이에 화목을 다시 한번 점검하는 절기이며 하나님 안에서 하나됨을 축하드리는 절기입니다.
(다)요제를 드립니다(레23:20)
제물을 흔들어 바쳐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귀한 것을 지극히 높여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라)번제를 드립니다(레23:18)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몸바쳐 헌신을 다짐하는 절기입니다. 번제는 전부를 드리는 제사입니다. 짐승의 온몸을 전체로 태워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주님의 은혜로 살았고 살아갈 사람이니 이 은총을 갚으면서 살겠다는 다짐의 제사입니다.
(마)소제를 드립니다(레23:15)
곡식을 갈아서 드리는 것입니다. 고운 가루나 떡을 만들어서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속성이 깨트려지고 새롭게 형성된 성도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인간의 혈기가 부셔진 성도를 말합니다.
6. 특별한 교훈/맥추절은
1) 감사절이 되어야 합니다.
2) 영적으로 추수하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전도의 날이 되어야 합니다.
3) 성령 충만함을 기도하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4) 거룩한 행사로 성도의 삶이 성화 되는 날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5) 하나님에게는 감사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성도에게는 성숙과 화목이 돈독하여지고 신앙으로 약진하는 기회가 되게 하여야 합니다.
맥추감사절(칠칠절)
레위기 23:15-22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출 23:16)
성도들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생활은 다른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마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성도들이 그렇게 예배를 중요시하는 것은 성도가 어떤 의식이나 제도에 매여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들이 아브라함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까지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예배라는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제사 즉 예배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택한 백성들을 만나 주셨으며. 그 예배를 통하여 복을 주셨습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그리고 매주일 안식일에 그리고 월삭이라는 매월 초하루에 드리는 예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반 제사와는 달리 특별한 절기인 유월절과 수장절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맥추절 즉 칠칠절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이 맥추감사주일을 지키면서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제사를 생각하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 절기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맥추절은 감사로 드리는 절기였으며 제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3대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입니다. 이 절기는 모두가 감사로 지키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이 세 절기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구속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가장 큰 감사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인도하고 베풀어 주신 사랑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맥추절은 보리와 밀을 거두어들이고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제사로 드리라고 말씀하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맥추절은 감사의 절기입니다. 감사의 절기를 이렇게 1년에 3번씩 드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감사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믿음이 약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 감사 예물을 드려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표현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도 전반기 동안에 어려운 사회적인 현실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 은혜를 다시한번 감사하며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감사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의 삶을 살사는 사람과 그렇게 살려는 사람에게는 3가지가 없습니다.
1. 불평이 없습니다.
감사가 몸에 배여 있는 사람은 불평과 원망이 없습니다. 불신자가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을 할라치면 자기를 돌아보고 생활습관을 고치려거나 마음을 고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뭐라고 합니까? 어쩌다가 내가 하필이면 이런 병에 재수 없게 중병에 걸렸는가 원망합니다. 불평합니다. 일을 힘들게 시킨 사장을 원망하거나 자기를 괴롭힌 자를 욕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녀석은 술 먹고 온갖 짓 다 해도 괜찮은데 왜 나만 이병에 걸렸는가 재수 더럽다고 합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어떠합니까? 자기를 살핍니다. 회개할 기회로 압니다. 그 동안 아무거나 먹고 아무거나 마시고 아무 데나 돌아다닌 것을 회개합니다. 운동하지 못한 것, 마음을 바로 갖지 못한 것을 회개합니다. 주님의 선하심을 믿고 기도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긍휼히 여길 것이라고. 로마서 8장 28절처럼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고 주님의 뜻을 묻습니다.
2. 감사에는 욕심이 없습니다.
(딤전 6:8-9)"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욕심은 우리로 만족을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감사를 시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영혼이 배부름을 얻으면 욕심에서 벗어납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자기가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을 다 가졌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인가요? 주님의 은총으로 그분의 사랑을 누리기에 감사의 마음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안전을 삼고, 하나님 아버지로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필요를 공급받는 것이기에 감사드렸습니다.
우리의 모든 갈등과 욕망의 끝에는 채우지 못한 탐욕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채우지 못한 소유욕, 명예욕,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가 기회만 오면 우리로 감사치 못하게 원망을 쏟아놓게 됩니다.
한자로 욕심(慾心)이라는 “욕”자를 풀어보면 계곡을 말하는 골“곡”자와 하품할 “흠”자가 합성어로 되었습니다. 산이란 원래 골짜기도 있고 봉우리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욕심은 항상 골짜기가 없습니다. 낮은 곳이 없습니다. 봉우리만, 높은 데만 찾는다는 뜻입니다.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3. 감사에는 비교가 없습니다.
비교는 우리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비교는 유일한 나의 존재를 초라한 상품가치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비교하는 순간 관계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비교하는 사람은 감사할 수 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드리는 예배는 무엇보다 감사를 제물로 하여 드리는 예배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때에 드리는 예물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그 제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들이 맥추절을 어떤 자세로 맞고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첫 이삭으로 만든 떡을 요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20절)
첫 이삭은 첫 소산물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첫 소산물로 만든 떡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또한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드리는 예물이요 제사였다는 것입니다.
고로 오늘 우리가 이 맥추 감사절을 예배로 드리면서 우리들도 그 동안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와 인도하심에 감사하면서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하여 여러분들의 가장 좋은 몸과 마음으로 그리고 최선을 다한 예물로 하나님께 드리시는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② 1년 된 흠 없는 어린양 7, 어린 수소 1, 수양 2을 화제로 드렸습니다.(18)
1년 되었고 어리다고 표현한 것은 좋은 것, 싱싱한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불로 태워서 그 타는 냄새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헌신하는 의미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와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사랑과 도우시는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나는 무엇으로 하나님께 드릴 것인가를 생각하며 내가 남은 생은 하나님을 위하여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겠다고 고백하는 의미로 좋은 제물을 내 대신 하나님께 태워 드린 것입니다. 고로 감사는 입으로만의 감사가 아니라 감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내 삶을 통하여 영광 돌리며 살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로 맥추 감사절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신 분들은 그 감사를 이 시간 물질로 표현하지만 우리들의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는 결단의 은혜가 있길 축원합니다.
③ 수 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리라고 했습니다.(19상)
속죄제라는 것은 죄를 속하는 제물이며 제사입니다. 자신의 지금까지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희생 제물로 수양 하나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이 죄를 그대로 두고는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 용서에 대한 감사의 고백 가운데서 드리는 감사절이 진정한 바른 감사절입니다.
우리도 이 시간 먼저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서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드리는 이 예배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④ 일년 된 어린 수양 둘을 화목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19하)
화목제란 무엇을 의미하니까? 화목제란 관계 개선을 의미합니다. 그 동안 서로 간에 반목질시했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거나 서로 간에 사랑이 식어진 모습이 있었다면 이 감사절에 먼저 사람들과 화해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절로 지켜야 합니다. 여기서 첫 이삭의 떡과 화목제물로 드린 어린 숫양 2마리는 제사장의 몫이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은 일하지 말고 즐거워하며 가난한 자와 떠돌이 거류민들을 위해 사랑을 나누십시다.(21-22절)
이 시간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전반기를 은혜 가운데 지키시고 인도하신 그 은혜가 감사하여 이 시간에 맥추감사절로 지킵니다. 하나님께 우리들의 그 모든 것에 대한 표현을 예물로 드리면서 표시합니다.
우리들이 드리는 헌물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헌물이 되길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 감사하여 헌신하는 의미로 드리는 예물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성도들과 가족들과 화목하게 살겠다는 결단 가운데 드리는 예물이 되길 바랍니다.
그렇게 드리면서 가장 좋은 것으로 최선의 것! 최상의 것으로 드리는 자세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지혜로운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서 불평과 욕심과 비교가 없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감사절에 하나님과의 관계와 성도들과의 관계가 새롭게 회복됨으로 이 후의 삶이 더욱 크신 은혜와 축복의 삶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나눔의 감사
레 23:15-22 / 오창우 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가운데 22절에 있는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룻기에 보면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워서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맥추감사절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사를 드리라`, 지난 시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 감사제사, 헌신제사, 서원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15-22절까지 말씀을 통해 같이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이것을 드림의 감사라고 한다면 오늘 맥추감사절에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눔의 감사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에 어려운 사람도 생각하는 것, 그것이 또한 우리가 드려야 할 제사입니다. 왜 제사라고 했습니까? 제사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제사인데,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이렇게 감사, 헌신, 서원으로 드리는 제사뿐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도와주는 것도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셨고, 이런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신다 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그냥 돕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요, 예배요, 감사절에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임을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있는 것과 같은 말씀이 신명기 24:19-22에 기록되어 있는데, 제가 읽겠습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괴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이름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밭에서 추수를 하다가 일부를 남겨두어 그 일부를 가난한 사람, 고아와 과부와 지나가는 나그네가 먹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감사절에 드리는 또 하나의 제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만나시겠다는 것입니다.
과수원에 다 익은 과실, 오늘 성경에 보면 감람나무, 올리브 열매, 포도열매를 딸 때에 어느정도 남겨두라고 했는데, 우리 나라에도 과수원에서 열매를 따다가 꼭대기에 있는 것은 끝까지 따지 않고 남겨두는데, 그것을 까치밥이라고 합니다. 짐승도 먹고 살게 남겨두라는 것인데,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꽃도 보면, 먼저 피는 꽃, 나중에 피는 꽃이 있습니다. 열매도 먼저 익는 것, 나중에 익는 것, 다 딸 때까지 파란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끝물 열매들은 남겨두어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그것을 가져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성서학자인 매튜헨리는 유대교 전통에 의해 남겨두는 양이 어느 정도인가? 60분의 1정도이다라고 했습니다. 전체 수확량 가운데 1.6-1.7% 정도 되는 것을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것을 남겨두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것을 기쁘게 여기시고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돕는다고 했을 때 이것이 단순히 돕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우리가 제사를 드릴 때에 이 제사가 진정한 제사가 되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두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추수한 것에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는 청지기이고 주인의 자세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구제할 때에 주인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과 눈높이를 낮추라는 의미에서 구제라는 말보다 나눔이라는 말이 나은 것 같습니다.
「제자입니까?」라는 책을 쓴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이 `오늘 세상에는 두 종류의 무신론자들이 있는데, 첫째 말 그대로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는 무신론자가 있고, 둘째,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무신론자와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든 것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싱가포르 한인교회에서 있었던 일을 잡지에 실은 것을 보았습니다.
부인이 암 말기로 죽음의 고통 속에 있는데, 남편이 이 아내를 데리고 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이 부부는 굉장히 잘 살은 사람들입니다. 시골집에서 자랐지만, 좋은 대학 나오고, 카이스트에서 근무하다가 지금 싱가폴에 간 사람입니다. 주위의 인정도 받고 사회적 지위도 있고, 무엇이든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개척한 자수성가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내가 암에 걸려 죽음의 투병을 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무것도 해 줄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박사학위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회적 지위도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직장도 소용이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해 줄수 있습니까? 이 남편이 목사님께 와서 하는 말이 "목사님, 저는 무엇이든 제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 아내가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저는 아무것도 해 줄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목사님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했으니, 부인을 위해 진정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주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남편은 그 아내를 위해 극진히 기도하고, 온 교회가 이 가정을 위해 기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에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다 살 것처럼 하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나를 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손에 내 모든 인생의 계획이 달려 있는 줄로 믿습니다.
내 몸은 내가 가졌다고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가 일을 얼마나 했느냐, 얼마나 많은 능력을 가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마21:23에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내게 이르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십니다.
선지자 노릇하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귀신 쫒아내는 것이 얼마나 큰 역사입니까? 권능을 갖고 많은 일을 행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일입니까? 그러나 주님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내가 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인데, 하나님의 뜻대로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그 분이 모든 것의 결정권을 갖고 계시고, 그 분이 가져 가실려면 가져가실 수 있고, 그 분이 우리를 심판하실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나눔의 제사를 바르게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봉사도 같은 의미입니다. 내가 잘 나서 봉사합니까? 내가 힘이 있고, 내가 한다고 생각하니까, 늦게 와도 아무 잘못이 없는 것입니다. 빠져도 내가 나머지 도와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봉사하셔야 합니다. 잘나서 봉사한다고 생각합니까? 저와 여러분이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 재난 당해서 어려움을 당한 사람보다 나아서 더 좋은 일 많이 해서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삶,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 것이 다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산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청지기로 살라고 합니다. 청지기라는 말은 주인의 것을 위탁받아 관리하는 일군이요, 종인 것입니다. 청지기에게 중요한 것은 주인의 것을 얼마나 주인의 뜻에 맞게 관리하느냐는 것입니다.
마태25장에 달란트비유가 나오는데, 착하고 충성된 종이 나오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 나옵니다. 이 두 종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얼마나 많이 일을 했느냐가 아닙니다. 주인을 의식했느냐? 안 했느냐? 주인의 소유권을 인정했느냐? 안 했느냐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의 한 달란트를 허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인은 인색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습니다. 일하다가 잘 될수도 있고, 안 될수도 있습니다. 주인이 보고 싶은 것은 내가 너에게 맡겼는데, 관리를 잘했느냐입니다. 내 생각대로 묻었다가, 내 생각대로 갖다 주는 것입니다.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눔의 제사는 봉사할수 있는 것은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인이시고, 나는 청지기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인생의 주인이시고, 나는 그의 종이라는 시험에 합격합니다.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바칩니다. 히브리서 11장19절에 이삭을 왜 바쳤느냐?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능히 살리실 줄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식이지만, 죽이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살리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마음대로 쓰시라는 것입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더니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할 때에 나는 관리인이요,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입니다. 때에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4장7절에 `내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받은 것은 다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역대상 29장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건축을 못 하자, 내가 하나님의 성전건축을 위해 건축헌금이라도 하겠습니다. 건축헌금을 바치며 내가 바친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바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니까, 그 많은 것을 바치고도 자기의 것은 없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시고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사람, 하나님의 청지기로 사는 사람이 신앙인이고, 이런 사람에게 은혜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선 수입이 많으면 많을수록 높임받고, 적으면 적다는 것 때문에 열등의식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신앙인 가운데도 수입이 많으면 축복받은 것 같고, 훌륭한 사람 같고, 수입이 없으면 형편이 없고 축복을 받지 못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지난 6개월동안 수입이 좋으셨습니까? 그래서 감사합니까? 혹은 지난 6개월동안 별로 된 것이 없어서 감사 못하겠습니까?
이것은 철저한 세상적 가치관입니다.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삶이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할때도 있고 가난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입이 좋을 때도 바울이고, 나쁠 때도 바울이고, 그는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마음에 따라 물질에 따라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빌4장12-13절에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서 모든 일에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의 가치는 수입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요, 적게 벌었다고 가치없는 사람도 아니요, 많이 벌었다고 훌륭한 사람도 절대 아닙니다. 우리의 가치는 하나님이 주인이요, 나는 그의 청지기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파스칼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가난을 사랑한다. 왜? 예수님이 가난하셨으니까.
나는 부를 사랑한다. 왜?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으니까.
여러분, 무엇 때문에 행복하십니까? 무엇 때문에 불행하십니까? 하나님은 주인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주시기도 하시고, 가져가시기도 합니다. 건강하게도 하시고, 병들게도 하시고, 그러나 우리를 진토에서부터 끌어올려 귀족의 자리,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하시는 하나님이신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살아있다는 이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께 소유권을 인정하고, 주님이 주신 생명과 시간과 믿음과 이 교회를 잘 섬겨서 정말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우리 모두 진정한 나눔의 제사를 돌리셔서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나눔의 제사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준 제물을 갖고 은사로 사용해야 합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선물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 살리우는 데, 교회를 세우고, 봉사하는데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선물 가운데,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양선과 자비와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 모든 것들이 다 다른 사람을 위해 세워지는 일에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에릭프롬이 쓴 책 가운데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 사람이 물질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두가지로 사용하며 그것을 갖고 그 사람의 삶이 판가름이 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소유지향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욕구를 충족하는 것에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남보다 더 좋은 것을 갖고 싶어하고,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하고, 필요하지 않아도 사야 하는 사람. 우리 나라가 돈 좀 벌기 시작하니까, 소유지향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내 돈 벌어서 내가 쓰는데, 누가 뭐라고 하는가? 비싼 게 더 잘 팔리고, 만원 써 놓으면 안 사가도 백만원 써 놓으면 사간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습니다.
명품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이 소유지향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존재지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지향이라는 것은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나을 도와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구두쇠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놀부, 베니스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오는 스쿠르지 가 생각납니다.
그런데, 조지 엘리엇이 쓴 「사일러스 마이너 1861」라는 책에 대한 글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이 마이너라고 하는 사람이 어느 마을에 살다가 도둑누명을 쓰고 더 살지 못하게 되어 다른 마을에 갔습니다. 새로운 곳에 가서 생각하는 것이 돈을 벌어야겠다 생각해서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하루 열여섯시간 씩 잠자는 시간 외에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 돈을 벌어 금화를 만들어 갖고 밤마다 그 금화를 꺼내어 보는 것으로 만족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누가 들었는지 도둑이 들어와 그것을 훔쳐갔습니다. 얼마나 절망했겠습니까? 그래서 이 도둑을 찾으려고 열심히 다녔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다시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 누가 두 살배기 어린아이를 버리고 갔습니다. 이 상황에 무슨 아이를 키우겠습니까? 그러나 아이가 울자, 달래주고 배고플 때 먹을 것 주고 하다 보니, 정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받아야 하니까, 마을 사람들에게 말을 붙이고, 사람들이 도와주고 살다 보니, 세상에 인생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전엔 금화를 보면 이것이 그렇게 행복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주면서 얻는 행복이 너무나 커서 이 세상엔 선과 악의 고통이 있는데, 그러나 선이 더 많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남을 도와 주는 것이 행복이고 과거엔 소유지향적인 삶을 살았는데, 그것을 잃어 버린 후에 절망적이고 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아무것 없이도 살아가다 보니 삶에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 때문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사람들이 불교를 많이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불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저기 티벳산골마을에 불교인들이 하는 호흡 수련법 가운데 `통렌` 호흡법이라고 있습니다.
`통렌`이라는 말은 주고 받는다는 뜻입니다.
대개의 호흡법은 들숨과 함께 깨끗하고 좋은 기운을 받아 마시고 날 숨과 함께 더럽고 나쁜 기운을 내보낸다고 상상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통렌 호흡법은 반대로 더럽고 나쁜 기운을 받아 마시고 맑고 좋은 기운을 내보낸다고 상상하는 것입니다.
이 호흡법의 효과는 물론 해 본 사람만 알겠지만 뚜렷하고 놀랍다고 합니다.
의학적이나 건강학적으로는 모르겠으나, 굉장히 행복하답니다. 집안에 심기가 불편한 사람이 있을 때, 구석진 곳을 찾아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그가 내뿜고 있는 나쁜 기운을 들숨과 함께 마시고 반대로 맑고 좋은 기운을 날숨과 함께 토하여 그에게 보냄으로서 그의 불편한 심기가 내게로 전염되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막을 수 있고, 나쁜 기운을 받아 마시면 마실수록 네 몸 안에 맑고 좋은 기운이 가득 찬다는 이론입니다. 그럴 듯 합니까?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이것이 사실 그런지 안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통렌 호흡법이 가지는 정신은 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말만으로 원수사랑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내가 죽어서 네가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이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은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 밥 퍼 최일도 목사님 ` 청량리 굴다리에서 노숙자들에게 밥을 해 준다고 해서 `밥 퍼` 목사님 아닙니까? 제 후배 목사님이지만 참 존경하는 목사님입니다.
그 분이 쓴 책 가운데 `이 밥 먹고 이 밥 주고`라는 책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분을 먹지 않았습니까? 그분의 살 먹고, 그 분의 피 먹고, 우리가 구원받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우리도 세상에서 밥이 되어 살아야지, 우리는 세상 사람을 내 밥으로 보고 삽니다. "저거 먹어서, 내가 저 사람 이겨 가지고"
우리는 세상을 밥으로 보지, 우리가 예수님의 밥 때문에 우리가 살았는데, 우리가 왜 이 세상에 밥이 되어 살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나 먹고 너 살아라", "나쁜 공기 마시고 좋은 공기 마셔라"가 아니고 "나 먹고 너 살아라."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살아야 할 삶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 갈 때에 내게 주신 복,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선 목표가 나를 위해 가지고, 나를 위해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이 소유라고 하는 것이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좋은 차 타고, 좋은 옷 입고 대접받으려 합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티벳불교의 `통렌 호흡법`을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 종교라는 것도 다른 것 없습니다. 남에게 나누어 줄때에 자기를 높이는 것이 세상 종교입니다.
이전에 거지들이 동냥할 때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적선합쇼." 그것이 무엇입니까? 선을 쌓는 일입니다. 나를 도와 주는 것은 선을 쌓는 것이고, 죽으면 좋은 데 갈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 종교는 좋은 일을 하면서도 자기를 높이는 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자기 덕을 세우고, 자기가 높아지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내가 높아지려는 데 사용하고, 이런 사람을 대우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에는 차별이 있습니다. 높은 사람은 행복할 수 있지만, 낮은 사람은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나라 대학 중에 제일 좋은 대학이 서울 대학 아닙니까?
그런데, 서울대학생이 자살했습니다. 열등의식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서울 대학 다니면 최고인줄 알았는데, 왜 열등의식에 빠집니까? 서울대학 안에도 좋은 과가 있고, 나쁜 과가 있다고 합니다. 주신 것을 언제나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다 보면, 언제나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는 법입니다.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면 차별이 생긱고, 차별 때문에 교만해 지거나 비굴해 지고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고 이것은 정말로 잘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이 잘 되는 것은 내 것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하나님의 은사로 정말 사람 살리우는 데에 이것을 사용할 때에 여기에 하나님의 은사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있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리차드 포스터 가 쓴 책 가운데 「영적성장과 훈련」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두 주간 동안 열심히 읽었던 책인데, 그 내용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위의 권위보다 기능의 권위를 원하신다. 지위의 권위라는 것은 내가 돈 많이 벌고, 힘과 권력이 생겨서 남을 이리 저리 다스리는 것인데, 기능의 권위라는 것은 내가 섬기는 자가 되어서, 다른 사람이 감동을 받아 나와 협력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의 섬김과 참된 섬김의 차이를 이야기합니다.
자기의 섬김은 인간적인 계획과 노력에 의해서 하는 것입니다.
참된 섬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합니다.
자기의 섬김은 광고에 관심을 둡니다. 내가 얼마나 드러나는가, 그러나 참된 섬김은 조용합니다.
자기의 섬김은 외적인 상급을 요구합니다만, 참된 섬김은 섬김 자체에 만족을 합니다.
자기의 섬김은 결과에 관심을 두지만, 참된 섬김은 섬김 자체를 기뻐합니다.
자기의 섬김은 대상을 선택합니다. 특히 권세자를 섬기고 차별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섬김은 차별이 없습니다.
자기의 섬김은 마음의 감정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참된 섬김은 단순하고 성실합니다.
자기의 섬김은 일시적 감정에 의해서 하지만, 참된 섬김은 생활방식입니다.
자기의 섬김은 기회를 요구하지만, 참된 섬김은 항상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섬김은 공동체를 금가게 하지만, 참된 섬김은 공동체를 튼튼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남을 섬기고 세우려는 진정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열가지를 이야기합니다.
① 윤리규정이 아니고 생활방식이 되어야 한다.
② 숨은 섬김도 있다.
③ 작은 섬김이 있다.
(꼭 돈을 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길가의 종이를 줍거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
프랑수아 드 살르 라고 하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큰 덕행은 설탕과 같고 작은 덕행은 소금과도 같다.`
④ 관용의 섬김이 있다.(남을 헐뜯거나 비판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입니다.)
⑤ 섬김을 받는 섬김이 있다. (시어머니들이 며느리들이 무엇을 갖고 오면 그냥 받을줄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기실 때에 아니라고 했는데,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⑥ 예절의 섬김이 있다. (누가 우리에게 인사하거나 반길 때에 그것도 하나의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심방을 받을 때에 방 한번 쓸어놓고, 옷 입고 기다리는 것도 섬김입니다.)
⑦ 대접하는 섬김이 있다. (교회의 감독, 목사님, 장로님, 딤전3:2, 손 대접하기를 즐겨야 합니다.)
⑧ 듣는 섬김이 있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입니다. 설교를 잘 듣는 것도 목사님을 섬기는 것이 됩니다.)
⑨ 서로 짐 지는 섬김(같이 울고, 같이 웃고 - 저는 밥을 늦게 먹는 편인데, 우리 구역이 아닌데도 들어가서 설거지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좋은 섬김입니다.)
⑩ 생명의 말씀을 나누는 섬김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갖고 높아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사용하는 데에 쓰지 말고, 이웃을 세우는 데에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이 말씀을 정리하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첫째, 검소하게 살아야 겠다.
바리새인들이 좋은 경건의 신앙의 삶을 위해 세가지를 생각했는데, 매일 하나님 앞에 기도로 예배하는 것, 이웃을 향해 구제하는 일, 자기 자신을 향해서 금식을 했습니다.
우리가 남을 돕는 데에, 있어서 돕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내가 안 먹고 안 써야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내가 희생해야, 어려운 사람의 마음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검소해야 겠습니다. 시간도 나를 위해 쓰는 것을 줄이고, 능력도 나를 위해 쓰는 것 줄이고, 너무 바쁘면 안 됩니다. "늘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겠다."
지난 주 TV에서 인간극장을 보았습니다. 남편은 `김동덕`씨이고, 부인은 `박완금`씨입니다.
그런데, 이 부인이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고 재미있게 잘 살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교통사고로 목 아래를 전혀 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이동섭 목사님이 생각났습니다. 우리 이목사님은 손이라도 쓰시지만, 이 부인은 전혀 못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어디를 갈 때면, 이 부인을 옆에 묶어 놓습니다. 집에 있을 때도 누워 있을 때 외엔 묶는 것을 해서 있습니다. 밥도 떠 먹여 줘야 하고, 책을 보고 싶어도 누가 펴주어야 합니다. 남편이 직장을 다니다, 아내 때문에 고향에 내려가서 개를 키우며 살자 해서 식당에서 짬밥을 얻어 다니는데, 그때마다 부인을 데리고 다닙니다. 남들이 오해합니다. "왜 부인을 묶어 두는가?" 묶어 놓지 않으면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짬밥을 얻어 가지고 개를 먹일 때는 -어디서 주워온지 모를 스피커와 마이크를 놓고 밖에서 일할 때 들리게- 부인이 부르면, 일하다 말고 들어 와, 부인의 일을 돕는 데, 성경 한페이지 넘겨달라고 하면, 그것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넘겨주고 금방 가면, 한 삽 뜨자 마자 또 부릅니다. 귀가 간지러우니까, 긁어줍니다.
"이왕 온 김에 성경책 한 장 넘기고 가자.", "안돼, 아직 남았어." 모르겠다 하고 후닥 넘기고 도망갑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부인이 부를 때마다 화나고 짜증나지 않냐고 묻습니다. 저는 짧은 순간 보는데도 짜증이 나던데, 정말 어떻게 저렇게 할까? 도망갈 것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하고 살까? 너무나 가난하게 사는데. 이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라고 왜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웃어야지. 안 그러면 저 사람은 상처를 받을 것 아닙니다. 저 사람이 상처를 받으면 어떻게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은혜받았습니다. 머리하는 것도 이렇습니다. 내 마음대로 하면, 나는 티셔츠 바람에 설교도 하고 싶고, 심방도 하고 싶고, 이 더운 여름에 왜 넥타이를 매고 다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상대방을 배려하기 때문에 이 옷도 입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 한마디도 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에게 진정한 존재가치가 있고, 이런 사람이 진정한 나눔의 감사를 드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께 감사제사를 드리면서 어려운 이웃들도 생각하는 감사제사,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너무나도 있는 것, 없는 것에 짓눌려 살며 차별화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교만하고, 그것 때문에 비굴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소유권이 하나님에게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사용되는 존재론적인
삶, 그런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시 하나를 소개 하고 끝마칠까 합니다.
제 아내가 쓴 편지 중에 있는 글입니다. 어디서 퍼온 글 같습니다.
1. 세상에서 내가 가장 많이 생각했던 열 글자. ▷항상 내 곁에 있어 줬으면
2. 세상에서 내가 가장 많이 바랬던 아홉 글자. ▷너와 하나 될 수 있다면
3. 세상 모든 것이 달라진다 해도 달라지지 않는 여덟글자 ▷항상 너를 향한 마음
4.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생겼을 때 해 줄 일곱 글자 ▷항상 널 지켜줄게
5. 세상의 모든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여섯 글자 ▷너의 밝은 미소
6. 세상의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다섯 글자 ▷너를 위해서
7. 세상에서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네 글자 ▷너의 사랑
8. 세상에서 너에게만 들려줄 세 글자 ▷사랑해
9.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에게 없을 두 글자 ▷ 이별
10.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한 글자 ▷ 너
너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 한 주간도 주님의 은혜 받은 자로 이 세상에서 너를 위해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맥추절
레 23:15-22 / 채규현 목사
우리의 삶에서 인생의 진정한 기쁨은 어디서 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세상 사람들은 인생의 기쁨은 무엇인가 얻는 것, 가지는 데에서 온다고 보통 생각합니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가질 때에 기쁨이 있고, 내가 누리고 싶은 것을 누릴 때에 기쁨이 있다고 보통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럴 때에 기쁨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 잠깐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처음에 그것을 얻을 때의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보다 더 영속적인, 오래 가는, 끝까지 없어지지 않는 그러한 기쁨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심지어 세상의 쾌락은 그것을 맛보면 맛볼수록 그 뒤에 더 깊은 고통의 나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술과 담배와 마약, 이런 것들이 쾌락 아닙니까?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즐길 수 있는 것들, 설탕도 있지요? 지방이라는 것도 사실 우리에게 맛을 주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나치게 탐닉하다 보면 결국 그 뒤에 우리에게 고통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그러한 세상적 기쁨과 즐거움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보다 더 오래가는, 영원한 그러한 즐거움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그러한 면을 우리가 천국에서 누리겠지만, 천국가기 전에 이 세상에서도 우리에게 누릴 수 있도록 장치한 것이 바로 절기들입니다. 절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우리가 기쁠 수 있고 천국을 누릴 수 있고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지내는 맥추감사절도 사실은 기쁨의 상징이 되는 절기입니다. 요즘엔 절기, 특히 맥추감사절의 의미가 많이 퇴색해 있지만, 점점 더 앞으로 이 감사절의 의미를 추수감사절처럼 살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절기가 옛날에는 아주 다양하게 여러 가지 면에서 행사로서 지켜져 왔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그저 절기 헌금만 내는 날로 변질된 것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모든 예배가 오직 설교 위주, 가르침 위주, 이러한 교훈적 예배 위주의 성격으로 가다보니까 그 외의 모든 우리의 상징적인 행위들이 전부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이 바로 맥추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오순절이라고도 하고 칠칠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유월절 이후에 50번째 되는 날이 오순절이고 칠칠절입니다. 실질적인 날짜로 계산하면 6월 정도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수확기에 맞추어서 특정한 주일을 정하다 보니 바로 오늘이 맥추감사절로 지키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맥추절하면 말의 의미에서 이미 나왔듯이 보리를 수확하고 나서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 맥추감사주일이나 추수감사주일, 이 모든 것이 농사의 달력에 맞추어서 지키는 것입니다. 많은 수확이 있은 뒤에, 그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드리는 감사 절기가 바로 맥추절과 추수절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추수감사절보다는 보다 더 성경적 의미가 강한 것이 맥추절입니다. 맥추절은 누룩 있는 떡을 해서 하나님께 드리고 또한 먹습니다. 여기 비해서 유월절 직후부터 지키는 무교절에는 누룩 없는 떡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즐거움의 상징은 누룩 있는 떡입니다. 누룩 없는 떡을 먹는다는 것은 그 즐거움을 제하고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 누룩 없는 떡을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맥추절 자체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소산을 즐기며 기쁨을 서로 나누며 감사하는 때입니다. 그와 동시에 이것을 나만 즐기는 것이 아니고 함께 즐긴다는 개념으로 나와 있습니다. 함께 불쌍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 오히려 남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키는 때, 바로 이것이 맥추감사절입니다. 그래서 그 면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봅시다.
제일 먼저 맥추감사절은 먼저 여러분의 마음으로 감사하는 때입니다. 그런데 보통 하나님께 감사의 헌금으로 드린다, 연보를 드린다 할 때에 감사주일만 오면 스트레스 쌓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를 드려야 하나? 목사님도 새로 오셨는데, 많이 드리자니 조금 더 아플 것 같고, 조금 드리자니 눈치가 보이고.’ 이래저래 스트레스 쌓이는 것이 맥추감사주일입니까? 그런데 원래 감사주일의 참된 의미는 나를 희생시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헌신할 때에 그런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나를 죽이고 쳐서 내가 손해되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이런 방향으로 여러분이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그러한 면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꾸 하나님께 연보를 드리라, 감사를 하라,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만 즐겁고, 우리 즐겁지 않은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하는 그 심령 중에 오히려 내 기쁨이 커지는 것을 여러분이 경험 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천국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기쁨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진정한 안식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위해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이상하게 내 것을 하나님께 더욱 드리면 드릴수록 내 속에 은혜가 넘치는 것을 체험합니다. 생명의 하나님과 하나 됨을 더욱 체험하는 순간들이 있단 말입니다. 그리하여서 하나님께 진정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삶이 어떠한 형태이든지 간에 감사하는 사람만이 삶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 적극적인 자세, 이것이 내 모든 환경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에서부터 옵니다. 그래서 끝없이 계속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감사를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감사가 습관화되다보니까 점점 진정한 마음의 감사가 우리의 이해로도 오게 된단 말입니다.
제가 한 사람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청주에 사는 권용수씨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원래 소아마비로 두 발을 못 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목발을 짚고 다녔는데, 초등학교 졸업 후에 집안이 어려워서 양복점에 취직을 했습니다. 양복점에서 하루 종일 앉아서만 일을 하다보니까 다음에는 목발로도 짚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두 발이 약해져서 완전히 앉은뱅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병든 아버지와 착하기만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 그리고 어린 두 동생이 있는 어려운 집안의 장남이었습니다. 도저히 이대로는 삶을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혼자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재활원에 있으면서 전자제품 조립공장에 다녔습니다. 조립공장에서 계속해서 일을 하면서 집안을 살리고 자기는 계속 공부를 해서 고입검정고시에 합격했고, 대입검정고시를 합격했습니다. 대입검정고시를 합격한 뒤에 시계 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고향인 경북 예천에 돌아가서 요한당이라는 시계방을 차렸습니다. 그러다가 동생이 하나하나 충북대에 합격을 했습니다. 예천과 충북대가 있는 청주에 두 집 살림을 할 수 없어서 아예 청주로 이사를 했습니다. 거기에서도 변두리에 요한당이라는 시계점을 차리고 또 근처에 사글세방을 얻어서 온 식구가 거기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사는 동안에 지금의 아내도 만났습니다. 그 아내도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의 이름도 요한이라고 지었습니다. 이쯤 되면 바로 이 권용수씨라는 사람이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겠죠? 모든 게 다 요한이에요. 그러면서 점점 그 사업이 번창해서 두 동생을 분가를 시키고 부모님에게는 원래 고향인 농촌에서 사실 수 있도록 전답도 사드리고, 자기 자신은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4천만 원을 들여서 장애인 전용 엘리베이터도 설치해 주었습니다. 지금 현재 그는 30여명의 장애인을 고용한 회사의 사장입니다. 이분이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었을까요? 보통의 사람이면 처음부터 절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보통의 사람이면 그 찌든 삶 때문에 삶을 포기했을 지도 모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이 비록 소아마비의 삶이었고, 가난에 찌든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삶이었고, 어린 두 동생을 계속해서 돌볼 수밖에 없는 삶, 아내를 만났어도 아내도 장애인인 그런 삶이었지만, 그의 삶이 힘을 낼 수 있는 근원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인생을 극복하고 승리하고, 마침내 번성할 수 있는 축복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에 진정 승리하는 삶의 출발점은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는 삶, 내 환경이 어떻든지 관계없이, 여러분의 현재의 삶에서 어떠한 문제가 있든지 관계없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 이것이 필요합니다. 감사를 통해서 인생을 보는 면이 바뀝니다. 인생을 보다 긍정적으로 보게 되고 인생을 보다 적극적으로 보게 되고 오히려 어려움에서 일어날 때마다 더 큰 삶의 희열과 기쁨을 누리게 된단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환란을 당해봤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어려움을 당해봤습니까? 참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속에 살아보십시오.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서 ‘아, 헌금한다’ 이 생각 말고라도 정말 내게 주신 모든 삶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있는 감사가 표현되는 연보여야만 합니다. 억지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맥추절을 주신 진정한 의미가 여러분의 인생과 여러분의 삶에 다시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 권용수씨가 어느 누구보다도 그 인생에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맥추감사절은 그러한 면, 하나님 앞에서 감사를 보다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때 입니다.
두 번째는 맥추감사주일은 나보다 못한 사람, 내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 이 사람들을 생각하는 때가 바로 하나님 앞에 감사할 때입니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면 바로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남도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오직 불쌍한 인생들이 자기 인생의 문제에만 집중해서 생각할 때에 남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관계에 많은 문제가 있는 가정들을 들여다보면, 각각 남편과 아내가 전부 자기만 생각합니다. 자기중심적으로만 되어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마음 바닥 속에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없을 때, 어떤 환경에든지 그 사람의 삶과 그 사람의 인생, 그 사람의 가정, 절대로 천국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천국은 감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환경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돈을 가졌느냐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인생길을 가고 있느냐 그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많은 능력을 가졌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오직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남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서 감사절 날, 누구보다도 남을 생각할 수 있는 때, 감사가 넘치게 되면 불쌍한 사람들이 드디어 보이게 되는 바로 그러한 때란 말입니다. 감사할 때 비로소 내 마음도 넉넉해지기 시작합니다. 그 마음이 넉넉해질 때 비로소 삶의 기쁨이 있습니다.
세 번째, 맥추감사절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때라고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합쳐져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때입니다. “내가 네 하나님 여호와가 아니냐,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 계속해서 하나님이 이야기 하십니다. ‘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란 말 속에 특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6장에 보면 “나는 여호와니라” 하는 말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그러면서 너희 선조들에게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내 이름을 여호와로 알리지 아니하였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만 알렸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엘 샤다이 하나님, 하나님께서 하나님 스스로를 소개할 때마다 여호와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때에 와서 비로소 하나님이 “나는 여호와로다” 이야기 하십니다. 그 뒤로 출애굽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행한 뒤에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정한 명령을 하실 때마다 언제나 하나님은 “나는 여호와로다” 라는 말을 거듭해서 이야기 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경험해봐야 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 이스라엘 백성은 “나는 여호와로다” 이 말 자체에서 여호와가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한 뒤에 계속해서 “나는 여호와로다” 하면 아, 나를 이렇게 구원하신 그 하나님! 하고 생각이 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여호와로다는 말이 계속해서 출애굽 때부터 나왔고 선지서를 보면“나는 여호와로다” 라는 말이 제일 많이 나옵니다.
저는 채규현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저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얼마나 많이 아십니까? 아직은 두 달 밖에 안됐습니다. 두 달 전에 여러분들이 채규현이란 사람을 얼마나 많이 이해했습니까? 거의 몰랐거든요. 그러나 “제 이름이 채규현입니다” 할 때 두 달 만큼 이해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십년 뒤에 채규현 목사라 하면 십년의 여러분과의 삶을 통해서 저를 알게 됩니다. 그때 제가 누구인지 이야기한다면 바로 여러분과 십년 있었던 그 모든 삶이 집약되어서, 아, 우리 목사님! 이렇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바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 그 자체에는 특별한 이름이 그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여호와라는 그 이름 속에, 제일 먼저 출애굽사건에서 “나는 여호와로다” 이야기 하신 뒤에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특정한 일, 특히 구원의 일을 하시면서 계속 여호와라는 그 하나님의 이름 속에 의미를 담아갑니다. 지금 여기서도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다” 하실 때는 내가 너를 구원한 하나님이 아니냐, 이 뜻이 있습니다. 성경의 하나님, 맥추절을 지키라고 하신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아닙니까? 맥추절을 지키라는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을 사랑하신 하나님 아닙니까? 그 하나님이 여러분께 감사절을 지키며 감사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믿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다.” 이 말의 의미를 여러분이 모든 삶에서 경험하고 있냐는 말입니다. 오늘 절기를 지키면서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감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감사를 통해서 나를 살리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내게 생명주신 그 하나님을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불쌍한 자를, 불쌍한 나를 생각하신 그 하나님께서 모든 다른 불쌍한 자도 생각하시는 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인정하고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하나님을 느끼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떠한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 진정 그러한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그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여러분은 먼저 물론 성경을 먼저 읽어야 되겠죠. 그러나 실제 삶에 순종하는 행위 하나하나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감사는 나와 하나님이 하나 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내가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도 내가 하나님의 입장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모든 말씀을 지키는 진정한 이유는 그 말씀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진정 만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순간이 내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바로 그때입니다.
언제 부모님의 마음을 제일 많이 이해합니까? 아무리 자식들이 부모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언제 가장 근접하게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느냐 하면 바로 내가 자식을 키울 때, 내가 자식을 키우면서 처음에 애를 낳고 밤새도록 울고 자지 않는 아이들을 달래면서 고통스러워하면서 ‘나도 어려서 우리 부모님이 나를 이렇게 키웠겠구나’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플 때 정신없이 등에 업고 병원으로 달리면서 ‘내가 아팠을 때 우리 부모님도 내게 이렇게 했겠구나’ 하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처음 학교 갈 때의 그 감격스러움, 그걸 느끼면서 ‘우리 부모님도 내가 학교 갈 때 그렇게 느꼈겠구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어려운 시험을 잘 치르고 합격하는 순간에 그 감격, 자식의 감격보다 부모 되었을 때의 감격이 더 크다는 사실을 내가 부모 되어서 자식이 합격할 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부모가 되는 순간에 부모님의 마음을 제일 많이 이해하거든요.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히려 내게 있는 것을 하나님께 더욱 드릴 때, 내 삶에 주름이 져가며 드릴 때,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내 주변의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도울 때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인생 속에 더욱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절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 다시 한번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을 상기하는 날, 다시 한 번 느끼고 누리는 날입니다. 여러분의 오늘 삶에서 다시 한번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드립시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구합시다. 하나님의 참된 은혜와 사랑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옆 사람과 함께 인사합시다.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삽시다. 참된 감사가 여러분의 삶 속에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