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난히 추웠던 1976년 겨울이야기 - 1편
내가 군대생활을 마치고 제대해 집에 온 것이 1976년 11월 3일이었다
10월 말 경에 부대가 있던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하심곡리를 떠나
사단본부가 있던 경기도 가평군 현리를 거쳐
경기도인지 서울인지 수색 쪽에 있던 30사단을 거쳐 집에 왔다
군대생활 3년도 아주 빡세고, 힘들다는 맹호부대에서 했다
수도기계화보병사단 기갑여단 101기보대. 장갑차부대였다
거기서 대대 정비과 차량계를 봤다.
M113 APC 장갑차 수리부속품을 조달하는 직책.
쫄병 때는 닥치는대로 정비도 하고 그랬다.
부대에 있던 63대의 장갑차 정비를 관리하는 직책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기계화부대는 수기사가 유일했다
철수하는 미군 제7사단 장비를 고스란히 인계받아
월남에서 막 철수한 맹호부대를 모태로 창설된 부대였다
M113 APC(인원수송용 수륙양용 장갑차)
전차장 자리에는 캘리버-50이라고 하는 중기관총이 한 대 거치돼 있었다. 보통 50이라고 불렀다.
그 총기도 우리 정비과에서 관리했었다. 동기였던 총포계가 따로 있었다
집에는 이미 병환이 깊으셨던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세살 어린 여동생, 다섯살 어린 남동생, 그리고 여덟살 아래 여동생
그렇게 다섯 식구가 있었다. 나보다 여섯살 위인 누님은 출가하셨고...
내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가세가 많이 기울었고
몇 번의 이사를 거쳐 내가 제대할 무렵엔 건재상회를 하고 있었다
그 동네에서는 제법 이름이 난 "새마을 건재"란 간판을 걸고...
주로 시멘트와 모래, 그리고 벽돌, 브록크, 등을 쌓아 놓고
또 한 쪽에는 갖가지 건축자재와 철물점까지 겸하고 있었다
일종의 종합 건축자재를 파는 일이었다
안채는 살림집이었고, 바깥쪽은 미장이 들과 배달꾼들이 노는 공간
거기서 화투도 치고, 막걸리도 사다 마시고, 왁자지껄했다
그러다가 일감이 들어오면 우리가게에서 자재가 배달됐다
반대로 우리집에 일감이 들어오면 미장이들에게 주기도 하고 그랬다
미장이들이 당연히 갑이고 우리가 을인 관계였다고 해야하나
서로 상부상조하는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였다
제대하던 첫날부터 아버지는 내가 일을 해 주기 바라셨다
어느 집에서 일감이 들어왔는데 내게 배달을 하라고 하셨다
제대할 때 입고, 신고 나온 개구리복이라고 하는 제대복과
새까만 운동화를 신고 배달을 나섰다
군대생활 때도 해보지 않았던 노동의 현장으로 바로 뛰어 들었다
다섯살 아래의 남동생과 함께였다
당시 내가 키 178센치에 체중이 75키로
동생도 나랑 덩치가 비슷했었다
가게에 두 명의 리어카 배달꾼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 배달료가 나가는 것도 아까워 하셨다
당시 한 리어카를 끌고 가서 배달하면 100원을 주었다
배달꾼들도 배달일보다는 미장이들의 데모도 일을 더 좋아했다
그게 힘도 덜 들고 수입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었다
한 리어카에 실을 수 있는 물량이 정해져 있었다
더 이상 실으면 하중이 너무 많아 위험했다
언덕길을 내려갈 때 더욱 위험했는데
제동장치라고는 리어카 바닥에 붙인 폐타이어가 전부였다
리어카채를 머리위로 한껏 들어 올리고 힘으로 버티며
지그재그식으로 언덕길을 내려갔다
특히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사람이 있을 때 아주 위험했다
이를 피하려다 미끄러져 크게 다친 일도 있었다
시멘트벽돌을 차곡차곡 쌓으면 200장을 실을 수 있었다
구멍이 세개 뚫린 시멘트 브록크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너비가 4인치인 브록크와 5인치짜리가 있었다
4인치 짜리 브록크는 50장, 5인치 짜리는 45장 실을 수 있었다
모래를 가득 실을 경우에는 양 옆으로 시멘트를 두 포대 얹었다
그게 제일 무거웠다. 시멘트 벽돌도 마찬가지였고...
시멘트 한 포대가 40kg 였으니, 두 포대면 80kg
거기다가 모래의 무게가 또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가 한 셋트로 배달됐다
길다란 PVC파이프도 직경이 서로 달랐는데 아주 길었다
그 파이프를 실으면 리어카 앞뒤로 삐져나와 조심해야 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다칠 수 있었다. 코너를 돌아갈 때...
가끔씩은 하수도 공사에 쓰이는 노깡이라는 것도 배달했다
그 것도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도자기로 구워낸 노깡.
항아리나 장독과 같은 재질로 만들어져 나왔다
노깡은 모래위에 얹거나 앞쪽 주머니에 넣었다
위에 적은 건축자재들을 실어 나르는 생활이 시작됐다
제대하고 집에 오자마자 바로 노동의 현장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나 일을 했을까?
아버지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셨다
집에 있던 돈을 모두 찾아서 어디론가로 가출을 하셨다
나중에 알고보니 지금의 안산시 고잔동이란 곳으로 요양을 위해서
당시 수원에서 포목점을 크게 하셨던 큰아버지가
동생을 살리겠다고 바닷가 집 방 한 칸을 구해서 보내신 거였다
결국 아버님은 2년 여 남짓 더 사시고 돌아 가셨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한지 딱 1년만이었다
겨우 저축했던 돈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지금 경기도 광주 모현면에 있는 한남공원에 잠들어 계시다
17년을 더 사시고 가신 어머님을 옆에 합장시켜 드렸다
통장에 남아있는 돈은 달랑 4만원 뿐이었다
그 날부터 더욱 고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날씨는 겨울이 되어 추워졌고, 얼음이 얼고, 눈이 내렸다
그 해 겨울이 유난히 더 추웠다고 했다
겨울이 되면 큰 공사는 없지만 작은 공사가 많았다
당시 구공탄을 때던 시절이라 가스중독이 문제였고
여기저기 연기가 새거나 하면 수리를 해야했다
구로4동의 허름하게 지어진 공영주택들이 주 고객이었다
구로공단에 근무하는 여공들이 많이 월세를 살았는데
연탄가스 중독이 되면 집주인의 책임이었다
겨울이면 가스 새는 곳을 막는 공사가 참 많았다
그런데 겨울날씨다 보니 모래가 얼어 붙었다
일일이 곡괭이로 찍어내고 부스러 뜨려 배달을 해야했다
8톤 덤프트럭으로 배달된 모래가 쌓여 그대로 얼었다
그 때는 주로 한강에서 채취한 모래를 썼는데
물을 다 빼지 않고, 물을 줄줄 흘리며 배달이 됐다
그 바람에 추운 날씨에 모래가 얼어 붙었다
시멘트 포대도 싸늘하게 얼어붙어 매우 차가웠다
시멘트도 배달이 오면 한 포씩 내려야 했는데
한 포 내리는데 10원씩을 내라고 했다
그 돈을 아낀다고 동생이랑 둘이서 열심히 하차를 하고
안쪽의 시멘트 쌓는 공간에 쌓아 올렸다
겨울에는 얼어서 힘들었고, 여름엔 뜨거워서 힘이 더 들었다
고무로 된 앞치마를 입고 작업을 했다
장갑을 끼고 작업을 해도 시멘트 독에 살껍질이 벗겨졌다
100포를 쌓으면 4,000kg 즉 4톤이었다
한 사람 앞에 2톤씩이었다.
그래서 동생 입대 후에는 50포씩만 받았다
겨울인데도 땀이 비오듯 흘러 내렸다
목에 수건을 걸고 땀을 닦아가며 작업을 했다
하차에 쌓는 작업까지 마치고 나면 온몸이 파김치가 됐다
당시 내가 25살이고 동생이 20살이었으니까 견뎌냈을 것이다
아버님이 가출하신 후 물건을 들일 돈이 없었다
주문이 들어오면 막바로 브록크 공장으로 가서 물건을 싣고
현장으로 배달을 했다. 지금 고대 의대 구로병원이 있는 자리에서
벽돌과 브록크를 구워서 팔았다. 왕씨라는 이가 사장이었다
보충대라는 군 부대가 있었던 자리라는데 꽤 큰 공터였다
종합병원이 하나 들어설 정도니까...
처음 거길 갔을 때 나를 몰라서 물건을 못 주겠다고 하는 바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를 모시고 가서 소개를 받았다
이 아이가 우리 큰 아들이니 앞으로 안심하고 외상을 주라고...
거기서 막바로 벽돌 200장, 4인치 브록크 50장, 또는 5인치 브록크 45장
그렇게 싣고 나와 경사진 길을 오르려면 배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차를 타고 가면 모르겠지만, 거기가 약간 오르막길이다
우리집이 있는 버스종점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길로 배달을 가야 하는게 원래 제대로 가는 코스였다
그런 입지조건을 보고 건재상회를 하기위해 그 집을 사신 거였다
그러려면 차떼기로 물건을 들여놔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직접 물건을 리어카에 싣고 거꾸로 올라와야 했다
지금은 그 고갯길을 넘어 막바로 가리봉쪽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있지만
그 시절엔 그 꼭대기가 막혀 있었고, 거기가 버스 종점이었다
118번 보영운수 종점. 지금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이 있는 곳이다
구로4동 동회 앞에서 출발해 영등포, 여의도, 마포를 거쳐
시청앞과 롯데호텔을 끼고 미도파를 돌아서 아현동과 신촌을 거쳐
다시 돌아오는 비교적 승객이 많은 황금노선이었다
우리 집은 그 버스종점 바로 안쪽 골목에 있었다
버스들이 왕왕 거리는 걸 피해가며 무거운 벽돌을 실어 날랐다
다른 차들도 클락션을 울리며 빨리 비키라고 난리를 쳤다
이후 차를 운전하며 리어카를 마주치면 절대로 클락션을 울리지 않는다
가끔씩 인근에 있던 구로중학교 학생들이 하교길에 나를 마주치면
리어카에 가방을 올려놓고 몇 명씩 달라붙어 밀어 줄 때도 있었다.
낑낑거리며 무거운 벽돌을 싣고 올라가는 모습이 안쓰러웠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너무 고마웠다.
날아갈듯이 순식간에 언덕을 올라갔다.
아이스크림이라도 한 개씩 사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래도 씩씩하게 깔깔대며 괜찮다고 하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돈이 떨어지고 나니 쌀밥은 언감생심이었다
당시에 통일쌀이라는게 나왔다
밀가루를 눌러서 쌀모양으로 만들어 팔았다
그 밀가루밥을 먹거나 가끔씩 보리쌀을 섞어서도 먹었다
아니면 근처에 있었던 국수 만들어 파는 집에 가서
아직 말리지 않은 젖은 국수를 사다 끓여 먹었다
100원어치를 사면 온 식구가 한 끼를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반찬은 겨우 담가 놓았던 김치 한 가지 뿐이었다
어쩌다 트림을 하면 속이 쓰렸다. 그걸 생목 오른다고 하던가?
그 해 겨울에 사과 한 개, 감 한 개도 먹지 못하였다
이러다가 쓰러질 거 같았다. 체중이 빠져 나갔다
동생과 둘이서 배달을 나가기 전에 소금을 한 숟가락씩 타서
그 소금물을 한 대접씩 마셨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군대생활 할 때 여름에 완전군장 구보를 뛸 때 하던 일이었다
이를 악물고 버텼다
크리스마스가 왔지만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
아니 갈 수가 없었다. 친구들과도 연락을 끊었다.
아니 내 형편을 알게된 친구녀석들이 먼저 연락을 끊었다.
전에 올렸던 글에서 소개했던 재일교포 여학생과
그 밖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들과도 모두 연락이 끊어졌다
아니 내가 연락을 하지 않았다. 잠적을 했다고 해야하나?
그 당시 내게 연애는 먼 꿈나라의 일이었다
그 해 겨울이 유난히 추웠다
다행이 가리봉동 쪽의 어느 아저씨가 공사를 크게 했다
이층집을 온통 다 뜯어 고치는 공사였는데 각종 자재가 많이 들어갔다
벽돌, 브록크, 시멘트, 모래, 노깡, PVC 파이프, 기타 철물 등등
그 해 겨울 그 아저씨가 우리집의 구세주였다
우리가게 미장이도 거치지 않고 막바로 오셔서 이문도 많았다
대머리가 까진 중키의 아주 젊잖게 생긴 분이셨는데
나중에 내가 대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시며 내게 저녁도 사 주신 분이다
다음 해 봄 통학을 위해 가리봉 전철역으로 가던 나를 마주치고
학생이냐고 하시면서 한번 만나자고 일부러 우리집으로 오셨다
구로시장 안의 어느 고깃집으로 날 데리고 가서 술을 받아 주셨다
그때 먹었던 그 저녁을 나는 절대로 잊지 못한다
아마도 지금쯤은 돌아 가셨을 것이다
그해 유난히 추웠던 그 겨울을 그 분 덕분에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첫댓글
내용은 길지만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저가
오래전 시멘트 40킬로를
들다 허리를 다친적이 있었는데
그 무거운 공사용 자재를
인건비 절약한다고 동생과
단둘이서 했다는 이야기에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열심히
사셨으니 좋은 직장에 입사
하고 승진도 빨랐고 노년을
행복하게 잘 사시나 봅니다
한 포에 10원을 절약하려고
이를 악물고 일했지요
그 100포를 하차해서 쌓고나면
온 몸이 파김치가 됐습니다
다시 그 시절이 온다면
못할 거 같습니다만
그 때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후 어려운일이 닥칠 때마다
그 시절을 생각했지요
그런 시절도 겪었는데...
네 이후로 행운이 따랐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운칠기삼을 믿습니다
늘 따뜻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반듯하게 살아 오셨으니 도와주는 운도 따르고
열심히 장남노릇도 하시며
누님도 계시지만..
어떤 역경도 헤쳐 나갈수 있는 용기도 대단 하셨네요
반듯하게라기 보다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늘 그 시절을 잊지않고 살았다고 할까요
다시는 그런 구렁텅이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님께
저승에 가서 떳떳하고 싶었습니다
아버님께 칭찬은 듣지 못하더라도
질책을 받지는 말아야지
그런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늘 따뜻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
고생하셨군요.
글 잘 읽었습니다.
118번 보영운수 종점 근처에 큰 고모 댁이 있어서 가끔 탔던 기억이 납니다.
네 그 해 겨울이 유난히 추웠습니다
고난의 행군이었다고나 할까요
큰고모님댁이 거기셨군요
지금도 그 때 그 집 주소가 기억납니다
서울시 구로구 구로4동 803-7
118번 버스회사 사장이 그 근처에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