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의 밀
말씀 요한복음 12:23-2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24)
요한복음은 참 놀라운 복음서입니다. 저는 말씀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로고스를 사용한 측면에서 이 복음서가 참 놀랍다는 생각이 듭니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그리고 이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그가 곧 하나님이라는 것을 복음서의 맨 서두에 둔 것 또한 놀랍기만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incarnation, 성육신의 은혜도 바로 요한복음 1장에 있습니다. 이것만 생각해도 그 은혜와 진리가 밀려옵니다.
오늘 본문은 어떻습니까? 한 알의 밀이란 이 비유의 말씀은 너무나 놀랍습니다. 누구나 알 수 있고 누구나 경험하는 매우 보편적인 자연의 진리이지만 이것을 하나님의 생명과 부활, 그리고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씀해주는 진리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깨닫지 못해 주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며 자주 생명이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사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간단하고 명확하며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진정 생명의 삶과 진리의 삶은 무엇입니까?
유월절을 바로 코 앞에 두고 예루살렘이 몹시 바빠졌습니다. 그 전에 죽은 후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부활한 사건이 예루살렘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건의 주인공인 예수님과 또 나사로를 보고자한 사람들도 그 곳에 많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월절 명절과 예수님 사건이 겹쳐 많은 인파들이 모였습니다. 사람들은 나귀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호산나 찬송을 외치며 대환영을 했습니다.
요한은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 명이 있는 것을 눈여겨 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밀알의 비유와 너무나 관련 있는 것을 말하고자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때 예루살렘에 왔을까요?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얼마나 많을까요? 또 다른 민족의 개종자들이 있지 안을까요? 그런데 요한은 헬라인 개종자 몇 명이 예수님을 찾고 있었음을 우리들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왜 그럴까요? 헬라라는 나라가 정치 사상적으로 종교적으로도 그만큼 중요한 나라가 아닙니까? 당시의 학문의 주류는 바로 그리스이지 않습니까? 모든 진리는 헬라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서양 사상의 근원들이 여기에서 오지 않았습니까?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더 제국이 다 그리스로부터 유래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모든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라의 청년 몇 명이 예수님께 나아와 진리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헬레니즘 사상이 참진리가 아님을 반증하는 그런 일이 아닙니까?
그들이 빌립을 찾았고 빌립과 안드레가 이것을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처음에는 바로 이해가 안됩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만나 복음을 말씀해주시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말씀해주시면 될텐데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씀을 하시니 제자들도 처음에는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니 무슨 말일까, 순간적으로 생각의 흐름이 막혔을지도 모릅니다.
보통 영광이라고 하면 무슨 뜻입니까? 빛나는 때가 아닙니까? 삶의 한 부분에서 가장 그 사람의 능력이나 업적이 화려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까? 무슨 상을 받고 무슨 능력을 최고로 입증하는 순간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지금 그것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지금이 가장 좋은 타이밍이 왔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은 십자가를 지실 최고의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대표라고도 할 수 있는, 진리를 최고로 찾고자 하는 이들이 온 이 순간에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방법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때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너무나 참혹하고 너무나 희생적이고 너무나 영광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온전한 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온전한 변론 한 번 제대로 하시지 못하고, 멋진 싸움을 하여 완전한 반전을 일으키는 그런 싸움의 승리를 보여주지 못한 수치의 순간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한 알의 밀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갑자기 밀 이야기 하십니다. 2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우리 동네에는 밀밭이 많이 있습니다. 전에는 사람들을 위해 밀을 키웠지만 지금은 가축을 위해 더 키 큰 밀을 재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앞에도 보니 벌써 밀이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 겨울처럼 보이는 가을에도 며칠 따뜻한 날이 있었는데 그 틈을 타서 밀들이 싹을 티우고 올라오고 있습니다. 다 죽어 가는 것 같은데 한 쪽에는 생명의 역사가 있는 것을 봅니다.
그 밀알들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결코 생명 현상이 일어나지 않지요. 떨어져 땅의 시간들 속에서 자신이 썩고 죽음으로써 비로소 그 안에서 생명이 움틉니다.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이 생명의 신비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그 순간부터 변함없이 이어져 왔고 한 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바꿀수도 없겠죠. 예수님은 이것을 진리로 가지고 왔습니다. 이것이 진리이다, 라고 말씀해주십니다.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는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묻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등 여러가지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 보여 주셨고 예수님께서 헬라 청년들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다 보여주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 그로 말미암아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 곧 믿음의 삶입니다.
밀알은 떨어지는 순간 보이지 않습니다. 흙에 묻힙니다. 어둡고, 조용하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자리입니다. 겉껍질은 썩어 없어질 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새싹이 트고 뿌리가 내립니다. 겉으로는 죽음인데 안에서는 생명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선택하신 길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라지는 길, 낮아지는 길, 아무도 환호해주지 않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서 구원의 역사는 조용히 자라났습니다.
우리 삶에도 때로는 이런 “흙 속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내가 하는 일의 의미가 있는지조차 의심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곳을 생명이 자라는 자리로 사용하십니다.
자연은 늘 아름답습니다. 떨어져 쌓이는 은행잎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진리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 삶에 적용하는 순간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 적용된 말씀이 무엇입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말씀의 현실입니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바로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해주십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비유의 말씀을 통해 지금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십자가를 감당할 각오를 다짐하고 계십니다. 말씀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영광의 때, 밀알의 시간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26절에 보면 희망의 말씀도 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이 가신 길은 희생의 길이지만 그 길은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과 영광이 가득한 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 길에서 그분과 함께 걷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에게도 현실이 있었습니다. 2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이 말씀을 생각할 때 많은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힘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도 육신의 몸으로 이 땅을 사시므로 그 고통은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음을 봅니다. 밀알의 비유는 좋았지만 현실의 십자가는 용기가 나지 않았고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분명히 자신의 정체성을 붙잡으십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때를 소중히 여기시고 그 때를 따라 자신을 헌신합니다. 요한복음은 정말 때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때, 그것은 죽어야 할 때 죽는 그런 때였습니다. 우리는 자연의 순리를 따라 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자연의 순리도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순리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생명의 순리를 찾아내시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 십자가는 인류 모두를 위한 희생의 십자가입니다. 감당할 수 없고 돌이킬 수 없고 회복할 수 없는 인류의 무거운 죄를 도맡기 위한 십자가입니다. 결코 회피할 수 없는 십자가입니다. 그럼에도 결코 가벼울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의 죄와 나의 모든 허물과 더러움과 무지를 대신하여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해 어린 양이 되셔서 속죄의 양이 되셨습니다. 그것이 있음으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새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조지 아틀레이라고 하는 영국인 선교사님의 순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1895년 그가 29살 때 있었던 일입니다.
중앙아프리카에서 선교하던 이 선교사님이 강가에서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을때, 가보니 적대적인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그를 창으로 찔러 비참한 모습으로 순교했는데, 놀랍게도 그가 갖고 있던 라이플 총이 발견되었는데, 10연발 윈체스터 라이플 총인데 총을 당기면 열 발까지 자동적으로 쏠 수 있는 총입니다.
사나운 맹수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갖고 있던 총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위태할 때 얼마든지 그 총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그는 창에 찔려죽으면서도 그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죽었습니다.
그 뒤에 나온 이야기에 따르면, 그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죽어서 그의 소지품, 가진 것이 무엇인가 찾아보러 왔을 때 총이 있었고 총 안에 총알이 열 발이 장전되어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창에 찔리면서도 뭐라고 그렇게 전하려고 했던 그 메시지가 결국은 그들로 회개를 불러일으켰고 온 마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 같습니다. 밀알의 진리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동시에 우리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언제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밀알의 비유 진리가 늘 살아 있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