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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
다시 포르트.
커피를 한 잔씩 더 받은 두 사람. 포워드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리며 물었다.
“자세히 좀 말해봐, 입양이라니?”
“말 그대로야. 옆에 두기 위해서. 그렇다고 서류상의 절차를 밟는 건 아니고, 그렇게 공표를 내고 나니까 내 마음이 좀 편하네. 그리고 다른 놈들도 더 이상 안 덤벼 들 테고.”
“무슨 소리야?”
“그냥 데리고 있으면 위험할 테니까. 한 번 노예로 끌려나왔는데, 또 끌려가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어. 일종의 보험이야. 공표를 함으로써 그녀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는.”
친구의 대답을 들으며 커피를 마신 포워드는 다시 잔을 내려두었다.
“으흠. 너 안 가? 옆에 안 있고 싶어?”
“한동안 있으려고. 세이나의 어마마마께서 이 대륙, 포르트 출신이라고 하네.”
“으음~! 그럼 돌아다니고 싶겠네. 상처는 좀 어때?”
“부하 몇 명 붙여서 다녀도 된다고 해놨어. 치프가 워낙 치료를 잘 해놔서, 너무 많이만 움직이지 않으면 돼.”
“병원 안 가도 돼?”
포워드의 물음에 레이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의사 말로는 안 가도 되게 해 놨다 하던데?”
“그래서 안 가려고?”
“응.”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더를 보며 포워드는 그가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했다.
“너, 카인 녀석들 만나더니 많이 변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그 세이나 아가씨가 되겠고 말이야.”
마음에 둔 사람의 이름에 그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 어이없는 모습에 포워드는 다시 실소를 터트렸다.
* * *
그로부터 7시간 뒤 오후 6시, 허즈그레이 서쪽 항구. 아쿠아리버 호가 처음 기항했던 곳이 여기다. 한창 노를 저어서 오던 아쿠아리버 호의 네 남녀는 배를 세우기 위해 항구로 향했다.
그런데.
하필 그 입구서 낚시 한답시고 앉아 있는 치프를 뒤늦게 본 것이다. 칼리프의 목청이 갑자기 커졌다.
“세워, 세워, 세워, 세워!”
라이아도 놀랐지만, 살인만은 막아야 했기에 손을 뻗어 닻을 끌어 내렸다. 때문에 바다에선 두 번의 파도가 울렁였다. 라이아의 닻이 떨어지면서 한 번 첨벙. 그리고 배가 밀고 온 파도도 한 번 첨벙.
하지만 파도는 바다 위에 가라앉지 않고, 그대로 날아올라 치프를 덮쳤다. 예상 못 한 파도의 위력 앞에, 치프는 미처 피하지도 못 하고 두 눈 뜬 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촤아아~~~~~~~~~~~~~~~~~~~~~~~~~~~!
치프!! 오, 맙소사!
그 순간은 갑판 위의 네 남녀에게 아주 느리게 지나갔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바다에 빠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물벼락을 맞힌단 말인가.
“…….”
몰려온 바닷물을 순식간에 온 몸으로 맞닥뜨린 치프의 몰골은 처참했다.
강력한 수압에 휩쓸려 머리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목덜미를 덮는 청색의 머리카락은 막 건져 올린 미역처럼 축축 늘여졌다. 안으로 옴폭 들어간 코는 뽕 소리를 내며 원래대로 돌아왔고, 입에서는 삼키지 못 한 바닷물이 뿜어져 나왔다.
더불어 옆에 세워뒀던 낚싯대도 휩쓸려 바다로 떠내려가, 그의 발밑 아래에서 출렁였다. 양동이 안의 미끼 역시 모두 바다에 풀려버린 후다.
배를 완전히 기항시킨 칼리프와 오스카, 다이아와 라이아는 노를 풀어 갑판에 두고 헐레벌떡 아래로 내려왔다.
그런데 의문이 있다.
그들 모두는 기척을 통해 상대가 어디 있는 지 다 알 수 있는 자들인데, 왜 치프와 다이아 일행은 서로를 몰라봤을까?
원인은 치프한테 있었다.
살아 있냐! 살아있어야 한다, 치프! 너 카인과 의형제라며! 게다가 오늘이 생일이라며! 생일에 죽는 어이없는 놈이 되지는 말아야 할 거 아냐!
칼리프와 오스카가 제일 먼저 양 옆으로 와서 무릎 세우고 앉았다. 칼리프가 이마에 두른 녹색 띠의 끈과, 오스카의 긴 흑색 머리카락 그리고 왼쪽 귀걸이가 한꺼번에 흔들렸다.
“너 괜찮아?”
“형, 괜찮아요?”
“그럭저럭.”
이어 다이아와 라이아 자매가 다가왔다. 다이아는 긴 금색 머리카락을 가운데를 중심으로, 두 갈래로 나눠서 땋아서 앞으로 내렸다. 라이아는 신문에서 본 대로 주황색으로 염색을 했다.
다행이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근데 기척은 왜 숨기고 있었어요?”
“위험했잖아. 이 낚싯대도 괜찮은 거야? 미끼는 다 사라졌네.”
라이아는 치프의 발아래에서 파도에 휩쓸려서 움직이는 낚싯대와 양동이를 건져 올렸다. 자신의 코트를 벗어 치프의 등을 덮어주며 오스카가 다시 말을 이었다.
“기척만 있었어도 이런 사고는 안 당했을 거예요.”
“왜 숨기고 있었어?”
라이아의 물음에 치프는 옅은 한숨과 함께 일어서며 말했다.
“숨긴 거 아니에요. 일단 들어가죠. 옷 갈아입고 좀 씻어야겠네요. 아우, 짜.”
“어.”
치프는 벌떡 일어나 코트를 오스카에게 주고, 낚싯대와 양동이를 갖고 여관으로 향했다. 두 왕녀와 칼리프, 오스카도 일어나 뒤를 이었다.
낚싯대와 양동이는 여관 주인에게 빌린 물건이라서, 돌려주고 올라왔다. 치프가 샤워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 다이아와 라이아가 율무차를 내어놓고 있었다. 그들 넷도 가볍게 씻었다. 두 왕녀 때문에 치프의 말투는 존칭이었다.
“알레르기 걸린 사람들 치료약이 없어요. 그래서 국왕들 설득하고 다른 대륙으로 편지를 보내놓은 상태에요. 약 싣고 올 배들 기다리려고 새벽부터 나와서 이러고 있었어요. 그랬더니 20분 전부터 완전히 피곤한 거 있죠. 그래서 기척을 완전히 숨겨버렸어요. 조금이라도 더 버텨보려고. 내 탓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설명을 끝낸 치프는 율무차를 후루룩 마셨다.
“따뜻하니 좋네요!”
“그럼 치료가 아직 안 끝난 거예요, 치프?”
“네. 면역성이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감기 걸린 사람도 꽤 되요.”
고개를 끄덕이던 율무차를 마시던 오스카,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놓고 온 게 있다! 치프 형이 물벼락을 맞는 통에 노를 푼다고 정신이 없어서. 치프 형 생일선물을 지금 갑판에 놓고 왔잖아!
“칼리프 형, 책!”
“아, 맞다! 얼른 가자, 오스카.”
“예.”
칼리프와 오스카는 동시에 일어나 후다닥 방을 나갔다. 그러는 동안 라이아와 다이아에게 눈짓으로 눈치를 주었다. 나중에 잔치 전까지 쉿! 하자는 말이었다. 둘이 무슨 얘기하고 나가는지를 알아차리지 못 한 치프는, 끈을 잃어 묶지 못 한 꽁지머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엉? 저 두 사람 어디 가요, 두 마마?”
“책 가지러 가요.”
“자기네 볼 책이래.”
“플라우에서 자기들만 알고 있던 단일본을, 우리가 사겠다고 난리를 좀 쳤어요. 그랬더니 값을 어찌나 높여서 부르던지, 그거 낮춘다고 고생 꽤 했거든요. 아, 맞다. 치프, 나 목 좀 봐줘요. 아~~~~”
다이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치프를 바라봤다. 치프는 성대 진단을 위해 옆의 가방에서 작은 손전등과, 혀를 누를 나무로 만든 숟가락을 꺼내 들었다. 잠시 살펴보던 그는 이내 손전등과 숟가락을 내렸다.
“성대가 조금 부어오르기는 했네요. 언성을 너무 높이지만 않는다면 곧 가라앉을 거예요. 따뜻한 물 많이 마셔야 해요.”
“음료수는 안 돼요?”
“안 돼요.”
치프의 단호한 어투에 다이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어깨를 앞뒤로 흔들었다. 자그마한 애교다.
“으으응~ 율무차라도!”
“…….”
헐.
순간 넋을 놓고 만 치프는 손에 들고 있던 나무 숟가락을 떨어트렸다. 잠시 후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점점 사라져갔다.
“마마, 그런 애교는 마마의 애인 되는 사람한테나 통하죠. 전 안 통 해요. 안 돼요.”
“칫.”
다이아는 입을 대발이나 내밀었다. 라이아는 제 3자인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배로 갔던 칼리프와 오스카는 공중비행을 썼는지 제법 빨리 돌아왔다.
“형, 어디 놔두죠? 카인 형은 왜 안 와요?”
퍽, 쿵-
뭔가가 차는 소리와 쓰러지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났다. 누군가가 올라오는 기척이 느껴지기는 했으나, 그런 소리가 나는 건 예상하지 못 했기 때문에 그들 다섯의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바지의 양 주머니에 손 넣고 발로 문을 차서 부순 그 기척의 정체는 바로 신이었다. 그들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진 가운데 라이아가 대표로 물었다.
“왜 그랬어?”
문을 왜 부쉈냐 이거다.
“그냥.”
“…….”
이런.
“어쨌거나. 이따 7시까지 <폴그린스> 홀로 모이라고 전하란다.”
“<폴그린스>? 거기가 어디에요? 쭉 허즈그레이에 없었던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저도 몰라요.”
다이아의 말에 치프도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대자 신이 대답했다. 그의 어깨에 다시 힘이 들어간다.
“내가 이끈다. 됐지? 그건 뭐냐.”
상자를 바닥에 놓은 칼리프가 후다닥 신에게로 가, 그의 긴 귀에 대고 작게 속닥였다.
“책이에요! 치프 녀석, 아무래도 자기 생일이 오늘인 걸 모르는 모양이에요.”
“아, 그래? 후후후후훗.”
“신 저하는 선물 장만 했어요?”
“의학서적 준비해 놨다. 너희는.”
“우리도요.”
속삭임이 끝난 칼리프는 자리로 와서 앉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은 신은 미리 받아온 500G를 치프에게 건넸다.
“치프, 신문 좀 사와라.”
“신문? 아직 안 봤어요?”
“어.”
신의 대답에 치프는 화장용 거울 앞에 있는 신문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럼 저건 뭐지?
불평 어린 시선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치프는 신의 돈을 받아 여관을 나갔다. 그를 내보내고 난 뒤 넷은 신에게로 모였다. 라이아가 대표로 물었다.
“우리 어디로 가? 아까 네가 말한 거기?”
“음.”
“가요, 언니. 가요, 두 사람.”
“예.”
넷은 신을 따라 방을 나갔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서 작은 대화가 잠시 있었다.
“칼리프 형, 저 문은 어떻게 해요?”
“어쩌긴 어째, 나중에 카인이 알아서 하겠지.”
심드렁한 물음에 심드렁한 대꾸였다. 둘은 발을 맞춰서 가야 했다. 치프에게 줄 선물이 들어 있는 상자 때문이다.
신이 이끄는 대로 걸어가던 일행은 20분 걸어서 <폴그린스> 홀이라는 식당에 도착했다.
6시 20분.
큰 불은 다 꺼지고 작은 불만 남아 가게 안은 꽤 어두웠다. 그 불 아래 반짝이는 게 몇 보였다. 1층 홀은 가운데에 2층 케이크가 놓여 있고, 탁자 두 개가 케이크를 중심으로 양 옆으로 나뉘어져 놓여 있었다. 탁자 하나당 의자가 4개씩이었다.
바닥은 갖가지 색의 풍선으로 가득 차 있고 주방 쪽에서는 뭔가가 익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카인!”
“바닥에 있는 풍선, 천장에 좀 붙여! 치프는?”
“여기로 오도록 해놨어.”
신은 대답하면서도 속으로 툴툴거렸다. 시킨 건 너 아냐.
풍선을 천장에 붙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총 24개의 풍선이었고, 다섯이서 붙이니까 속도가 빠른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한편 치프는 신문 사러 나왔다가 얼떨결에 끈을 샀다.
주인이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뭐냐고 물었고 치프는 머리 묶는 끈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고무로 만들어진 끈. 치프가 꽁지머리를 묶는 것을 보며 주인이 물었다.
“청년이 바로 치프 팰턴 맞죠?”
“예, 전데요.”
“곧 7시인데, 7시까지 <홀그린스>로 보내라고 하던데요?”
“거기가 어디에요?”
“여기서 왼쪽으로 15분 정도 걸어가셔서, 길을 건너서 오른쪽으로 15분 걸어가면 골목이 하나 나와요.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서 또 1분 걸어서 가면 되요.”
주인의 말을 가만히 듣던 치프는 머리를 잠시 굴렸다.
왼쪽으로 15분, 거기서 오른쪽으로 15분? 잠시 고민하던 치프는 고개를 스윽 돌려 길 건너를 바라봤다. 골목 위에 걸린 간판이 보였다.
『레스토랑 홀그린스』
“허. 예. 아줌마, 고마워요.”
치프는 거기서 곧장 길을 건너 홀그린스로 향했고, 그 모습에 가게 주인은 시계를 보며 당황했다.
“30분 벌어야 하는데, 이그.”
7시가 되기도 전에 홀그린스에 도착한 치프는 안의 그림을 상상하며 문을 열었다. 안에서는 그의 생각대로 원성이 터져 나왔다.
“뭐야, 너! 주인이 시키는 대로 빙 안 둘렀지?”
“칼리프 형! 촛불에 불 붙여요, 얼른. 카인 형, 치프 형 왔어요!”
오스카의 말 끝나기 무섭게 주방 안쪽에서는 험악한 중얼거림이 튀어 나왔다.
“……빌어먹을 놈.”
“인마, 넌 생일인 친구한테 욕밖에 줄 게 없냐?”
하지만 탁자 밑에서 기다리던 동료들의 입에서도 축하 인사는 먼저 안 나왔다.
“먼저 잘못한 건 너야.”
“에이, 케이크 들어갔다가 나와야 하는데. 실수는 네가 먼저 했거든?”
“그러게요. 치프가 다 망쳤어요.”
“…….”
와~ 이 사람들 너무하네, 정말. 삐졌어! 생일에 삐졌으니 나 오래 갈 거야!
“나 갈래!”
“어딜 가!”
돌아서는 그의 어깨를 주방에서 급히 나온 카인이 급히 잡아당겼다.
“생일 축하한다.”
“콜록! 욕쟁이.”
“그게 욕이냐?”
“하하하하하하하!”
치프의 생일은 그렇게 정신없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