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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동활의 음악정원 ♣ 원문보기 글쓴이: joba
엘가 첼로 협주곡 e단조 작품 85 "Cello Concerto in e minor op. 85
Jacqueline du Pre쟈클린 뒤 프레 연주1945 - 1947
The New Philharmonic Orchestra & Barenboim
엘가 첼로 협주곡 e단조 1 - 2 / Jacqueline du Pre
1악장 Adagio Moderato e단조 8분의 9박자
2악장 Lento Allegro Molto G장조 4분의 4박자.
엘가 첼로 협주곡 e단조 3 - 4 / Jacqueline du Pre
3악장 Adagio Bb장조 8분의 3박자.
4악장 Allegro Moderato Allegro Ma Non Troppo e단조 4분의 2박자
엘가 첼로 협주곡 e단조 3 - 4 / Jacqueline du Pre
3악장 Adagio Bb장조 8분의 3박자.
4악장 Allegro Moderato Allegro Ma Non Troppo e단조 4분의 2박자
엘가(Edward Elgar)의 '첼로 협주곡'은 늦가을의 황혼같은 적막함과 쓸쓸함을 보여주는 음악입니다.
아련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는 명상적인 이러한 작품은 대중적인 인기를 폭넓게 얻기가 어렵긴 하지만 우리들에게 있어서, 비운의 여류 첼리스트 쟈클린느 뒤 프레로 인하여 유명해진 음악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천재 소녀 장한나 양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들은 바 있습니다.
6살 무렵 쟈클린느 뒤 프레의 첼로 연주를 듣고 감동하여 음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영국 출신의 유명한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의 곡이지만
저명한 첼리스트 펠릭스 샐몬스에 의한 1919년 초연에서는 실패한 곡이었다고 합니다.
이 곡을 인상적인 재연에 성공, 많은 연주가의 래퍼터리로 정착시킨 사람이 빙아트리스 해리슨이라는 사람이고, 레코드로 세상에 널리 알리기는 바로 쟈클린느 뒤 프레의 곡이 으뜸으로 꾭히는데 두 사람 모두 여류 첼리스트입니다.
이 협주곡은 4악장으로 이루어진 대작이긴 하지만 간결하여 매우 실내악적이라 하겠습니다.
엘가는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도 유명했다고 합니다.
연상인 그의 아내는 그에게 자신의 정신과 음악을 붙들어 주는 에너지였다고 하는데 이 작품이 발표된 후, 다음 해에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어느 깊은 밤, 그날 따라 우리는 아주 외로웠는지도 모른다. 나는 친구들을 내 자취방에 불러모으고 뒤 프레의 첼로협주곡(엘가)을 틀었다. 그리고 친구들과 나는 모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밖으로는 비가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자클린느의 보우잉은 힘차게 현을 긁었다. 연주가 끝나고 친구는 자클린느의 사진이 담긴 CD재킷을 들고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쩐지 이 여자는 일찍 죽을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 친구는 뒤 프레의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 깃든 그 활달한 미소를 바라보면 어딘지 모르게 요절할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모양이었다.
뒤 프레 그의 이름을 들으면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라는 말이 생각난다. 아마도 요절한 천재들에 대한 선입견 탓일 수도 있고, 그녀를 앗아간 병명이 ‘다중 경화증’이라는 희귀한 병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금세기 최고의 여성 첼리스트로 꼽힌 그녀가 너무나 일찍 무대를 떠나야 했던 것에 대한 우리들의 아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연주한 엘가의 첼로 협주곡(바비롤리 경 지휘의 EMI음반)은 아마도 두 번 다시 나오기 힘든 명반 중 하나이다.
순박한 미소와 넘치는 힘의 첼로 연주
영국 옥스퍼드 대학 교수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클린느는 세 살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악기 소리 가운데, 특히 첼로 음을 지적하며 그 소리를 내고 싶다고 졸랐다고 한다. 네 살 때 자기 키보다 큰 첼로를 선물 받고 다섯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첼로를 공부한 그녀는 카잘스와 토르틀리에, 그리고 로스트로포비치에게 사사해 어린 나이에 금세기 첼로계의 모든 흐름을 두루 섭렵할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16세가 되던 1961년 런던에서 공식 데뷔 무대를 가졌고, 65년엔 뉴욕에 데뷔했다. 이후 그녀는 세계적인 첼리스트로서 널리 각광을 받으며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나이 23세이던 68년에는 가족이 탐탁치않게 여기던 다니엘 바렌보임과 결혼했고, 28세 되던 73년, '다중경화증'이라는 희귀한 병에 걸려 사실상 연주 활동의 막을 내려야 했다.
개인적으로는 다니엘 바렌보임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지는 못하지만 그와의 결혼이 재키(뒤 프레의 애칭)에게 음악적으로 좀 더 성숙할 수 있었고, 좀 더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시 역시 바렌보임에 의해 뒤 프레가 좀 더 많은 순회 공연과 바렌보임이 지휘자로서 초기의 캐리어를 쌓는 동안 협연자로 혹사당했다는 인상 역시 감추기 어렵다. 어쨌든 뒤 프레가 다니엘 바렌보임을 사랑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유태인이었던 바렌보임을 따라 중동과 전쟁(6일 전쟁) 중이었던 이스라엘까지 날아가 이스라엘 교향악단과 협연한 사실만 하더라도 뒤 프레의 그에 대한 사랑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에서 유태인으로 개종한 뒤 프레는 이스라엘 수상인 벤구리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고, 영국으로 돌아온 뒤 이들은 행복해 보였다. 그녀의 연주는 너무나 힘에 넘쳐 현을 끊어먹는 실수를 저지를 정도였다. 비평가들은 그녀의 연주에 대해 "그녀는 나를 미치게 만든다"리고 할 만큼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황홀함은 5년을 넘기지 못하고 불행이 그녀를 덮쳤다. 1970년 무렵 그녀는 눈에 띄게 피로해 하기 시작했다. 눈이 침침해질 때가 많았고, 손가락이 저리며 차가워지고 걸음걸이도 점점 더 볼품없어져 갔다. 병에 걸린 뒤 프레는 차츰 병의 증세가 악화되어 가고 있었음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니엘 바렌보임과의 결혼생활과 다중경화증 발병
뒤 프레는 아주 가끔씩 자신의 이런 증상을 남편에게 털아놓았지만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은 바렌보임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바렌보임은 연주자 뿐만 아니라 지휘자로서의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그녀의 연주가 필요했다. 재키가 리허설이나 연습 때 자주 템포를 놓치게 되자 바렌보임은 그때마다 뒤 프레를 혹독하게 몰아부쳤다. 이를테면 그녀의 정신력이 해이해진 탓이라는 것이 바렌보임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뒤 프레 역시 자신이 아픈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고 일주일에 5회씩 프로이트 학차의 정신분석가인 월터 조피에게 진찰을 받으러 다녔다. 그러는 중 그녀의 연주에 대한 악평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를 미치게 한다"던 그녀의 연주는 차츰 "일관성도, 논리성도 없는" 연주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서웠다.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의 부인인 라이자 윌슨은 "그녀 혼자서 외출하는 일이 잦았다. 쇼핑을 하거나 들판을 거닐거나 했다. 그러다가 넘어지면 지나가는 사람이 도와줄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늦게 돌아온 데 대해 남편이 화를 내면 '쇼핑하다 보니 입고 싶은 옷이 많았어요'라고 둘러댔다. 결국엔 아마 도로변이었다고 생각되는데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병원으로 실려가는 지경이 되었다." 드디어 병세가 너무 악화되어 뒤 프레가 연주 중에 활을 놓쳐 버릴 지경이 되어서야 찾아간 병원에서 그녀가 '다중경화증'이란 희귀한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뒤 프레는 오히려 안도의 숨을 쉬었다고 한다.
자신의 정신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바렌보임의 질책이 얼마나 심했으며 그녀 자신이 그로인해 얼마나 큰 상처를 받고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병으로 인해 더 이상 순회공연에 따라나설 수 없게 된 자클린느 뒤 프레는 그 후 음악 교육에 정열을 바쳐 78년에 맨체스터의 솔포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요요마와 린 하렐의 스트라디바리는 그녀의 것이었다. 뒤 프레가 이들에게 물려준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
1987년, 남편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랜 투병 생활로 지친 42년간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그녀의 연주는 남성에 뒤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힘과 넘치는 표현으로 마치 톱질이라도 하는 듯 힘찬 보우잉과 순진하고 솔직한 동작으로부터 발산하는 순수한 열정이 돋보였다. 그녀는 병에 걸리기 전까지만 해도 항상 웃음을 간직한 낙천주의자였고, 자신감에 넘쳐흘렀으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활달하기까지 했다. 그녀의 그런 낙천적 성격과 자신감이 그녀의 연주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듯 했다. 이런 그녀의 연주를 한편에서는 자신을 활활 태워 만들어 낸 음악’이라고 했고, 다른 한 편에서는 한 인간이 평생을 두고 써야 할 수명과 기를 짧은 기간에 소진했기에 때 이른 죽음을 맞이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그녀의 연주는 스케일이 크고 열정적이었다.
그녀가 잃어 버린 것은 첼로 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잃어 버릴 것이 없을 만큼 아무 것도 갖지 못했다. 최후의 비참했던 연주회로부터 시작하여 두 다리, 양팔 그리고 몸 전체의 균형을 잃었고, 사물이 두 개로 보일 지경이어서 책도 읽을 수가 없었다. 전화의 다이얼 돌리는 일도, 돌아눕는 일도 그녀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심지어 1975년 이후로는 눈물을 흘릴 수도 없게 되었다. 남편 바렌보임을 비롯하여 사람들은 바쁘다거나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뒤 프레에게 연락하는 횟수를 줄였고 차츰 아무도 찾지 않게 되었다.뒤 프레는 아무도 없는 밤에는 혼자 절망에 떨며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에게 와달라고 조르곤 했다. 뒤 프레는 병으로 쓰러져 휠체어에 앉아 보내던 시절 이렇게 고백했다.
“첼로는 외로운 악기다. 다른 악기나 지휘자가 있는 오케스트라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첼로로 음악을 완성시키기 위해선 음악적으로 강한 유대를 가진 보조자가 필요하다. 나는 운이 좋아 다니엘을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연주하고 싶었던 곡을 거의 다 음반에 담을 수 있었다.”
그의 음반으로는 엘가의 협주곡(EMI)이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며, 코바셰비치와의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EMI)도 수작이다. 그녀의 미소와 그녀의 연주를 들으면 누구라도 자클린느 뒤 프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뒤 프레의 전기 작가 캐롤 이스턴은 읽기도 말하기도 힘들게 된 말년의 뒤 프레는 자신이 연주한 엘가의 협주곡을 틀어놓고 멍하게 있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들을 때마다 몸이 찟겨나가는 기분이 들어요.……눈물 조각처럼" 그러곤 고개를 떨구고서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
언젠가 영국 BBC에서 제작한 그녀의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자신의 어머니 무덤에도 가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녀의 무덤에 단 한 차례도 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 순간 다니엘 바렌보임의 연주가 설령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 실제로 그의 연주와 지휘는 훌륭한 것들이 있다. - 그의 음반은 사지 않겠노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한 적이 있다. 자클린느 뒤 프레는 남편이 한 번도 찾아와주지 않는 무덤에 홀로 누워있다.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글출처 : http://windshoes.new21.org/index.htm
퍼셀 이후 200년 만에 처음으로 세계에 내세울만한 작곡가를 찾은 영국인들이 엘가에게 쏟은 사랑과 존경은 실로 대단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섹스에 별장을 구하고 겨우 안정을 되찾은 엘가는 1918년에는 실내악곡 3곡을, 1919년에는 첼로협주곡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 해 여름동안 저명한 첼리스트 살몬드가 별장으로 찾아와 엘가와 함께 이 협주곡을 연습한 후 10월 26일 런던 퀸즈홀에서 본인 지휘로 초연 되었다. 모처럼 다시 찾은 창작열은 이듬해 사랑하는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소실되었고, 결국 그는 작곡에서 손을 떼었다. 마지막 대작이 되어버린 이 첼로협주곡은 오케스트라의 연습부족으로 초연에서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오랜 친지인 여류 첼리스트 해리슨의 인상적인 연주에 힘입어 차차 인기를 회복했고, 그후 카잘스를 위시하여 자클린느 뒤 프레, 폴토르틀리에 등의 연주와 음반 취입으로 가장 사랑 받는 첼로 레퍼토리가 되었다. 이 곡은 일찍부터 친교가 두터웠던 콜빈 일가에게 우정의 표시로 증정되었다.
연민의 우울함으로 가득찬 첼로 협주곡
1919년 엘가의 예순 두 번째 생일날, 지휘자 랜든 로날드(Landon Ronald)는 브링크웰즈를 방문하였고, 엘가는 그에게 이 협주곡의 긴 패시지들을 피아노로 들려주었다. 3일 후에는 엘가의 실내악 작품들을 초연할 때 참여하였던 첼리스트 펠릭스 잘몬트(Felix Salmond)가 찾아와 이 작품을 살펴보았다. ?펠릭스 잘몬트는 매우 기뻐하고 흥분하였다?고 앨리스는 당시 상황을 일기에 적고 있다. 7월 말, 엘가는 시드니 콜빈에게 "첼로를 위한 협주곡을 거의 완성해가고 있네. 정말 대작이며 나는 이 작품이 대단하며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 작품을 콜빈과 그의 아내 프란시스에게 헌정하기로 하였고 잘몬트에게 독주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잘몬트는 다시 한번 브링크웰즈를 방문하여 마지막으로 덧붙여진 부분들을 연주해 보았으며, 8월 앨리스가 완성된 악보를 런던에 있는 엘가의 출판업자에게 부쳤다.
엘가의 실내악 작품들처럼 간결하고 응집력이 있는 이 첼로 협주곡은 구조적인 면에서 관례적인 것을 벗어나 있다. 통상 3악장 구조로 되어 있는 협주곡 형식에서 벗어나 교향곡과 같은 4악장 구조를 채택하고 있으며, 각각 두 악장씩 짝을 이루도록 배치하였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시작되는 1악장의 도입방식은, 우울하고 비탄에 잠긴 첼로의 레치타티보로 시작되고 있다. 비올라 파트에서 들려주는 애도의 탄식과 같은 주제가 인상적인 1악장은 중단 없이 밝고 유쾌한 스케르초 악장으로 이어진다.
이 작품의 백미로 꼽히고 있는 아다지오 악장은 엘가의 탁월한 오케스트레이션을 만날 수 있는 악장으로, 오케스트라 위에서 독주 첼로가 자유로이 노래하고 있다. 1악장 도입부와 마찬가지로 첼로의 레치타티보로 시작되는 4악장은 이후 대부분이 활기찬 요소들이 뒤를 잇고 있지만, 여전히 우울한 기운이 잠재되어 있으며, 곡의 끝부분에서 첼로는 아다지오 악장에서의 마음을 애끓게 하는 프레이즈를 가져와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마침내 첼로에서는 바로 첫번째 프레이즈를 갑자기 연주하고, 오케스트라에서 끝을 내버린다. 이 작품에 대해 "가을날의 우울함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우울함은 비관적인 것이 아니라 연민에 의한 우울함이다"라고 말한 다이애나 맥베그(Diana McVeagh)의 말처럼, 이 협주곡의 매우 우울한 선율을 통해 엘가는 전쟁으로 희생된 모든 것들수만 명의 목숨, 그리고 삶의 방식에 대한 애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도를 담은 이 협주곡의 초연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10월, 퀸즈 홀에서 엘가 자신이 직접 지휘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펠릭스 잘몬트와의 협연으로 초연된 이날 연주회 프로그램에는 엘가의 협주곡 외에도 앨버트 코츠(Albert Coastes)가 지휘하는 스크리아빈과 보로딘의 작품이 같이 올라 있었는데, 앨버트는 엘가에게 할당된 리허설 시간의 상당부분을 자신의 리허설 시간으로 사용해버린 것이다. 결국 엘가의 협주곡 연주는 매우 불만족스러운 것이 되었고, 런던의 한 비평가는 오케스트라에 대해 “유감스럽게도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평하였다.
하지만 당대 유명한 비평가였던 어니스트 뉴만(Ernest Newman)은 불완전한 연주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작품 자체에 대해서는 “아름답고, 매우 간단하다. 지난 2년간 엘가의 음악에서 볼 수 있었던 그러한 간결함으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그러한 단순함 밑바닥에는 깊이 있는 현명함과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평생을 지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에 잠겨 이를 동경해온 훌륭한 영혼을 느낄 수 있다”고 평하였다.
협주곡 초연이 있은 후, 엘가는 이렇다할 만한 작품을 내놓지 못했다. 벤 존슨의 ‘악마는 당나귀(Devil Is an Ass)’를 기초로 한 오페라 ‘The Spanish Lady’와 피아노 협주곡, 그리고 BBC로부터 위촉받은 3번 교향곡의 작곡을 시작했으나, 이들 모두 스케치만 남아 있을 뿐 완성되지는 못했다. 갑작스런 작곡 활동의 중단은 1920년 평생 창작의 불씨가 되어준 아내 앨리스의 죽음과 그로 인한 내적 공허감으로 말미암아 창작 의욕이 모두 사라진 때문인 듯하다.
바흐·헨델·쇼팽의 작품들을 오케스트라 작품으로 편곡하거나, 행사 음악들을 간혹 작곡하는 것으로 작품 활동을 벌인 엘가는, 대신 명연주로 꼽히는 자신의 주요 작품들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녹음 작업들을 지휘하며 말년을 보내게 되었다.
1933년 마지막 병상에서 친구에게 첼로 협주곡의 제1주제를 불러주며 “내가 죽은 후에 누군가 말번 언덕에서 이 선율을 부르는 휘파람 소리를 듣게 되더라도 놀라지 말게. 그 사람이 바로 나일 테니까…”라고 말한 엘가는 그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운명적이게도, 초연에 참여했던 19세의 전도유망한 연주자가 그로부터 66년 후 영국의 존경받는 지휘자로서, 역시 영국을 대표하는 첼리스트와 함께 이 작품을 녹음, 첼로 레퍼토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위치에 올려놓게 되었는데, 그들이 바로 존 바비롤리 경(Sir John Barbirolli)과 자크린느 뒤 프레(Jacqueline Du Pre)였다. --이혜진(음악칼럼니스트)
엘가 첼로협주곡 E단조 - 가치와 매력
이 곡의 특징은 먼저 독특한 구성에 바탕을 두고 지극히 간결하게 작곡되었다는 것이다. 전곡은 4악장으로 되어 있지만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앞의 1, 2 악장과 뒤의 3, 4 악장을 묶어 거의 휴식 없이 진행한다. 레치타티보는 각 악장의 첫머리를 장식할 뿐 아니라 곡 중간에서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동기나 주제의 요소가 되기도 한다.
특히 3악장의 주제가 4악장에서 교묘하게 취급된다거나 마지막에 1악장의 레치타티보를 다시 가져오는 등 구성에서 뛰어난 독창성을 보인다. 첼로 독주의 기교적인 부분이 관현악과 더불어 과장됨 없이 간결하게 정수만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실내악적이다. 한편 반음계적 전조로 화성적 색채를 짙게 하는 양식은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듯하며, 감정의 내면적 성향에 있어서는 슈만이나 브람스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중후한 영국인다운 품격을 갖추고, 적당히 낭만적 서정성을 내포하며, 담담하고 애잔한 우수를 띤 곡으로 세인의 존경을 받고 있다. 시대를 벗어나는 노 대가의 최후의 대작에 걸 맞는 곡이다.
엘가 (Sir Edward Elgar 1857∼1934)
영국 작곡가. 우스터 근교 브로드힐 출생.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인 아버지로부터 음악 기초를 배웠으나, 작곡은 독학으로 익혔다. 초기에는 지방음악가로 활동했으나, 곧 작곡가로 활동을 시작하여 관현악곡 《에니그마 변주곡(1899)》, 오라토리오(聖譚曲) 《제론티우스의 꿈(1900)》 등으로 지위를 확립했으며, R. 슈트라우스의 칭찬으로 유럽대륙까지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엘가의 본래 영역은 합창을 이용한 오라토리오·칸타타 등이었으나 교향곡·협주곡 등 관현악작품에서 수완을 발휘했다. 그의 음악은 후기낭만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친숙해지기 쉬운 선율과 장인적(匠人的) 기교로써 고귀한 인간감정을 표현하여 영국 국민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동시에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행진곡 《위풍당당》의 5곡 가운데 1902년 에드워드 7세 대관식에서 사용한 제 1 번곡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