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흠신서(欽欽新書) 읽기, 경사요의(經史要義)3-1
절도사의 남살(濫殺)
선조 때 함경남도 절도사 소흡이 사적인 일로 분노하여 함경북도 관노 2명을 죽여서, 의금부로 잡혀와 심문을 받았다. 자복하자 대신들은 ‘남형(濫刑)’의 죄를 적용할 것을 의논했다. 대간은 “공적인 일로 자기 관할 군인과 백성을 죽인 경우 남형의 죄를 적용할 수 있지만, 이것은 사사로운 노여움으로 다른 도민을 죽였으니 살인죄를 적용해야 합니다.”고 주장했다. 임금이 2품 이상 대신의 의견을 수렴했는데 모두 “살인죄 적용은 불가합니다.”고 했다.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다시 여러 달을 다투었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〇율곡이 말했다 :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법에서 사면하지 않는다. 고수가 살인하여 고요가 구속해면 순임금의 힘으로도 저지할 수 없다. 소흡이 누구기에 감히 제멋대로 살인하고도 형벌을 받지 않는가? 만약 ‘팔의(八議)의 법’을 거론하고자 하면, 담당 관리는 살인죄로 적용시키되 혹시 임금의 특별한 은전으로 사형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것을 남형죄로 적용하게 되면 국법이 크게 문란해질 것이다. 2품 이상에는 한 명도 바르게 주장하는 사람이 없으니 조정이 공허해진 지 오래구나. 어찌 바르게 일할 수 있겠는가?”
수령의 남살[남살은 법률에 있다]
숙종 25년, 강원도 회양 부사 유신일(俞信一)이 유생 이우백이 자기 앞길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곤장을 치다 죽게 하였다. 유신일이 이 일로 갇혔는데 이우백의 죽음은 전염병 때문으로 처리했다. 의금부에서 강원도와 함경도에 조사를 의뢰한 결과 곤장으로 죽었다고 보고했다. 여러 대신들이 모두 사건 내용에도 불구하고 그 정황만으로 단죄함은 뒷날의 폐단이 있을 것이 우려된다고 하였다.
임금의 판결 : “살인자를 사형에 처함은 엄격한 법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법이 유독 관리들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지방의 관리들이 거리낌 없이 자기 기분에 따라, 사사로운 혐오로 남형으로 사람 죽이기를 마치 풀을 베듯이 하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지금 유신일은 선비에게 곤장치는 일을 했고 자신이 이미 자복했고 이우백은 곤장을 맞은 날로부터 보고(保辜) 기한 내에 죽었음이 분명하다. 검증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처벌에 경중을 두면 죽은 자는 저승에서 어떻게 원한을 풀겠는가? ...(중략) ... 반복하여 생각해도 유신일을 살려줄 실제적인 이유가 없다. 법률에 따라 처단하라.”
정원(政院)에서 결국 왕의 명령을 되돌려 시정해 줄 것을 상소하였다. : “살인사건에서 검증은 법의 정신에도 있으니 해당 부서에서 대신들에게 논의해 줄 것을 청하였고 대신들의 논의에 올린 결과 모두 형벌에 신중하여 뒷날의 폐단을 염려하는 것이니 다시 대신들에게 물어서 처분하시기 바랍니다.”
〇임금의 답 : “법은 조종(祖宗)의 법이지 결코 너희들이 감히 내렸다 올렸다 할 것이 아니다. 예로부터 임금이 위에서 법을 지키고자 하는데 신하들이 엎고 거역하며 법을 굽히는 자가 어디 있었는가? ..(중략).. 아! 만약 유신일이 살아서 의금부를 나간다면, 이는 법이 없는 나라이다. 조종의 법을 내가 감히 흔들어 고칠 수 없다.”
호족(豪族) 노비의 남살
세조14년, 인산군 홍윤성(*수양대군의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이후 공신으로 영의정까지 지냄)의 여종의 남편이 홍산 사람 나계문을 길에서 만나 무례함을 이유로 역리(驛吏)로 하여금 때려 죽게 하였다. 현감 최윤은 권세에 겁을 먹고 역리만 가두고 나머지는 모두 불문에 붙였다. 홍윤성의 노비 둘이 또 역리를 탈옥시키고 도망쳤다. 감사 김지경이 또 사면령을 내려 모두 방면하여 돌려보내고 오히려 나계문의 장인 윤기가 홍윤성을 해치려고 모의했다고 하며 잡아 가뒀다. 마침 왕이 온천으로 행차하자 나계문의 처 윤씨가 행궁 밖에서 곡하였다. 임금이 윤씨를 친히 불러 묻고 측은히 여겨 김지경, 최윤과 홍윤성을 잡아 심문하고 여종의 남편과 두 노비를 모두 극형에 처하였다.
호족(豪族)의 남살
세종 10년 형조판서 서선의 동생 서달이 신창 고을 아전 표예평을 죽였다. 담당 추관(推官) 등이 주범과 종범을 나누면서 노비를 주범으로 하고 화해를 들어주었다. 일이 발각되자, 임금은 사건 전후의 추관, 관찰사 등 모두를 의금부에 가두고 죄에 따라 조처하도록 하였다.
사사로이 노비를 죽인 경우
세종 26년, 교지를 내렸다. “나라 풍속에 상하의 구분이 엄격하여 노비가 죄를 지어 주인이 죽일 경우 모두 주인을 편들고 노비를 억압하였다. 이것은 진실로 좋은 뜻이지만, 상벌은 임금의 권한이다. 임금이라도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불가하며, 하물며 노비가 비록 천하지만 하늘이 낸 백성이다. 어찌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겠는가? 임금이 덕은 살리는 것을 좋아할 뿐이다. 앉아서 무고한 사람이 피살되는 것을 보면 어찌 두렵고 무섭지 않겠는가? 지금부터는 노비에게 죄가 있더라도 관에 알리지 않고 때려죽이는 자는 한결같이 옛날과 같이 처단한다. 만약 불로 지지고, 코나 귀를 베고, 얼굴에 먹물을 뜨고, 발꿈치를 자르고, 칼과 몽둥이 돌로 참혹하게 죽이는 자는 그 종의 식구를 법에 따라 관아에 소속시킨다.”
사사로이 여종의 남편을 죽인 경우
태종 5년 원윤 이백온(*태종의 사촌이라고 한다)이 여종의 남편을 죽였다. 임금이 그 죄를 용서하자 대사헌 이래(李來) 등이 청하였다.
“옛날에는 천자의 아버지가 살인을 해도 법관은 법을 집행하였으며 천자도 사사로이 간섭할 수 없다고 논하였습니다. 원컨대 법대로 처리하여 무고하게 죽어 눈물을 삼키는 혼을 위로해 주소서.”
두 번 세 번 청하자 임금이 말했다. “도성 밖으로 쫓아내라.”
이래 등이 엎드려 끈질기게 청하자 임금이 종부시(宗簿寺) 동순금사에 명하여 형장을 쳐 함주로 유배시키라고 하였다. 사헌부에서 이백온을 결박하여 호송하니 임금이 노하여 지평 이흡을 결박하여 순금사 옥에 가두게 했다.
이래가 아뢰었다. “백온의 형이 전 왕 때 살인하고 백온이 또 살인한 것은 실로 전하의 살리고자하는 성덕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결박하여 호송한 것은 도망칠 것을 염려한 때문입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이씨 사직의 신하가 아닌가? 어찌 종친을 이처럼 대하는가?”
래가 말하였다. “신 등은 종친을 욕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하의 덕을 보전하기 위함입니다.”
대관이 모두 물러나와 죄를 청하였다.
간관 조서(趙敍) 등이 청하여 아뢰기를 “이흡의 법 집행은 달리할 수 없습니다. 그를 석방하여 모두 바라는 바를 위로하시기 바랍니다.”하니 임금이 비로소 그를 석방했다.
*조선에서 살인사건의 최종 판결자는 왕이었나 보다. 왕의 선고는 그들 각자의 성격을 드러내고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던 선입견과도 별로 다르지 않아서 재미있다. 선조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고, 숙종은 격정적이다. 영조의 성격 일부는 아버지한테서 물려받기도 한 것 같다. 세조는 자기의 왕권찬탈을 도와준 홍윤성의 노비에게는 과단성 있지만 정작 홍윤성에는 그러하지 못했다고 한다(홍윤성이 숙부를 죽였는데 처벌하지 않았다고 함). 정통성이 떨어지는 것이 약점이다. 세종대왕은 역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며, 태종과 신하들의 밀당(?)은 종친을 처벌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어야 하는 태종의 심중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12.01 19:25
첫댓글 갑자기 돌아가신 듯 합니다. 경황이 없을 텐데 여길랑 염려마세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