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주관한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에 참가하여 일본 속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유산을 직접 확인하면서 역사 속 한-일 관계의 실상을 바로 보는 계기가 되었다. 한반도에서 전래된 고대문화를 살펴보고, 400년전 조선통신사의 여정을 따라서 민족사의 과거를 조명하는 시간이 되었다. 6일간의 여정 속에 가장 뇌리에 남았던 두 곳을 반면교사 삼아 학교와 역사현장에서 활용할 것이다.
첫째. 임진왜란의 출발지는 나고야城과 발음이 같은 규슈(九州)지방 佐賀県 名護屋城이라는 것이다. 왜? 그들은 7년 전쟁에 광분한 진원지였던 히젠 나고야성(肥前 名護屋城)을 허물었을까? 어떤 이유로 나고야성은 서로 다른 역사적 운명을 가지게 되었을까? 해질녁 비 내리는 사가현(佐賀縣) 나고야성터에서 대마도를 바라보며 일본을 경계하였다.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히데요시(豐臣秀吉)가 1년 2개월 동안 머물었고, 보급기지역할을 하며 20만명이 출병했다는 名護屋城 성터의 규모는 크지 않았고 7년 전쟁의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아마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정권을 잡은 후 침략에 따른 원성을 지웠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오사카성(大坂城)에서 도요토미히데요시를 豊國大明神으로 神社를 만들어 추앙하는 모습에서 정한론(征韓論)의 실체를 어렴풋이 깨닫게 하였다. 정조론(征朝論)이라고도 하는 정한론은 1592년 5월 23일 출병한 왜군이 2달만에 7월23일 평양성까지 함락시킨 자신감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느낌이 들었다. 고려말 분탕질한 왜구들이 한반도를 노략질한 이후 대규모 침공으로 조선의 수도까지 정복한 자신들의 무력적 우월성을 경험한 전설적인 무용담이 후세들에게 조선은 무능하고 약한 나라, 침략하기 쉬운 나라로 얕보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일본의 에도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에 당시 정부의 수뇌들에 의해 주장된, 무력을 이용해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책은 도요토미히데요시를 영웅시하는 침략근성에서 출발한 것은 아닐까? 그 후 명성황후시해사건과 청일전쟁을 도발하며 제국주의 침략을 자부심 느끼듯, 안중근의사의 손에 척결된 일본 근대화의 자부심으로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동상과 시모노세끼(下關)조약 전승기념관을 남겨둔 이유도 침략의 상징이 아닐까? 계속 떠오르는 궁금함으로 오사카의 밤은 개운하지 않았다.
둘째, 우리나라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쌍둥이처럼 보이는 일본 국보1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있는 광륭사와 1949년 1월26일 금당벽화 소실사고가 발생한 법륭사를 방문하니 관람객도 10명씩 배분하여 입장하도록 엄격히 통제하였다. 또 사찰주변에 소방차가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부끄러웠다. 왜냐하면 2008년 2월 10일 우리나라 국보1호인 숭례문이 방화로 고스란히 불탄 화재 사고 후에도 변함없는 우리의 인식 때문이다. 정부기관과 지자체는 축제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일에만 급급한 나머지 전국에 산재한 문화유산에 대한 각별한 보호와 법에 의한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하는 걱정이 앞선다.
일본은 대륙의 동쪽 끝에서 문화적 유입에 한계가 있어서 그런지 별 것도 아닌데 별 것으로 만드는 나라가 아닌가? 없어서 있는 것을 최대한 보전하고 활용하는 나라, 절제와 숨김으로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생산한 나라, 철저히 지방분권적이라서 관리체계가 엄중한 것은 아닌가? 일본의 문화유산을 탐방하는 과정에서 엄격한 통제와 관리하는 모습이 부럽다. 또한 일본 도자기의 시조지라고 말하는 이삼평의 도요지가 있는 아키타현에서 고옥을 보전하면서 건물바닥 기둥부분에 나무를 하나씩 끼워 통째로 들어 올리며 보수하는 공사 장면에서 옛 것을 지키는 치밀감을 보았다. 우리도 그렇게 하겠지만, 일부 사람들이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무책임하게 대하는 모습과 방치되는 우리 문화유산의 현주소와 비교를 해본다. 탐방과정에 본 것들을 학교에서 아이들과 공유하면서 우리 모두의 방심과 자만을 경계하리라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