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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사 Ⅳ』
4. 조선 후기의 소설문학
고전소설의 유통 과정
15세기∼17세기의 작가와 작품으로는 채수(蔡壽)의 『설공찬전』, 심의(沈義)의 『대관재몽유록(大觀齊夢遊錄)』, 신광한의 『기재기이(企齋記異)』, 임제(林悌)의 『화사(花史)』·『수성지(愁城誌)』·『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조위한의 『최척전(崔陟傳)』, 허균(許筠)의 『홍길동전』·「엄처사전」·「손곡산인전」·「장산인전」·「장생전」·「남궁선생전」, 권필(權韠)의 『주생전(周生傳)』, 윤계선의 『달천몽유록(達川夢遊錄)』, 정태제의 『천군연의(天君衍義)』, 김만중의 『구운몽(九雲夢)』·『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조성기의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 이정작의 『옥린몽(玉麟夢)』, 박지원의 「마장전(馬駔傳)」·「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민옹전(閔翁傳)」·「양반전(兩班傳)」·「김신선전(金神仙傳)」·「광문자전(廣文者傳)」·「우상전(虞裳傳)」·「호질(虎叱)」·「허생(許生)」, 서유영의 『육미당기(六美堂記) 』, 남영로의 『옥루몽(玉樓夢)』, 김수민의 『내성지(奈城誌)』, 심능숙의 『옥수기(玉樹記)』, 그리고 작가 미상의 『완월회맹연(玩月會盟宴)』·『소씨명행록(蘇氏明行錄)』 등이 있다.
15세기 중엽부터 출현한 몽유록 소설은 비현실적인 꿈과 환상의 세계를 통해 우의적으로 현실 세계를 묘사하는 유형의 고전 소설로 심의(1475년∼?)의 『대관제몽유록』, 임제(1549년∼1587년)의 『원생몽유록』 등이 있다. 그리고, 작품의 제목이 '몽(夢)'자로 끝나는 소설을 몽자류 소설이라고 하는데 『구운몽(九雲夢)』·『옥린몽(玉麟夢)』 ·『옥루몽((玉樓夢)』 등이 있다.
몽유록 소설과 몽자류 소설은 서사 구조에 있어서 '현실-(입몽)-꿈-(각몽)-현실'이라는 공통적인 구조를 가진다. 그러나 서사적인 구조에 있어서 몽자류 소설에서의 환몽 구조와 몽유록 소설에서의 몽유 구조에는 차이가 있다. 몽유구조는 서술자가 꿈꾸기 이전의 자신의 동일성과 의식을 유지한 채 꿈 속의 세계로 나아가 일련의 일들을 겪은 뒤 본래의 현실로 귀환하여 그 체험 내용을 스스로 서술한다. 그리고 환몽구조는 주인공이 꿈을 통해 새로운 인물로 태어나 파란 많은 일생을 거친 뒤 죽어 본래의 자아로 돌아오는 이야기가 3인칭 전지적 관찰자에 의해 서술된다.
한편 몽유록 소설과 몽자류 소설의 서사 구조에서 꿈 부분도 차이가 있다. 몽유록 소설의 꿈부분은 서술자가 다수의 인물을 만나 이야기를 주고 받거나 그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보고 들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고, 몽자류 소설의 꿈 부분은 그 전체가 유기적 사건의 연쇄로 엮어진 한 인물의 일생 이야기이다.
『번암집(樊巖集)』의 저자인 채제공(蔡濟恭,1720년~1799년)의 「여사서서(女四書序)」는 조선 시대 후기에 소설이 어떻게 보급되었으며 유통되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글이다.
가만히 살펴 보니, 근래에 이르러 부녀들이 서로 다투어 가며 능사로 삼는 것은 오직 패설(稗說)을 읽는 일이다. 패설은 그 수가 나날이 늘고 달마다 증가하여 그 종류가 천백(千百) 종에 이르렀다. 쾌가(儈家)에서 이것을 깨끗이 필사해서 빌려주면서 그 값을 받아서 이익을 취한다. 부녀들은 식견이 없어 비녀나 팔찌를 팔기도 하고 , 혹은 빚을 내어서라도 서로 다투어 패설을 빌려다가 지루한 시간의 소일거리로 삼고자 한다.
竊觀 近世閨閣之競以爲能事者, 惟稗說, 是崇日加月增, 千百其種, 儈家以是淨寫, 凡有借覽. 輒收其直以爲利, 婦女無見識, 或賣釵釧, 或求債銅, 爭相貰來, 以消永日.
-채제공(蔡濟恭), 『번암선생문집(樊巖先生文集)』, 권(卷) 33, 「여사서서(女四書序)」
채제공은 「여사서서(女四書序)」에서 부녀자들에게 패설(稗說: 소설)을 읽지 말고 『여사서(女四書)』 같은 책을 읽으라고 말하고 있다. 『여사서(女四書)』는 청나라 왕진승(王晉升)이 여성의 덕행교육에 대한 4권의 책을 모아 하나로 합하여 전주(箋注)한 것으로 중국 후한(後漢) 때 반소(班昭) 곧 조태고(曹大家)의 『여계(女誡)』, 당(唐)나라 때 송약소(宋若昭)의 『여논어(女論語)』, 명(明)나라 때 효문황후(仁孝文皇后)의 『내훈(內訓)』, 명나라 때 왕절부(王節婦) 유씨(劉氏)가 지은 『여범첩록(女範捷錄)』 등을 묶은 4권의 책이다.
세책이라 해서 돈을 주고 책을 빌려다 읽는 방식은 여성 독자와 더 밀착되었던 것 같다. 18세기 후반에 이덕무나 채제공(蔡濟恭)이 사대부 부녀자의 행실을 바로잡자는 글에서, 집안일을 버려두고 길쌈을 게을리하면서 소설을 빌려다 읽느라고 가산을 기울이는 일까지 있고, 소설은 수가 나날이 늘어난다 했다. 쾌가(儈家)라고도 한 세책가(貰冊家)에서는 소설을 필사해 빌려주면서 값을 거두어 이익을 취하는데, 다투어 빌려보느라고 비녀나 팔찌를 팔고 빚을 내니 그럴 수 있겠느냐고 분개했다. 이런 자료는 부녀자들을 상대로 한 세책가의 영업이 아주 활기를 띠었음을 입증해준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3, 지식산업사, 2002, pp.201∼2002.
조선후기에는 허균· 김만중· 심능숙·남영로 같은 독자들에게 이름이 알려져 있는 작가들의 등장으로 소설을 읽는 독자층이 늘어났다. 이로 인해 소설과 관련된 직업이 출현했다. 채제공의 「여사서서(女四書序)」에는 책을 대여해주는 쾌가(儈家)가 생겨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후기에는 소설 작품집이 늘어나고, 그 소설 작품집을 읽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이 시기에 소설과 관련된 새로운 직업인 전기수(傳奇叟)가 등장했다. 구자균이 "장혼(張混)을 위항시인(委巷詩人) 중(中)의 대가(大家)라 한다면 홍세태(洪世泰), 이언전(李彦塡), 조수삼(趙秀三), 정지윤(鄭芝潤), 장지완(張之琬) 등은 위항시인(委巷詩人) 중(中)의 명가(名家)로 추거(推擧)할 수 있을 것" (구자균, 『한국평민문학사』 , 문조사, 1947, p.89.)이라고 평한 조수삼(趙秀三, 1762년~1849년)은 중인 신분으로 태어나 서리 생활로 일생을 마쳤으나, 조선 후기의 역사·사회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문명을 떨쳤다. 조수삼의 문집인 『추재집 (秋齋集)』 「기이(紀異)」에는 전기수(傳奇叟)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풍물·일화·인물을 묘사한 70여 편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전기수(傳奇叟)는 동대문 밖에 살았다. 국문소설책을 읽어주었는데, 이를테면 『숙향전』, 『소대성전』, 『심청전』, 『설인귀전』 같은 전기소설들이었다. 매달 초하루에는 제일교 아래, 초이틀에는 제이교 아래, 그리고 초사흘에는 배오개에, 초나흘에는 교동 입구에, 초닷새에는 대사동 입구에, 초엿새에는 종각 앞에 앉아서 읽어주었다. 이렇게 올라갔다가는 다시 내려오고 하면서 한 달을 마친다. 다음 달에도 또 그렇게 하였다. 워낙 재미있게 읽은 까닭에 곁에서 구경하는 청중들이 빙 둘러싸고 있다. 그는 읽다가 가장 긴요해서 매우 들을 만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문득 읽기를 멈춘다. 그러면 청중은 그 다음 대목이 궁금해서 다투어 돈을 던진다. 이것을 일컬어 요전법이라고 한다.
아녀자들 마음 아파하여 눈물을 저리 흘리는데
이야기 속 영웅의 승패란 한 칼에 분간하기 어려운 법.
잘 읽다가 잠잠히 말소리 죽이며 요전법을 쓰니
묘처는 빨리 듣고 싶은 사람의 마음에 달렸다네.
傳奇叟居東門外, 口誦諺課稗說, 如淑香ㆍ蘇大成ㆍ沈淸ㆍ薛仁貴等傳奇也. 月初一日坐第一橋下, 二日坐第二橋下, 三日坐梨峴, 四日坐校洞口, 五日坐大寺洞口, 六日坐鍾樓前, 溯上旣, 自七日, 沿而下, 下而上, 上而又下, 終其月也. 改月亦如之. 而以善讀故, 傍觀匝圍, 讀至最喫緊可聽之句節, 忽黙而無聲, 人欲聽其下回, 爭以錢投之, 曰此邀錢法云.
兒女傷心涕自雰
英雄勝敗劒難分
言多默少邀錢法
妙在人情最急聞
―조수삼(趙秀三), 『추재집 (秋齋集)』 권(卷)7, 「기이(紀異)」, ‘전기수(傳奇叟)’.
조수삼은 산문 양식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국문소설책을 읽어주고 돈을 받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운문 양식으로 요전법(邀錢法)을 쓰는 장면을 압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요전법은 국문소설책을 읽어주다가 주요 대목에 이르러 갑자기 읽어주는 것을 중단하여 청중들이 듣고 싶어서 돈을 내게 하는 방법을 말한다.
홍경래의 난을 사실적으로 그린 장편 오언고시 「서구도올(西寇檮杌)」과 함경도 민중들의 고난을 그린 「북행백절(北行百絶)」의 시인 조수삼은 「전기수(傳奇叟)」 에서 돈을 받고 직업적으로 소설을 청중에게 읽어주는 노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조선시대 소설론의 전개
한국문학사에서 소설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후기이다. 물론 조선전기에도 소설을 둘러싼 논쟁이 다소 있었다. 그 가운데 소설작품을 둘러싸고 조정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설공찬전(薛公瓚傳)」 논쟁을 먼저 『중종실록(中宗實錄)』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조선 후기에 전개된 소설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설공찬전(薛公瓚傳)
1∼13쪽
설공찬이
예전에 순창(淳昌)에 살던 설충란(薛忠蘭)이는 지극한 가문의 사람이었다. 매우 부유하더니 한 딸이 있어 서방을 맞았으나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일찍 죽었다.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공찬(公瓚)이고 아이 때 이름은 숙동이라고 하였다. 어릴 때부터 글 공부하기를 즐겨 한문과 문장 제법을 매우 즐겨 읽고 글쓰기를 아주 잘하였다. 갑자년에 나이 스물인데도 장가를 들지 않고 있더니 병들어 죽었다.
공찬의 아버지는 불쌍히 여겨 신주를 만들어 두고 조석으로 매일 울면서 제사지내었다. 병인년에 삼년상을 마치자 아버지 설충란이 조카딸더러 이르되, “죽은 아들이 장가도 들이지 않아서 죽어 그 신주(神主)를 먹일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묻어야겠다”하고 하루는 (신주를) 멀리 싸두었다가 그 무덤 곁에 묻고 많이 서러워 이레 동안 밥을 먹지 않고 서러워하였다.
설충란의 동생의 이름은 설충수(薛忠壽)였다. 그 아들의 이름은 공침(公琛)이고 아이 때 이름은 업종이었는데 ‘셔으ᄅᆞᆫ(서울?)서 업살고 있었다. 그 동생의 이름은 업동이니 순창에서 살았다. 공침이는 젊었을 때부터 글을 힘써 배우되 동생의 반만도 못하고 글쓰기도 그만 못하였다.
정덕(正德) 무신년(무진년의 잘못된 표기, 1508년) 7월20일에 공침이 충수의 집에 올 때였다. 그 집에 있던 아이가 행금가지 잎을 당기더니 고운 계집이 공중에서 내려와 춤추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매우 놀라 제 집에 겨우 들어가니 이윽고 충수의 집에서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다. 물어보니, 공침이 뒷간에 갔다가 병을 얻어 땅에 엎드려 있다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렸지만 기운이 미쳐버리고 다른 사람과 다르더라고 하였다.
설충수는 그때 마침 시골에 가 있었는데 종이 즉시 이 사실을 아뢰자 충수가 울고 올라와 보니, 공침의 병이 더욱 깊어 그지없이 서러워하였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느뇨?”하고 공침이더러 물으니, 잠잠하고 누워서 대답하지 않았다. 제 아버지가 슬퍼 더 울고 의심하기를, 요사스런 귀신에게 빌미될까 하여 도로 김석산이를 청하였는데, 석산이는 귀신 쫓는 사람이었다. 김석산이 와서 복숭아 나무채로 가리키고 방법하여 부적하니 그 귀신이 이르기를, “나는 계집이므로 이기지 못하지만 내 오라비 공찬이를 데려오겠다”하고는 갔다. 이윽고 공찬이가 오니 그 계집은 없어졌다.
공찬이 와서 제 사촌아우 공침이를 붙들어 그 입을 빌어 이르기를, “아주버님이 백방으로 양재(攘災)하시려 하시지만 오직 아주버님의 아들을 상하게 할 뿐입니다. 나는 늘 하늘가로 다니기 때문에 내 몸이야 상할 줄이 있겠습니까?”하였다. 또 이르기를, “왼 새끼를 꼬아 집문 밖으로 두르면 내가 어찌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하거늘, 충수가 그 말을 곧이들으시므로 그렇게 하자 공찬이 웃고 이르기를, “아주버님(숙부님)이 하도 남의 말을 곧이 들으시므로 이렇게 속여보니 과연 내 술수에 빠졌습니다”하고 그로부터는 오며 가며 하기를 무상히 하였다.
공찬의 넋이 오면 공침의 마음과 기운이 빼앗기고, 물러가 집 뒤 살구나무 정자에 가서 앉았더니, 그 넋이 밥을 하루 세번씩 먹되 왼손으로 먹거늘 충수가 이르기를, “얘가 전에 왔을 때는 오른손으로 먹더니 어찌 왼손으로 먹는가?”하니, 공찬이 이르기를, “저승에서는 다 왼손으로 먹느니라.”라고 대답하였다. 공찬의 넋이 내리면 공침의 마음도 제대로 되어 도로 들어와 앉았더니, 그러므로 많이 서러워 밥을 못 먹고 목을 놓아 우니, 옷이 다 젖었다.
제 아버님에게 말하기를, “나는 매일 공찬이에게 보채여 서럽습니다”하더니 그로부터는 공찬의 넋이 제 무덤에 가서 겨우 □들이더니, 충수가 아들의 병앓는 것을 서럽게 여겨 다시 김석산에게 사람을 보내서 오도록 하였다. 김석산이 이르기를, “주사(朱砂) 한 냥을 사두고 나를 기다리시오. 내가 가면 영혼이 제 무덤 밖에도 나다니지 못할 것이다.”하고, 이 말을 많이 하여 그 영혼에게 들려주라고 하였다. 심부름 간 사람이 와서 그 말을 많이 이르자, 공찬의 넋이 듣고 대로(大怒)하여 이르기를, “이렇듯이 나를 때리시면 아주버님 얼굴을 변화시키겠습니다.”하고 공침의 사지를 비틀고 눈을 빼니 눈자위가 자지러지고 또 혀도 파서 베어내니, 코 위에 오르며 귀 뒤로 나갔더니, 늙은 종이 곁에서 병 구환하다가, 깨우니 그 종도 죽었다가 한참만에야 겨우 기었다. 공침의 아버님이 몹시 두려워 넋을 잃어 다시 공찬이를 향하여 빌기를, “석산이를 놓아보내고 부르지 않으마.”하고 많이 비니, 한참만에야 얼굴이 본래 모습으로 되었다.
하루는 공찬이가 편지를 보내 사촌 동생 설워(원?)와 윤자신이 이 둘을 함께 불렀다. 두 사람이 함께 와 보니, 그때는 공찬의 넋이 오지 않은 때였다. 공침이 그 사람들더러 이르기를, “나는 병들어 죽을 것이다.”하고 이윽고 고개를 빼서 눈물을 흘리고 베개에 누웠는데, 그 영혼은 아직 오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공침의 말이 아주 끊어지려 하였는데, 제 아버지가 이르기를 “영혼이 또 온다.”고 하였다.
공침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앉아 머리를 긁고 그 사람을 보고 이르기를, “내 너희와 이별한 지 다섯 해니, 머리카락조차 희니 매우 슬픈 뜻이 있다.”라고 하였다. 저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매우 기특하게 여겨 저승 기별을 물어보았다.
저승에 대한 말을 이르기를 “저승은 바닷가이로되, 매우 멀어서 여기서 거기 가는 것이 40리인데, 우리 다니는 것은 매우 빨라 여기에서 술시(저녁 8시)에 나서서 자시(자정)에 들어가, 축시(새벽 2시)에 성문이 열려 있으면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우리나라 이름은 단월국(檀越國)이라고 한다. 중국과 모든 나라의 죽은 사람이 다 이 땅에 모이니, 하도 많아 수효를 세지 못한다. 우리 임금의 이름은 비사문천왕(毗沙門天王)이다. 육지의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이승 생활에 대해 묻는데, ‘네 부모, 동생, 족친들을 말해보라.’며 쇠채로 치는데, 많이 맞는 것을 서러워하면 책을 상고(詳考)하여, 명이 다하지 않았으면 그냥 두고, 다하였으면 즉시 연좌(蓮座)로 잡아간다. 나도 죽어 정녕히 잡혀가니, 쇠채로 치며 묻기에 맞기가 매우 서러워 먼저 죽은 어머니와 누님을 대니, 또 치려고 하길래, 증조부 설위(薛緯)로부터 편지를 받아다가 주관하는 관원한테 전하니 놓아주었다. 설위도 이승에서 대사성 벼슬을 하였다시피 저승에 가서도 좋은 벼슬을 하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아래의 말을 여기에 하기를, “이승에 어진 재상이면 죽어서도 재상으로 다니고, 이승에서는 비록 여편네 몸이었어도 약간이라도 글을 잘 하면 저승에서 아무 소임이나 맡으면, 잘 지낸다. 이승에서 비록 비명에 죽었어도 임금께 충성하여 간하다가 죽은 사람이면 저승에 가서도 좋은 벼슬을 하고, 비록 여기에서 임금을 하였더라도 주전충 같은 반역자는 다 지옥에 들어가 있었다. 주전충 임금은 당나라 사람이다. 적선을 많이 한 사람이면 이승에서 비록 천하게 다니다가도 (저승에서) 가장 품계 높이 다닌다. 서럽게 살지 않고 여기에서 비록 존귀히 다니다가도 악을 쌓으면 저승에 가도 수고롭고 불쌍하게 다닌다. 이승에서 존귀히 다니고 남의 원한 살만한 일을 하지 않고 악덕을 베풀지 않았으면 저승에 가서도 귀하게 다니고, 이승에서 사납게 다니고 각별히 공덕 쌓은 게 없으면, 저승에 가서도 그 자손도 사납게 다니게 된다. 민후가 비록 이승에서 특별한 행실은 없었어도 청렴하다 하여, 거기 가서는 좋은 벼슬을 하고 있었다. 염라왕 있는 궁궐이 장대하고 위엄이 매우 성하니, 비록 중국 임금이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염라왕이 시키면 모든 나라 임금과 어진 사람이 나오는데, 앉히고 예악을 썼다.
또 거기에 앉은 사람들을 보니 설위도 허(?)리□□앉고 민후는 아래에서 두어째쯤에 앉아 있었다.
하루는 성화 황제의 신하 애박이를 염라왕께 보내 “아무개는 나의 가장 어여쁘게 여기는 사람이니 한 해만 잡아오지 마소서”하고 청하자, 염라왕이 이르기를, “이는 천자의 말씀이라 거스리지 못하고 부득이 들을 것이지만, 한 해는 너무 많으니 한 달만 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애박이가 다시 “한 해만 주소서”하고 아뢰자, 염라왕이 대로하여 이르기를, “황제가 비록 천자라고 하지만,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것은 다 내 권한에 다 속하였는데 어찌 거듭 빌어 내게 청할 수가 있단 말인가?”하고 아니 듣는 것이었다. 성화 황제가 들으시고는 즉시 위의를 갖추시고 친히 가신대, 염라왕이 자네는 북벽에 주홍사 금교의 놓고 앉고, 황제는 교상에 앉히고, 황제가 청하던 사람을 즉시 잡아오라.“ 하여 이르기를, “이 사람이 죄가 중하고 말을 내니 그 손이 빨리 삶아지리라.”하니 성화 황제
―「설공찬전(薛公瓚傳)」[이복규 편저, 『설공찬전· 주석과 관련자료』, 시인사, 1997, pp.65∼69.]
조선 최초의 금서(禁書)로 규정되어 탄압받은 「설공찬전(薛公瓚傳)」은 중종 6년(1511년) 채수(蔡壽, 1449년~1515년)가 귀신 또는 저승을 소재로 하여 지은 소설로 어숙권의 『패관잡기』에서는 「설공찬환혼전(薛公瓚還魂傳)」으로 표기되어 있고, 『중종실록』에서는 「설공찬전(薛公瓚傳)」으로 표기되어 있다.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었다. 헌부가 아뢰기를,
"채수(蔡壽)가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지었는데, 내용이 모두 화복(禍福)이 윤회(輪廻)한다는 논설로, 매우 요망(妖妄)한 것인데 중외(中外)가 현혹되어 믿고서, 문자(文字: 한문)로 옮기거나 언어(諺語: 한글)로 번역하여 전파함으로써 민중을 미혹시킵니다. 부(府)에서 마땅히 행이(行移)하여 거두어 들이겠으나, 혹 거두어들이지 않거나 뒤에 발견되면, 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설공찬전』은 내용이 요망하고 허황하니 금지함이 옳다. 그러나 법을 세울 필요는 없다.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臺諫啓前事, 憲府啓, 蔡壽作 薛公瓚傳, 其事皆輪回, 禍福之說, 甚爲妖妄, 中外惑信, 或飜以文字, 或譯以諺語, 傳播惑衆, 府當行移收取, 然恐或有不收入者, 如有後見者治罪, 答曰, 薛公瓚傳, 事涉妖誕, 禁戢可也, 然不必立法, 餘不允.
―『中宗實錄(중종실록)』 卷(권)14, 中宗(중종) 6년 9월 2일
중종 6년 9월 2일 사헌부에서 채수의 『설공찬전』이 "내용이 모두 화복(禍福)이 윤회(輪廻)한다는 논설로" 사회 윤리 기강을 해치기에 거두어 불태워 버리고, 또 책을 숨긴 자들은 '요서를 숨긴 죄(妖書隱葬之律)’로 다스리도록 하라고 청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9월 5일에는 " 『설공찬전』을 거두어 불태우게 하고 책을 숨긴 자는 '요서를 숨긴 죄'로 다스리도록 명했다((命燒薛公瓚傳, 其隱匿不出者, 依妖書隱葬之律, 治罪)”(『中宗實錄(중종실록)』 卷(권)14, 中宗(중종) 6년 9월 5일)했다는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라 채수를 죽여야 한다고 대간이 아뢰자, 중종은 그를 파직시키는 명을 내렸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영의정이었던 김수동이 반론을 폈다.
영의정 김수동이 아뢰기를, "들으니, 채수의 죄를 교수(絞首)로써 단죄하였다 하는데, 정도(正道)를 붙들고 사설(邪說)을 막아야 하는 대간의 뜻으로는 이와 같이 함이 마땅하나, 채수(蔡壽)가 만약 스스로 요망한 말을 만들어 인심을 동요하게 하였다면 사형으로 단죄함이 마땅하지만, 다만 기양(技癢)의 시킨 바가 되어 보고 들은 대로 망녕되이 지었으니, 이는 해서는 안 될 것을 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형벌과 상은 공평하게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만약 채수가 죽어야 된다면, 『태평광기(太平廣記)』·『전등신화(剪燈新話)』 같은 부류를 지은 자들도 모조리 죽여야 마땅하겠습니까?"
領事金壽童曰, 聞蔡壽之罪, 斷律以絞, 臺諫扶正道闢邪說之意, 固當如是, 壽若自造爲妖言, 皷動人心, 則可斷以死, 但爲技癢所使, 聞見而妄作, 是所不當爲而爲之也, 刑賞務要得中, 若此人可死, 則如大平廣記、剪燈新話之類, 其可盡誅乎.
―『中宗實錄(중종실록)』 卷(권)14, 中宗(중종) 6년 9월 20일
김수동은 채수가 기양(技癢 : 재능을 발휘하고픈 의욕을 참을 수 없는 것)의 시킨 바가 되어 보고 들은 대로 「설공찬전」을 망녕되이 지었으니, 이는 해서는 안 될 것을 한 것뿐이지 인심을 동요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헌부를 중심으로 한 벼슬아치들은 소설이라는 것은 세교(世敎)와 치도(治道)에 해롭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중종실록』 의 기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설공찬전(薛公瓚傳)」은 전라도 순창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은 저승경험담 계열의 전기(傳奇)소설이다. 주인공의 영혼이 잠시 지상에 나와 자신의 경험을 진술한다는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는 「설공찬전」은 “비록 여기에서 임금을 하였더라도 주전충 같은 반역자는 다 지옥에 들어가 있었다.”며, 반역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고 묘사해 중종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중종 정권을 비판하고 있다. 또한 「설공찬전」에서 채수는 “이승에서는 비록 여편네 몸이었어도 약간이라도 글을 잘 하면 저승에서 아무 소임이나 맡으면, 잘 지낸다."며. 여성이라도 글만 할 줄 알면 얼마든지 벼슬자리를 받아 잘 지낸다고 묘사해 여성을 차별하는 조선의 신분제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설공찬전」은 전문이 전하지 않아 이 작품의 저승경험담이 불교적인 윤회회복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당대의 정치 현실이나 사회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거나 풍자하고 있는 것인지 확실하게 판단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한편 이복규는 「설공찬전(薛公瓚傳)」의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금오신화』 이후 『기재기이』가 나오기까지 80여 년에 이르는 소설사의 공백을 메울 수 있게 되었다. 『금오신화』가 나온 지 40여 년만에 「설공찬전」 이 나오고, 「설공찬전」 이 나온 후 다시 40여 년만에 『기재기이』가 출현한 셈이니, 이 작품은 두 작품의 교량적인 위치를 자지하면서 우리 소설사의 흐름을 단절 없이 서술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복규, 『설공찬전· 주석과 관련자료』, 시인사, 1997, p.34.
저승 이야기를 통한 현실 정치의 비판하는 전기소설이자 한문소설로. 현실비판적 주제를 가지고 있는 단편소설인 「설공찬전」은 『금오신화』 와 『기재기이』의 교량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으로 문학사적인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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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김종성(金鍾星)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하여 삼척군 장성읍(지금의 태백시)에서 성장.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및 고려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4년 「한국현대소설의 생태의식연구」로 고려대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84년 제8회 방송대문학상에 단편소설 「괴탄」 당선.
1986년 제1회 월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검은 땅 비탈 위」 당선.
2006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으로 제9회 경희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연작소설집 『마을』(실천문학사, 2009), 『탄(炭)』(미래사, 1988) 출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 『말 없는 놀이꾼들』(풀빛, 1996), 『금지된 문』(풀빛, 1993) 등 출간. 『한국환경생태소설연구』(서정시학, 2012), 『글쓰기와 서사의 방법』(서정시학, 2016), 『한국어어휘와표현Ⅰ:파생어ㆍ합성어ㆍ신체어ㆍ친족어ㆍ속담』(서정시학, 2014), 『한국어 어휘와 표현Ⅱ:관용어ㆍ한자성어ㆍ산업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Ⅲ:고유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Ⅳ:한자어』(서정시학, 2016), 『글쓰기의 원리와 방법』(서연비람, 2018) 등 출간. 『인물한국사 이야기 전 8권』(문예마당, 2004년) 출간.
'김종성 한국사총서 전 5권' 『한국고대사』(미출간), 『고려시대사』(미출간), 『조선시대사Ⅰ』(미출간), 『조선시대사Ⅱ』(미출간), 『한국근현대사』(미출간), ‘김종성 한국문학사 총서 전 5권’ 『한국문학사 Ⅰ』(미출간),『한국문학사 Ⅱ』(미출간), 『한국문학사 Ⅲ』(미출간), 『한국문학사 Ⅳ』(미출간), 『한국문학사 Ⅴ』(미출간).
도서출판 한벗 편집주간, 도서출판 집문당 기획실장 , 고려대출판부 소설어사전편찬실장, 고려대 국문과 강사, 경희대 국문과 겸임교수, 경기대 문예창작과 및 동 대학원 강사, 고려대 문화창의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