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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을 이어온 왕들의 공동묘지-동구릉 글,사진:이종원
50번은 넘게 동구릉을 찾은 것 같다. 왕릉, 뭐 그리 볼 것이 있다고 그리 자주 가냐고 핀잔하는 사람도 있다.
천만의 말씀...왕릉은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고 그렇게 갔어도 단 한번도 지루했던 적이 없다. 능청스런 호랑이 얼굴, 주먹코의 장군상, 유성룡을 연상케하는 문인상 등 시대를 넘나드는 석조에술에 감탄해 본다. 능의 형식을 배우고 나면, 왕의 생애가 기다리고 왕비의 질투, 반목 사랑과 복수가 점철된 옛이야기에 빠지다보면 하루 해가 모자란다.
자식을 왕으로 세우려고, 친정식구들을 먹여 살리느라고, 궁녀에서 왕비로 신분상승, 저들을 밟지 못하면 내가 죽어야 하는 생존...다양한 이유 때문에 궁궐에서 그렇게 피 튀기며 싸우다가 죽어서는 왕의 곁에서 왕비와 계비가 너무나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다. 죽음이야말로 또다른 만남이며 이승에서 못한 화해를 하고 있다.
단순히 500년전 잊혀진 왕들의 무덤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지금도 전주이씨 종친회에서 매년 6월 27일 기신제를 올리고 있는 진행형의 능이다.
내가 맨처음 동구릉을 간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다. 그때 그곳에서 무술배우들이 피아노줄을 몸에 걸고 무술영화를 찍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이곳이 왕릉이라기 보다는 중국의 소림사로 여겼는지 모른다.
왕릉이 차리리 행락지로 여기면 차라리 낫다. 자주 들락거리다보면 뭔가 느끼는 것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마저도 외면하는 사람들을 위해 펜을 들었다. 우리가족은 어버이 날 행사를 매년 이곳에서 갖는다. 집에서도 가깝다는 잇점도 있지만 아이들에게 충효를 가르치는 살아 있는 학습장이기 때문에 매년 돗자리를 펼친다.
모놀 독자를 위해서 한번쯤은 동구릉을 체계적으로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가졌다. 어쩌면 여행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나의 작은 소임일지 모른다. 몇 일 자료를 모으고 문화유산해설사의 친절한 안내를 통해 답사를 마치고 나름대로 글을 정리해 보았다. 다 완성하고 나니 빼 놓은 부분도 있고 글마저 맘에 들지 않는다.
덕분에 왕릉을 더 많이 찾을 명분이 생겼다. 자주 들락거리면서 글을 계속 보완코자 한다. 이 보잘 것 없는 글을 통해 우리 왕릉을 더욱 사랑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을 가져본다.
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총 40기 중에서 22%인 9개가 동구능에 몰려 있다. 그만큼 풍수지리상 명당이고, 역대 왕들이 선조들과 함께 묻히려는 염원때문이 아닐까 싶다.
왕릉 뿐만이 아니다. 59만평, 과천의 서울대공원 넓이와 비슷하다. 그 그 빼곡한 솔숲 길을 거니는 것만으로 머리가 맑아진다. 입구부터 선조의 능인 목릉까지 가는 작은 오솔길과 경릉 옆 자연학습장으로 가는 길이 맘에 든다.
동구릉은 4계절 어느 때 찾아도 좋다. 봄에는 신록이 가슴 설레게 만들고 여름엔 청량한 그늘 아래서 늘어지게 낮잠을 즐기는 여유도 가져볼 수 있으며 가을엔 세상이 온통 붉어진다. 눈 내리는 겨울이야말로 한 폭의 풍경화다. 아이를 데려 왔다면 왕릉은 신나는 놀이터로 변한다. 내집 정원마냥 마음껏 뛰어 놀아도 좋다. 오죽했으며 동구릉에 반해 서울시내에서 살다가 이 근처로 이사 왔을까? 거대한 산소 호흡기를 옆에 두고 나만의 행복을 만끽한다.
조선왕조 500년 왕릉은 총 42기다.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신의왕후능), 후릉(정종과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는 남한에 있다. 능은 한양을 깃점으로 100리 안(예외 장릉)에 몰려 있으며 500년동안 훼손되지 않고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 역시 세계 유래를 찾기 힘들다.
동구릉은 궁궐(경복궁)을 중심으로 볼 때 '동쪽의 9개 왕릉'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동구릉을 감싸고 있는 산은 검암산으로 높이는 해발 177m의 얕은 산으로 수락산 불암산의 남쪽 지류에 해당하며, 망우산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망우리 공동묘지와 왕릉이 함께 묘자리를 쓰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일반적인 왕릉답사 코스는 주차장-일주문-수릉-현릉-건원릉-목릉-휘릉-원릉-경릉-혜릉-숭릉 식으로 걷는 것이 좋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경릉 옆 자연학습장까지 다녀와도 좋다.
건원릉을 중심으로 후손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것으로 보면 된다. 요즈음이야 정치인들이 국립묘지 참배를 하지만, 조선의 건국자 태조를 모신 곳이기에 역대 왕은 매년 몇 차례씩(3차례 이상) 참배하러 온 성지이기도하다. 태종이 이곳에 아버지 왕릉을 정하고 근심을 잊었다고 해서 망우리가 되었다.
주차장을 지나면 홍살문이 나온다. 이런 문은 관아, 묘, 서원 향교에서도 볼 수 있다. 홍문이라고 해서 화살을 꽂아놓은 듯한 붉은 색깔의 문이다. 붉은 색깔은 신라 '처용가'에도 나오듯이 악귀들이 붉은 색을 가장 싫어한다고 한다. 동짓달에 먹는 팥죽도 마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축선이 살짝 꺾어지면서 울창한 솔숲이 나온다. 중국에서는 밤나무가 기가 세고, 우리나라는 소나무가 기가 세다고 한다. 조상의 혼령은 기가 센 나무에 의지해서 놀고, 그 나무를 타고 땅속으로 들어간다고 믿었다. 아기가 나면 금줄을 거는데 솔잎을 매다는 것도 같은 이치다. 그런 주술적인 의미외에도 해충과 잡풀에 강해서 우리나라 묘에 주로 심는다. 대신 복숭아나무는 귀신을 물리치는 나무라 사장이나 집안에는 심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제사상에도 복숭아는 놓지 않는다.
관리사무소겸 재실. 왕릉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은 향과 제기를 보관하고 제사음식을 만들기도 하고 제관들이 와서 목욕재계를 하고 제사를 모신 곳이기도 하다.
동구릉 관리사무소겸 재실에서 신위를 모신 함을 나르고 있다. 관리사무소에서 수능가기 직전 오른쪽 숲이 건원릉의 원찰인 개경사다. 봉선사, 봉원사, 신륵사 등 왕을 지키는 원찰이 있는데 동구릉은 없어 의아해 했는데 이번에 해설사님을 통해 얘기를 들었다. 1408년부터 조계종 소속 승려 100명, 노비 150명이있어 태조의 명복을 비는 재를 올렸다고 한다.
조선왕릉의 터줏대감은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이다. 조선왕조 500년 왕릉의 형식은 바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의 능제를 따랐다. 건원릉을 지나기 전에 금천교가 나온다. 10개의 화강암 돌판으로 이 다리를 너머는 임금님의 혼령이 머무는 신령한 영역임을 표시하게 된다. 모든 능을 유심히 보라. 금천교라는 돌다리를 볼 수 있다. 지금이야 모두들 들어갈 수 있지만 예전엔 일반인의 출입을 엄금했다. 적발되면 곤장을 맞았으며 능참봉을 위시한 관리책임자는 처벌을 받았다.
악귀를 물리친다는 홍살문을 지나면 판위가 나온다. 임금님이 연(뚜껑없는 가마)을 판위 앞에서 내리신 후 판위에 올라서서 능쪽을 향해 4배를 하게 된다.
임금님이 홍살문 앞에서 내려 판위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뒤에 연이 보인다.
그리고 이어진 돌길을 참도라고 하는데 "참"이라는 말은 '길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긴 돌길을 뜻하는데 높은 길을 신도, 즉 신령만이 다니는 길이고 낮은 길은 왕과 제관들이 다니는 길이다. 신위는 신도로 가고 제관은 어도로 간다.
왕도 역시 어도로 가고 신하들이 그 뒤를 따른다.
어도를 갈때는 홀을 쥔 공수자세로 머리를 약간 수그리고 앞 사람과 2보 정도 띄어서 걷는다. 공손하면서도 경건한 자세
정자각을 기준으로 왼쪽으로는 제사음식을 보관하였던 수라간, 오른쪽에는 능을 지키니 위해 능수호군이 근무하는 수복방(3칸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정자각은 하늘에서 볼 때 그 모양이 '丁'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정자각이라고 부른다.. 제사를 지낼때 그늘이 있어 유용하게 사용한다. 일반인은 봉분앞에서 제사를 지내지만 왕릉제사는 반드시 정자각에서 지낸다. 계단도 역시 2곳으로 나눠져 있다. 신이 올라가는 신계, 임금이 올라가는 어계....일반인들은 감히 오를 수도 없다. 계단은 먼저 오른발, 왼발, 다시 오른발 다시 왼발 순으로...
장자각 지붕위의 인물상을 잡상이라고 하는데 중국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인물과 토신으로 꾸며진다.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침전수호와, 장식이 주 목적이다.. 손오공 ,사자, 해태 등이 있어 반드시 서유기 내용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경희루는 11개, 숭례문은 9개 돈화문은 7개 창경궁 홍화문은 5개.
왕이지만 의외로 제사 음식이 아주 간결하다
참신(參神)이라는 의식을 행한다. 신을 맞이하기 위하여 모든 제관이 네 번 절을 한다고 한다.
감작(監爵)은 제주를 따르는 것을 살펴보는 의식.
초헌례는 초헌관인 임금이 첫째 잔을 신위전에 올리는 의식다. 그 뒤에 아헌관(영의정)이 둘째 잔을 신위전에 올리고,종헌례하고 하여, 좌의정이 셋째 잔을 신위전에 올린다. 제례시 조선의 모든 권력이 이곳에 집결한다.
축문을 들고 정자각을 빠져 나온다.
계단을 오르면 네모난 돌이 있다. 망료대다.
이곳에서 제사를 마치고 조상에게 이마가 돌에 닿도록 4배를 하게 된다. 이를 사신(辭神) 의례라고 하는데 신을 보내기 위해 네 번 절하는 의식이다
망료(望燎)의식. 제례에 쓰인 축문을 태우는 의식이다.
소전대. 망료의식이 끝나면서 기신제는 마치게 된다. 이런 소전대는 능제의 검소함을 주창한 국조오례의 양식을 적용해 문종때부터 예감이 생겨 생략되게 된다.
정자각에서 바라본 사초지
왕이 직접 축물을 태운다면 아래로 내려가지만 신하를 시킨다면 이곳에서 축문을 넘기고 회랑을 따라 빠져 나간다. 망료위석이라 하는데 . 왕이 초헌관인 경우 정자각 위의 망료위석에서 소전대를 보고, 왕이 초헌관아 아닐 경우는 소전대가 망료위가 된다.
제사를 마치고 왕은 계단으로 내려가지만 제관들은 회랑을 따라서 한 바퀴 돌고 동쪽 계단으로 내려간다.
축문을 태우는 역할을 하고 있는 소전대. 망료위라고 한다. 부드럽게 다듬은 것이 아주 예쁘다.
6.25 전쟁의 상흔. 건원릉 서쪽면은 이렇게 총탄자국이 보인다.
살아 생전 왕의 업적을 새긴 비석인 신도비. 권근이 글을 짓고 당대의 명필 성석린의 글씨다. 1409년 4월 13일이니까..지금부터 딱 600년 전의 글씨다.
신도비는 고려말 부도비의 영향을 받았다. 세밀한 거북의 비늘과 연꽃의 앙련은 여주 고달사지 부도 조각물과 아주 흡사하다. ..신도비는 조선의 왕릉중에서 태종의 능과 태조의 능 세종의 능... 딱 3기가 있다.
정자각에서 바라본 왕릉. 인간이 볼 때는 아주 폐쇄적인 공간 구조다. 위에서 내려볼 때는 그 반대다. 왕이 승하하면 5개월안에 장례를 지내게 되는데 1일차 습에 9벌, 3일차 소렴에 19벌, 5일차 대렴에 90벌....도합 118벌의 옷을 시신에 입혀드린다. 부폐방지를 위한 조치가 아닌가 싶다. '9'라는 숫자는 완성을 의미한다. 5개월동안 산릉을 조성하게 되는데 총 6000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사진에서 보듯 능상은 3개의 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1단은 곡장, 봉분, 석호, 석양, 뭉주석이 배치되고 2단은 장명등과 문인석과 석마가 3단은 무인석과 석마가 배치된다.
건원릉은 그냥 따온 것이 아니라, 고려왕릉 중에서 가장 잘 조성된 현정릉(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묘)의 능제를 기본으로 삼았다. 고려 현정릉은 중국 남송의 능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 왕릉이 병풍석과 고려왕릉의 호석제도가 조선까지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조선능제에만 있는 유일한 양식은 바로 뒷담인 곡장이다. 높이 1m, 북풍을 막아주고, 혼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남쪽만 트고 모두 막고 있다.
곡장 위의 기와는 용과 봉황이 새겨져 있다.
건원릉 능침. 능상이라고도 한다. 조선왕조 500년 능제의 시원이자 기준이 되는 능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이다. 고려의 찬란한 불교 석조예술을 이어받아 조각이 섬세하고 화려하며 다른 능에서는 보기 힘든 신도비까지 볼 수 있다. 봉분 위는 뾰족한 억새가 자라고 있는데, 태종이 고향인 함흥에 묻히길 원한 아버지 태조의 뜻을 받들어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와 봉분을 덮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600년된 억새풀이다. 억새는 자주 자르면 죽기 때문에 1년중 한식날 딱 한번만 잘라준다고 한다.
좋은 풍수지는 꽃술에 있으면 된다. 켜켜히 쌓여 있는 산줄기는 꽃잎에 해당하고 그 한가운데 건원릉이 자리잡고 있다. 저 멀리 망우리 공동묘지가 있는 용마산이 보인다. 능앞으로 왕이 하룻밤을 보냈다는 의미의 왕숙천이 흐르고 그 너머가 한강이다.
왕릉이야말로 정신, 문화, 예술이 한데 모인 종합예술장이다. 600년 동안 봉분이 허물어지지 않는 이유는 첨단 과학이 있어 가능했다. 안쪽에 석회를 덮어 방수가 되어 빗물이 자연스레 흘러내리도록 했다. 불국사에 보이는 인석을 깊숙히 박아 외부 흙이 무너짐을 막고 있다. 지금 보이는 병풍석과 내부의 석실을 만들기가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100톤되는 돌을 이 산까지 나르고 세우는 작업이야말로 국가의 최대 난공사다. 그렇게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란다. 그래서 세조 이후에는 병풍석을 세우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런데 후대에 와서 그걸 지키지 않는 왕이 몇분 계신다. 조금 이따 가 볼 세조의 목릉이 그렇다.
신라의 신문왕릉이나 김유신묘, 집안의 광개토왕릉을 보면 봉분둘레를 돌로 막아 놓은 것을 볼수 있다. 이것이 바로 호석인데 고구려, 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까지 이어온 것이다. 구름위의 서 있는 십이지신상. 관모위에 동물이 그려져 있다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 고사리 같은 귀꽃문양과 둥글둥글한 구름문양이 꿈틀거린다.
아무리 유교국가라도 초기조선은 불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도리처의 주인인 제석천(인드라)의 무기이다. 부처님 뒤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가운데 태극문양이 선명하다. 방울도 보인다.
호랑이 4마리, 양 4마리가 밖을 향하면서 능침을 지키고 있다. 호랑이는 보이는 사악한 것. 양은 천성이 착하다. 잡귀를 물리치는 상징물이다.
왕릉의 보는 재미는 바로 석물의 표정이다. 도무지 무서움이 전혀 느끼지 않는 허허실실의 얼굴
잘 보면 암놈 수놈 구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망주석은 영혼이 자기의 유택을 찾아오게하는 안내표시라는데 귀신도 집찾기가 쉽지 않은가보다. 풍수지리에서는 능침에서 기가 빠지는 것을 곡작이 막지만, 남쪽으로는 이 망주석이 기를 막는다고 한다. 다람쥐나 이무기를 새겨져 있다. 망주석은 가운데 구멍이 나있어 이곳에 줄을 걸고 차양을 씌워 혼유석을 가리게 된다. 특이한 것은 양과 호랑이는 임금을 지키는 수호신이기에 바깥을 향하고 있는데 말은 그렇지 문인석, 무인석 뒤에서 안쪽을 향하고 있다. 왕이 언제든지 신하를 부르면 말을 타도 달려오라는 의미일게다.
일반인들은 이 돌위에 음식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지만 왕의 제사는 아래 정자각에서 거행하며 이곳은 왕이 이 돌 위에서 노는 혼유석이다. 돗자리 같은 이 돌위에 앉아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을 지켜본다.
혼유석의 묘미는 바로 받침돌에 있다.북처럼 생겼다고 해서 고석이라고 부르는데 다양한 형태의 귀면상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고석은 건원릉이 5개인데반해 세종의 영릉부터는 4개로 줄어든다.
혼유석 앞의 장명등은 불교의 석등의 양식을 고스한히 가져왔다. 사철 것보다 육중한 것이 다른데 처음에는 매일 촛불을 붙였다고 한다. 영원불멸의 상징물이 아닐까 싶다.
왕릉에서 볼 수 있는 재미는 바로 이 문인석과 무인석이다. 왕의 일생을 반영하듯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비장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입이 찢어져라 웃기도 하고, 슬피 울고 있는 석물도 있다. 심지어 경릉의 무인석은 총탄까지 맞아 처연하게 보인다. 역사책을 슬며시 펼치며 왕과 왕비의 삶을 들추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시간이다.
건원릉의 무인석. 볼수록 명작이다. (참고자료)
태종 능인 헌인능에 가면 호랑이와 양이 16마리가 있다.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의 능인 헌능.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냉혹한 왕이란 평가를 받는다.
이곳은 모든 석물이 두 개다. 무인석도 2기가 서 있다.
건원릉 앞을 지나는 묘내수다. 은근히 수량이 많다.
건원릉 옆 목릉도 특이한 능이다. 참..목릉까지 들어가는 숲길이 참 예쁘다. 예전에 이곳을 개방하지 않을 때는 울창한 숲을 지나 철조망 너머 몰래 들어갔을 때는 앙코르왓을 발견했을 때의 감동을 얻었다. 예나 지금이나 신비스럽기는 마찬가지. 유교에서는 서쪽을 높이는 풍습이 있어 능에서 항상 왕은 정면에서 볼 때 왼쪽에 있다. 왼쪽에 언덕이 선조, 가운데 의인왕후 나주 박씨, 한참 떨어진 언덕은 계비 인목왕후가 지라하고 있는 동원이강릉의 변형이다.
선조임금은 조선최초로 왕비가 출생하지 않은 방계 출신의 왕이다. 중종의 손자이며 명종의 조카다. 거기다 전쟁까지 겪었으니 그만큼 왕권이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전에는 왕릉 택지로 결정되면 아무말도 못하고 공신이라도 묘지는 파헤쳐지고 그날로 이장당해야한다. 그런데 의인왕후가 죽자 양반들의 반발 때문일까 5개월이 넘어도 택지를 결정하지 못한 것이다. 우여곡절 속에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임란후 약해진 왕권 때문일까 아니면 석공이 전쟁 때문에 다 죽고 말았을까? 3m에 육박한 장신석물이지만 상하 비례는 맞지 않고 조각은 아주 거칠고 투박하다. 전쟁을 겪은 왕은 장군의 힘이 절실했을까? 유난히 우락부락하고 힘이 느껴진다.
선조임금 능인 목릉의 호랑이상. 왕방울 만한 눈. 삐죽 튀어난 이빨이 앙증맞다.
목릉 혼유석의 귀면상. 전쟁의 참화를 이겨낸 선조. 죽어서는 편안했으면 좋겠다.
왕비 의인왕후 능에서 바라본 선조릉.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다. 왕방울 만한 눈, 부처님 귀는 날개처럼 펄럭인다. 의인왕후. 몸이 허약해 평생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왕비가 자식이 없는 것도 국가의 큰 재앙이다.
1600년 의인왕후가 죽자 1602년 인목왕후는 19세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어 4년 후 영창대군을 낳게 된다. 당시 광해군이 세자의 지위에 있었는데, 실권자인 유영경은 적통론을 주창해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생각을 품었다. 그러나 선조가 급사하는 바람에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고 이복동생 영창대군은 강화도에서 짧은 삶을 마감해야 했다.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는 어머니의 야망. 목적 달성을커녕 잔혹하게 살해된 아들을 보며 피눈물을 흘리면서 복수의 칼을 갈게 된다. 결국 인조반정에 성공해 광해군을 죽이려고 살기등등했지만 조정의 반대로 광해군은 목숨을 부지했고 강화도,태안, 제주도까지 끌려다니면서 온갖 모욕을 당한다. 자신이 데리고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자신은 아랫방에 거처하는 모욕속에서도 광해군은 묵묵히 지냈다. 언젠가는 기회가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인데 65세에 천수를 다하고 죽고 만다. 처절한 원한과 복수, 피의 상쟁이 있는 조정과는 달리 목릉은 너무나도 초연해 있었다. 죽음이 만들어낸 평온이 아닐까 싶다.
국사책 탕평책을 펼친 영조임금의 원릉. 왕비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몰게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정조가 승하하자 순조가 즉위했을 때 수렴청정을 하면서 천주교를 탄압하기도 했으며 정약용 약종을 유배 보내기도 했다.
현릉은 세종대왕 아들인 문종과 왕비 안동권씨 현덕왕후가 잠들어 계신 능이다. 문종은 소년왕이자 단종의 아버지가 된다. 실제 세종의 한글창제에 막강한 역할을 다했다. 7세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37세에 왕이 되어 불과 2년동안 왕이되었다가 39세에 승하하신다. 얼굴은 관운장처럼 생겼고 성품이 너그럽고 검소했다고 한다. 세종이 앵두를 좋아해서 궁궐내에 앵두나무를 심어 쟁반에 바쳐 세종을 기쁘게 한 기록도 남아 있다. 전쟁이 있을 때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군사제도를 개편했고 손수 군대배치방법을 연구한 '진법'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그런데 문종은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궁궐내에서 이동할 때도 가마을 즐겨탔다고 한다. 이것이 단종의 죽음으로 이어질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 왕은 제때 죽어야 하고 왕비는 제때 아이를 낳아야 하는 교훈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만약 문종이 10년만 더 살았어도 세종에 이은 문화황금기는 오래 이어기지 않았나 싶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 역시 한 많은 여인네다. 14세에 궁녀로 입궁하여 20세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당세 세자(문종)의 첫 번째 세자빈 김씨는 투기가 심해 조정의 반발을 삼았고, 둘째 세자빈 봉씨는 조선최초의 동성연애자였으니.....며느리 때문에 겪는 세종의 근심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 와중에 세 번째 세자빈이 바로 자애로운 현덕왕후 권씨다. 그러나 그녀도 어린 단종을 출산하고 3일만에 산후병으로 승하하게 된다. 원래 현덕왕후 권씨 시신을 광릉근처에 이장하기로 했다가 관이 동구릉 앞을 지나는데 동구릉 입구에서 움직이질 않아 "현덕왕후가 남편 문종대왕 근처로 가고 싶구나"라고 하여 동구릉으로 방향을 트니 그제서야 관이 움직였다고 하다. 왼쪽 문종릉과 현덕왕후 능사이는 소나무가 무성했다고 하는데 현덕왕후가 이곳에 온 후로는 가운데 소나무들이 말라죽고 두 릉사이가 탁 트였다고 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죽어서는 서로 마주하고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과천의 서울대공원만큼이나 넓은 동구릉은 경내가 거대한 산소통이라고 부를 정도로 숲이 울창하다. 새벽 6시에 문을 열기 때문에 숲 산책을 하겠다면 이른 시간에 찾는 것이 좋다. 경릉 뒤편 자연학습장은 동구릉의 숨은 볼거리로, 3.5km 산책로를 따라 소나무, 상수리나무, 전나무 등이 아름드리 숲을 만나게 되는데 끝자락에는 야생화단지가 조성되어 있다.(5.1~11.30, 09:00~18:00)
동구릉 여행 스케치
동구릉이야말로 우리 아이들의 놀이터여요. 정수가 두 살쯤 되었을겁니다. 그때부터 동구릉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예전 정수가 그린 왕릉 그림.. 성의가 보이지 않는다.
500년의 세월이 이렇게 흘러갑니다.
눈 오는 날 원릉 근천
정자각 기둥을 부여잡고 미소 짓는 성수.
역시 정수는 아빠의 최고 모델입니다.
아이고 대장의 면적이 제일 넓네요.
정수의 특기...공중 부양 왕릉이 과거의 전유물만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자~~ 떠나셔요. 동구릉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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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저는 겨울에는 동구릉을 가보지 못했어요. 여름에 보는 겨울 동구릉 운치있으면서 시원하네요~
어쩌다 보니 동구릉은 87차 답사로 처음 가는 것 같습니다.^^*
비오는 날 동구릉 참 멋졌는데...멀리서 본 태조의 억새풀능도 인상깊었었구요...대장님 덕분에 조선왕릉에 대한 공부 열심히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우리 선조왕릉에 관해서 공부 잘 하고갑니다감사
학교에서 갈때는 잘몰랐는데 지금보니 새롭네여...잘보고갑니다...
조선 특집 대하드라마를 본 듯 합니다!! 한시간 반이 흘렀네요 ^^ 내가 보았던 대장님은 날씬 했었는데....ㅋㅋ 너무 재밌게 보았어요!!
미리 보는 동구릉의 사진과 해설이 참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자세한 설명과 사진 너무 좋네요 감사합니다^^
많은 사진들과 쉽고 자세하게 설명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역사 공부 많이 했습니다.~~~~^^
조선왕조 더 많은 관심갖고 공부 많이 해야겠습니다. 해설과 사진 정말 잘보고 갑니다
역사공부 잘하고 구경 잘했습니다. 감사드려요~
동구릉이 친밀하게 다가옵니다. 답사로 가서 좋아요 ^*^
직접 가서 볼것을 생각하니 아주 좋아요.
^^이 글을 보고 어제 처음으로 동구릉을 방문했었습니다. 대장님의 사진과 해설을 잘 읽고 찾아서 인지 처음 방문한 풍경과 능들이 전혀 낮설지 않더군요. 여름, 가을, 겨울에 다시한번 방문해야 겠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동구릉 사진 잘봤읍니다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주제넘게 한마디 보탠다면 '동구릉"이란 명칭은 일제 강점기에 편리하게 부르기 위해서
동쪽에 릉이 아홉기가 있으니 동구릉으로 했다는 전해 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오릉 서삼릉도 마찬가지구요
저도 전주 이 가 라서요..ㅎ
요즘 이곳 저곳 왕릉 답사를 하고 있답니다
제가 모르던 여러 설명 잘 읽었습니다
그래요? 조선후기에 동칠릉이라고 불렀고 그 후 2기가 늘어 동구릉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답니다.
우와,,금방 댓글을 올리셨네요
공부 많이 하시는 대장님께서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희 집안은 청권사에 제를 올리는 후손들인데 집안끼리 모였을때 들었던 이야기 였어요
일제가 조선을 이조라고 하기도 해서 왕릉도 좀 깍아 내렸을 것 같고 해서 솔깃하게 들렸었지요
옛날에 있었던 일이니 제가 자세한 것은 알리 없지요
글을 쓰시는 분이니 제가 들었던 것을 이야기 했을 뿐입니다
역사적인 사실까지 많은 공부가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