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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원 맹문재 김석환 이은봉 엮음, <오늘의 좋은 시>, 푸른사상, 2015년 3월 10일.
“배꼽”은 탯줄을 끊은 자리로 단절과 연결이라는 이중성을 띤다. 어미와 새끼가 한 몸이 아니기에 분리될 수밖에 없는 운명의 흔적이면서 새끼가 어미라는 뿌리로부터 태어났음을 증명하는 흔적인 것이다. 따라서 “배꼽”은 처음이자 끝이고, 슬픔이자 기쁨이고, 독립이면서 연대이고, 과거이자 현재이고, 상처이자 영광이다. 한 개인의 중심지면서 우주의 중심지인 것이다.
“안녕, 배꼽”이라고 인사하는 것은 필요하다.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배꼽”과 같은 운명을 타고 났기에 어떻게 “인사”를 하느냐에 따라 세계관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향하는 세계관은 “상처”의 조건에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흠집” 같은 흔적에 부끄러워해서도 안 된다. “아픔을 모른 척”하다 보면 “아물”게 되는 것이다. 겸손하면서 자랑스럽게 다시 인사를 하자. “안녕, 배꼽”! (b)23
훗날 대한민국의 역사서에는 ‘십상시(十常侍)’나 ‘지록위마(指鹿爲馬)’ 같은 어휘가 등장할 것이다. 십상시란 중국 후한 말 영제(靈帝) 때 정권을 잡고 조정을 농락한 10여 명의 중상시(中常侍), 즉 환관(내시)을 말한다. 중상시는 환관으로 임용되었던 관직명이다. 지록위마란 중국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의 시황제가 세상을 뜨자 권력을 잡은 조고(趙高)라는 환관의 일화에서 유래한다. 조고는 2대 황제 호해(胡亥)에게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의도적으로 주장했는데, 그의 권세에 굴복한 신하들 모두 동의한 것이다.32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일/별로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달콤한 혀는 늘 가까이 머물고/뼈 있는 말은/멀리 유배지에서 고초를 겪는다”. 이와 같은 일이 대한민국의 역사서에 언급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권력자들은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비판하는 국민들을 협박한다. 국민들의 주권이 더 이상 유린되어서는 안 된다. 작품의 화자처럼 물러서지 않고 “새를 자꾸 날려 보”내야 한다. 자신의 바른 소리가 먼 유배지에서 고초를 겪을지라도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필요한 시대이다. 대한민국에는 “아직도,/심장이 붉”은 시인들이 있다. (b)32
작품의 화자가 “호미 끝에 찍혀 나오는 하얀 속살”에서 “아린 비린내”를 맡는 것은 생명을 의식하는 모습이다. “뒤란 장독대에 엎어둔 시루 속에/밤톨 소복이 묻어다 놓고/싹트도록 소식 없는 다람쥐”며, “마당귀를 지키다 삭아버린 짚신” 등을 품는 것이다.
“호미 끝에 찍혀 나오는 하얀 속살”에서 “아린 비린내”를 맡는 것은 역사의식을 추구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노름쟁이 남편 몰래/사랑채 처마 끝 이엉 아래”에 “피 묻은 지전 동전 몇 닢”을 묻고 세상을 뜬 “폐병쟁이 아내”며, “아내 뱃속에 첫아이 남겨두고/가서는 오지 않는 남편” 등을 품는 것이다.
대지는 생명과 역사를 품고 있다. 그러므로 대지가 존재하는 한 우주의 역사는 결코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부엌 바닥 서둘러 파고/씻나락이며 족보 묻어두고/얼어붙은 강을 건너던 종손 일가와/대숲 사이에 걸린 그믐달” 등은 대지의 “아린 냄새”를 맡고 있는 한 영원할 것이다. (b)44
“빗물받이 홈통을 타고 골목으로/빗물이 쏟아져 나”오는 장면은 장마철에 흔히 볼 수 있다. 빗물 속으로 “오래된 담배꽁초”며 “바닥에 말라붙었던 가래침 자국”이며 “살비듬처럼 일어 나풀거리던 시멘트 가루”가 쓸려 내려가는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싸구려 구두의 가죽 냄새”며 “깨진 화분”이며 “뜯겨서 빠진 듯한/머리카락”도 쓸려간다. 따라서 청소를 하는 것과 같이 속이 시원할 텐데, 작품의 화자는 오히려 “붉은 핏물이 섞여들”고 있다고 인식한다.
담배꽁초며 가래침 자국이며 시멘트 가루며 값싼 구두 냄새며 깨진 화분이며 머리카락 등의 비주류들에 “핏물”이 섞여드는 것이 자본주의의 현실이다. 배우지 못하고 가지지 못하고 권세가 없는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를 흘려야만 살아갈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끊임없이 전선으로 내몬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b)55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전문가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전문가들에 의해 사회가 조직되고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매우 빠르게 변하고 다양하면서도 전문화되고 있기에 전문가의 등장은 불가피하다. “병원”의 “의사”가 그 한 예이다.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은 인간의 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더욱 커지고 있기에 “의사”는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문가 계급 중에서 상업적 전문가 혹은 타락한 전문가의 등장이 심화되고 있기에 문제이다. 그들은 사회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목적을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두고 있다. 그리하여 비전문가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전문가 계급의 소비자 혹은 전문가 계급을 위한 생산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병원은 안전하다”고 “의사를 무조건 믿는” 것은 위험하다. “치유를 즐기는 것은 좋지만 무조건 의존하고 빠”지거나 “의사에게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을 맡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느덧 질병은 막대한 자본과 정치 권력과 상업 매체의 전략이 깊숙이 작용하고 있는 거대한 황금” 시장이다. (b)61
“내가 잡혀온 우리 집으로/한참 동거 중인 슬픔을 관람하러” “기린”이 찾아왔다. 좋은 결과가 기대된다. 기린은 옛날부터 자애심이 깊고 덕망이 높고 재주가 뛰어나고 지혜가 비상한 길조의 동물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방문한 “기린”은 “슬픔을 면밀히 감상하기 위해/목을 구부렸다”. 그리고 “사과벌레처럼 움츠린 슬픔이 깜빡”이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침내 “슬픔은 상영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슬픔”과 함께하고 있는 “조울증, 편집증, 공황장애, 대인기피증”도 “손가락을 움직인 기분이 마침내 발가락을 움직일 때까지” “상영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기린”의 말대로 “슬픔”은 상영되기 시작했다. “모자가 되어 내 머리 위로 기어 올”랐다가, “차라투스트라가 되어 외치다가”, “시속 이백 킬로를 달리다가, 마침내 “갓 구운 빵이” 된 것이다. “시든 꽃들이 화들짝 피어”난 것이다.
“빵을 길게 찢어 내 입에 넣어주”기까지 하는 “잘 만든 가구처럼 미학적인 기린”은 무엇일까? 길조를 상징하는 전설의 동물일까? 긍정적인 자아일까? 빵을 만들어주는 신(神)일까? 아니면 슬픔을 치유해주는 시(詩)일까? (b)64
라캉은 인간이 자신의 주체를 형성해가는 과정을 거울의 단계, 실 당기기 게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보았는데, “자장가”를 듣는 시기는 거울의 단계 이전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주체를 형성하기 이전의 단계에 해당되는 것이다.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인간은 거울의 단계에 들어간다.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비로소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을 완전한 존재로, 이상적인 자아로 생각하는데, 그러면서도 자신이 엄마와 분리된 존재라는 사실을 느끼며 소외감을 갖는다. 이에 비해 “자장가”를 듣는 시기는 (혹은 순간은) 자신이 엄마와 분리된 존재라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엄마와 동일체 의식을 가져 가장 평온하고 충만하고 행복한 것이다.
인간은 그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저장하고 있다. 그 기억은 “아기의 시간도 시간의 아기도 모두 사라져 지상의 지붕엔 어느덧 그늘이 지는 오후”에 이르러서도 여전하다. 인간에게 가장 행복한 노래, 자장가.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 우리 아가. (b)66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54년 베트남이 승리하면서 종결되었다. 그렇지만 같은 해 7월 제네바 협정에 따라 소련이 지원하는 북부와 미국이 지원하는 남부로 분할되었다. 그 후 북베트남의 게릴라 활동과 남베트남 내의 친공산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미국의 개입을 가져온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 전쟁)을 겪었다. 북베트남은 제네바 협정에 따라 보통선거로 베트남에 단일정부를 구성할 것을 주장했으나 미국은 거부하고 반공정부인 남베트남 공화국을 세우고자 했다. 이에 1959년 북베트남이 남베트남 정권을 미국의 하수인이라고 보고 공격했다. 1961년 미국이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정규군을 파견하면서 북베트남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프랑스의 식민지 건설에 대한 베트남 민중들의 항전이라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미국의 침략에 대한 베트남 민중들의 항전이었다. 1973년 미국이 철수하면서 휴전되었고, 1976년 북베트남의 주도로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탄생되었다.
그 베트남 전쟁에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의 “31만 2,853명 청룡맹호백마부대 병사들”이 참전했다. 그 결과 “4,960명 젊은이”들이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사망자, 사상자, 실종자, 고엽제로 인한 휴유증을 앓고 있는 참전 용사 등 엄청난 군인들이 희생당한 것이다. 파병의 대가로 받은 지원금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경제적인 이익을 가져왔지만 희생은 너무 컸다. 그러므로 “45년 만에 찾은 부산항 제3부두/네 말없이 몇 잔의 소주를 부어놓고” 참회하는 우리의 자세는 필요하다. 그 어떤 전쟁도 용인할 수 없는 것이다. (b)69
“콩국”은 “연애의 마지막처럼 비릿하고 은밀한 빛깔”을 띠기에 제대로 끓이기 위해서는 “적당한 온도”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쉽지 않아 “하염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어디로 가야 우연이 운명을 만나게 되는지/알 수 없”지만, “오래 끓을수록 자주 놓치는/절망을 끌어안”아야 한다. “콩국은 누구나 끓일 수 있지만 아무나/끓일 수 없”다. “비릿한 네가 내 안에서 끓고 있”는 사람만이,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끓일 수 있는 일이다.
“콩국”을 끓이는 자세는 물질과 속도가 지배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예외적인 것이다. “콩국”의 빛깔도 냄새도 맛도 원시적인 것이기에 원시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콩국”을 끓이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사랑을 물질로 변질시켜 점점 딱딱하고 날카롭게 만든다. 그와 같은 사랑에는 조건과 계약이 그림자처럼 붙어 있다. 따라서 “비릿한 것들이 섞이고 섞”인 “콩국”을 끓이는 일은 물질화된 사랑을 인간의 사랑으로 회복시킨다. “비릿한” 사랑이 생명을 낳는다. (b)77
“작업복에 담겨 평생을/철길 아래 침목으로 누”운 노동자들에게 “기차를 기다리는” 일은 생의 목표이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기차”는 쉽게 오지 않는다. 먼 곳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보며 “외딴 전철기 막사에 앉아” 기다리지만 여전히 오지 않는다. 기다림이 깊어지면 강박증이 오고 결국 병들게 된다. 그 어떤 목표도 병든 몸으로는 이룰 수 없다.
그리하여 작품의 화자는 “소주를 마셨”다. 그 자신만이 아니라 “동료들/슬슬 꼬드겨” 함께 마셨다. 그들이 소주를 마신 것은 오지 않는 “기차”에 대한 불만이나 불안감을 극복하려는 행동이었다. 여유를 가지고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의 가슴은 “수은 불빛으로 타올랐”다. 그와 같은 용기와 결단에 “기차”가 오지 않을 리 없었다. 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잃은 것은 없었다. 주체성을 회복시키는 연대의 힘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b)92
죽음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행동은 살아남으려는 자의 전략이기에 부정할 수 없다. 가령 덩치가 작은 동물이 큰 상대를 만났을 때 죽은 척하는 모습은 자신의 생명을 살리려고 하는 지혜이기에 인정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에게 목숨이란 그 어떠한 가치와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안일함이나 타협하는 자세로 “죽은 척하”는 행동은 바로잡아야 한다. 그것은 진정한 지혜가 아니라 회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품의 화자처럼 “누가 큰 칼을 들고 내 마음으로 오너라/와서, 죽은 척하는 것들을 모두 베어라”라고 자신에게 단호하게 명령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행동이 시인의 자세이다. 마치 김남주 시인이 온몸으로 추구했던 모습과 같은 것이다. 온몸으로 자신을 밀어가기가 어렵고, 밀어간다고 해도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지 않을 것 같은 시대이다. 그리하여 “죽은 척하”는 자신의 마음을 베어내 “삼나무 숲처럼 우거진 그곳에 길을 내어” “마침내 바람이 지나가게 하라”고 외치는 목소리는 우리를 각성시킨다. (b)100
융통성이 없고 고집이 센 “완고한 세상”을 향한 사람의 얼굴이나 “장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다. “시시각각 뒤집히는 배를 바라보고만 있던” “사월엔 날마다 울어” 눈이 부었고 “피가 몰”리었다. “살아 있”기에 “오월”에는 “장미를” 보고 “향기를 맡”을 수 있지만 상기된 표정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얼굴로 몰렸던 피가 다시 전신으로 퍼”지는 것이다. “사월”이든 “오월”이든 완고한 세상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충혈”을 막을 수는 없다.
시인이 생각하는 “완고한 세상”은 도덕 규범이나 법이 융통성이 없는 상황이 아니다. “지지를 호소하는 소리들 무성한 거리에/열없는 박수와 환호/마지못해 내미는 손길, 슬며시 피해가는 발걸음”이 변화하지 않는 세상이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해서 살아가려면 철저히 경쟁해야 한다. 자신에만 관심을 가질 뿐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전략적으로 거리를 두어야 하는데 정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거리유세”를 그만둘 수는 없다. “살아내는 일, 눈알이 뜨”거운 것이기에 “울타리 밖”으로 “장미”가 고개를 내밀듯 목을 길게 내고 세상을 살펴야 한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b)107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한 이후 실제로 “이 체제하에서는 모두가 난민”인 상황이다. 대통령과 정부와 여당은 과연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하여 제대로 책임지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유족들을 우롱하고 협박하고 진상 규명을 방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국민의 인권이 존재하는지 묻고 싶다. 국가 정보기관이 선거에 개입해서 탄생한 정권이 반성을 하기는커녕 종북몰이에 몰두하고 그에 따라 극우단체가 등장해 기막힌 행태를 벌이고…… 비선 실세들이 국정에 개입하고, 간첩 조작 사건이 일어나고…… 가계 부채가 1천조에 이르고, 실업과 비정규직과 저임금으로 노동자들이 신음하고, 자살이 늘고 …… “이 체제”는 한마디로 총체적인 난국이다. 세월호의 참사가 일어난 “진도 수심에 거꾸로 박힌 무덤들을 보면 영해조차 거대한 장지(葬地)”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숲 속에다가 슬픔을 말릴 1인용 건초 창고라도 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말린다”와 “말리다” 사이에서 “혼자 울어도 외롭지 않을 방”을 한 평쯤 넓혀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신은 질문만 허락하시고 끝내 답은 주지 않으”시므로 이 지상에서 슬픔을 말려야 하는 것이다. (b)111
“영혼이 바싹바싹 타들어갈 때” “참다못해 나는 철물점에” 가는 행동은 유물론을 실천하는 모습이다. “영혼”이란 결국 “철물점”에 영향받는 것이다. 인간 세계에서 흔히 말하는 “진리는 언제나 먼 곳에 있”다. 더러는 “가까운 곳에 있다고들 우기지만/지렛대처럼 반대편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자유나 평등의 개념도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어서 멀기만 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의 가치를 포기할 수는 없다. 따라서 “철물점”을 찾아가는 행동이 필요한 것이다.
“철물점에는/세상을 수리하는 물건들 대충 다 있”다. “고장 난 것이면 뭐든 고치는 연장들 대충 다 있”는 것이다. “진리”가 멀다는 것도 “알고 보면 이음새 한 곳이 헐거워졌거나/축 하나가 녹이 슬어 잘 돌지 않거나/전체가 먹통이지만 실은 영 점 육 미리 전선 하나 빠”진 것에 불과하다. 또한 “물에도 때가 있어 출구를 막았거나/찌든 먼지 낀 조명을 너무 오래 놔둬서/침침한 것에 익숙해”진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것들을 “연장들”로 고치면 이 세계의 “진리”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기존의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진리”로 자유와 평화와 평등을 외친다. 국민을 섬긴다고도 말한다. 그렇지만 그들이 외치는 구호는 “물질적인 것”에 토대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실체가 없고 허위이다. “연장들”로 고쳐야 하는 것이다. (b)129
2014년의 대한민국 상황을 나타내는 키워드를 찾는다면 ‘세월호’가 아닐까?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설익은 밥알을 씹”을 수밖에 없다. “보배섬을 옆구리에 끼고 제주를 향하던 아이들의/재잘거림”이 “이명처럼” 계속 들려오기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세월호의 참사를 제재로 한 작품들이 계속 창작되고 단식 투쟁 등 국민들의 행동이 지속되고 있지만, 아픔은 치유될 수 없다. 국가가 문제를 해결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정책을 구체적으로 마련할 필요가 있는데, 오히려 문제를 은폐하고 왜곡시키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기에 실망을 넘어 절망하게 된다. “가망이라고 썼다가 지우고/기다림이라 썼다가 지우”기를 여러 차례. 이제는 “절망”을 넘어 포기 아니면 분노를 선택할 단계에 와 있다. 우리 앞에는 “우울한 해도”가 펼쳐져 있지만 주권을 잃지 않고 헤쳐가야 하는 것이다. (b)131
“여러 번 읽어도 낡지 않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은 “애월”을 닮았다. 그는 “병든 사내”로서 “이끼처럼 물가에 앉아 있다”. 그는 “녹슨 얼굴”이지만 “먼 길을 다친 개처럼 걸었”다. 마치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관음보살처럼 “나를 따라”왔는데 그 길은 진실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당신이 가짜라면 당신을 베어버리겠다”고 “나”는 자신한다.
“모래를 파”고 “누군가 버리고 간 녹슨 얼굴”을 찾는 “나” 역시 “애월”을 닮았다. “나”는 “너무 아픈 것은 기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를 통해 알고 있다. “피는 틀린 적이 없다”는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를 위해 “얼굴을 만나면 얼굴을 지”우고 “얼굴에 새겨진 흙의 슬픔을 지”운다. 그와의 인연이 있기에 “이번 생은 쓸모없”다고 할지라도 “아름답고 현묘하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와 함께 쓴 “애월 일기”가 “수치심으로 가득하”지만 가슴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나”를 따라온 그가 곧 “애월”의 운명이고 그를 찾아낸 “나” 역시 “애월”의 운명이다. 애월(涯月)의 이름은 해안가의 달이란 의미를, 그중에서도 초승달을 의미한다. 달은 초승달,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 그믐달 등으로 운명을 겪지만 모두 서쪽으로 기운다. 초저녁에 보이다가 지고 마는 달의 행로와 같은 것이 그와 “나”의 운명이다. 유한한 존재이기에 서로의 사랑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영원한 것이다. (b)133
창세기 장 절에는 “사라”가 “127세”에 생을 마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편 아브라함을 따라 먼 유랑의 길을 떠다니다가 가나안 땅에 묻힌 것이다. 성서는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죽은 나이를 기록해왔지만 여성의 경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라”는 예외적인 경우라고 볼 수 있는데, 그만큼 민족의 어머니라는 상징성을 갖는다.
작품의 화자는 “신체나이가 100세가 넘는다”고 한 “의사”의 진단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하여 “가보지 않는 세월들이/언제 나를 다녀갔단 말인가?”라고 항변하며,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보고 있다. “빠르게 돋아났다 사라진 열꽃과/한껏 휘몰아치다 잦아든 사랑의 배경이/먼 그림자로 스”미는 것을 느낀다. 그것으로 사라지는 “그림자”가 아니라 존재하는 “그림자”를 꿈꾼다. 마치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았듯이 “500세”까지의 그림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나날이 커지는 나이를” “유전자 페이지”에 쓰기에 인간은 위대하다. (b)136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참상은 노동자의 관점에서 바라보아도 큰 충격이다. “자본과 권력은 이미” 노동자의 “모든 삶에서/평형수를 덜어냈”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정규직 일자리를 덜어내고/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정성을 주입”해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노동자 세월호에 태워진 이들이 900만 명이”나 되는 것이다. “평형수”에 “‘안전’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어야 할 곳들을 덜어내고/그곳에 ‘무한 이윤’이라는 탐욕을 채워 넣”고 있는 “이런 자본의 재해 속에서/오늘도 하루 일곱 명씩 산재라는 이름으로” 침몰하고 있다. 심지어 “생계 비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고도 있다.
“평형수”는 선박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선박의 내부에 저장하는 물이다. 그 선박 평형수(ballast water)는 선박 화물의 양에 따라 조절된다. 그리고 선박 평형수를 임의로 배출할 경우 해양 생태계를 교란시킬 수 있고 해양을 오염시킬 수 있기에 국제해사기구(IMO)에서는 처리 장치의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다. 그렇지만 “자본만이 무한히 안전하고 배부른” 이 참혹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평형수”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도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그들만 탈출하려는” “선장과 선원들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b)145
“뱃가죽 홀쭉한/개 한 마리/빈 깡통/뚜껑을 핥다가//조금씩 조금씩/깡통 속으로 고개를 들이”밀어 결국 그 “깡통을 뒤집어”쓰고 만다. 자신이 추구하는 욕망의 덫에 걸려 벗어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물론 “개”가 “깡통을 핥”는 것은 생존 욕구의 차원이기에 비난할 수 없다.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이기에 또한 그러하다. 따라서 “개”에 대한 비판보다는 인간의 자화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깡통 속으로 계속 고개를 들이밀면 끝내 뒤집어쓸 수밖에 없고 또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도 지식으로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의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고 끝내 함몰하고 만다. 무엇을 바라는 마음이 동기를 자극해 발전을 이룰 수 있지만 지나친 것이다.
“개”의 행동이 인간의 행동으로 비춰지는 것은 자본주의의 그림자가 매우 크고 짙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함몰된 인간들의 모습이 곧 “개”의 행동인 것이다. (b)150
“트럭”의 “꿈”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것은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어릴 적 대구 신천의 백사장은/무한 상상의 벌판”이었는데 “거기서 쉭쉭 숨을 내쉬며 굵은 바퀴를 굴리던 트럭과/힘센 검은 운전사!”를 바라보면서 “트럭을 몰고 싶”어 했던 “꿈”! 그리하여 안간힘을 쓰면서 사방으로 뻗어나가 “삼척 해변에서 미루나무 아득한 울진 국도, 정선 아우라지, 백복령, 속사 운두령,/로키를 넘어 대평원을 가로지르고 미시시피를 건너 캐나다까지 내달렸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아라비아의 초승달과 사막이 눈앞에 아른거리고/하이에나 떼랑 아프리카 사바나를 달리고 싶”어 한다.
“트럭”의 “꿈”을 이루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꿈”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많아 때로는 “마음만/캄캄한 하늘을 끝없이 날아”오를 수 있다. 또한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이리저리 치받기만 하다가/힘은 참 좋다는 말만 듣”게 될 수도 있다. 특히 “나이 들면서” “용기”를 상실할 수 있다. 그러므로 외부적 환경뿐만 아니라 내부적 조건을 극복해야 한다. “꿈”을 싣고 달려가는 “트럭”이여, 주춤거리는 우리들도 태우고 달려라. (b)153
하루의 일을 마치고 “도랑물에 손과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어둠이 내리는 마을과 숲을 바라”보는 한 농부의 모습이 선하다. 그는 자신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저녁에 이르러 산과 숲과 나무와 새들과 짐승들과 그리고 하늘 역시 저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그제도 바라보았고 어제도 바라보았고 내일도 바라볼 것이다.
농부는 “하늘의 하루가 내게 주어졌던 하루와 함께 저”무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주의 운명을 깨닫고 있다. 사람의 생명도 그 우주의 기운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 생은 “풍요롭지도 외롭지도 않”고 풍요롭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다. 풍요로움은 모르지만 외로움을 아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은 고요하다. (b)159
“엄마”는 “살아”가는 일이 “연애”하는 일보다 소중하다고 여긴다. 그것은 사회가 만들어낸 “잔인한 도덕”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엄마” 스스로 수행해낸 것이다. “슬픈 멜로드라마를 보다/눈물을 흘리던 엄마의 늦은 겨울 밤/코 골며 자던 고단한 엄마의 젊은 몸”이 그 여실한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는 “밤새 눈이 온 날/구멍 난 털신을 신고 방학동으로 화장품 행상 나가시”어 “여섯 자식 다 키우시며 삼양동에 집까지 장만하셨다”.
“엄마”는 자식을 희망으로 삼고 있다. “엄마”에게 “여섯 자식”은 짐이기보다는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그리하여 “종일 차가운 바람 몸 안에 가득 채우”면서도 의연하게 살아간다. 이 세상에 “엄마”가 존재하는 한 자식들의 “연애”는 안전하다. (b)170
자본주의 사회가 심화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눈밭에 구르”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계약자 간의 눈은 어느새 감시하는 눈과 감시받는 눈으로, 명령과 복종의 눈으로,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눈으로, 권력자와 비권력자의 눈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어느 눈에 들려고/때로는 비굴하게 견”디는 삶을 영위한다. 그러나 “눈 안에 있지만 모두/눈 밖에 나 있는 사람들”이 되고 만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계산과 의심과 감시가 철저하기 때문이다.
어느덧 사람들이 쓰는 “말에도 눈이 있”는 상황이다. “황사 먼지 내리는 불편한 도시의 골목에도/냉정한 눈들이 녹지도 않고 내리”고 있다. “눈을 피해 엘리베이터에 도착”해도 “눈이 있”다. 사람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물질화된 “눈”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것이다.
빅브라더가 공고해진 세상에 시인의 “눈”이 있다. 시인의 “눈”도 이 세상과 타협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알고 부끄러워하고 있다. (b)203
인간의 감정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사회적인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 작품의 화자가 느끼는 “불안”도 그러하다.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불편한 일이나 위험이 닥칠 것 같아 갖게 되는 감정만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나 세상이 자꾸 뒷걸음질을 치고 있기 때문일까”와 같은 토로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불안”을 극복하려면 사회의 개선이 필요하다. 작품의 화자는 그것을 알고 “길을 나”선다. 그리고 “한 권의 시집 속”에 도착했다가, 마침내 “스마트폰 속의 뉴스들”에 들어가본다. “시리아는 화학무기로 또 수백 명의 국민들을 죽였다고 한다 흰 수의에 싸여 있는 수많은 주검들”을 보게 되고, 문득 “1980년 5월”을 떠올린다. 그곳에 널브러진 “죽음”을 상기하며 “걸핏하면 죽음을 불러들이는 사건 사고들, 죽음을 향해 몰려가는 사람들”을 다시금 바라본다. 그렇지만 자신의 “불안”을 극복하는 대책을 마련하지는 못한다. 자신의 힘이 “죽음”을 일으키는 사회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불안이 또 나를 낭떠러지로 밀어 넣을 것만 같아 나는 그만 다시 또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다.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려면 “불안”이 불가피하다. 자신을 역사적인 존재로 알고 있다가 우연적인 존재인 것을 발견하게 되면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불안”을 동반자로 삼으려면 확고한 역사의식이 필요하다. (b)215
“외진 산길”에 버려진 “밥상” 하나. 버려진 이유는 “다리가 부러”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 기능을 다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작품의 화자는 존재 자체를 내세운다. 비록 다리가 없다고 할지라도 “밥상”이라는 존재 자체는 달라진 면이 없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꽃잎과 단풍과 마른 나뭇잎까지/제철 음식을 풍성하게 올려놓고/누군가를 기다”리는 “밥상”을 노래한다. “밥상”이 제 역할을 다하는 이상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풀과 나무가 가져다주는 재료에/햇빛과 비와 눈을 버무려가며/정성껏 차”려냈기에 더욱 풍성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심화되면서 존재 자체가 점점 위축되고 있다. 존재 자체가 이익관계에 따라 무시되고 왜곡되고 수단화되고 심지어 상업화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이 다리가 부러진 “밥상”의 존재 자체를 발견한 것은 중요하다. 마치 팔이나 다리의 장애를 입었다고 해도 인간 존재 자체가 변하지 않았다고 인식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설령 장애우가 이익 창출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존재하기에 인간세계는 영위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두가 “밥상”이다. (b)220
“동서사다리연합”이나 “남북사다리연합”은 “사다리차들의 연합에 지나지 않는 이름이지만/통일을 갈망하는 시민단체 이름 같게” 여겨진다. 그런데 이들 이름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이념의 색깔에 움츠러든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는 이념의 억압이 뿌리 깊다. 집권자들이 권력의 유지를 위해 매카시즘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평양 사는 이종수 씨이거나/청주 사는 이종수 씨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도 조심스러워진다.
매카시즘은 1950년 조지프 메카시(Joseph R. McCathy, 1909~1957) 상원의원이 공화당 지원 연설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205명의 공산주의자들이 국무부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소련의 원자폭탄 보유를 비롯한 미소 간의 냉전, 중국의 공산주의화, 동유럽의 공산주의화 등에 위협을 느낀 미국인들은 진위를 확인하기도 전에 관심을 가졌다. 그렇지만 곧 이성을 되찾고 매카시즘의 폐해에 맞서 1955년 이후에는 미국의 정치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8·15해방 뒤 친일파 숙청이 시작되면서 친일파 세력들이 방어 내지 공격의 수단으로 매카시즘을 들고 나왔다.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 숙청을 내세우는 쪽을 공산주의자로 덮어씌웠고, 그 후에도 정치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이용했다. 그 잔재가 여전해 북방한계선(NLL)에 대한 남북 정상 회담 논란, <천안함 프로젝트> 상영 중단, 전교조(전국 교직원 노동조합)의 법외 노조 판결, 통합진보당 해산, 민주당에 대한 종북 씌우기, 시국 미사에 참여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종북몰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민주주의 가치를 억압하는 매카시즘을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된다. (b)223
“증언”의 풍토가 확립되어 있으면 이 세상은 정직하고 공정하다. 사실을 사실대로 증명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라면 정책의 결정도 투명하고 법원의 판결도 정직하고 노동의 대가도 공정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사회의 실현은 마치 유토피아의 세계처럼 이루기가 어렵다. “냉장고”가 숨을 거두어 “관계가 느슨해지”는 것과 같이 “믿음이 행방을 감”추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을 살릴 수 있는 이는 “전자계측기를 든 기술자” 같은 인간이다. 인간만이 이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의 믿음을 점검”하는 일이 필요하다. “엇나간 사랑을 주입하고 방전된 믿음을 갈아 끼우고 새로운 입단속에 대해 사용설명서”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 시인도 예외일 수 없다. 오히려 선두에 서서 “증언”을 노래할 필요가 있다. (b)242
<변호인>은 2013년 12월 18일에 개봉한 영화로 1천만 이상의 관중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제16대 노무현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에 맡았던 ‘부림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로 양우석 감독이 연출했고 송강호 배우가 주연을 맡아 호연을 펼쳤다. ‘부림사건’은 전두환 정권 초기였던 1981년 부산 지역에서 사회과학 독서 모임을 한 학생,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불법 체포한 뒤 감금하고 고문을 가해 국가보안법, 계엄법, 집시법 위반 등으로 기소한 용공 조작 사건이다. 따라서 그 사건을 배경으로 삼은 영화에서 정의를 위해 온몸으로 싸운 변호인의 모습은 감동을 준다.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이 그 변호사에게 감동한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실제로 우리 사회의 “정의의 여신은 구리에 내려앉은 인류의 푸른 추억”에 불과하다. “정의의 칼이 벨 수 있는 건 숙취에 목마른 자리끼 한 모금”뿐이다. 그리고 “정의의 저울로 재면 가장 가벼운 것은” 가난하고 학력이 낮고 힘이 없는 사람들의 “눈물과 한숨이고”, “가장 무거운 것은” 부정과 불법으로 권력을 쥔 사람들이 내세우는 “오리발과 건망증이다”. 그리하여 작품의 화자는 “정의는 크레인의 높이에 매달려 오금이 저리고/어여쁜 여신은 눈을 가리고 허기진 평등을 고수레 중”이라고 에둘러 비판하고 있다.
작품의 화자는 직업적인 ‘변호사’보다 인간적인 “변호인”을 부른다. “변호인”, 길거리의 간판처럼 반짝인다. (b)247
“그동안 삼성서비스 다니며 너무 힘들었어요. 배고파 못 살았고 다들 너무 힘들어서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 삼성전자서비스 충남 천안센터에서 일하던 고(故) 최종범 씨가 유서로 남긴 내용이다.
“삼성전자서비스 충남 천안센터” 근무하는 “최종범 씨”는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살아가기가 힘들 정도로 임금이 적었고, 출장 작업에 필요한 차량도 공구도 자재도 근무복도 개인이 구입해야만 될 정도로 근무 조건이 열악했다. 몸이 좋지 않아 휴가를 내어도 반려당하기 일쑤였다. 또한 “임마, 새끼야. 네가 지져버리던지/칼로 찔러서 죽여버리던지” 같은 사장의 막말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결국 자살하고 만 것이다.
“최종범 씨” 같은 노동자가 나오지 않기 위해서는 사용자의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 그렇지만 그동안 사용자들의 비인간적인 행태에서 보았듯이 기대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사용자의 변화를 기다리기보다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대항해야 한다. 노동조합의 결성과 활동에 적극성을 띠어야 하는 것이다.
2013년 7월 14일 삼성전자서비스 산하에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75년 동안 무노조의 경영을 고집해왔던 삼성의 벽이 무너진 것이다. 이제 노동자들은 더욱 단결해 근로기준법의 준수를 비롯해 권익을 찾아야 할 것이다. (b)255
앙카라 학교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의 군인들이 설립해 전쟁의 고아들을 돌보아주던 시설이다. 작품의 화자는 여행길에서 뜻밖에 그 터키군이었던 사람을 “터키의 재래시장 투르크족이 사는 곳”에서 만났다. “너, 한국 사람이지!” 하며 “난데없이 거친 손 하나가 불쑥” 내미는 “덥수룩한 콧수염의 영감”이었는데, 그는 “육이오 때 다리 하나 잃어 절뚝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화자는 “그의 손을 다시 잡았다”. 우리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머나먼 이국에서 와 목숨을 건 그에게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터키는 우리에게 ‘형제의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근거는 한국전쟁 때 많은 병력을 파견해 백척간두에 선 우리나라를 도와준 데 기인한다. 뿐만 아니라 “세 살배기 내 딸만 한 아이들이/낙엽처럼 거리 헤매며 쓰레기통 뒤질 때/더 이상 시들지 말라고, 활짝 꽃 피우라고” 앙카라 학교를 짓는 등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돌보아주었기 때문이다.
터키는 1950년 7월 유엔사무총장의 파병 요청을 제의받고 5,500여 명 규모의 지상군을 1년씩 교대로 보냈다. 그리고 전투에 직접 참여해 “전쟁 기간 중 전사자 721명, 전상자 2,493명, 실종 175명, 포로 234명 등 총 3,623명에 이르는 인명 피해를 입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로 볼 때 터키는 우리에게 형제의 나라로 불릴 수 있다. 인간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폭력은 전쟁이므로 그 어떤 명분으로도 용인될 수 없다. 형제의 나라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b)257
“세 살” 때 “입양”된 아이가 어느덧 “스물세 살”의 성인이 되었다. 그 아이는 “입양”할 때 “보라색 운동화”를 신고 있어 “그대로 이름이 되어” “보라슈퍼 보라아버지 보라라이터 보라향수”로 불리었다. 그녀가 “거듭 뒤돌아보는/거리에서 육교 위에서 전철 안에서/조용히 멀어지는 보라의 물결”을 바라보는 것은 살아온 시간들을 반추하는 모습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세 살”때부터 “스물세 살”의 시간이 물결처럼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 세월 동안 그녀는 “달빛의 이목구비를 더듬”기도 했고, “모르는 별의 이름을 그대로 묻”으려고도 했다. 또 자신의 뿌리를 탐색하려고 “자꾸만 두리번거리는 귓속 달팽이”가 되기도 했다. 김숨이 「뿌리 이야기」에서 그렸듯이 “땅 위 지상에서 줄기가 가지를 치는 동안 땅 아래 지하에서는 원뿌리가 곁뿌리를”(2015년 제3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19쪽) 친다. 그리하여 자주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 내가 왜 없는 게 아니라 있는가?”(위의 글, 31쪽)라고 자기 존재의 근원을 질문하게 된다. 그 물음은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거나 회의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겠지만 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물음을 금기시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
어느덧 “보라의 운동화는 스물세 살/보라슈퍼의 간판도 스물세 살”이 되었다. 보라야, “내 이름은 보라”라고 이젠 자랑스럽게 말해보렴. (b)262
노동자가 자신의 작업장에서 일하는 것은 산악인이 등산하는 것과 같은 철학을 가졌는지 모른다. 조지 맬러리(George Herbert Leigh Mallory, 1886~1924)라는 영국 산악인은 “왜 에베레스트를 오르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말을 그가 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산악인의 좌우명으로 볼 수 있다. 등산은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지만 산이라는 목표물이 있기에 운명으로 삼고 오르는 것이다. 실제로 조지 맬러리는 1924년 6월 에베레스트를 올라가다가 실종되었고, 1999년 5월 1일(실종된 지 75년) 국제 탐색대에 의해 발견되었다.
노동자들이 일을 하는 것은 사용자와의 계약에 의한 것이기에 등산과는 성격이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노동자들 중에는 노동을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하는 이가 많다. 노동을 힘들고 하기 싫은 것으로 여기거나 의식주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삼기보다는 자신의 운명으로 여기는 것이다. “예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힘든 일도 늘 웃는 얼굴로” 하는 “그”가 본보기이다. “그”는 작업장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운명을 맞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를 슬퍼하기보다는 “끝끝내 지우지” 않는 것이 노동자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b)265
“음악을 들려주면 잎이 연해진다는/식물의 감정은 유효한가”라는 작품 화자의 질문은 실존 의식의 표상이다. 본질적으로는 유효하지만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요양병원 마당 한쪽에/눈을 덮어쓴 화분들”에게 “음악을 들려”준다고 해서 “푸른 칩”이 살아날 수는 없는 일이다.
“영하의 추위에 길들은 얼어붙”어 있는 상황이 실존이라면 “음악”은 본질이다. 따라서 음악이 영하의 날씨를 녹일 수는 없다. 그렇지만 “어머니 저 왔어요”라든가, “우리 옛날처럼 갈치구이를 먹을까요?”라든가, “아빠! 혹은 딸기 복숭아 오렌지” 같은 “목소리”는 영하의 날씨를 녹일 수 있다. 아니 그와 같은 “목소리”만이 가능하다. 그 이유는 “목소리”의 주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얼어붙은 이 세계를 살릴 수 있는 것이다. (b)274
첫댓글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