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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28-36 별세(別世) 2007. 6. 17
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쌔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었다고 하여도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분주하게 살고 있지만 이 삶의 방향과 목표가 우리를 살리는 길이 아니라 죽이는 길로 질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있는 것을 더 있게 하기 위한 삶입니다. 소유를 늘리고자 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무리 많아진다고 하여도 그 소유의 넉넉함이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다 허무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자의 말을 들어봅시다. 전도서 7:1-4절입니다. “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오늘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잔치집입니까? 초상집입니까? 이 질문은 너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 앞에서 질문해야 참된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의 질문에 베드로가 잘 대답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리스도, 마태의 표현으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 고백 후에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른다는 것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세상 사람들이 환영하거나 부러워하는 길이 아니라 고개를 돌이질 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서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인데 이것을 누가 원하겠습니까? 이 표현을 지난주에 요즈음 표현으로 말해서 쪽팔리게 따라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 은혜 받았다는 분도 계시니 아마 쪽 팔리는 삶이 있는 모양입니다.
좀 고상한 표현을 봅니다. 구상 시인의 “그 분이 홀로서 가듯” 이라는 시의 마지막 연만 옮깁니다.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아니 볼꼴 없고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
그분이 부활(復活)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이 길을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그 길을 왜 가야만 하는 것입니까? 지난 주 보았던 26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예수님은 정말 피하고 싶은 분입니다. 삼년을 따라 다녔던 제자들조차 다 배신하고 돌아설 정도로 부끄러운 분이었습니다. 처음에야 좋았지요! 기적을 행하고 능력이 있어 보이니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의 어깨도 힘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린 영웅적 기색도 없이 군인들에게 잡혀서 수치와 조롱과 매 맞음과 벌거벗기 움과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 주님을 따라 나설 자는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도 도망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이 부끄러울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영광스러워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정 반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 예수 믿고서 이렇게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그렇게 다들 예수님을 따라 나섰는데 예수님은 반대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세상에서 버림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여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세상이 그렇게 대접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이 성경에 있습니까? 요한복음 15:18-20절입니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면 예수님을 무엇 하려고 믿느냐고 하실 것입니다.
답변은 누가복음 9:26절에서 예수님이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고난의 길이지만 그러나 영광중에 올 것임을 맛보기로 보여주시기 위하여 여기 서 있는 자들, 즉 제자들 중에서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순간적이나마 보게 되는 일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28-31절을 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시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이때 문득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 내용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일과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별세를 이야기한 것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출애굽이 24장에 나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시내산에 왔을 때에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받습니다. 그때 40일 동안 하나님의 영광중에 거하다가 내려옵니다. 그런데 그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난 것입니다. 모세도 하나님을 직접 뵙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후광만 볼 수 있었는데도 그 얼굴에 광채가 난 것입니다. 자신은 몰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수건으로 그 얼굴을 가렸다고 합니다.
엘리야도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입니다. 열왕기 상 19장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엘리야 앞을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지만 그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아니하시고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아니하시고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아니하셨다고 합니다.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아합 왕의 가문을 쓸어버리시기를 원하였지만 세미한 음성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얼굴을 가리고 음성을 들었습니다. 두 사람 다 하나님을 직접 뵐 수는 없었습니다. 그 영광만 보았던 것입니다.
뿐 만 아니라 모세는 율법의 대표요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가 증거 한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임을 지금 변화산에서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모세나 엘리야가 다 별세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세의 별세는 출애굽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합니다. 이것이 모세의 개인적인 별세라면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애굽에서 이끌어 낸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의 별세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모세의 시체를 가지고 미가엘과 마귀가 다투었다고 합니다(유1:9). 그러니 지상에서 모세의 무덤조차 찾을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감추어 버림으로 별세를 보였습니다. 남아 있었다면 모세가 만든 놋 뱀을 우상으로 섬겼듯이 우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예 산채로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여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지상에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별세를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엘리야는 다 하나님의 영광을 부분적으로 본 자들이지만 지금 예수님에게 나타난 것은 그 영광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29절을 봅니다. 기도하실 때에 그 용모가 변화하신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봅니다. 직접 그 얼굴을 볼 수도 없는 영광의 빛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단지 표현한 것이 예수님의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고 합니다. 이때 문득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별세를 말씀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별세, 세상을 떠나신다는 것, 죽음을 말씀하시는데 그 단어를 출애굽이라는 단어와 같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늘 출 세상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한편 제자들은 어떤 모습입니까? 32절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별세를 말씀하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곤하여 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기 위하여 이 산에 오르셨고 기도 중에 변화하셨는데 제자들은 함께 기도하다가 곤하여 졸았던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제일 새롭게 와 닿은 부분의 이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별세를 말씀하시고 영광이 나타났는데 제자들은 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디지털 아카데미라는 인터넷 강좌에서 고미숙씨의 ‘영화 괴물로 본 한국의 근대사’라는 강의를 보았습니다. 괴물에 희생당한 자들의 합동분향소에서 자기 딸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큰 대자로 누워서 코를 골고 자는 주인공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딸이 죽어서 슬프고 괴롭지만 잠이 오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배가 고픈 것을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모하고 별세를 말씀하셔도 잠이 오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졸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이 잡히시는 밤에까지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피땀 흘리며 기도하시는데 제자들은 졸고 있습니다. 몇 번이나 깨워가면서 기도하라고 하여도 그래도 또 졸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예수님 홀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기에 동원된 제자들은 역할은 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늘 깨어있어서 한 몫 하였다면 아마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소리 칠 것이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졸다가 광채 때문에 눈이 뜨였는지 비몽사몽간에 보니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모하셨고 모세와 엘리야도 보이니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함께 있을까요? 지금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게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보니 너무 좋아서 그 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와 세상이 간 곳이 없이 예수님의 영광과 모세와 엘리야도 나타났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그 영광이란 십자가를 통한 영광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때 구름이 저희를 덮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그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이는 나의 아들 곧 나의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영광의 모습으로 변모하신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더욱 분명하여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한 영광이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도 졸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습니다. 졸고 있던 제자들을 별세에 합류시키셨듯이 예수님께서 오늘도 자기 백성을 별세시키실 것입니다. 모세를 출애굽 시키시듯이, 엘리야를 산채로 하늘로 끌어올리시듯이, 오늘도 자기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으로 별세시키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