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Ⅰ
시골 사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집 안에 앉아 있어도 밖의 일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아무 움직임이 없어도 눈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거나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비가 오는 걸 알 수 있었다. 삶 자체가 복잡했던 도시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경험이었다. 며칠 동안 누구하고도 교류가 없이 지내다 보면 때론 사람보다 나무에게서 더 친근함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런 날은 자연의 작은 변화나 미묘한 움직임에도 아주 민감해지기 마련이다.그날 밤도 그런 느낌에 이끌려 문득 잠이 깨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기 전부터 나는 하늘 가득 충만한 달빛을 예감하고 있었다. 환한 허공에 한 오라기 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나의 마음이 무정한 탓인지 달빛에 피어나는 흰구름은 더욱 유정해 보였고 달빛이 밝은 만큼 내 삶은 더욱 창백해 보였다.
Ⅱ
선창가까지 물이 가득 찬 만조였다. 그 배는 통통선이 아닌 노로 가는 조그만 목선이었다. 한 사람이 서서 노를 저었다. 그는 달을 향해 비스듬한 원을 그리며 물 속에 담가 뒤적이는 듯 부드럽게 노를 저었다. 그에 따라 배도 부드럽게 흔들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노가 걸려 있는 곳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그 때마다 어둠 속에서 놋쇠 꼭지가 빛났다. 바닷물에 잠긴 노에 달빛이 엉겼다 풀려나갔다. 그가 뱃노래를 불렀는지, 그냥 노만 저었는지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심지어 그가 정확히 누구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옷차림이 누추했고 말이 없었는데 노를 저을 때만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늠름해 보였다는 것만 기억난다. 심지어 밤바다에선 그의 남루조차 밤하늘에 펄럭이는 깃폭처럼 당당해보였다. 그 배엔 몇 사람이 더 타고 있었다. 밤마실을 가는 배라 정처가 없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과 그 가운데 떠있는 한 척의 배와 출렁거리는 바닷물 소리가 전부였다. 단지 어린 내가 아무 두려움이 없었던 이유는, 파도에 부서지는 푸른 달빛 때문이었다. 대자연의 리듬 때문이었다.
Ⅲ
거실에서 잠들어 있다가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침대 위에 흰 보자기 같은 것이 펼쳐져 있었다. 벌어진 커튼 사이로 스며든 달빛이었다. 그 보자기는 달빛에 젖어있다기보다는 잘 마름질되어 달빛에 마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커튼을 더 열어젖히자 방안이 은은한 광망으로 가득찼다. 멀리 중천에 달이 떠있었다. 달은 고독한 짐승의 눈빛 같기도 했고 누군가의 병든 영혼 같기도 했다.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을 감추지 않았다. 가득 차 있으면서도 텅 비어 있는 그 빛에는 언제나 스스로 빛나지 못하는 자의 창백함이 있었다. 나에게 언제나 생의 의지는 버거웠다. 불현듯 찾아온 이 죽음의 환영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만약에 이 달빛의 위무가 없었더라면 우리에겐 진정한 삶도 진정한 죽음도 없었을 것이다. 진정한 노동도 진정한 휴식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커튼을 반쯤 열어두고 침대로 들어갔다. 이불 위에는 여전히 흰 보자기가 펼쳐져 있었다. 최근에 아버님은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장모님은 요양원에 들어가셨다. 나는 주변에 그나마 몇 남지 않은 친구들과의 관계가 마저 끊어져 더욱 쓸쓸한 삶이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자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나는 달빛이 만든 빈 보자기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한 생이라는 게 저 보따리를 싸는 일 정도가 아닐까 하는 덧없는 생각에 잠겨들었다.
Ⅳ
그 바닷가의 백사장은 넓었다. 썰물 때면 바다는 거의 보이지 않는 곳까지 멀리 물러나 있었다. 사막과 바다가 공존하는 것처럼 보였다. 모래사막 멀리 바다와 사람들은 신기루처럼 떠 있었다. 출렁거리는 파도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한참을 걸어야만 했었다. 모래가 조금씩 습해지면서 발자국이 남았다. 파도의 흔적이 주름처럼 남아 있었다. 뜬금없이 자동차 바퀴의 긴 궤적도 보였다. 말발굽도 보였다. 새들 특유의 삼지창 같은 발가락도 찍혀 있었다. 그러나 자동차도 말도 새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선사시대의 공룡들처럼 사라져버렸다. 바다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내 발자국이 뚜렷이 찍혔다. 나보다 작은 발자국이면서도 훨씬 더 깊이 찍힌 발자국들도 있었다. 왜 더 깊이 찍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모래밭 위의 흔적들은 중력과 전혀 상관없이 찍히는지도 모르겠다. 게 한 마리가 도망쳤다. 모래색을 띄고서 빠르게 움직이니 모래밭과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핀셋처럼 찍히는 발자국이 오히려 그의 몸체보다도 훨씬 선명히 눈에 띄었다. 그는 나를 의식하고는 재빨리 바다 쪽으로 달아났다. 때마침 밀려온 파도가 순식간에 그를 삼켜버렸다. 그는 모래처럼 흩어져버렸다. 때는 밀물이었다. 바닷물이 빠르게 해안을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게는 바다 속에서 사라지고 사람들은 어슬렁거리며 뭍의 어스름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파도는 우리의 모든 흔적들을 지워버렸다. 곧 밤이 되었다. 달이 떠올랐다. 달빛이 모래처럼 수평선 위로 흘러 내렸다. 바다는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갔고 낮과 밤의 전환은 그치지 않았다. 생멸의 경계는 모래시계의 허리처럼 가늘어 보였으나 종말은 다시 시원이 되어 끝없이 이어졌다.
Ⅴ
까마귀들이 어제는 나무에서 나무로 날아다니더니 오늘은 거의 어깨 높이에서 날아다녔다.그들의 음성은 부드러운 저음이었다. 느티나무는 온 마을에 그 잎을 뿌렸다. 길거리마다 그의 잎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이 마을에 온지도 꽤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누구도 사귀지 못했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걸 믿지 못했다. 그들은 언제나 결국 나를 싫어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 또한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나를 사귀어 본 적도 없으면서 나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까마귀나 나무나 돌담보다도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더 힘들었다. 밤이 되면 차고 단단해 보이는 달이 떠올랐다. 이런 밤은 오히려 낮보다 환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환한 밤에 그들은 왜 걷지 않는 걸까? 문득 낮에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어졌다. 이런 달밤이면 나는 그들과 함께 걸으며 까마귀처럼 부드러운 저음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Ⅵ
어제는 잠이 오지 않아 밤중에 마당에 나가 풀을 뽑았다. 뽑으면 뽑은만큼 또 새로 돋아나는 게 풀인 성싶었다. 하늘에 걸려있는 달은 불길하게도 붉은 색이었다. 달 자체가 붉기보다는 달 속으로 붉은 기운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문득 오늘 월식이 있을 거라는 보도가 기억났다. 그렇다면 저 불길한 기미가 바로 지구의 그림자로구나. 지구의 기운이 저 먼 데까지 미치다니. 지구의 그림자가 저 먼 곳까지 드리워지다니. 나는 계속 풀을 뽑았고, 그 때마다 마당은 월면月面처럼 점점 더 황폐해져 갔다.
Ⅶ
한 낮의 땡볕 더위에 일을 했다. 예초기를 칼처럼 휘둘렀다. 베어져 나가는 잡초들과 함께 땅강아지가 나뒹굴었고 풀무치들이 사방으로 튀어 달아났다. 숨막히는 더위에 곧 죽을 것 같았다. 나는 그늘에 가서 주저앉았다. 힘든 일보다도 나를 무시하고 모욕했던 사람들의 언행에 대한 기억들이 나를 더욱 괴롭혔다. 그때마다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내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문득 진화론에 관한 어귀들이 떠올랐다. 적자생존. 자연선택. 약육강식. 도대체 누만 년에 걸친 인류 진화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나처럼 연약한 유전자가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 그 불가사의함이 더욱더 나를 분노와 좌절에 휩싸이게 했다. 밤이 되었다. 달밤이었다. 나는 무엇에 이끌리는 듯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한 길을 걸었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밖은 대낮처럼 밝았으나 길에는 차도 사람도 없었다. 조금 걷다보니 일렬로 늘어선 가로수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긴 그림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길 위에 도열해 있었다. 다섯 번째 그림자가 빠져 있었다. 다섯 번째 나무가 없는 것이다. 낮에는 나무 한 그루가 비어 있다는 사실은 물론 나무들의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못했었다. 밤에는 인식의 대상 자체가 달라지는 듯싶었다. 낮에는 드러나지 않던 것들이 밤이 되자 드러났다. 낮에 나를 괴롭히던 상념들은 물 썰듯이 사라져버렸다. 환한 달빛 아래선 모든 생물들은 진화도 도태도 없이 죽은 듯이 고요했다. 나는 나무들과 함께 달빛 아래 서서 다섯 번째 그림자를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