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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호(采蒿). 다북쑥을 캔다
정약용
采蒿采蒿(채호채호) 다북쑥을 캐네 다북쑥 캐네
匪蒿伊莪(비호이아) 다북쑥이 아니라 새발쑥이네
群行如羊(군행여양) 양(羊)처럼 떼지어 다니며
遵彼山坡(준피산파) 저 산(山)언덕을 오르네
靑裙偊僂(청군우루) 푸른 치마에 등은 구부정하고
紅髮俄兮(홍발아혜) 붉은 머리털은 기울어졌다네
采蒿何爲(채호하위) 무엇하려고 다북쑥 캐시요
涕滂沱兮(체방타혜) 눈물이 와락 쏟아진다네.
甁無殘粟(병무잔속) 독에도 남은 곡식(穀食)이 없고
野無萌芽(야무맹아) 들에도 풀잎이 없다오
唯蒿生之(유호생지) 그나마 다북쑥이 자라나서
爲毬爲科(위구위과) 둥글게 무더기를 지었네.
乾之䕩之(건지료지) 말리고 말려서는
瀹之鹺之(약지차지) 데치고 소금 쳐서
我饘我鬻(아전아죽) 허기(虛飢) 채우려는 죽(粥)이지
庶无他兮(서무타혜) 달리 무슨 뜻이 있겠는가
采蒿采蒿(채호채호) 다북쑥 캐네 다북쑥 캐네,
匪蒿伊菣(비호이긴) 다북쑥이 아니라 제비쑥이네
藜莧其萎(여현기위) 명아주도 비름도 거의 시들어 버리고
慈姑不孕(자고불잉) 쇠귀나물은 떡잎도 안 생겨
芻槱其焦(추유기초) 꼴도 땔나무도 거의 타고
水泉其盡(수천기진) 샘물까지도 거의 말라서
田無田靑(전무전청) 논에는 우렁이도 없고
海無蠯蜃(해무비신) 바다에는 조개 종류(種類)도 없다네.
君子不察(군자불찰) 높은 분들 살펴보지도 않고
曰饑曰饉(왈기왈근) 흉년(凶年)이다 흉년(凶年)이다 떠들어댄다.
秋之旣殞(추지기운) 가을에 이미 죽을 텐데
春將賑兮(춘장진혜) 봄이 되어야만 구제(救濟)한다네
夫壻旣流(부서기유) 남편(男便)도 이미 유랑(流浪)했으니
誰其殣兮(수기근혜) 굶어 죽으면 누가 파묻을까.
嗚呼蒼天(오호창천) 오오, 하늘이시여!
曷其不憖(갈기불은) 어찌 그리도 근심하지 않으시나요
采蒿采蒿(채호채호) 다북쑥 캐네 다북쑥 캐네,
或得其蕭(혹득기소) 더러는 산(山)쑥도 얻고
或得其䕲(혹득기름) 더러는 다북쑥 같은 쑥도 얻고
或得其蒿(혹득기호) 더러는 다북쑥을 얻기도 한다네.
方潰由胡(방궤유호) 문드러진 쑥이랑 검은 쑥이랑
馬新之苗(마신지묘) 미나리 싹이랑
曾是不擇(증시불택) 어찌 가리겠는가
曾是不饒(증시불요) 어찌 풍성(豊盛)해지겠는가
搴之捋之(건지랄지) 그것을 뽑아 쥐고 따내서
于筥于筲(우거우소) 광주리와 바구니에 담아
歸焉鬻之(귀언죽지) 돌아와 죽(粥)을 쑤니
爲餮爲饕(위철위도) 아귀아귀 먹어대네.
兄弟相攫(형제상확) 형제간(兄弟間)에 서로들 가로채니
滿室其囂(만실기효) 온 집안이 떠들썩하네.
胥怨胥詈(서원서리) 서로 원망(怨望)하고 서로 욕(辱)하는
如䲭如梟(여시여효) 몰골 탐욕(貪慾)스런 올빼미 같다네.
- 朝鮮後期:1637[인조15].1.30-1897[조선 고종34, 대한제국 광무 원년].10.11) 문신(文臣)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조선 영조38].6.16-1836[조선 헌종2].2.22)이
강진(康津)에 귀양가 있던 1809년(千八百九年[조선 순조9])에
전라도(全羅道)에 사상초유(史上初有)의 가뭄이 덮치자 흉년(凶年)을 걱정하여 쓴 시(詩) -
채호 3장 장 16구(釆蒿三章章十六句)
▪ 오매(烏昧) : 고사리의 이칭. 오매초(烏昧草). 송(宋)의 범중엄(范仲淹)이 강회(江淮) 지대를 안무시키고 돌아
와서 가난한 백성들이 먹고 있는 오매초(烏昧草)를 올리면서, 그것을 육궁(六宮)의 척리(戚里)들에게 보임으로
사치를 억제하도록 하라고 하였음. 《山堂肆考》
▪ 은대(銀臺)의 그림 : 은대는 신선이 사는 곳. 《후한서(後漢書)》장형전(張衡傳)에, “왕모(王母)를 은대에서
보았더니 옥지(玉芝)를 먹으며 굶주린 배를 채우네." 하였음.
田間記事--기사년(1809) 내가 다산초당에 있을 때인데, 이 해는 크게 가물었다. 그전 겨울부터 봄을 거쳐 입추(立秋)가 되도록 가물어 붉은 땅이 1천리나 되었고 들에는 푸른 풀 한포기 없었다.
6월 초가 되자 유랑민들이 길을 메우기 시작했는데 마음이 아프고 눈을 뜨고 보기에 처참하여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죄를 짓고 귀양살이 온 몸으로서는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하기에 오매(烏昧)에 대하여 아뢸 길이 없었고
승정원에 유민도도 바칠길이 없기에 때때로 본 사실들을 시가(詩歌)로 엮어 보았다.
대체로 처량한 쓰르라미나 귀뚜라미가 함께 풀밭에서 슬피 울듯이 그들과 함께 울면서 올바은 이성과 감정으로 천지의 화기(天地之和氣)를 잃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오래 써 모은 것이 몇 편 되어 이름하여 전간기사(田間記事)라고 했다.
채호는 흉년을 걱정하여 쓴 시다. 가을이 되기도 전에 기근이 들어 들에 푸른 싹이라곤 없었으므로 아낙들이 쑥을 캐어다 죽을 쑤어 그것으로 끼니를 때웠다[釆蒿閔荒也 未秋而饑 野無靑草 婦人釆蒿爲鬻以當食焉] 기사년 내가 다산의 초당에 있을 때인데, 그 해에 크게 가물어 그 전해 겨울부터 이듬해 봄을 거쳐 입추(立秋)가 되도록까지 들에는 푸른 풀 한 포기 없이 그야말로 적지천리였었다. 6월 초가 되자 유랑민들이 길을 메우기 시작했는데 마음이 아프고 보기에 처참하여 살고 싶은 의욕이 없을 정도였다. 죄를 짓고 귀양살이 온 이몸으로서는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하기에 오매(烏昧)에 관하여 아뢸 길이 없고, 은대(銀臺)의 그림도 바칠 길이 없어 그때그때 본 것들을 시가(詩歌)로 엮어보았는데, 그것은 처량한 쓰르라미나 귀뚜라미가 풀밭에서 슬피 울 듯이 그들과 함께 울면서 올바른 이성과 감정으로 천지의 화기(和氣)를 잃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오래 써 모은 것이 몇 편 되어 이름하여 전가기사(田家紀事)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