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혁명(辛亥革命)은 1911년청을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성립시킨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이다. 이 혁명은 중국사에서 처음으로 공화국을 수립한 혁명이라서 공화혁명이라고도 불린다.
1900년의 의화단운동 이후 열강 침략이 한층 강화하는 가운데 청 조정은 정치개혁을 꾀하는 소위 '신정' 운동을 일으켰으나 납세 거부와 기독교 배척을 위시한 대중운동이 전국으로 번져 입헌군주제를 향한 운동으로 발전하였다.[1]
이런 정세하에서 [[쑨원|孫文]]은 1905년중국혁명동맹회(중국동맹회)를 결성하고 삼민주의를 제창하는 일변 혁명파를 지휘, 반청(反淸) 무장투쟁을 전개했다.[1]1911년청(淸朝)는 철도 국유령을 내려 민영이었던 철도를 담보로 열강에 차관을 얻어 재정난을 타개하려고 하자 반대하는 운동이 광범하게 일어나 대규모 무장투쟁인 쓰촨봉기로 결국 발전했다. 이를 계기로 10월 10일 혁명파가 한 공작으로 우창에서 신군이 봉기하여 신해혁명의 불길이 당겨져 약 한 달 만에 14省이 이에 호응하여 궐기했고[2] 12월 말에는 17省으로 확대되어 청조에 독립을 선포하였다.[3]1912년 1월 난징에서 [[쑨원|孫文]]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혁명 주체의 단결력과 세력이 굳건하지 못한 탓에 청조에게 대권을 부여받은 위안스카이와 타협, 선통제의 퇴위로 청을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한 대신 [[쑨원|孫文]]이 사임하고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었다.[1]
1911년이 신해년(辛亥年)이라서 신해혁명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혁명(제1차 혁명)으로 공화정이 수립됐지만, 곧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면서 이후 帝制의 야심을 품고 혁명파를 탄압하는 일편 위안스카이의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는데 1913년 7월 국민당에서 '위안스카이를 타도'하려는 운동하면서 혁명을 호소하여 봉기했다. 이를 제2차 혁명이라고 하나 위안스카이는 군대를 동원해 이를 진압했다.[1] 이후 위안스카이는 1915년일본의 '21개 조 요구' 수락을 위시해 買辦性을 드러내어 이런 위안스카이의 독재정치에 민중은 극심하게 반발했는데 이를 ‘제3차 혁명’(호국전쟁)이라고 부르고 1916년 위안스카이 사후 내전과 군벌의 割據로 혼란이 계속되었다.[1]
우창에서 최초로 봉기한 10월 10일을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신해혁명 기념일’로, 중화민국에서는 중요 국경일인 “[[쌍십절|雙十節]]”로 기념한다. 신해혁명은 20세기아시아에서 일어난 정치사에 관계된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된다.
# 삼일절에 들른 전주. 마침 전주 한옥마을 주변이었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행진을 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이 삼일절 기념행사에는 외국인들도 끼어 있었고, 학생들은 물론 아이를 안고, 걸리는 부부, 나이 지긋한 어른들도 행렬을 뒤따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그냥 쉬는 날로만, 정치권에서 으레 치르는 행사쯤으로 여겨지게 되는 삼일절 기념식을 잊은 지 오래인 것 같아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안위는 아랑곳없이 목숨마저 버렸던 이땅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해졌다.
▲ 흥화실업은행 개막식 사진. 오른쪽에서 다섯번째가 김규흥, 왼쪽에서 세번째가 김구 선생
# 삼일절을 지나 3월3일에는 KBS가 특별한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삼일운동의 숨겨진 대부 김규흥’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였는데, 그동안 역사학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옥천 출신 한 독립운동가의 삶과 활동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날 방송은 선생의 고향인 옥천을 비롯해 주요 활동무대였던 중국 광동성 광주시와 상해, 북경은 물론 마지막을 지냈던 중국 천진에 이르기까지 그 파란만장한 여정을 소개했다.
김규흥 선생은 1872년 옥천읍 문정리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다. 지역 명문가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문명의 영향을 받았고, 구한말에는 대한자강회 활동을 하면서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옥천읍에 사립 창명학교를 세우게 된다. 이것이 모태가 되어 옥천읍에서는 가장 오래된 학교가 설립되게 되었으니 그게 오늘날 죽향초등학교다. 재미있는 것은 선생이 고종의 밀명을 받고 중국 상해에 무관학교를 세우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 합작은행이었던 아청은행에 예금된 고종 비자금 9천만 원을 찾으러 가려다 일제에 체포돼 6개월여 가택연금과 아울러 감시를 받는 상황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비록 미스테리같은 일이긴 하지만 아청은행에 예치했다는 고종의 비자금은 은행이 파산하는 바람에 행방이 묘연해졌으나 2010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팀에서 보도했을 정도로 상당한 신빙성을 갖고 있는 얘기다.
선생은 1908년 초 중국 상해를 거쳐 광동으로 망명한다. 망명지를 광동으로 택한 것은 당시 손문을 비롯한 중국 혁명세력의 근거지가 광동 등 남부지역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한다. 선생은 이름을 김복(金復)으로 바꾸고 신분을 철저히 숨기면서 활동을 한다. 그는 손문, 진기미, 진형명 등 중국 혁명세력들과 두터운 친분을 맺고 신해혁명의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초기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인 신규식, 박은식, 여운형 선생 등을 중국 혁명세력과 연결시켜준 거물이었다. 김규흥이 아니었으면 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초기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을 일이다.
▲ 김규흥 사진
선생은 특히 중국 1차 신해혁명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인 1910년에 이미 광동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혁명세력과의 교유를 통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1911년 1차 신해혁명에 참가, 혁명정부 도독부 참의 및 고문원을 역임했다. 이는 중국 광동성에 선생이 참의 및 고문원으로 임명되었음을 알려주는 1911년 및 1912년 관직표가 발견돼 사실로 확인된다. 이는 선생이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와 사진 등을 종합해 밝혀진 사실로, 지금까지 역사학계에서 중국 신해혁명에 처음으로 참가한 한국 사람이 신규식 선생이라고 말해온 기존 학설을 뒤엎는 큰 사건이다.
김규흥 선생의 초기 독립운동 사실은 우리 역사학계의 학설을 다시 쓰고 있는 것이다. 신해혁명 첫 한국인 참가자가 신규식 선생에서 김규흥 선생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또한 신해혁명이 원세계를 비롯한 반동세력에 의해 실패한 1913년 홍콩에서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발행한 한중합작언론 ‘향강’ 잡지를 통해 민주공화정을 설파했다. 이는 추후 각종 선언문이나 성명서 등은 물론 결정적으로 1919년 삼일운동의 결과물로 상해에 수립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체를 민주공화정으로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 부분이다.
조선왕조가 무너진 1910년 이후 1919년까지는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왕정복고에 대한 생각이 왜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임시정부의 국체를 민주공화정으로 확립할 수 있었던 데에는 중국 신해혁명의 강력한 영향력과 김규흥 선생 등 민주공화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이들의 회합, 독립운동가들의 체험 및 공부에 의한 결과였을 것이다.
1920년대에는 박용만 선생 등과 함께 1922년 북경에 북경흥화실업은행을 설립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노력했고, 영속적인 독립운동이 되도록 하기 위해 둔전제를 주장, 한국, 중국, 러시아와의 3국 합작을 통해 시베리아지역을 차용하자고 주장했다. 이후에도 내몽골 등지에 둔전제 실시를 주장했던 그는 끝내 실행을 보지 못하고 1936년 중국 천진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규흥 선생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사진이 있다. 1922년 북경에서 흥화실업은행 개막식에 상석을 차지하고 있다. 그 사진에는 김구나 신채호, 이회영, 김창숙 등 독립운동가들로 추정되는 이들이 보이는데 이중에서도 김규흥은 상석에 위치하고 있다. 선생은 평생 독립운동을 하면서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은 후 단 한 번도 일제에 체포되지 않았다. 그만큼 투철하게 보이지 않게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후원했다.
초기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이렇듯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김규흥 선생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이다. 아니 그동안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지 않았던 이유 등으로 인해 소외되고, 기성 역사학계의 시야에서 멀어져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모른다. 그러나 박은식, 안창호, 박용만 등 주요 독립운동가들을 연구하는 와중에 김복, 또는 김규흥이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함에 따라 선생에 대한 연구를 안 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 그런 시기에 방영된 김규흥 다큐멘터리는 지금의 우리가 있게 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을 기리고, 민족의식을 바로세우라는 적절한 주의환기가 되었다.
# 옥천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 제2세 교주 최시형 선생이 보은에 대도소를 두고 옥천군 청산면을 오가며 동학을 지휘했던 곳이다. 동학 교세가 그만큼 셌고, 활발했다. 삼일운동이 일어난 1919년 옥천읍, 이원면, 청산면, 군서면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어느 곳보다도 치열하게 전개된 곳이다. 일제 헌병에 끌려간 만세 지도자들을 구하려고 경찰서를 무너뜨리기도 했고, 시위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순국하기도 한 고장이다. 삼일절 기념이라야 안내면에서 최근 시작한 삼일절 면민걷기대회 정도가 고작이니, 이래가지고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이제부터라도 나라를 찾는데 온 백성이 나선 기념비적인 우리의 독립정신을 되새길 민족정신을 다시 한 번 일으킬 계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손문의 신해혁명에 참가한 한국인 범재 김규흥
-이글은 <공산주의 독립운동도 우리의 역사>를 읽은 한 독자가 요청한
“우리 선배들의 독립운동과 중국공산당의 관계”를 요약한 것입니다-
우리 겨레의 독립운동과 중국공산당의 관계를 말하자면, 우리 역사에서 철저하게 외면 당한 범재 김규흥 선생님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범재 선생은 을사늑약(1905)을 전후한 일제의 만행에 비분강개하여 중국상해로 망명, 종이장사 또는인삼장사로 변장하여 중국대륙을 유랑하면서, 늙은 종이호랑이 중국을 개혁하고자 하는 혁명지사들을 찾아 그들과 교유하면서, 서세동침의 세계정세와 서구열강의 동양 침략 전략 등 여러 가지 정보를 획득하였고, 그 결과 일제의 강압 아래 신음하는 나라를 구하는 최선의 방도는 중국 혁명지사들과 제휴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던 당대의 선구자였습니다.
범재선생은 중국 혁명지사들과의 교유를 통해 얻은 지식과 예지력으로, 조국의 독립을 확고하게 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상해에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판단, 당시 대한제국 조정의판서 민경호, 판서 조민희, 그리고 판서 이경직의 부인 등의 비밀스러운 도움을 받아, 광무황제(고종)의 내락을 받아 상해 아청은행에 예치되어 있는 고종의 비자금 4,000만 원을 대한제국 상해 무관학교 설립 비용으로 사용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무관학교 설립을 대비하여 미국, 영국, 중국 등의 군사교육 전문가들을 섭외하여 무보수로 교육을 담당하여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다음, 곧 귀국하여 황제의 밀지를 받아 비자금 인출의 특별밀사로 출발했지만, 황제의 접견인물들을 철저하게 감시해 온 일본 헌병에 의해 인천에서 붙잡혀, 100일 간의 모진 고문에도 함구하여 결국 석방됐지만, 일경의 감시하에 1년 이상 가택 연금을 당했습니다.
일제 통감부는 엄청난 금액인 황제의 비자금을 탈취하기 위해, 회유 혹은 협박으로 가택 연금 중인 범재선생을 괴롭혔지만, 선생은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고생 끝에 그들의 감시망을 피하여 중국 혁명투쟁가들의 둥지인 광동으로 망명했습니다.
광동은 당시 중국 근대화 혁명을 지휘하고 있던 손문 선생을 정점으로 하여, "중국을 살리기 위해서는 대청제국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혁명의 투지에 불타는 각계 각층의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범재선생은 이들 가운데 특히 모택동, 주은래 등 공산주의자들과 교유하며, 나름대로 대한제국이 사회민주주의 이상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국가로 바뀌어야 한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대한제국에서 중국으로 망명해 온 많은 대한청년들을 중국의 혁명동맹회에 가입시켜, 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도록 주선하는 한편, 중국혁명 참가를 통하여 조국의 혁명 방도를 찾도록 당부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젊은이가 후일 님 에일즈의 <아리랑>으로 널리 알려진 김산(본명 장지락)
과 김원봉입니다.
일제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요시찰 인물 명부(본명 김규흥, 가명 김복)
범재 선생의 사후, 제자 김원봉이 중국 무한에서 창설한 독립무장조직 <조선의용대>의 기념사진
범재선생은 이들 젊은이들과 함께 손문의 신해혁명에 참가했고, 혁명이 성공한 뒤 혁명정부(광동)의 도독부 총참의 겸 육군소장직을 수행했지만, 이 벼슬이 조국에서 세운 공훈이 아니고 남의 나라 중국에서 얻은 것이기에 심히 부끄럽고 한이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범재 선생은대한인으로서 유일한 신해혁명의 공로자였으며, 삼일운동, 임시정부 수립,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의 숨은 기획자였고, 의열투쟁의 배후 지원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한중합작금융기관인 북경흥화실업을 통한 자금 모집 그리고 둔전제에 의한 독립운동기지 건설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분입니다. 범재 선생의 교유관계 중 특이한 것은 원영의, 정안립, 양기탁 등 동년배 학자들과도 친분이 있었으나, 민영환, 김택영 등 자신보다 연상의 당대 문사, 정객들과 교분이 두터웠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망명 이후에도 창강 김택영, 백암 박은식, 취당 전병훈 등 10년 이상 연배의 선배들과 교분이 두터웠습니다. 이들과의 교분을 통해 범재 선생은 계급차별의 타파와 빈부격차의 해소를 중요시했으며, 독재적인 권력은 결단코 거부해야한다고도 했습니다. 범재 선생의 사상을 요즈음 용어로 말한다면 사민주의에 가깝습니다. 즉 범재 선생은 망명 이전부터 공화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이유 때문에 중국의 혁명투쟁가들의 집합소였던 광동으로 망명을 떠났으며, 또 그곳의 공산주의 혁명지사들과 가깝게 사귀게 된 것입니다. 범재 선생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창강 김택영, 취당 전병훈 등 한국의 개화파 학자, 사상가들이 망명지로 선택한 곳도 광동이었습니다. 당시 광동은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등 개화사상과 혁명에 대한 열정으로 무장한 신지식인들의 요람이었기에, 범재 선생과 그 뒤를 이은 김원봉과 장지락의 독립운동 그리고 혁명에 대한 방략과 중국인과의 연대는 모두 광동에서 출발했음이 분명합니다.
아래에 소개하는 오언시는 범재 선생이 신해혁명 참가의 공적으로 손문이 세운 <중화민국 > 정부로부터 “도독부 참의 육군소장”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스승이자 삼종숙인한말의 대학자 부헌 김유성의 회갑(1914?)에 선물한 담배갑의 뚜껑 위에 음각하여 보낸 비밀서한(아래 사진)으로서, 그의 사상과 현실 그리고 향후 하고자하는 행동지침 등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天壤求脣齒 천지간에 입술과 이빨 같은 밀접함을 요구하는 이치 있기에
風箱煉肺肝 오랜 세월 모진 고생 마음속에 짓이겨져 있나이다. 孤槎衝浪渡 뗏목 위에 외롭게 의지하여 파도에 부딪히며 이곳(중국)에 건너와 雄劍映星看지금 고관이 되어 큰 칼에 장군별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不勝恥歸趙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타국이기 때문에 부끄럽습니다 有生終報韓 그러나, 생명이 다 하는 날까지 조국(韓)을 위해 신명을 다 바치렵니다. 中原足豪傑 중원엔 호걸도 많사오니 相與濟艱難 서로가 힘을 모아 힘들고 어려운 이 세태를 구제하겠습니다. 姪復敬題조카 “復”이 우러러 아뢰었습니다.
2011년 중앙일보 어젠다(국가 의제) [1] 한반도 소용돌이, 주도권 잡자 “서양 패도 따를 것인가, 동양 왕도 지킬 것인가” 87년 전 일본에 던진 쑨원의 경고 … 오늘날 중국에 다시 묻다
쑨원의 생애 마지막 연설
‘차(次)식민지’. 100여 년 전 중국의 상황을 쑨원(孫文·손문)은 이렇게 표현했다. 갈가리 찢긴 중국의 모습이 식민지만도 못하다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이제는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조공체제 부활을 점치는 목소리가 나온다. 영국의 좌파 이론가 마틴 자크는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에서 동아시아 각국이 중국의 압도적 파워와 불평등한 관계 설정을 인정함으로써 마음은 불편하지만 대신 안정적 질서를 유지하는 ‘21세기판 조공체제’에 동의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과연 그럴까. 새로운 한·중·일 시대의 바람직한 동아시아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지난해 12월 19일 찾은 후베이성 우한(武漢)의 신해혁명박물관. ‘쑨원과 우메야 쇼키치(梅屋壯吉)’라는 이름의 특별 전시회 마지막 날이었다. 쑨원과 우메야가 주고받은 편지, 도쿄에서 있었던 쑨원과 쑹칭링(宋慶齡·송경령)의 결혼식 사진 등 신해혁명 당시의 생생한 모습이 담긴 사진과 동영상이 전시됐다. 현장에서 눈물을 훔치던 82세의 한 중국 노인과 맞닥뜨렸다. 그는 “내 팔십 평생이 격동의 중국 역사와 일치하는데 어찌 눈물이 나지 않겠느냐. 쑨원과 우메야 두 사람의 우의는 오늘날 중·일 양국 국민에게 무언의 교훈을 준다”고 말했다.
우메야는 쑨원의 숨은 협력자였다. 영화사업으로 큰돈을 번 그는 27세 때 두 살 위의 쑨원과 의형제를 맺었다. 이후 요즘 돈으로 환산해 2조 엔이라는 거액을 무기와 탄약 구입 등의 혁명자금으로 지원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최근 우메야의 증손 고사카 아야노(小坂文乃)가 책을 내고 관련 자료를 공개하면서 외부에 알려지게 됐다.
쑨원에겐 많은 일본 친구가 있었다. 그는 30여 년의 혁명활동 기간 중 3분의 1 이상을 일본에서 보냈다.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에서 중국의 미래를 모색했던 것이다. 그의 생각은 ‘대(大)아시아주의’란 형태로 정리된다. 그는 서양을 무력과 이익에 바탕을 둔 패도(覇道)문명으로, 동양을 인의와 도덕에 기초한 왕도(王道)문명으로 구분하고, 서양의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아시아의 피압박 민족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 중국과 일본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흘러 중국은 이제 미국과 어깨를 견줄 G2 국가로 부상했다. 하지만 중국의 굴기를 바라보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시선은 불안하기만 하다. 지난해 9월 센카쿠(尖閣)열도 분쟁 때 중국이 보여준 맨얼굴은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한동안 잠잠하던 일본의 재무장론이 들썩이며 서점에선 중국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책들이 인기다. 천안함·연평도 사건을 거치면서 중국을 보는 한국의 시선에도 우려가 짙게 깔려 있다.
과연 중국의 이런 거친 모습이 쑨원의 유지에 부합하는 것일까. 혹자는 중국이 서구와 대등한 힘을 갖게 돼 쑨원의 뜻이 이뤄졌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책임 있는 모습을 바라는 이들의 생각은 다르다. “쑨원이 주장한 아시아 협력이야말로 중국이 지향해야 할 길”이라고 왕이저우(王逸舟·왕일주)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부원장은 주장한다. 후진타오(胡錦濤·호금도) 국가주석의 외교 브레인으로 알려진 그는 “중국이 패권을 지향해서도 안 되지만, 앞으로 그럴 일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앞으로 한·중·일 시대는 어떻게 펼쳐져야 할까. “우리가 바라는 건 패권국가 중국이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이 함께 번영을 구가하는 데 지도적 역할을 하는 중국이다.” 이홍구 전 총리의 말이다. 그는 또 “중국의 장래에 대해 우리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지만, 중국인들의 예지가 창조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은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선 한·중·일 협력체제, 나아가 동북아 집단안전보장체제와 경제공동체 창설 등을 지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쑨원의 생애 마지막 대중연설이 된 1924년 11월 일본 고베에서의 강연회 장면.
1924년 11월 쑨원은 일본 고베에서 일생의 마지막 대중 강연을 한다. ‘아시아주의’를 주제로 한 강연의 마지막 결론은 이랬다. “일본은 이미 유럽 패도의 문화를 이룩했고 또 아시아 왕도의 본질도 갖고 있다. 이제부터 서구 패도의 주구(走狗)가 될 것인지, 아니면 동방 왕도의 간성(干城)이 될 것인지 일본인 스스로 잘 선택하기를 바란다.” 쑨원의 기대와 달리 점점 더 제국주의를 향해 치닫는 일본을 향해 던진 마지막 충고였다. 그 이후 일본이 어떤 길을 갔는지는 역사가 증명하는 바다. 이젠 쑨원이 일본에 던졌던 일갈을 중국에 되물을 차례다. 쑨원은 또 이런 말도 남겼다. “시대 조류에 순하면 흥하고 역하면 망한다(世界潮流 浩浩蕩蕩 順之卽昌 逆之卽亡).”
한·중·일 GDP 합치면 세계 18.6% … EU, NAFTA 맞먹는 경제권
신해혁명 당시 변방에 불과했던 동아시아가 100년 만에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한·중·일 3국의 국내총생산(GDP)을 합치면 세계의 18.6%에 이른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나 유럽연합(EU)에 맞먹는 경제권이다. 외환보유액은 세계 절반에 가깝다. 돈과 물건이 이 지역으로 몰린다는 이야기다. 세 나라가 힘만 모으면 세계 중심이 되는 것이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한·중·일 협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말한다.
실제로 동아시아에선 다양한 한·중·일 협력체제가 구축되고 있다. “현재 한·중·일 간에는 100개 이상의 협력 사업이 정상회담 합의를 거쳐 가동되고 있다.” 정부 당국자의 말이다. 세 나라 대학에서 서로 학점을 인정해 주는 동북아판 에라스무스 프로그램 구상이나, 서울(김포공항)-도쿄(하네다공항)-상하이(훙차오공항)를 셔틀편으로 엮는 항공협력 등은 실질적인 효과가 크다. 3국 정부 간 채널만 50여 개에 달한다. 2008년부터는 3국 정상 간의 협의 채널이 정례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협력은 여전히 취약하기만 하다. 세 나라가 그리는 지역의 장래상에 대한 그림이 다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해법 도출이 어려운 영토 분쟁이 한·일 간, 중·일 간 뇌관으로 존재한다. 북핵과 한반도 문제 해결방식을 둘러싼 인식의 괴리도 크다. 이 지역에서의 미국 역할에 대해서도 큰 차이가 있다. 더 큰 문제는 허심탄회한 논의를 힘들게 하는 신뢰 부족의 문제다.
3국 간 불안 요소가 불거질 때마다 한반도는 요동친다. 반대로 이런 취약한 환경은 한국에 기회이기도 하다. 지역의 미래상을 그리고, 이를 실현시킬 전략과 로드맵을 짜고, 중·일을 조정하는 역할은 한국의 몫이기 때문이다. 3국 정상회담의 합의에 따라 한·중·일 3국 협력 사무국을 오는 3월 인천 송도에 설치키로 한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다.
“중국은 개혁·개방으로 많은 이익 … 패권은 득보다 실이란 걸 안다”
[왕이저우 베이징대 부원장 인터뷰]
“쑨원이 일본의 패권 추구를 경계한 발언은 지금의 중국에도 유효하다.”
왕이저우(王逸舟·왕일주·사진)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부원장의 말이다.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책임 있는 역할을 강조하며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그는 “쑨원이 주장한 아시아 협력이야말로 중국이 지향해야 할 길”이라고 역설한다. 지난해 12월 17일 베이징대 연구실에서 왕 교수를 만났다.
-중국의 부상이 새로운 패권 국가의 출현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중국이 패권을 추구할 가능성은 낮다. 중국 지도자들의 생각도 그렇다. 패권을 추구하면 득보다 실이 더 크다는 것을 중국은 안다. 개혁·개방이 그랬듯이 중국의 이익은 다른 나라와의 협력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가 싫어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최근 중국이 보여주는 모습은 이웃 나라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중국은 점점 배우고 있는 중이다. 중국의 정치 자유화와 언론의 자유도 발전하는 과정에 있고, 그 방향은 세계 여러 나라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한꺼번에 모든 것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외국 친구들도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동아시아의 미래를 생각할 때 미국 요인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민 중에는 중국이 미국을 아시아에서 배제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 그런 의도는 없다. 장기적으로 미국은 이 지역에서 계속 존재할 것이고, 군사적 관계도 유지될 것이다. 그게 현실이다. 중·북한 관계에 대해서도 우려가 있는 걸 안다. 중국과 북한은 옛날부터 혈맹관계였으나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혈맹관계에서 정상관계로 조정 중에 있다.”
-세계 질서의 중심이 서구에서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고 보나.
“세계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어 태평양을 건너 중국·인도로 이동하고 있다는 관점이 있다. 나도 그랬지만 지금은 약간 다르다. 글로벌화 시대는 여러 나라가 다같이 발전하는 것이므로 중심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중심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 뒤 원래의 중심이 낙후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쑨원은 아시아 국가들의 협력을 주창했는데.
“그는 패도를 버리고 왕도를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패도는 불평등한 아시아,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관계다. 왕도는 평등과 협력의 관계다. 쑨원의 가르침은 일본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오늘의 중국에도 유효하다. 쑨원은 대아시아주의를 말했는데 대(大)자는 뭔가 거만한 어감을 주므로 나는 신(新)아시아주의로 고쳐 말한다.”
일제때부터 우리는 백제,고구려,신라는 한반도와 현재 만주라고 불리는 지나족들이 차지하고앉은 동북삼성이라고 배워왔다.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우리가 배운 역사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우리조상들이 기록한 역사서를 해석하지않고는 알수가 없다. 단지 학교에서 선생들이 가르쳐주고 신문방송에서 매일같이 내보내는 기사를 보며 아하 그렇구나 하고 믿는것 뿐이다. 결국 학교에서 한자교육을 등한시하게되면 우리 스스로는 조상들의 역사를 해석할 수가 없다.단지 권력을 장악한자들과 그들과 짜고치는 매국노 언론세력들에게 세ㅤㄴㅙㅤ당하는 길밖에 없다. 일제후 해방된 후에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일제가 조작한 날조된 역사를 가르치는 식민사관의 후예들에게 장악되어 있다는 것은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자들은 절대로 우리 자라는 어린 아이들이 한자를 익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만약 어린 아이들이 한자를 익혀서 조상들의 숨겨진 역사서를 해석할 수 있다면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교다닐때 우리역사가 신라의 김부식이쓴 삼국사기에 바탕을 두고있다고 배웠다. 과연 우리가 학교 다닐때...역사선생이 삼국사기나 그외 역사책의 원본 한문을 학교에서 가르쳐준 적이 있는가? 나는 거의 보지못했다. 거의다가 이랫고 저랫다는 식으로 한글로 써있었을 뿐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조상들이 쓴 한문의 원본을 본적이 거의없이 역사라고 배워온 것이다. 이런 상태의 역사교육은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다.
지금 지나족이 차지한 중국대륙에 수많은 "고려성"과 "백제향"이라는 지명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지명이라는 것은 그 지역을 차지하지 않고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현 중국대륙 최남단의 배트남북쪽 광시자치족지역에 백제향과 수많은 백제연관지명이 존재하고...하북지방과 몽골에 아직도 많은 고려성의 흔적과 이름이 존재하는 것은 이 지역이 분명이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실제 현재 지나족이 황하강 이북에 살게된 것은 근세 100여년에 걸쳐서 이루어졌다다.
우선 1948년 현 중공이 개국되기 전까지...현재 만주라고 일컫는 동북삼성에는 지나족이 거의 살지않았다. 모택동이 공산화한후에 남방의 지나족을 수천만명을 동북삼성으로 이주시킨 것이다. 현 동북삼성지역은 본래 우리 조선인, 고려인들이 대대로 살아왔고 일제때 일제의 핍박을 피해서 소수가 이주해갔다는 것 역시 날조에 가깝다고 본다. 조선시대에도 역시 현재 동북삼성(만주)지역은 우리민족의 무대였던 것이다. 이것을 일제가 원래 현 동북삼성은 여진족이 살던지역이라고 함으로서 조선인과 무관한 지역으로 역사를 날조했고 식민사관의 후예들이 이것을 학생들에게 주입식 교육으로 세뇌시킨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제적인 영어명칭은 "KOREA" 이다. 그러나 수천년이상 서양이 우리민족을 부르는 명칭은 "The Corea"였다. 누가 이것을 바꾸었는가? 일본인들이 일제때 바꾼 것이고 이것을 우리는 아직도 The Corea로 고치지 않고 Korea로 쓰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원래 태전이었던것을 일제때 대전으로 바꾼것을 아직도 그대로 쓰고있는 등 아직도 우리는 일제로부터 제대로 해방이된 것이 아니다. 단지 매국노들은 일본이라는 말에서 미국이라는 말로 말만 갈아탔을 뿐이다.
The Corea는 제국이었다.
서양과 아랍인들은 아직도 우리를 Corea라고 부른다. 동북아 끝쪽에 귀퉁이에 있는 나라가 The Corea 였다면...과연 대륙끝의 서양인과 아랍인들이 우리의 존재를 알고서 Corea라고 불렀을까? 만약 현재 교통수단이 말밖에 없다면 우리가 유럽 끝쪽에 있는 포르투갈의 존재를 알 수 있을까? 로마는 알 수 있겠지만 포르투갈은 알기 힘들 것이다. 결국...고려가 동북아 끝자락의 반도귀퉁이에 있었다는 것은 새빨간 날조인 것이다.
고려는 제국이었으며 현 한반도와 만주...중국대륙 대부분...그리고 현재 중앙아시아 키르키즈스탄, 카자흐스탄에 걸치는 대제국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거란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명확해진다. 현재 거란과 돌궐의 후손이 바로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우스베키스탄 등이다. 이들 역시 자신들이 거란, 돌궐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우리와 같은 동이족의 정통후손들이라서 우리와 생김새도 거의 구분이 안가고(물론 세월이 오래 흘러 러시아와 아랍피가 ㅤㅇㅑㄲ간은 섞였지만)...이곳지역을 자세히 보면 우리 상고사와 연관이 있는 지역명이 수도없이 많다. 다시말하면 거란과 돌궐의 위치는 원래부터...현재 중앙아시아 천산유역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와 고려의 위치는 자연스럽게 몽골과 현 중국 양자강이북...동북삼성.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이다. 서울대 박창범교수가 컴퓨터를 이용해서 측정한 삼국시대의 천문기록은 고구려의 위치가 바이칼호, 현 외몽골, 내몽골지역, 현재의 신만주(동북삼성), 등으로 나오고, 백제는 산동반도, 화북지방, 한반도, 요서지역으로 나온다. 박창범교수의 과학에 근거한 사료증명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몽골인들과 키르기스스탄인들이 전세계에서 우리와 가장 비슷하게 생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혈통이 같기 때문이다. 식민사관의 일제후예들이 강단사학을 장악하고 말로는 우리를 속일 수있다.그들이 1905년이후로 장악해온 신문과 방송을통해서도 역사를 속일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은 속일 수가 없기에 박창범교수가 컴퓨터로 측정한 삼국의 위치는 대륙과 한반도를 다 포함하는것이며...피는 속일 수 없기에 삼국시대에 우리와 같은 한민족구성원이었던 몽골과 부리야트, 키르기스스탄인들은 우리와 똑같은 생김새를 하고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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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륙조선사이트(http://cafe.daum.net/chosunsa)를 접한 것은 얼마되지 않는다. 대륙조선은 한반도가 대륙조선과 전혀다른국가였다고 완전히 분리하는 주장을 하는사람들도있는데, 나는 이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산동반도에서 보면 한반도가 보이고..배타면 불과 몇일이면 도달하는 한반도가 대륙의 영향권과 전혀 별개일 수는 없는 것이다. 베이징과 중국남부의 광동성은 산동반도와 한반도보다 몇배 더 먼데 그럼 어떻게 한국가가 될 수 있는가?결국 근세말까지도 조선조정이 중국 장안(Xian:시안,서안)에 있었다면...한반도 역시 조선제국의 영향권이었거나 조선연방의 일원...혹은 몽골(여진)인이었던 이성계의 이씨조선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았던 고려의 후손들이 연방의 형태로 느슨하게 대륙에서 대피해와서 대대로 살아왔던 지역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근세까지도 양자강이북...최소한 현 북경지역과 장안지역등의 화북지역과 한반도 만큼은 청의 영역이 아닌 조선의 영역이었다고 본다. 현 재 시안부근에 있는 이집트보다도 수천년 더 오래된...크기도 이집트피라미드보다 몇배 더 큰 피라미드를 중국정부가 일반인의 접근을 통제하고 숨기는 이유는 바로 이 피라미드를 조사하면 대륙전체가 한민족의 땅이었다는 엄청난 진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지나족이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지나족들은 공산화 이후 역사를 거의 가르치지 않았다. 왜일까? 대륙의 역사가 바로 한민족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 대륙을 광동과 복건성에서 세력을 북으로 넓힌 지나족과 현재 일본정권을 장악한 그 지나족의 갈래인 일본집권층이 구한말 공산주의와 제국주의를 통해서 대륙을 차지한 것이다.
우리는 만주가 현재의 북한 위쪽의 동북삼성이라고 배웠다. 이것은 사실인가?
그리고 우리는 여진족이 대대로 동북삼성에서 살아왔고 누르하치는 압록강 백두산 주변에서 발원했다고 배웠다. 사실일까? 그렇다면 현재 동북삼성에 만주족의 후손들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어야 하고...그들은 만주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중국에서 만주어를 구사할 수 있는 만주족들이 사는 곳은 동북삼성이 아니라 내몽골이다. 옛날부터 오르도스라고 불리는 곳이고,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 집안이 발원한 곳이다.
왜 만주족은 동북삼성에 남아 있지 않은가?
동북삼성에 남아 있는 소수의 원주민은 우리와 같은 퉁구스계이긴 하나 그들은 만주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하고 퉁구스어를 구사한다. 결국 현재 동북삼성이 만주라는 것은 한민족의 역사를 철저히 왜곡하기 위해서 날조한 것이다. 원래 우리 주무대가 대륙과 그중에서도 장안(시안)이었던 것을 날조하기 위해서...우리역사를 반도로 축소하기 위해서...대륙의 장안을 반도의 서울로 옮겨 놓고...우리역사를 반도로 축소하기 위해서 대륙서부 오르도스에 있었던 여진족의 근거지를 현재의 동북삼성지역으로 위치만 옮겨 놓은 것이다.
여진 글자를 보았는가? 겉으로보기에는 몽골문자와 거의 구분이 가지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여진이 몽골이고 몽골이 바로 여진인 것이다. 바로 이성계가 여진이고 이성계가 몽골인 것이다. 우리민족과 몽골족, 여진족은 전부다 한민족...전부다 몽골족이고 단지 세밀한 갈래일뿐 그뿌리는 전부다 한뿌리로 한족, 몽골족 거기서 거기인 것이다. 이것을 지나족과 그 뿌리가 같은 현재 일본의 권력을 장악한 왜족이 한민족을 갈기 갈기 찢어놓기 위해서 한국인과 몽골인을 갈라놓고...몽골인과 여진인을 갈라놓고...거란족과 돌궐족과 흉노족을 또 갈라놓고...몽골인과 말갈인을 또 다른 민족인 것처럼 갈라놓은 것이다. 이렇게 갈라놓으면, 동이족은 전부 다른 지역에 사는 다른 민족이 되어서 원래 대륙이 동이족이 주인이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인이 바로 말갈인이고...고구려의 후손이 바로 현재의 우리와 같은 핏줄인 몽골인이고 돌궐이 바로 거란이고 거란이 바로 몽골과 거기서 거기인 것이다. 그때그때 이합집산에 의해서 세력을 재편했을뿐...그 뿌리는 바로 천산산맥(현 키르기스스탄)지역의 아사달에 도읍을 정한 단군(Tengri) 후예들인 것이다.
청색의 곤룡포다...청색은 바로 여진과 몽골의 상징이다. 몽골의 상징이 바로 징기스칸의 심볼인 푸른늑대다. 결국 여진과 몽골은 한뿌리고 한민족이기때문이다. 오르도스지방은 현 내몽골지역인데.. 여진과 몽골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바로 쪽바리들이 심어 놓은 식민사관, 반도중심사관에 넘어가는 것이다.
현 동북삼성이 진짜 만주고 진짜 여진족의 발원지라면...현몽골지역에 사는 몽골인들과 여진을 다른 민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진다. 그러나 원래 만주가 신강위구르 근방의 내몽골지역이고. 바로 대륙조선이 있었던 장안(시안)의 서북쪽지역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몽골과 여진은 분리되는 민족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내몽골지역이 겹치기 때문이다. 한반도처럼 산악지역도아닌 내몽골초원지역에서 여진과 몽골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을 일제와 지나족은 한민족을 갈기 갈기 찢어놓기 위해서...청(몽골)이 대륙을 제패했을때는 청이 몽골을 격파했다고 날조한 것이다.
이렇게 일제와 지나족은 만주를 현재의 동북삼성지역으로 옮겨놓고...여진족이 거기 살았다면서 여진과 몽골이 다른 민족인 것처럼 역사를 날조하고.. 다시 우리민족이 대륙과 무관한 것처럼 하기 위해서 여진과 우리민족을 다시 갈라 놓은 것이다. 여진(몽골)은 우리와 한뿌리로...단군의 후예지만 단지 유목생활을 고집한 또 다른 형제들일 뿐이고 우리는 같은 환인의 후손이지만 농경과 유목을 병행하면서 한반도로 차츰차츰 지나족에 쫏겨들어 왔고 구한말 서양세력을 주도하던 영국과 미국, 러시아의 유태인세력과 이 유태인서양세력의 도움을 받은 지나족 공산주의세력과 왜족에 의해서 대륙의 근거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내가 유럽에 체류하고있을때 중국 칭화대출신을 만난적이 있는데, 역사얘기가 나왔는데 징기스칸이 누군지를 몰랐다. 나에게 징기스칸이 누군지 가르켜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칭화대는 중국 최고의 명문인데 징기스칸을 모른다니...그의 말은 역사를 별로 배우지 않았단다. 이것이 바로 중국공산당의 현실이다. 그들은 대륙에 자기 역사가 거의 없기 때문에 역사를 일부러 가르쳐 오지 않은 것이며 이제 차지한 대륙의 정통임을 날조하기 위해서 동북공정으로 대륙이 주근거지였던 고구려역사를 훔침으로서 우리역사 자체를 훔쳐서 대륙의 주인행세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성계가 몽골인(여진인)이라해서 우리가 이성계를 다른 민족으로 보는 것도 식민사관의 장난질에 넘어가는 것이다. 이성계가 몽골인(여진인)인것은 확실하지만...몽골인(여진인) 자체가 바로 우리와 한핏줄인 한민족인 것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경기도인(고려인)이 차지하고 있던 대륙정권을 경상도인(이성계)가 찬탈한것에 지나지 않는다. 홍건적이 침입해와도...왜적이 침입해와도...왕은 몽진 피난길에 오른다.
몽진이란 무엇인가? 몽골쪽으로 피신하는 것이 바로 몽진이다. 홍건적은 바로 꽝똥지역에서 발호한 지나족이고...왜적 역시 근세에 일본섬으로 대량이주하기 전까지 대만, 복건성, 광동성, 필리핀 등지에 근거하며 해적질하던 지나족의 일원이었으므로 이들이 난을 일으키면 우리조상들의 본래 근거지인 오르도스지역..몽골지역으로 피신하는 것이다.
현재의 반도서울에서 평양이 몽진이 아니고...중국 장안(시안,Xian)에서 몽골지역으로 피신하는 것이 몽진이다. 그곳은 바로 우리 민족조상 단군의 근거지이고...유목지역에는 언제나 우리핏줄인 유목부족들이 웅거하고 있기 때문에유사시 원군이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장안(시안)에서 현재의 동북삼성이나 타이완으로 도망가지 왜 서쪽인 내몽골로 피신할까?
중국공산화의 과정을 보면...역사의 진실의 단편을 볼 수 있다.
모택동은 어디출신인가? 바로 후난성(호남성)출신이다. 호남성은 어디인가? 바로 지나족이 웅거하고있던 꽝똥지역이다.
손문이 어디출신인가? 역시 꽝똥출신의 객가다...객가는 누군가? 바로 꽝똥지역에서 근거하는 중국 유태인 혈통들의 근거지이며...구한말에 유태인 서양세력과 짜고 조선세력을 대륙에서 몰아낸자다. 손문이 공부한 곳이 바로 유태인들의 근거지인 영국과 미국이다. 또한 손문은 러시아의 스탈린과 밀접하게 교류한 인물이다. 모택동이 튀어나오기전까지...
스탈인이 누군가? 바로 유태인이다. 스탈린은 Georgia에서 러시아로 이주한 유태인이다. 그러기에 2000만이 넘는 러시아인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자기 민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손문이 바로 대륙조선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뒤를 장개석이 이었고.. 유태인세력의 도움으로 대륙조선을 축출할 수 있게된 후에 누가 대륙을 차지하느냐를 놓고 싸운 것이 바로 손문의 똘마니 장개석과 모택동의 싸움인 것이다.
모택동이 한 대장정의 루트를 본적이 있는가? 중국에서 옛날부터 끈질기게 살아온 유태인혈통들이라는 말들이 많은 꽝똥 객가 지나족의 근거지인 꽝똥에서 쓰촨지역 등의 엄청난 산악 지역만을 골라타고 올라가서. 대륙조선의 근거지였던 중국장안(시안,서안)에서 장개석군과 일전을 치르고 이긴 후에 대륙을 차지한다. 결국 장안이 대륙의핵심이었다. 장안을 차지하는자가 대륙을 차지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조선이 대륙의 중심이었을 때...대륙의 남방은 지나족이...오르도스지역은 청나라가...요서지역과 화북지역, 서안지역은 여전히 대륙조선의 영향권이었을 것이다. 한반도는 대대로 고려인, 조선인의 피난지였을 것이고...요즘같이 교통이 발달한 때에도 미국같은 경우만 보아도 대륙끝에서 끝까지 갈려면 차로 일주일이상 가야한다. 말이라면 몇달가도 부족할 것이다. 그런데 중국 대륙전체를 청나라가 차지하고 통치했다는것은 새빨간 역사의 날조다. 근세까지 대륙은 조선황제(장안(시안))를 중심축으로하는 느슨한 연방체제였을 것이고...청나라와 지나족은 그 연방의 구성원이었다고 본다.
모택동이 장안을 장악하고 중국의 수도를 베이징에 정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왜 날씨도 춥고..대륙의 동북쪽에 치우쳐있으며...자신의 근거지인 남부 광똥성의 호남지역과도 엄청나게 거리가 먼 북경에 수도를 정했을까? 그것은 북경은 대대로 한민족(몽골족, 거란족포함)의 핵심 연결 고리지역이었고.. 중국대륙을 지배한 유목민족의 전략거점이었기때문이다. 이 전략거점을 끊어버리고 지나족의 대륙지배를 공고히하기위해서, 모택동은 대륙의 중심인 우한이나 충칭,또는 지나족의 본거지인 광뚱이나 스촨의 청뚜지역이 아닌 몽골리안 루트의 핵심요충지인 북경에 수도를 정한것이다.
만약 모택동이 수도를 동해안의 가운데인 상해나...자신의 지지기반이 강한 지나족지역인 꽝뚱지역에 수도를 정했다가...북방에서 한민족과 몽골인들이 다시 뭉치면 대륙은 다시 유목족이 장악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막기위해서 모택동은 몽골리안루트의 요충지인 북경를 장악하고동북삼성에 수천만명의 지나족을 이주시켜서...한반도 한민족과 대륙한민족(몽골,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부리야트)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버린 것이다.
여기에다가 대륙조선을 망하게 만드는데 지나족을 도와 준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다시 둘로 갈라놓은 것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한반도에 대륙조선을 이식하고 역사를 날조하고, 20 만권에 이르는 정사책을 불태우거나 일본으로 가져가고, 지나족 사대에 물든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달랑 두권만 남겨두고(삼국사기도 조선왕조와 일제때 상당히 많이 조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재야사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지고 있음)...여기에 일제가 역사를 날조해왔고 아직도 그 일제 후예들이 강단사학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대륙조선을 붕괴시키고 대륙을 차지한 지나족...그리고 지나족을 도와서 조선제국을 무너뜨린 유태인이 지배하는 미국과...유태인들이 공산혁명을 통해서 장악한 유태러시아 공산정권은 연해주에 있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켜서 한민족의 연해주, 만주지역 영토를 뺏기위해서 수작질을 벌이고...유태인혈통인 트루먼은 유태인 스탈린과의 교감하에...김일성을 유인하는 전술을 써서 한국전쟁을 발발시킨다. 러시아 유태인들의 꾀임에 넘어간 김일성은 얼씨구나 좋다구 남침하고...미국의 개였던 미국시민권자 기독교도 이승만은 기다렸다는듯이 서울을 지킨다고 사기치며 서울시민들이 한강다리를 건너지 못하도록 한강을 폭파하고 저먼저 도망가버린다. 한강다리 폭파하고 도망간 이승만이 제일먼저 한일이 일제의 주구였던 김창룡이를 시켜서 자신에게 저항하던 민족주의자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그 전쟁와중에 제일 먼저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어있던 이승만의 반대세력 민족주의자들을 만명가까이 학살해버린다.
내 개인적인 견해는 이승만은 김일성을 유인해서 북진통일하자는 유태인들의 꾀임에 빠졌던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6.25발발전에 이승만이 똘마이들과 북진운운하며 평양에 몇일이면 도달할 수 있다는 둥의전쟁암시 발언을 할 이유가 없고, 당시 전방에 국지전이 벌어지는 살벌한 상황에서 대다수의 전방군인을 후방으로 휴가보내서 김일성을 유인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모택동이 6.25때 보낸 중공군의 상당수가 대륙에 남아있던 조선인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 대륙조선인들은 총도 안주고 꽹가리하나 달랑 쥐어주고 뒤에서 총을 갈기며 전장 터로 내몰았던것이다. 당시 모택동의 뒤를 이은 등소평이 6.25때 감군참모인가로 참전한 것으로 아는데...대륙에 남아 있던 조선인들을 청소하는데...감독관으로 등소평이 참석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고 본다.
등소평이 누군가? 손문과 같은 객가출신이다. 등소평이 중국에 오랫동안 거주한 유태인혈통이라는 사실은 대만의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이미 언급된 바 있다. 중국공산당은 극히 일부만 제외하고는 대륙의 역사를 모른다. 대륙의 역사는 대만인들이 오히려 더 잘안다. 대륙조선왕조의 역사책과 유물들을 장개석이 전부 가지고 떠났기 때문이다.
결국 한민족과 대륙조선의 진짜 역사책은 일본황실과...대만국립도서관...그리고 영국, 미국, Israel에 거주하는 유태인들의 서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유럽이나 미국의 서점에 가보면...서양인들이 쓴 중국여행 참고서적이 많다. 그런데 그 중국여행가이드북에 반드시 등장하는 도시는 어디일까? 베이징? 상하이? 홍콩? 대륙에 관한 가이드북은 상해보다...중국장안(시안)이 더 많이 나오고 지도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나온다. 장안에 중국의 유물이 가장 많이 나온다는 것은 대륙역사의 핵심은 바로 중국 장안에 있다는 말이다. 서양인들이 중국 장안을 베이징과 함께 반드시 가봐야하는 곳으로 추천하는 이유는? 중국역사를 알기위해서일까? 아니면...서양인들은 중국 장안의 역사적 중요성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미국과 영국 등의 출판계는 유태인들이 완벽하게 장악하고있다는 점에서...그들이 장안(서안,xian)을 엄청나게 중요시하는 이유는 그곳에 엄청난 비밀이 숨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첫댓글 대조선이 한반도로 작아진 비밀이군요 잘 보고 갑니다 ,,,,
동방한국님! 우리 역사를 아주 잘 정리해 주셨군요! 아시아 이상주의를 쓰신 이홍범 선생님 강의를 들어보면 미국을 청교도 유대 민주주의 라고 정의하셨어요! 미국, 쏘련, 유럽 유대인들이 우리 역사에 많이 관여한게 분명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