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씻으라"
본문말씀 : 요한복음 9:1-12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6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뒤에,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 사람이 가서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던 중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긍휼과 연민의 마음은커녕, 그들의 궁금증을 예수께 물어보기에 바쁩니다. "선생님, 이렇게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의 죄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그 자신입니까? 부모님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예수께서는 이 질문에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죄나 그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려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러한 대답에서 우리는 구원에 있어서는 신체적 장애가 절대로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사실과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구원의 평등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이 주어지는 것은 기준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질 수 없는 조건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이의 입장 이들의 대화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들의 대화는 맹인의 가슴이 아프게 만드는 것을 넘어 화가 나게 할 것입니다. 자신도 앞을 보지 못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자신을 원망한 적도 있었을 것이고, 너무 답답해서 자신에게 '왜 살아야하나?'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던졌을 겁니다. 부모님 탓부터 시작하여서 여러 가지 탓도 했겠죠. 그런데 자신을 두고,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죄'로 이유를 들어 말을 하다니요. 자신의 부모님까지 들먹이다니요. 자신이 수십 년간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살아왔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나기 위해서 그랬다니요. '왜, 하필이면 나인가?', '이들은 왜 내 앞에 지나가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가?' 라는 생각과 함께 짜증이 났을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 앞에서 이야기하는 이가 예수든 그의 제자이든 누구든 말이죠. 이렇게 그 맹인은 심기가 매우 불편했을 것 같습니다.
예수는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아직은 낮이니까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 밤이 올 것인데 그 때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에 있는 동안에 '빛'이다." 예수가 있는 이 땅은 빛이 있기에 낮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그는 이 땅에서 우리의 문제에 대하여 새롭게 접근합니다. 문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진리를 우리는 예수의 다음 행동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십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앞을 보지 못하는 이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묻지도 않으시고 그 맹인의 눈에 진흙을 발라서 치유를 시작하십니다. 일방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빛을, 구원의 빛을 받은 것입니다. 이 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은, 사랑은 전적인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찾아오심은 우리의 노력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행위는 안식일에 이루어졌습니다. 안식일은 말 그대로 쉬는 날입니다. 유대인이 지켜왔던 전통입니다. 침을 진흙에 겨는 것과 같은 행위는 안식일에 금지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 행위를 안식일에 함으로 안식일제도에 도전합니다. '안식일의 법보다 중요한 것은 그 전통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안식일에는 치유와 회복이 있어야 한다!' '막혀있던 우리들의 문제가 걷어지는 날이 되어야한다!' 라는 선포를 행동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이루신 것입니다.
진흙을 눈에 바르시고, 예수는 맹인에게 또한 일방적으로 말하십니다. "실로암 못에 가라! 그리고 씻으라!"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는 일방적으로 우리이게 주어지지만 행동은 우리의 몫입니다. 이 행동은 어찌 생각해 보면 쉬울 수도, 어찌 생각해보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의 음성을 들은 대로 내가 행동하면 됩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순종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거져 주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은 인간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바로 순종입니다. 이 맹인은 아까 제가 말했듯이 불쾌했을 상황에서도 그 말씀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의 발걸음을 실로암으로 옮기게 합니다. 그리고 눈을 떠서 빛을,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가 예수의 말을 듣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실로암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그걸로 그만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맹인으로 살아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로암으로 가서 눈을 씻었고 치유를 받았습니다.
사실, 그 맹인에게는 실로암 못보다 그 눈을 씻을 수 있었던 가까운 연못이었었습니다. 바로 요한복음 5장에서 38년 된 병자가 있었던 베다스다 못입니다. 이 연못은 예루살렘 안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예루살렘 밖에 있는 실로암보다 거리가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베다스다가 아닌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가 값싼 구원을 이루려하지 않는 다는 사실과 우리의 중심과 마음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 맹인의 앞에는 평생 빛을 보며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시험이 놓인 것입니다. 그 맹인은 그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 먼 길을 걸어갔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믿고 말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실로암으로 가는 길은 절대로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거리는 물론이고, 자신의 불쾌했던 감정도 고통과 불편도 다 감소해야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버려야합니다. 자신의 상황, 조건들을 극복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 말씀에 소망을 두고 따르는 길입니다. 믿음으로 따른 길입니다.
맹인이 된 자가 예루살렘을 돌아다니자 이웃 사람들이 그를 보고 깜짝 놀란다. 그리고 그 눈을 뜨게 된 맹인은 기쁜 마음으로 예수를 전하는 자가 된다. 예수의 증언자가 된다.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 깜깜한 어둠 속에 있었던 그에게서 예수의 말이 이루어졌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었다. 이 말씀은 그 당시 요한복음을 이루었던 요한 공동체에게는 숨어있지 말고 예수를 당당하게 고백하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됩니다. 그 당시 요한 공동체는 유대교 회당 내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함으로 축출 당할 위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경제권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 유대교에서 벗어난 다는 것은 그들의 생활에 큰 어려움이 밀려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기자는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생활이 어려워진다고 하더라도, 환경이 어려워진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있지 말고 예수의 일방적인 은혜와 사랑을 알았다면 당당히 빛으로, 세상으로 나오라는 메시지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행동함으로 말씀을 이루라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를 증언하는 자가 되라는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우리 또한 우리의 삶 속에서 일방적으로 은혜와 사랑을 주시는 하나님을 깨달아야합니다. 주님의 얼굴을 먼저 구하십시오. 그 분을 만나야 합니다. 이 예수를 정말 진정으로 만날 때, 우리에게는 그 말씀을 듣고 결단하고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생깁니다.
실로암으로 내딛었던 그 발걸음이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의 발걸음이 되기를 간절하게 소망합니다. 그 절박함 속에서, 절실함 속에서 예수를 만나 치유를 받고 후에 다시 예수를 만나 '주여, 내가 믿나이다!' 고백했던 그 맹인의 고백이 우리의 입술에서 흘러나오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