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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이야기이지만, 선진국에서는 어릴 때 아이들에게 고향동네의 오래된 다리나 풍물에 대해 진지하게 가르친다고 한다. 나는 어릴적 향토사라 할 수 있는 동네의 어떤 역사를 학교에서 배워본 적이 없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어느날 지방대학 학장을 하시던 친구의 아버지 서재에서 전 동경대 이즈미 세이치(泉 靖一)교수가 쓴 <濟州島>란 책을 보고 충격을 받았었다. 문화인류학적으로 저술한 그 책 속엔 1930년대 제주의 모습을 너무나 생생하게 그리고 있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그 만큼 제주에 대해서 치밀하게 연구한 서적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물론 세계사도 배우고 왕족의 역사도 외워야 하겠지만, 어릴때 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주변의 풍물이나 역사에도 애정을 갖고 배우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지난 금요일 밤, 올림픽축구 동메달을 놓고 일본과 벌인 꼭두새벽의 런던대첩을 밤새워 보았다. 왜국에 완벽하게 승리한 때문인지 잠깐 눈을 붙이고 나니 마음만은 상쾌했다. 베낭을 매고 집을 나섰다. 집 근처에 있는 안산을 오르고 주변에 있는 봉원사와 서대문독립공원을 들러볼 생각이었다. 평소에 안산을 오르내리던 산길과는 다른 길을 걸어 보았다. 얼마 전부터 앞으로는 눈에 익어서, 내가 살고 있는 동네라서 무심하게 보아온 것들에 대해 다른 생각으로 쳐다봐 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맛보기로 걸었다.
鞍山 입구에 있는 생태원... 마소를 들에 풀어놓아 풀을 뜯게 하고 놀던 옛 고향추억이~
여름이 깊어 산을 오르는 길은 그야말로 綠陰芳草였다...
버들잎엉겅퀴...
안산(鞍山)은 서대문구에 있는 산이다.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불리며, 정상인 봉화대에서의 경치가 서울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좋다. 봉원사가 이 산 중턱에 위치해 있으며 연세대학교, 독립문, 서대문 자연사 박물관, 서대문구청이 이 안산 산자락에 이어져있고 주변에는 백련산과 인왕산이 있다.
옥천 약수터 생태연못...
누군가 금붕어 두마리를 풀어 놓았다.
鞍山의 정상인 무악봉수대에서 바라본 인왕산 자락, 너머로 북악산이 보인다.
가운데 서대문독립공원이 보인다.
무악산 동봉수대
무악산 동봉수대 터
鞍山을 무악산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산 아래 인수봉과의 사이에 있는 고개이름이 무악재다. 무악산 동봉수대 터는 조선시대 봉수체제가 확립되었던 세종 24년(1438)에 무악산 동․서에 만든 봉수대 가운데 동쪽 봉수대 터이다.
봉수제는 중국에서는 25~27년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에 이미 상당히 정비된 봉수제도가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있어온 것으로 짐작되나 확실한 것은 고려 의종(毅宗) 3년(1149)부터이다.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봉수제는 크게 정비되고 발전된 체제를 갖추게 되었는데, 조선의 봉수는 그 시설 상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 봉수인 서울 목멱산(木覓山, 남산)의 경봉수(京烽燧), 해륙․변경의 제l선에 위치하여 연대라고 호칭된 연변봉수(沿邊烽燧),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내지봉수(內地烽燧)로 구분되며, 이밖에 기간 선로상의 직봉[直線烽燧]과 그 보조선상의 간봉[間線烽燧]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봉수대에서는 거수(炬數-횃불의 수)를 달리하여 정세의 완급을 나타냈다. 평상시에는 1거(炬), 왜적이 해상에 나타나거나 적이 국경에 나타나면 2거, 왜적이 해안에 가까이 오거나 적이 변경에 가까이 오면 3거, 우리 병선(兵船)과 접전하거나 국경을 침범하면 4거, 왜적이 상륙하거나 국경에 침범한 적과 접전하면 5거를 올리도록 하였다. 만약 적의 침입이 있을 때 안개․구름․비․바람 등으로 봉수를 올리지 못할 때는 포성(砲聲, 信砲․發火 등)과 각성(角聲, 角吹)으로 주위의 주민과 수비군인에게 급보를 알리고,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직접 달려가서 알리기도 하였다.
무악봉수대 중 동봉수대는 제3봉수로로 평안북도 강계(江界)에서 출발하여 황해도 → 경기도 내륙을 따라 고양 해포나루 → 무악 동봉 → 목멱(남산) 훈도방으로 연결하는 직봉 79처, 간봉 20처를 경유하는 봉수를 남산에 최종적으로 연락하는 곳이다. 이와 달리 제4봉수로 기점이었던 서봉수대는 평안북도 의주(義州)에서 시발하여 황해도 → 경기도 해안을 따라 고양 고봉 → 무악 서봉 → 목멱(남산) 명례방으로 연결하는 직봉 71처, 간봉 22처를 경유하는 경봉수대 최종 직봉이며, 동봉수대로부터 1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악 동봉수대는 터만 남아 있던 것을 서울정도 600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1994년에 자연석을 사용하여 상부 연대(烟臺), 하부 연대, 봉화연조대를 갖춘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이 전망명소에선 날 좋을 때는 왼쪽부터 북한산의 쪽두리봉, 향로봉, 비봉, 사모바위, 승가봉, 니월봉, 나한봉, 문수봉, 보현봉, 형제봉이 보이고... 인왕산, 북악산, 천마산, 저 말리 아차산까지 한눈에 볼 수가 있다.
평소에는 내려가지 않았던 길을 내려갔다. 오른쪽으로 봉원사가 있고, 왼쪽으로 서대문독립공원이 있다. 오른쪽 능선을 내려가 봉원사를 들러보고, 다시 능선을 되돌아 올라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내려갔다.
연세대학교 캠퍼스가 보인다. 이 길은 7~80년대 지명수배된 학생들이 형사들을 피해 도망다니던 일명' 베트콩루트'였다.
봉원사로 내려가는 길목...
모자가 한가하게 놀고 있었다. 보고 싶은 외손자 장군이...
후원을 통해 봉원사에 들어갔다.
奉元寺
봉원사(奉元寺)는 한국불교태고종의 총본산 사찰이다. 서대문구구 봉원동 산1번지의 안산 자락에 있다. 신라 말기 진성여왕 3년인 889년에 도선이 처음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의 이름은 반야사(般若寺)였다. 이후 고려 공민왕 때 보우(普愚)가 크게 중창하였다. 조선 태조가 불교에 심취했을 때 삼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하였고, 사후에는 태조의 초상이 봉안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짓는 등 조선 영조 때까지 지금의 연세대학교 자리인 연희궁 터에 있었다. 영조 24년인 1748년에 지금의 터로 이전하였고, 영조는 친필로 봉원사라는 글씨를 쓴 현판을 내렸다. 영조의 친필 현판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이때부터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 신도들 사이에서는 '새절'이라 불렀다. 정조 때 전국 승려의 풍기를 바로잡기 위한 8도승풍규정소(八道僧風糾正所)가 세워질 정도로 사세가 컸다.
조선 말기에는 승려 이동인이 머물러 갑신정변의 요람이 되었다. 이동인은 이곳에서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등 개화파 청년들과 교류하였고, 일본을 내왕하면서 이들에게 개화 문물을 전해주었다.
1954년부터 시작된 오랜 불교계 분규과정에서 사찰 운영은 태고종이, 토지 소유권은 대한불교조계종이 갖게 되어 순천 선암사와 함께 대표적인 분규 사찰로 꼽힌다. 그러다가 최근에 조계종과 원활한 합의를 이끌어 내어 결말을 보았다고 한다. 즉 봉원사 토지가 10만여 평인데 2만여 평은 조계종이 불사에 사용한다는 조건하에 양도하는 것으로 타결됐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승려 이만봉이 단청 분야에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또한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된 영산재(靈山齋)도 해마다 시연된다. 문화재 지정단체는 영산재보존회이며, 보유자는 범패 부분 김인식(법명 구해)이다. 옥천범음대학을 함께 두어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연꽃축제가 한창이었다.
태고종(太古宗)
한국불교의 전통종단으로 태고 보우국사의 통불교(通佛敎)사상과 원융(圓融)정신의 실천을 종지로 삼고 있는 종단으로 한국 불교 27개 종단의 하나이다. 고려시대 태고보우(太古普愚)국사를 종조(宗祖)로 하며 석가세존의 자각각타(自覺覺他) 각행원만(覺行圓滿)한 근본교리 를 받들어 실천하고 태고보우국사의 종풍(宗風)을 선양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 전법도생(傳法度生)함을 종지(宗旨)로 삼고 있다.
한국불교계는 해방 후 전국승려대회의 결의에 따라 '조선불교조계종총본사태고사법'과 조계종명을 폐지하고 '조선불교'라는 단일 종단으로 출범하였으나 3대 교정(종정)인 송만암에 의해 '조계종'으로 종명이 환원되었다. 1954년 5월 대통령 이승만이 가정(家庭)을 가지고 사는 중들은 다 사찰에서 물러가라는 특별담화 이후 조계종은 독신을 주장하는 세력과 승려의 결혼을 허용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으나 5. 16 혁명 후 불교재건위원회에 의해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을 종명으로 통합종단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중앙종회 구성의 쌍방 이견 대립으로 1970년 1월 박대륜(朴大輪)을 종정(宗正)으로 하여 통합종단에서 분리하여 태고종 종단을 발족하고 한국불교조계종과 통합하여 '한국불교태고종'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태고종은 사찰의 개인소유 인정과 승려의 결혼문제를 자율에 맡기고 있으며 출가를 하지 않더라도 사찰을 유지 운영할 수 있는 재가교역자제도인 교임제도를 두고 있다.
소의경전(所依經典)*은 <금강경>과 <화엄경>이며, 태고종계의 주요사찰로는 서울특별시 성북구의 태고사와 서대문구의 봉원사 및 전라남도 순천시의 선암사가 있다. 또한 사설사암(寺庵) 중심의 조직이라는 특징이 있으며 전국적으로 약 3,200여 개의 사찰을 두고 있다. 2008년말 기준으로 승려 7,200명, 교임(전법사) 1,100여명 교역자와 전국 500만 명의 신도를 두고 있다. 또한, 한국불교의 전통문화인 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와 제48호 단청을 보유하고 있다.
종단의 주요기구는 총무원, 중앙종회, 중앙사정원, 승정원, 포교원 등이 있으며 전국 각 지역에 26개 교구본사와 일본과, 미주지역에 해외특별교구가 있다. 관련기관으로 사단법인 한국불교교도회가 있으며, 정기적으로월간불교〉를 간행하며 기타 불교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주요행사로는 음력 1월 23일의 성도기념법회(成道紀念法會), 2월 15일의 열반절(涅槃節), 4월의 교도회대의원대회(敎徒會代議員大會), 4월 8일의 석가모니탄생 기념식, 8월 23일의 우란분절(盂蘭盆節), 9월 1일에서 10월 20일 사이의 범음강습회(梵音講習會), 10월 27일의 종조탄생기념법회 등이 있다.
*소의경전(所依經典)이란 불교경전으로서 신행(信行)을 비롯하여 교의적(敎義的)으로 의거하는 근본경전을 말한다.
봉원사 구경을 마치고 왔던 능선길을 다시 올랐다.
누리장나무꽃의 퀘퀘한 향기를 맡으며...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내려 가는 길...
서울을 방어하는 군부대를 만난다!
독립공원이라 공원주변에 무궁화를 많이 심었다.
서대문형무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 있었다. 전신(前身)은 형조의 지휘를 받아 죄수를 관장하던 전옥서(典獄署)이며, 1908년(순종 2) 10월 21일 일본인 건축가 시텐노 가즈마[四天王要馬]의 설계에 의해 인왕산록(仁王山麓)의 금계동에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인 경성감옥으로 준공되었다. 수용능력은 500명 정도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증축되면서 1912년 일제에 의해 서대문감옥으로,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불렸으며, 1946년 경성형무소, 1950년 서울형무소로 개칭되었다. 1961년 개정된 행형법(行刑法)에 따라 서울교도소가 되었으며 1967년 7월 7일부터 1987년 옥사를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할 때까지 서울구치소로 불렸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시위관련자 1,600여 명을 포함해 3,000여 명이 수용된 것을 비롯하여 일제강점기에 허위·유관순·강우규 등 수많은 애국지사가 수감되었던 민족수난의 현장이다. 1945년 이후에도 간첩·사상범, 많은 운동권학생과 재야인사 등이 거쳐 간 곳으로서 한국의 교도행정상 빼놓을 수 없는 기념지이다. 이곳에는 유관순굴·특수고문실 등이 있는 감방과 강우규·송학선이 처형된 사형장 및 일반사무실·교회당·공장·창고·취사장·식당·세면장·감시탑과 운동장 등이 있었다. 1987년 3월부터 서울특별시는 민족의 수난과 독립운동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곳 전체를 사적으로 지정,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조성했다.
런던대첩에서 完勝을 한 때문인지 옛 서대문형무소의 자취가 그렇게 슬프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서대문 독립공원 앞 버스정류소, 무악재를 항하는 버스...
무악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과 현저동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이 고개는 이름도 많아서, 모아재, 안현,길마재, 모래재, 추모현, 사현이라고도 한다. 무악(毋岳)재는 안산(296m)과 인왕산(338m) 사이의 나지막한 고개로, 도심과 서대문 외곽지대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 구실을 한다. 1번 국도인 의주로(義州路)가 놓여 있으며, 지하철 3호선이 통과한다.
조선시대부터 의주를 비롯해 황해도·평안도와 한양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특히 명·청의 사절들이 들어오는 길목의 관문구실을 했고 고개 아래 현저동에는 영취락(嶺聚落)*이 발달했었다. 현재 독립문(사적 제32호) 자리에는 중국 사절단의 영접을 위한 모화관과 영은문(사적 제33호)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의 가장 큰 내란인 이괄의 난이 종결되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고개 정상인 무악산(또는 鞍山)에는 평안도·황해도는 물론 부산·회령·의주까지 급보를 전했던 옛 봉화터가 2군데 남아 있다.
이 고개는 가파르고 길목이 좁았으며, 도적과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10명 이상이 모여야만 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고 한다. 홍명희(洪命熹)의 소설 <임꺽정>에서는 도적떼들이 이 고개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재물을 강탈하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오랜 침식작용으로 고개가 낮아지기는 했으나, 겨울철에는 눈이 조금만 내려도 교통 소통에 장애가 있다. * 영취락(嶺聚落) ~ 고개 아래에 발달한 마을을 영하취락(嶺下聚落)이라 하고 고개 위에 있는 마을을 영상취락(嶺上聚落) 이라 하는데, 상업과 교통 및 방어 등의 기능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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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양훈인 참 좋은 동네에 터 잡았네. 서울 도심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기도 하고. 옛날 신촌에서 하숙할 때 봉원사까지는 가봤는 데. 대종이도 연대 뒷산 봉원사 근처에서 하숙했었지 아마. 뉴욕으로 말하자면 그 비싼 Central Park 근처에서 살고 있는 셈이네. 몸은 미국에 있지만, 마음은 한국에 있으니 참 거시기허다. 이런 사진 볼 때마다. 언젠가 한국으로 이주하긴 해야 할텐데. 아이 둘을 안고 날개 옷입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며 한참 동안 금강산을 내려다봤을 나무꾼의 선녀 이야기가 생각날 듯하네. 한 인생 사는게 간단치가 안해. 나만 그런 가?
동네를 굴러댕겨야 몫돈이 생기던 시절에도...
난 어리석다는 소릴 들으며
이곳에 터잡고 살아온 시간이 24년이 되었네....ㅎㅎ
그 유맹헌 센트럴파크만이야 할라고~!
그래도 요즘 우리나라 도시도 디자인을 중시하고
사람중심의 시설들을 꾸준히 개선해 나가다 보니
유교수가 살았던 서울하고는 많이 달라졌을거야!
몸만 미국에 있고 마음은 한국에 있으니... 이게 쉬운 일은 아니야! ㅎ
암튼 사람 한평생 사는게 뜻대로만 안되는 거는 참 안탑깝지 뭐...
미국에 있으나, 서울에 있으나~ 그리고 제주에 있으나 다 마찬가지인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