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탐방 대원들과 경주 역사 탐방을 가는 날이다. 아침부터 세찬 바람에다 기온까지 급격히 내려가 두툼한 외투를 입고 승합차를 타고 경주를 향할 때 역사탐방 대원들의 표정을 보니 역사탐방 나들이를 마냥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는 순간 즐거워해야할 나는 대원들에게 하루 동안 역사여행이 의미 있고 재밌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오히려 살짝 걱정이 되었다.
사실 한국사 강의를 하면서 평생살아 왔지만, 교과서와 학문적인 내용 이외에는 잘 모른다. 그래서 현장 답사 탐방은 부담 스러웠다. 적어도 오늘처럼 역사 탐방을 이끌고 가려면 탐방하고자 하는 문화유산과 관련된 에피소드 및 전설 그리고 건축 공법 또는 그 문화재를 만들게 된 목적이나 그 당시 왕과 관련된 일화 등을 맛깔스럽게 설명을 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고 현장에서도 딱딱한 논리학이나 고증학적인 이야기만으로 만 설명을 한다면 금방 실증을 내고 말 것이다. 등 등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자동차는 어느덧 경주에 도착했다.
첫 방문지는 대릉원이다. 그 곳에 들어가 대릉원의 개념과 역사 그리고 무덤의 구조와 그렇게 만든 목적을 설명하면서 이곳은 신라 상대 왕과 친족들의 무덤 군인데, 그 무덤들이 정확히 누구의 무덤인지를 잘 몰라 1호 2호라는 숫자를 붙여 관리하고 있다가 그 중 155호라고 불러지는 가장 큰 무덤 하나를 발굴해 보았더니 무덤의 구조가 돌무지 덧널식이었다는 것과 또 무덤을 그렇게 거대하게 만든 이유와 엄청난 돌을 넣고 쌓아 만든 목적도 설명해 해 주었다. 그리고 이 능을 천마총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천마도’라는 그림 때문이라는 설명과 함께 이 무덤은 지증왕능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학자들의 견해도 소개 하면서 지증왕과 관련된 에피소드도 들려주었다.
지증왕의 에피소드는 이렇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지증마립간 편에 의하면, 체격이 크고 담력이 월등하여 왕이 되었다는 기록과 그리고『삼국유사』지철로 왕 편에는 왕의 음경길이가 한자 다섯 치(약 45센티)여서 왕비를 구하기 힘들었는데, 후일 왕비가 된 연제부인 박씨의 키가 7척 5촌(약 2.3미터)나 되는 여인을 만나면서 비로소 결혼을 할 수 있었다는 기록을 이야기 하면서 지증왕은 거인증이라 불리는 말단비대증 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내 생각도 말했다.
설명해 준『삼국유사』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지증왕은 체격이 거구였기에 60이 넘도록 배필을 구할 수가 없어 삼도(三道)에 사람들을 보내 배필을 구하러 다녔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모량부(牟梁部) 동로수(冬老樹) 나무 아래에 이르러 보니 개 두 마리가 꽁꽁 얼어 있는 북(鼓)만한 큰 똥 한 덩어리를 양 끝에서 물고 뒤흔드는 것을 보고 동네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웬 계집아이가 말하기를 “이 마을 재상 댁 따님이 여기 와서 빨래를 하다가 숲 속에 들어가 숨어서 눈 똥 이시더.” 라고 하였다는 말을 듣고 그의 집을 찾아가 보니 여자의 키가 7자 5치나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를 왕비로 맞아 들일 때 왕의 나이는 60이 넘었다. 그렇게 결혼해서 법흥왕과 진흥왕의 아버지 김입종을 낳았다는 내용이다.
이런 지증왕 일화를 설명해주었더니 매우 재밌어 하고 흡족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첫 번째 코스 탐방을 마치고 나와 경주 역사 문화유적 군으로 향했다. 역사 문화 유적 군이란?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을 알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하듯이 신라인들의 얼과 문화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 유적 군이다. 그 곳에 도착해 첨성대 앞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평소 같으면 별 생각 없이 저것이 신라시대 천문 관측소다 하고 지나쳤는데, 오늘은 하나씩 설명을 해야 하기에 첨성대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섰다. 국보 제31호인 첨성대는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 관측소라는 말로 시작해 그 모양에는 철학적 의미와 역사적 의미가 있다는 설명을 했다. 그리고 첨성대 바닥을 사각형으로 만든 것은 땅의 모양에서 착안했기 때문이고, 몸집은 하늘의 모양을 본 떠 원통형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땅은 네모고, 하늘은 둥글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체는 술병 모양의 원통으로 만들었고 그 의미 또한 심오하여 네모의 통치자는 왕이라는 뜻이며, 그 통치자는 제사장으로서 하늘에 제사를 올려야 한다는 뜻에서 다시 맨 꼭대기에 네모 모양의 정(井)자형을 정상에 얹어 놓았다고 설명했다.
이런 구조와 의미를 가진 첨성대의 높이는 9.17m로 맨 바닥 사각형의 기단을 포함하면 28단이고, 원통형 부분만 하면 27단이다. 여기서 28단의 의미는 천체의 별자리수를 뜻하고, 27단의 의미는 27대 선덕여왕을 상징하며, 창문틀은 3단인데 그 아래로 12단이고 창문틀 그 위로 12단으로 만든 것은 1년 12달을 의미한다는 뜻이다. 또 이것을 상하 합산하면 24단인데 그 의미는 농사의 24절기를 뜻한다. 그리고 첨성대 돌의 숫자도 총 362개인데, 그것은 음력으로 일 년을 362일로 보고 그렇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일 년 중에서 하지가 되면 햇볕이 바닥까지 들어오게 되고, 동지가 되면 햇볕이 창문틀까지만 비추어 진다고 설명을 했더니 설명을 다 들은 탐방대는 한 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한 참 후 이구동성으로 대단한 뜻이 있네요. 하고 말했다.
그렇게 두 곳을 돌고 나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지나는 길옆에 ‘육부촌’이라는 간판을 보고 부두 요리 전문집인가? 하면서 가볍게 순두부정도 먹는다는 생각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했던 5천 원짜리 식사가 아니고 기본이 15.000원 짜리 식사였다. 정말 무지가 화를 불렀다. 어쩔 수 없이 비싼 밥을 시켜 놓고 주인 아주머니에게 ‘육부촌’이 무슨 뜻인지 물었더니 옛날 6부족이 살았는데, 그 부족의 의미를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듣고 보니 신라 6부족이 생각났다. 그래서 신라의 중앙 행정부는 6부였다. 순간 왜 그것이 생각 안 났을까? 아마 입시 지도를 안 한지가 오래 되어서 그런가 보다하고 나를 위로했다. 그렇게 비싼 밥을 먹은 우리 일행은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불국사로 향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한국이 자랑하는 가장 중요한 고대 문화유산 중에 하나이다. 그리하여 오늘의 역사 탐방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 불국사 앞에서 두 절을 건립하게 된 배경과 전설을 말해 주었다. 불국사와 석굴암의 전설은 경주 근교 모량리라는 마을에 ‘경조 ’라는 가난한 여인이 살았는데, 그 여인에게 한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크고 이마가 평평하여 ‘대성’이라고 불렀다. 그 아이가 어느 날 밭에서 일을 하고 돌아왔더니 ‘점개’라는 스님이 ‘육륜회’ 법회 행사를 위해 시주 얻으러 그의 집에서 설법을 하고 있었다. 그 설법을 가만히 들어 보니 하나를 보시하며 만배의 이익을 취할 수 있고 장수한다는 말에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해서 구입한 작은 텃밭을 보시하였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 안 있어 대성이가 죽었는데, 재상 김문량의 집에서 하늘로부터 “너의 집에 대성이라는 아이가 태어 날 것이다.” 라는 소리를 듣고 그 날 밤 아이를 잉태 했다. 그 아이가 출생한 후 신기하게도 왼손을 꼭 움켜쥐고 있다가 7일 만에 그 손을 폈을 때 그 손에는 금패에다 ‘대성’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그렇게 태어난 그 아이가 청년으로 자라 사냥을 가서 곰을 잡았더니 그날 밤 그 곰이 꿈속에 나타나 꼭 너를 죽이겠다고 하였다. 만약 그 죄를 사면 받으려면 그 자리에 절을 지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장수사’라는 절을 지었다. 그리고 그가 재상이 되어 경덕왕 751년에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에 부모를 위해 ‘석불사’(석굴암)를 지었다고 기록해 놓은 『삼국유사』이야기를 했다.
그런 전설과 함께 지어진 불국사의 백미는 청운교와 백운교 그리고 석가탑과 다보탑이다. 그 중 청운교와 백운교의 의미는 불경 내용을 그대로 인간 세상에 옮겼다고 한다. 즉 불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사는 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물을 건너고 또 구름 위로 가야 한다고 했는데, 그 물을 건너고 구름을 건너기 위해 푸른 구름다리라는 뜻에서 ‘청운교’라 하였고, 또 흰 구름다리라는 뜻에서 ‘백운교 ’라 하였다. 이 청운교 백운교는 총 33계단인데, 33계단의 의미는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33가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다리 아래 위치한 청운교 16계단은 청년시절을 의미하는 뜻도 있고, 다리 위에 위치한 17계단은 백발노인을 의미한다는 뜻도 있다는 설명도 해주었다.
불국사 경내로 들어가 석가탑과 다보탑에 관한 설명도 했다. 석가탑은 751년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이다. 이 석가탑은 국보 제21호로 석가모니 부처님과 부처님의 교화를 상징하는 탑이다. 석가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이다. 불국사 안에 있는 이 석가탑은 높이가 8m 20cm이고 전통적인 석탑의 양식으로 만들어진 탑인데, 이 탑과 관련된 아사달과 아사녀 전설이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수만 리 타국에 남편을 보내고 외로이 남편 없는 텅 빈 방을 지키던 그의 아내 아사녀(阿斯女)는 남편을 찾아 신라로 건너왔다. 머나먼 길에 피곤한 다리를 끌고 불국사 문 앞까지 찾아왔으나, 큰 공역(工役)을 마치기도 전이요, 더러운 여인의 몸으로 신성한 절 문 안에 들어서지 못한다 하여 차디찬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절 문을 지키던 사람도 거절을 하기는 하였으되, 그 정성에 동정하였음이리라. 아사녀에게 이르기를,"여기서 얼마 아니 가면 큰 못이 있는데, 그 맑은 물속에는 지금 짓는 절의 그림자가 뚜렷이 비칠 것이니, 그대 남편이 맡아 짓는 석가탑의 그림자도 응당 거기 비치리라. 그러니 역사가 끝나거든 다시 찾아오라."하였다. 이리하여 아사녀는 공사가 끝나고 그림자가 떠오를 것을 빌었다. 그런데 공사가 끝이 나도 탑의 그림자는 끝내 연못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상심한 아사녀는 고향으로 돌아갈 기력마저 없어 남편의 이름을 부르다가 연못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 후 탑을 완성시킨 아사달은 바로 연못으로 달려갔으나 아사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내를 그리워하며 못 주변을 방황하는데 홀연히 아내의 모습이 앞산에 나타나 바위에 겹쳐졌다. 이 모습이 부처님의 모습처럼 보여 지기도 했는데, 그 후 아사달은 그 바위에 아내의 모습을 새기고 고향으로 유유히 사라진 후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이런 전설과 함께 국보급 문화재를 많이 간직한 불국사는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생전에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 후 국가에 의하여 완성할 때까지 30여 년의 세월이 더 걸렸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이 약 2,000칸이나 되었다. 그런데 불행이도 1593년 5월 임진왜란의 병화로 2,000여 칸의 대가람이 불에 타버리자 선조 1604년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순조 1805년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국가적으로 또는 승려들에 의하여 부분적인 중수(重修)가 이루어졌으나 조선 후기 국운(國運)의 쇠퇴와 더불어 사운(寺運)도 쇠퇴하여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도난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는 설명을 마지막으로 매듭을 지을 때 이미 해는 너무 기울져 곧 어둠이 내릴 것만 같이 불안해 지기 시작 했다. 그리하여 서둘러 석굴암으로 향했다.
석굴암에 오르기 위해 차에서 내리자 매서운 칼 바람과 함께 살갖을 파고드는추위는 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이 차가웠다. 그래도 탐방대 일행은 세계적 문화유산을 본다는 기쁨으로 추위에 떨면서 석굴암으로 향했다. 석굴 사원은 일찍이 인도와 중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사원이다. 그 지역은 사암(砂巖)으로 굴을 뚫기가 쉬워 석굴 사원에 부처님을 많이 모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산과 바위는 딱딱한 대리석으로 형성되어 있어 불가능하다. 그래서 김대성은 산을 파고 들어가 그 안에 대리석으로 마감재를 하여 천장에 흙을 덮어서 만들었는데, 구조는 천원지방(天圓地方)에 근본을 두고 설계하였다.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전방후원으로 만든 것이다.
전방은 예불 공간으로 만들었고, 후방은 석가여래와 10대 제자 그리고 12나한상을 조각하여 배치하고 천장에는 총 5단으로 대리석 판을 쌓아 가면서 팔둑 돌을 꽂아 쪼이게 하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1단과 2단은 13개의 평판 석을 쌓아서 만들었고, 3, 4, 5단은 10개의 평판 석을 쌓아서 만들었는데, 놀라운 것은 기하학적 건축공법에 허용 오차 1만의 1이라는 사실과 천장 덮개돌은 높이 1미터에 넓이 2.5미터로 그 무게는 무려 20톤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 육중한 무게 돌에 연꽃을 조각해 천장에 올리려고 한 것은 절대자의 진리를 유감없이 표현해 내고자 함이었는데, 그만 3조각으로 깨지고 말았다. 이에 김대성은 낙심하여 기도를 했더니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세 조각이 난 천장을 원형 그대로 고쳐 놓은 다음 어디론지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는 감격한 나머지 신선을 칭송하면서 토함산 남쪽에 있는 남령에 향을 피우고 성대한 제사를 올렸다. 그리하여 남령을 지금도 향령이라 부른다는 전설 도이야기 해 주었다.
이런 전설을 가지고 있는 석굴암은 우리나라와 세계를 대표하는 불교 미술이다. 자연 암벽을 직접 뚫지 않고 크고 작은 돌을 쌓아 만든 석굴암의 독특한 건축법은 세계의 자랑거리다. 인도나 중국의 석굴은 모두 자연의 암벽을 뚫어서 내부 공간을 만들었고, 또 긴 세월에 걸쳐 같은 장소에 여러 개의 석굴을 완성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석굴암은 크고 작은 화강암을 차례차례 쌓아 올려 인공적으로 석굴을 조립하였다. 바로 이 점이 석굴암 건축사의 특색이다. 석굴암은 그 조각 솜씨의 뛰어남과 전체적인 조화의 미를 전문가의 설명을 빌려 탐방대원들에게 전달을 했다.
먼저 배치구조에 대해 10분의 1비율부터 설명했다. 석굴암의 배치부터 생각할수록 놀랍다. 석굴암의 배치 구조는 기원전 25년 헬레니즘 사상가인 비트루비우스가 주창한 '균제비례(Symmetry)'와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건축미는 건물 각 부의 치수관계가 올바른 '균제비례'를 이룰 때 얻어진다."고 했다. 균제비례는 인체에서 얻어진 것이며, 인체에서 가장 아름다움과 안정감을 주는 비율이다. 이에 석굴암 본전 불상도 이런 균제비례가 적용되어 빼어난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설굴암 본전불은 얼굴과 가슴 어깨 무릎의 비율이 1:2:3:4 의 비율로 되어 있어 본존불상 자체를 1로 봤을 때 10분의 1인 균제비례가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신라인들이 당시 비트루비우스의 균제비례를 알았을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신라인들은 비트루비우스가 알아낸 안정감과 아름다움의 비율을 이미 알고 있었고 석굴암의 공간마다 이상적인 비례배분을 적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석굴암 전체의 구조를 기하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모든 공간이 가로 세로 또는 세로 가로의 비율이 1:2인 직사각형으로 이뤄져 있다고 하니 신라시대의 과학기술 수준에 놀랄 뿐이다. 또한 후실 돔형 천정 반지름은 하루 12시를 나타내고, 돔의 둘레 360도는 태음력의 1년 나타내며, 돔의 지름 24척은 하루의 24시간을 나타내는 우주 공간의 축소 구조이다.
또 돔의 중심과 전실 중심으로 이어지는 직선방향은 동짓날 해 뜨는 방향과 일치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후실의 돔 천정은 당시 천문도가 응용된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석굴암의 건축물에 적용된 응용 수학은 통일 신라 시대를 대표하는 기초적 수학을 총망라했을 정도로 완벽하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에 착공되어 금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약 1.200년을 지탱해 오고 있는데, 이는 석굴암이 평면 기하학을 기초로 하는 입체 기하학의 지식도 발휘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하학, 천문학, 종교, 물리학이 추구하는 근본적인 진리를 모두 담고 있는 석굴암의 예술은 그래서 더욱 위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그러나 신라시대에 만들어져 모진 세월을 버틴 석굴암에 일제 때부터 보수공사를 해오면서 오히려 누수현상, 습기, 이끼 등이 생겨났고,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1.200년 전 신라인들은 대리석에서 발생하는 결로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1년 내 물이 샘솟는 곳을 찾아서 석굴암을 지었고 그 안에 감로수를 흐르게 해 결로현상을 방지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과학으로 그 현상을 해결하지 못해 인공적인 통풍 장치를 만들어 관리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는 설명을 마지막으로 하고는 하루 일정을 마쳤다.
설명이 끝나고 토함산을 내려 올 때 매서운 추위는 오를 때 보다 더 심해 발 걸음 조차 옮기기가 힘이 들었지만, 신라인들의 얼과 훌륭함을 생각하면서 총총 걸음으로 돌아와 차에 앉을 때 내가 인솔해 간 첫 역사 탐방도 끝이났다. 나는 차를 타고 오면서도 한 참 동안 석굴암 구조와 배치 그리고 과학과 수학 및 예술성의 놀라움에 한 참 동안 아무 말을 하지 안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석굴암을 만들면서 석공과 학자들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니 어느새 내 마음도 숙연해 졌다. 그러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훌륭한 지혜를 가진 그런 조상들의 후손임이 자랑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차에서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 벌써 부산에 도착했다. 잠에서 깨어난 모습이 조금은 민망하기도 했지만, 오늘 역사 탐방은 보람이 있었다는 탐방대원들의 인사에 나도 보람을 느낀 하루였다.
2012년 12월 28일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