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사 원공 묘갈명(統制使元公墓碣銘)
[생졸년] 1647년(인조 25)~1706년(숙종 32) / 향년 59세
숙종 병술년(丙戌年,1706, 숙종32) 7월 3일, 평안 병사 원덕휘(元德徽) 공이 임소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0세였다. 성상께서 놀라고 애도하여 연도에서 호상하라고 특별히 명하니, 원주(原州) 가정(稼亭) 유좌(酉坐) 언덕으로 반장(返葬)하였다.
공은 원주(原州) 사람으로 자는 군미(君美)이다. 선조(先祖) 중에 우리나라의 문정공(文靖公) 효연[孝然,1404년(태종 4)~1466년(세조 12)]이 가장 널리 알려졌다. 증조 사열(士說)은 전부(典簿,종친부에 두었던 종5품직)를 지냈고, 조부 흡(翕,1590~1628)은 참판에 추증되었고, 부친 상(相)은 통제사(統制使)를 지냈다. 모친은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부친은 훤(暄)이다.
공은 어려서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독서하여 이름을 알리기도 전에 신해년(辛亥年,1671, 현종 12)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겸 비국랑(備局郞)에 임명되었는데 글솜씨가 물 흐르듯 하였다.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를 거쳐 해남 현감(海南縣監)이 되어 교활한 아전을 법으로 통렬히 다스리다가 마침내 죄에 연좌되었다.
얼마 후 서용되어 삼수 군수(三水郡守,現북측 양강도의 옛지명)가 되었는데, 땅이 척박하고 백성이 가난한 곳에서 지성으로 그들을 다독였다. 돌아와서는 통신사가 추천하여 자신을 보좌하게 하였다. 돌아올 적에는 행낭이 씻은 듯 아무 것도 없고 오직《사기(史記)》와 《한서(漢書)》몇 질 뿐이었다. 그리고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에 임명되었다.
을축년(乙丑年,1685, 숙종 11), 진주 영장(晉州營將)으로 발탁되어 장사들을 선발하고 병법을 가르쳤다. 조정으로 들어와 겸사복장(兼司僕將)이 되고, 금위영(禁衛營) 천총(千總)으로 있을 때 달마다 시사(試射)하여 맞춘 것이 많아 성상이 표창하고 말을 하사하였다.
영종도(永宗島)가 새로 방어영으로 승격하자 공이 첨사(僉使)가 되었는데, 적절히 다스렸으나 작은 허물로 여주(驪州)에 유배되었다. 통제공(統制公,아버지를 지칭함)이 세상을 떠나자 성상께서 듣고 불쌍히 여겨 특별히 사면하여 돌아오게 했다. 상을 마치자 내금위장(內禁衛將)이 되고, 전라좌도(全羅左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다.
성안에 불이 번져 60여 호가 소실되었는데, 공이 재목과 양식을 주어 각기 안도하게 하였다. 당시 큰 기근(飢饉)이 들었는데 살린 사람이 많았다. 전염병에 걸리자 대신(臺臣)이 그의 재주를 아까워하여 아뢰어 체직(替直)시켰다. 경상좌도(慶尙左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승진하였는데, 병영의 온갖 군수(軍需)를 군졸에게 요구하는 폐단이 오래되었다.
공이 가서 혁파하고 따로 저축을 쌓아 그 비용을 지급하니 군사들이 몹시 기뻐하였다. 돌아간 뒤 어떤 이는 사판(祠版)을 설치하여 밥 먹을 때마다 제사 지냈다. 신사년(辛巳年,1701),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발탁되고 통제사(統制使)로 옮겼다. 선친 통제공이 전함에 천금을 두어 비상시를 대비하였는데, 공이 또 그 수량을 갑절로 늘렸다.
부임하는 변방의 진(鎭)에 선친의 옛 자취가 많아 종종 큰 비석을 나란히 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병으로 해직되어 돌아와 부총관(副摠管, 오위도총부에 딸린 정이품 벼슬) 포도대장에 두 차례 임명되었다. 대신(臺臣)이 여러 곤수(閫帥)를 논죄하면서 공까지 뭉뚱그렸기에 공론이 원통하다고 하였다.
얼마 후 서영(西營, 평안 병영)으로 부임하였다. 세상을 떠날 적에 자제들에게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라고 경계하였다. 공은 중후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집에 있을 적에는 상례와 제례를 신중히 하였다. 형제에게 우애하고 친족에게 돈독하였으며, 정사를 할 적에는 관대하고 분명하여 가는 곳마다 민심을 얻었다. 여색을 멀리하기는 장수들 중에 홀로 그러하였다.
부인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충의위 득로(得老)의 딸로 여사(女士)의 풍도가 있었다. 시아버지가 한가로이 지내면서 술 마시기를 좋아하자 따로 작은 잔을 만들어 바쳤으며, 또 간혹 부드러운 목소리로 간언하니, 시아버지가 말하기를, “나의 어진 며느리이다.” 하였다.
공보다 9년 뒤 69세로 세상을 떠나 공의 묘소에 부장하였다. 두 딸은 이기조(李箕朝)와 군수 이정설(李挺卨)의 아내가 되었다. 후사로 삼은 아들 명규(命揆)가 설악산 아래로 나를 찾아와 글을 청하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간곡히 청하였다. 마침내 글을 짓는다.
훌륭하도다 통제공의 말씀이여 / 善乎先統制之言
나는 청렴결백을 너에게 주고 싶을 뿐이다 / 吾欲以廉白遺汝耳
공이 죽을 적에도 / 公之將死
내게 누를 끼치지 말라 하였네 / 亦曰勿累我
아, 소자들아 / 嗟小子
이것이 선조를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니 / 是謂無忝
아, 명을 지을 만하다 / 嗚呼可銘也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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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解]
[주01] 통제사 원공 묘갈 :
이 글은 원덕휘(元德徽)의 묘갈명이다. 원덕휘의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군미(君美)이다. 1647년(인조 25) 태어나 1706년(숙종
32) 7월 3일 세상을 떠났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