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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13 - 발루아왕조 샤를 8세, 6만으로 이탈리아를 정복해 유럽을 격동시키다!
100년 전쟁에서 영국군을 몰아낸 프랑스는 40년 후인 1494년에 샤를 8세 (1483-1498) 가
대군을 거느리고 이탈리아에 침입했는데.... 이탈리아의 군주들은 용병대장에게 전쟁을
맡겼으나, 샤를 8세가 친정한 군대는 대살육전을 전개하며 콘도티에레 군대를 격멸했으니
이 사건이 스페인 왕과 신성로마제국(오스트리아) 황제 등을 자극해 전쟁이 계속 이어집니다.
15,6세기 유럽 전쟁사에 영국· 프랑스· 스페인, 오스트리아는 전쟁의 주역으로, 이탈리아는 나폴리
·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교황령(로마) 등 다섯 군소국으로 분할되어 있었으니.... 15세기
말에 내전으로 혼란을 겪게 되자 동맹관계의 인접국 군대를 불러들이는 바람에 1494~1559년
이탈리아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드니 각축전을 벌인 주요 강대국은 프랑스와 스페인 이었습니다.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는 보병 4만명을 비롯한 65,000명 대군으로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에 침입했으니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피렌체를 점령하고 로마로 진격한 뒤, 이듬해에는 나폴리
까지 함락하고 베네치아와 밀라노 연합군에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전 이탈리아를 수중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이 침략전쟁은 모든 이탈리아 군소국들 뿐만 아니라 나폴리를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는
스페인왕, 북부 이탈리아와 알프스 무역로의 안전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신성로마
제국황제 등을 자극해 전쟁에 끌어들임으로써 전쟁을 확대시켰으며 한편 스위스 용병들은
이 전쟁을 돈을 벌수 있는 호기로 반기고 이편, 저편에 가담하면서 무차별로 전투를 벌였습니다.
초기에 샤를 8세의 혁혁한 승리는 '콘도티에레(용병대장) 전쟁시대' 의 막을 내렸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으니 이탈리아의 군주들은 용병대장과 계약을 맺고 전쟁을 맡겼는데, 일반적
으로 용병대장은 격렬한 전투를 피하고 기동훈련을 하는 식의 부드러운 전쟁을 진행시켰지만
샤를 8세의 군대는 질풍처럼 몰아치고 대살육전을 전개함으로써 콘도티에레 군대를 격멸합니다.
여기서 이탈리아인들은 크게 충격을 받았으니 유명한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는 불후의 저서
“군주론” 과 “전술론” 을 통해 후세 정치인들과 군인들에게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군사력
육성과 군사개혁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강조했으며 특히 용병이나 원병이
아닌 국민군대의 필요성, 보병 · 포병 위주의 군사력, 결전을 통한 승리 추구 등을 역설합니다.
샤를 8세는 이탈리아를 휩쓸면서 최신의 대포 기술을 선보였으니 가벼운 청동포를 개발하여 그것을
보병부대 행군속도에 맞추어 이동하는 야포로 사용하였으며 또한, 돌멩이 대신에 금속뭉치를
포탄으로 사용한 것은 포술을 한 단계 높인 중요한 발전이었는데 그러나 성벽 공격용 대포를 개발
하는데 치우쳐 있었으니 기동성 있고 신속하게 발사할수 있는 야포는 17세기가 되어서야 나옵니다.
이탈리아 전쟁 초기에 또 하나의 특징으로는 '아퀴버스(arquebus)' 라는 화승총 사용을 들 수
있으니 종래의 총보다 가벼우면서 사거리는 늘어나고 정확성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화승
- 발사 장치를 개발하여 발사 방법이 한결 편리해졌으니 화승에 불을 붙여 점화하는 대신에
방아쇠를 이용한 화승- 발사장치에 의한 자동 점화가 가능해져 발사의 효율성이 높아졌습니다.
1503년의 체리놀라 전투에서 스페인의 곤살로 데 코르도바의 보병대는 화승총 부대를 적절히 활용
해 창병과 기병 위주로 편성된 프랑스군을 크게 격파했으니.... 비록 이 전투는 참전 병력이 적고
정치적 의미도 별로 없는 전투였으나, 전쟁사적으로는 소총보병 시대의 개막을 알린 서곡이었습니다.
1525년의 "파비아 전투" 에서 스페인의 화승총 부대는 귀족으로 기사들인 프랑스 기병대에게
승리함으로써 또다시 그들의 우수성을 확실히 입증했는데, 이탈리아 전쟁은 이탈리아
정치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용병 군대와 기병의 한계를 드러내고 소총
보병대의 위력과 대포의 등장에 따르는 보병 · 포병 · 기병 협력의 필요성 등을 입증했습니다.
아시아에서 보면 평민으로 구성된 소총병들이 귀족인 사무라이 군대를 격파한 세이난전쟁
(西南戦争) 이 파비아 전투와 매우 유사하니..... 1868년 무진전쟁에서 목숨을 바쳐서
막부를 무느뜨리고 메이지유신을 이룩했음에도, 서구식 근대화 정책으로 토사구팽당해
사무라이의 특권과 수입인 연봉을 잃고 낭인(실업자)이 된 사무라이들의 불만이 고조됩니다.
그러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들의 불만을 달래고 또 영국, 프랑스, 미국 및 러시아등이 조선을 차지
하면 그 세력으로 일본의 안보가 위험해진다며 제기한 정한론(征韓論)을, 조선의 종주국 청나라
와 전쟁을 하기 위한 군비가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지라 시기상조라며 이토 히로부미와
오쿠보 도시미치가 거부하자 낙향한 사이고 다카모리 휘하에 낭인이 된 사무라이들이 집결합니다.
1877년 2월 사무라이군 1만 3천이 평민들로 구성된 정부군 소총병 3천이 수비하는 구마모토성을 포위
하니 전투(熊本城の戦い)가 벌어지는데, 사무라이 1만 7천이 증원돼 3만이 되었고 정부군도 1만 5천
명이 지원오는데 57일간 계속된 전투에서 함락에 실패하니, 원인은 2가지로 첫째는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에서 잡아온 수많은 조선인 포로(노예)를 동원해 튼튼하게 쌓은 구마모토성이 난공불락이었습니다.
조선인들은 성을 쌓은 공로를 인정받아 마을을 이루었으니 현재 구마모토시 “우루산마치” 이며, 두번째는
오무라 마스지로가 서양식으로 훈련시킨 평민들로 구성된 소총대가 예상외의 높은 전투력을 발휘한 것
이니..... 그후 증원된 정부군은 7만에 이르자 결국 사무라이들은 패퇴했는데 파비아전투와 세이난전쟁
은 귀족 기사(사무라이)들의 시대가 조종을 울렸으니 군사면에서 중세가 끝나고 근세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세이난(서남)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가 2004년에 개봉한 “라스트 사무라이” 인데, 막부군
(정부군) 의 훈련 교관이었던 미군 중위(톰 크루즈) 가 반란군에게 생포되어 사무라이
문화에 빠진 끝에 아예 사무라이 갑옷을 걸치고 반란군의 선봉에 선다는 얘기인데, 최고의
전쟁 영화라는 사람도 있고 일본 귀족 문화에 반한 미국 '쌍놈' 이야기 라는 악평도 있습니다.
총과 대포로 무장한 정부군을 향해 말을 타고 돌진하는 반란군(사무라이군)의 장려한 낙일
(落日)은 벚꽃 엔딩처럼 애잔한데..... 주목할 부분은 정부군의 절도있는 행군 모습이니
메이지 유신 전까지 일본인들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시대물 처럼 발로 땅을 스치듯
흐느적거리며 걸었으니 이른바 '난바' 라는 이 걸음걸이는 진흙탕에서 농사짓던 농민들
의 동작이 일상화한 것이니 마스지로는 이걸 바꾸어 행군이 가능한 군대를 만든 것입니다.
루이 12세(1498-1515) 는 샤를 8세가 1498년 젊은 나이에 죽자 샤를 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손자로 왕위를 계승했는데, 총신분회의 개최를 통해 통치제도 및 조세
제도 개혁을 실시해 당대인들로 부터 ‘인민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부여받았으며 밀라노 정복
과 나폴리왕국 정복등 무리한 대외 원정을 실시했으나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결국 실패합니다.
루이 12세는 중세말 시인으로 유명했던 오를레앙 공작 샤를의 아들이자 샤를 6세의 동생
으로 무겁공 장 1세에 의해 암살되었던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손자이니,
샤를 6세의 직계 후손인 샤를 8세가 1498년 젊은 나이에 남성 후손 없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게 되자 남성남계에 따른 왕위계승 원칙에 따라 왕위에 올랐습니다.
부친 샤를 1세는 그가 3살이던 1465년에 사망했으니 루이 11세가 후견인이 되어 엄격하게 교육을
시켰는데 14세가 되던 해에 루이 11세는 절름발이 장애가 있는 딸 잔과 루이 12세를 결혼
시켰으며, 1483년 루이 11세가 사망하자 투르에서 총신분회의가 개최되었고 여기에서 13세에
왕위에 오른 샤를 8세의 섭정으로 큰누나 안 드 보죄와 그의 남편 피에르 드 부르봉이 지명됩니다.
이러한 결정에 불만을 품은 루이 12세는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1488년 진압을 당해 투옥
되었다가 1491년에 사면된 루이 12세는 1494년에 샤를 8세와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기 위한 원정에 참가했다가 함께 돌아왔으며 1498년 샤를 8세가 남성 후사
없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자 그와 가장 가까운 남성남계 왕손으로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면서 1484년 총신분회의의 제안에 따라 왕국에 전면적인 개혁을 실시하여 인민
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동시대인으로 장미전쟁에서 승리해 튜더왕조를 연 잉글랜드
의 헨리 7세 처럼 사법 체계를 효율적으로 혁신하고 통치 체계를 정비했으며 귀족에게 하사
하는 연금을 줄이고 세금을 감면하면서 불만을 잘 관리했으며 프랑스 교회주의를 재확립했습니다.
루이 12세는 1506년 총신분회의에서 ‘인민의 아버지’ 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협상을 하여 그의 아들(외부에는 조카로 발표!) 체자레 보르자가 발렌티누아 공작이
되도록 도와주는 대신 루이 11세에 의해 강제로 시행된 잔과의 결혼을 무효화했으며 곧 샤를
8세의 왕비였던 안 드 브르타뉴와 결혼해 브르타뉴 공작령을 다시 한번 프랑스에 병합시킵니다.
그 이후 루이 12세는 샤를 8세의 뒤를 이어 다시 한 번 이탈리아 원정을 준비했는데 그는 나폴리 왕국
에 대한 프랑스 앙주 가문의 계승권 뿐만 아니라 밀라노 공작에 대한 계승권까지 주장했으니.....
밀라노의 지배 가문인 비스콘티 가문 출신의 발렌틴이 바로 자신의 조모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밀라노는 1494년 샤를 8세 원정 당시 프랑스에 호의를 보이며 길을 내주었다가 바로 그 다음 해에는
베네치아 동맹에 합류했는데, 바로 이 사건이 당시 샤를 8세와 함께 참전했던 루이 12세의 눈에는
배신으로 비춰졌으니 따라서 루이 12세는 밀라노를 장악하고 있던 루도비코 스포르차(비스콘티
가문의 사위로 후계자)를 응징하고자 했고 조모를 내세우며 비스콘티 후계자의 복귀를 주장했습니다.
아울러 원정에 앞서 주변 국가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잉글랜드, 합스부르크, 에스파냐에다가
스코틀랜드, 스위스, 사부아 등과 평화 조약을 맺어 외교적 관계망을 튼튼히 해 놓았으니
이렇게 해서 1499년 8월에 2만 7천명의 병력으로 이루어진 루이 12세의 이탈리아
원정이 시작되었으니 루이 12세는 리옹에 머무르면서 전쟁의 진행 상황을 보고받았습니다.
프랑스군은 밀라노로 진격해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베네치아 동맹군을 패퇴시킨후 9월 17일 밀라노시를
함락하니 루이 12세는 밀라노로 이동해 10월 6일 입성식을 했는데, 스위스로 피신하여 권토중래를
노리던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스위스 용병들을 고용해 1500년 1월 중순 밀라노로 진격하니 스포르차
의 귀환 소식에 친 스포르차파는 밀라노 에서 봉기했고 이를 통제하지 못한 루이 12세군은 후퇴합니다.
루이 12세도 스위스 용병을 고용해 스포르차를 공격하니 양 진영의 스위스 용병들은 같은
동족으로 서로를 공격하지 않았고, 두 쪽의 스위스 용병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자 대부분
의 군대를 스위스 용병에게 의존했던 스포르차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으니..... 결국에는
스포르차는 포로로 붙잡혀 프랑스의 로슈 감옥에 투옥되어 1508년 그곳에서 숨을 거둡니다.
밀라노를 다시 정복한 루이 12세는 밀라노 시민들에게 관대한 조치를 취했고 교역을 활성화
하면서 밀라노에서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해 나갔으며 서쪽의 제노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이에 제노바는 루이 12세와 협상을 벌여 그의 통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
했는데 루이 12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샤를 8세가 실패한 나폴리 왕국 정복에 나섭니다.
하지만 나폴리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피렌체가 위치해 있었고 루이 12세는 전통적인 우방국
이었던 피렌체와 싸우기 보다는 평화롭게 길을 얻는 방안을 강구했으니, 피렌체가
정복한 피사의 반란을 프랑스군이 진압해 주고 피렌체의 호의를 얻는 것이었지만
생각보다 피사 함락은 쉽지 않았고 결국 프랑스군은 피사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루이 12세는 나폴리로 진격하기전 에스파냐 페르난도 2세 및 이사벨라의 적대행동을 막기위해 1500년
11월 11일 그라나다 조약을 체결했으니, 루이 12세가 나폴리를 점령할 경우 영토를 에스파냐와 분할
한다는 내용을 담고있는 것으로 에스파냐에 의한 이탈리아 개입의 시작을 알렸으니 이탈리아인들
에게는 자신들의 땅을 강대국의 싸움터로 만드는 일로 여겨졌고 마키아벨리의 강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1502년 루이 12세와 페르디나도 2세는 손쉽게 나폴리를 점령했으나 세부적인 분할 문제들과 관련해
불화를 일으켜 두 왕들 간의 무력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고 1504년 루이 12세는 나폴리에서
쫓겨나 밀라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으니... 이탈리아는 북부는 프랑스, 남부는 에스파냐라는 거대
왕국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두 강대국에 저항할수 있는 세력은 베네치아와 교황 국가 둘 뿐이었습니다.
1503년 알렉산데르 6세가 죽고 새로운 교황으로 그의 철천지 원수였던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가
율리우스 2세로 선출되었는데.... 그는 예전에 교황령에 속했던 영토를 장악한 베네치아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베네치아를 함께 분할·점유할 것을 목표로 하는 캉브레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 동맹에는 루이 12세와 교황은 물론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 에스파냐의 페르디난도 2세
와 같은 거대 군주들뿐만 아니라, 여러 이탈리아 도시국가 군주들이 참여했으니.... 이렇게 해서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 있는 많은 영토를 강대국에 의해 갈갈이 분할·점령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1510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전략을 바꾸어 프랑스를 공동의 적으로 하는 신성
동맹(가톨릭 동맹)을 새로이 조직했으니, 그는 베네치아가 완전히 붕괴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고, 그가 보기에 캉브레 동맹의 승리 이후 이탈리아에 위험한 세력은
밀라노를 장악하고 있는 프랑스였기 때문이었으니 어제의 적과 동지가 서로 바뀐 것입니다.
이제 이 새로운 신성동맹에는 프랑스를 제외한 캉브레 동맹국 외에도 스위스 연방과
잉글랜드 헨리 8세까지 가담했고 루이 12세는 이 거대한 연합군을 상대해야
했으니 결국 1513년 루이 12세는 밀라노에서도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아들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가 다시 돌아와 밀라노를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밀라노에서 후퇴한 이후 루이 12세는 크게 낙심해 기력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는데 1514년
1월에 왕비 안 드 브르타뉴가 사망하자, 루이 12세는 같은 해 10월 잉글랜드 왕
헨리 8세의 여동생 메리 튜더와 결혼하면서 신성동맹 이후 양국 간의 화해를
추진했지만 장출혈에 시달리던 루이 12세는 결국 1515년 1월 1일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안 드 브르타뉴 사이에서도 남성 후손이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왕위는 다시 거슬러 올라가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둘째 아들인 앙굴렘 가문 후손들에게로 넘어갔으니..... 루이 12세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은 바로 앙굴렘 백작 샤를의 아들 프랑수아 1세였으니 프랑스는
카페왕조 - 발루아왕조 - 앙굴렘왕조로 이어지는데 하지만 핏줄은 같으니 같은 성씨들 입니다.
루이 12세는 비록 이탈리아 원정에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프랑스 왕국 내에서는 매우 존경받는
왕으로 평가받는데, 특히 바로 전의 왕이었던 독단적인 루이 11세에 비교했을 때 모든 일을 총신분
회의에서 결정하고 납득할만한 정책을 시행한 루이 12세는 후대에도 지속적으로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프랑수아 1세 (1515-1547) 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차남인 앙굴렘 백작 가문 출신으로 이탈리아
정복을 두고 최대의 영토를 자랑하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경쟁 구도를 이루었고 대내적
으로는 르네상스 예술과 인문주의 문화의 확산, 절대주의적 체제의 토대구축을 추구했으며 아메리카
탐사와 인도양 교역에 관심을 보였지만 절대주의적 경향과 종교 개혁에 대한 탄압은 숙제를 남깁니다.
루이 12세는 사촌인 샤를의 아들 프랑수아 1세를 잠정적인 왕위계승자로 생각했으니 어려서부터 루이
12세가 있는 루아르강의 앙부아즈성에서 어머니 루이즈 및 누이 마르그리트와 함께 성장했는데,
학문과 예술을 좋아하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로 운동은 물론 인문주의 교육에도 큰 흥미를
보였으며 12살이 되는 1506년에 루이 12세의 딸 클로드와 약혼했고 이때부터 블루아성에 거주합니다.
1512년 왕비 안 드 브르타뉴가 사산을 하자 루이 12세는 그를 국왕참사회에 참석하게 하는가
하면 기옌 총사령관에 임명했으니 이러한 이유로 프랑수아 1세의 즉위는 누구나 예상할수
있었으며, 1515년 루이 12세가 사망하자 2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데 실제로 그는
인문주의적 소양이 알려질 만큼 그동안 왕이 되기 위한 교육을 충실히 받아왔던 터였습니다.
프랑스 왕국은 대내적으로는 지방분권적인 봉기나 반란은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했으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운동의 자극으로 프랑스에서도 문예와 예술 분야에 발전이 이루어졌고 왕권
또한 강화되어 나갔으며 대외적으로는 이탈리아로의 진출과 공략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는 샤를 8세와 루이 12세의 선례에 따라 이탈리아에 끊임없이 관심을 보였고 또 다른 라이벌
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의 충돌을 불러일으켰는데.... 이처럼 그가 벌인 대·외적인
사업은 겉으로는 활발하고 화려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국가 재정의 부족에 시달리게 만들었습니다.
1515년초 즉위하자마자 프랑수아 1세는 밀라노로 진격했으니 루이 12세의 뒤를 이어 밀라노 공작
에 대한 권리를 내세웠던 것으로 국제적인 상황은 매우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는데, 루이 12세
에게 비참한 패배를 안겨주었던 신성동맹은 거의 와해된 상황이었으니 잉글랜드와 베네치아
가 동맹에서 탈퇴한데다가...... 동맹의 제창자인 교황 율리우스 2세 또한 1513년에 사망했습니다.
프랑스군의 밀라노 진격을 막을수 있는 세력은 밀라노를 보호령으로 한던 스위스밖에 없었으니
9월 마리냐노에서 스위스군에 대승을 거둔 프랑스는 다시 밀라노를 차지했으니, 프랑수아
1세는 북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역에 대해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고 나아가 교황
레오 10세와 볼로냐 협약을 맺어 프랑스 성직자들에 대한 왕권의 통제력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프랑수아 1세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으니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전역을 통치하게 될 카를 5세가
등장했기 때문인데, 1516년 스페인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사망한후 그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라
사이에 태어난 후아나가 여왕으로 왕국을 계승했으니, 부르고뉴 여공작 마리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 사이에 태어난 필립 1세와 결혼한 상태로 6명의 자식 중에 장자가 카를 5세 였습니다.
필립 1세가 1506년에 사망한 상태에서 카를 5세는 1516년 외조부 페르란도 2세가 사망하자 어머니와 함께
에스파냐 공동 왕위에 즉위했고 1519년에는 조부 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하자 제노바 자본가들의 후원을
받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었으니 양쪽 조부모로 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와 부르고뉴 공국
의 영토,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물론이고 나폴리 왕국에 남아메리카 스페인 식민지까지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입장에서 보면 북쪽의 잉글랜드를 제외하고는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유럽 전역이
카를 5세의 손아귀에 장악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미 루이 12세가 걱정한 바대로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프랑스가 중간에 낀 상황에다가 더 큰 문제는 해상로도
아라곤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와 카스티야를 중심으로 한 대서양까지 카를 5세에게 장악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당연히 프랑수아 1세를 초조하게 만들었고 나아가 카를 5세와의 대결이 임박
했다는 것을 느끼게 했으니 그는 1520년 영국의 헨리 8세와 동맹을 시도했으나 둘
사이의 개인적 갈등은 물론 각국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으며
프랑수아 1세는 1521년 11월부터 4년에 걸쳐 카를 5세의 군대와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하지만 1525년 2월 24일 벌어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의 군대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해 밀라노를 잃고 그의 포로가 되었으니 자신의 말대로 “명예를 제외한 모든 것을 잃은”
프랑수아 1세는 1526년 1월 마드리드 조약에 서명해야 했고, 그 조약에는 밀라노와 나폴리
왕국에 대해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과 부르고뉴 공국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이라!
그가 풀려나면 두 아들 프랑수아와 앙리가 대신 볼모로 마드리드에 온다는 조건도 들어 있었는데 하지만
3월 17일 포로에서 석방되어 프랑스로 돌아온 프랑수아 1세는 강요에 의한 것이기에 무효라고 주장
하면서 이탈리아에 개입하고자 했는데 1526년에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카를 5세의 세력에 위협을 느껴
베네치아와 코냑 동맹을 맺자 프랑수아 1세도 동맹에 가해 1527년에서 1529년까지 전쟁을 벌입니다.
이후로도 1546년까지 수차례에 걸쳐서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와 전쟁을 치렀고 카를 5세의
거대한 제국과 그 권력을 붕괴시키기 위해 다양한 합종연횡을 시도했으니 그는 카를 5세
에게 저항하는 독일 제후들과 동맹을 맺기도 했고 심지어 신성로마제국 동쪽에서 새롭게
지중해로 진출하고 있던 이교도 이슬람 오스만제국과도 1528년부터 다양한 협상을 시도합니다.
물론 카를 5세도 프랑수아 1세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키지를 못했으니.... 이유는 신성로마
제국의 내부적 문제 때문이었는데, 덩치만 컸지 실질적으로는 각 지방 제후들에 의해
분권화되어 있던 신성로마제국에서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의 여파로 1531년에
루터파 제후들에 의한 슈말칼덴 동맹이 결성되어 내부에서 황제와 맞섰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에서 절정에 달해있던 르네상스 및 인문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으니... 이탈리아의 유명한 예술가들을 프랑스로 초빙
하여 작업을 후원했는데 조각가 벤벤누토 첼리니,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프랑스에
초대를 받았고 특히 다빈치는 프랑스 루아르강변에 정착해‘라 조콘다(모나리자)’를 완성합니다.
르네상스 예술의 유입과 더불어 왕실 축제와 연회는 다채로워졌으며 이탈리아 예술품을 수집하여
1530년에 왕실 애장품 전시관을 창설했으며 르네상스에 대한 관심은 건축으로 이어졌으니
루아르 강가에 세워진 르네상스식 궁정들이었는데 블루아성이나 샹보르성 그리고
퐁텐블로성이라 미적인 가치를 지니는 르네상스식 건축물들이 프랑수아 1세 치세를 수놓았습니다.
프랑수아 1세는 또한 문예 활동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니 루이 11세 당시에 도입된 인쇄술
이 크게 발전하였고 1518년에는 블루아성에 방대한 왕실 도서관을 설치했으니 또한
인문주의자인 기욤 뷔데에게 이탈리아식의 고전 문헌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인문주의
학교 및 도서관 창설을 위임하여‘콜레주 드 프랑스’의 전신인 ‘콜레주 루아얄’ 을 설립했습니다.
이곳은 프랑스에서 중세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신학의 중심지 파리대학과 달리 새로운
인문주의 교육과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으니 왕실의 후원은 당연히 사회 엘리트들
사이에서 이탈리아 인문주의에 대한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이러한 환경 속에서
16세기 프랑스는...... 이탈리아 다음으로 인문주의 연구가 발전한 곳이 되었습니다.
고전 그리스어와 라틴어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인문주의가 발전함과 동시에 프랑스어를 가다듬고자
하는 노력도 등장했으니 이미 14세기에 이루어진 프랑스어 번역운동의 흐름 속에서 고전
작품들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었으며 클레망 마로나 프랑수아 라블레처럼 프랑스어로 문학 작품
을 쓰는 작가들이 등장했고 프랑수아 1세의 누이 나바라 왕비 마르그리트의 이름도 들어 있었습니다.
프랑스어에 대한 관심은 프랑스라는 나라에 대한 애착은 물론 프랑스 왕권의 자부심과도 연결
되었으니 프랑수아 1세는 1539년 빌레르-코트레 칙령을 반포해 왕이 관할하는 행정 문서는
모두 프랑스어로 작성할 것을 결정했는데 이러한 노력들을 바탕으로 16세기를 지나 17, 18
세기에 이르러 프랑스어는 프랑스 왕실의 발전과 더불어 유럽 세계의 공용어로 발전하게 됩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대서양항로 개척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으니
남아메리카에 식민지를 장악하고 있던 에스파냐와 인도양 교역을 독점하고있던 포르투갈
의 상황에서 아메리카 탐사와 아시아와 교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으니 에스파냐의
세비야처럼 1517년에 세워진 노르망디의 르 아브르가 해외 항로를 향한 주요 항구가 되었습니다.
1523년에는 이탈리아 출신 조반니 다 베라차노로 하여금 북아메리카 연안을 탐사하도록 했으니 미국
의 뉴욕과 뉴펀들랜드 지역, 그리고 남쪽의 플로리다 지역 등지였으며 1534년에도 자크 카르티에
로 하여금 아메리카 동북부 해안가를 탐사하도록 했는데 1542년까지 자크 카르티에는 세차례에
걸쳐 탐사했고 현재 ‘케벡(퀘벡)’ 이라 불리는 지역을 프랑스령인 ‘누벨 프랑스’ 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이 케벡 지방은 캐나다의 기원을 이루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아메리카 중부로 확대될 누벨
프랑스의 시작이 되었으며, 프랑수아 1세는 포르투갈이 독점하고 있던 인도양 항로
에도 탐사 및 교역선을 보내기 시작했으니 1529년 장 파르망티에는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에 당도하여 훗날 인도 및 인도차이나 지역에 대한 프랑스 진출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원정, 르네상스, 대항해 시대등 사건들에서 큰 두각을 나타냈지만... 전대미문의
대규모 사업들과 성과들은 왕국에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시켰으니 국가 재정의 고갈이었는데 루이 12세
가 착실하게 쌓아놓은 국가 재정은 프랑수아 1세의 무리한 전쟁과 해외 탐사, 문예후원들로 소진됐습니다.
그의 치세에 프랑스 왕국 내에서는 더 이상 왕권에 대한 지방 귀족들의 도전이 발생하지 않았으니,
내부 귀족들의 폭력적 성향이나 불만 요소를 이탈리아라는 외부 전쟁으로 돌린 것과도 상관
이 있고 왕국 내에 국왕주권과 통치권을 확고하게 정착시킨 프랑수아 1세의 정책과도
상관이 있었는데 지방 귀족들의 순응은 왕권을 중심으로 한 왕국의 통일성을 강화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는 이후 전개될 절대주의적 경향의 토대를 이루기도 했으니.... 재정과 입법에 관한 왕권에
대한 견제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는데, 실제로 루이 12세가 정상화시켜 놓은 총신분회를 프랑수아
1세는 단 한번도 열지 않았고 또한 국왕에 의한 일방적인 과세가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수아 1세 치세에 등장한 새로운 현상은 바로 그의 라이벌 카를 5세를 궁지에 빠트린 종교개혁의
물결이었으니.... 독일 지역에 널리 퍼진 루터교는 독일의 민족감정과 깊이 결합되어 있던지라
프랑스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인문주의 교육을 받으면서 종교적 교리에 대해 한편
으로 개방적으로, 또 근본주의적으로 생각하던 신학자들은 자연스럽게 종교개혁의 물결에 합류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장 칼뱅으로 프랑수아 1세 치세 말년인 1540년대를 전후로 스트라스
부르와 스위스 주네브에서 새로운 종교개혁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으니 프랑수아
1세는 초기에는 이들 종교개혁의 성향이 교회 개혁과 직결되고 기독교에 경건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가톨릭 교리 자체에 어긋나지 않는 한 관대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이 제시하는 요구들이 이미 가톨릭에 깊이 연루된 왕국의 정책들이나 관례
들과 충돌하면서 프랑수아 1세는 종교개혁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했고 이후
개신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는데 하지만 프랑수아 1세는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카를 5세에 도전하는 개신교인 루터교 제후들에 대해서는 지원을 전혀 아끼지 않았습니다.
프랑수아 1세에게 중요한 것은 국왕 주권이었고 이를 기준으로 내부적으로는 개신교를 탄압하고
외부적으로는 지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이러한 모습은 앙리 2세 치세에도 반복되었고
17세기 중반 루이 13세 당시에도 반복되는데, 재정 문제와 종교 문제는 왕권의 절대주의화를
향한 측면인데 장기적 차원에서‘구체제’ 라 하는 프랑스 체제의 모순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됩니다.
1530년대부터 프랑수아 1세는 비대해지기 시작하면서 갖가지 질병을 앓기 시작했고, 1547년
패혈증 증상으로 사망하니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인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3세
는 1536년 18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막내인 오를레앙 공작 샤를 2세는 1545년
23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니 프랑스 왕위는 28세였던 차남 앙리 2세에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