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몽으로 알려진 고구려의 왕 동명성왕은 고구려의 초대 국왕이다. 고구려 본기를 인용한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에는 주몽의 본래의 성은 해였다가 건국 후 고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휘가 주몽이라 하였다고 하며 삼국사기 등에 따르면 추모, 중모, 중해, 상해 도모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다고 한다. 부여의 금와왕의 아들인 대소의 박해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고구려를 건국하게 된다. 부여에서 자란 동명성왕 주몽은 매우 총명하고 활을 잘 쏘았다고 하는데 이에 많은 사람이 주몽을 좋아하였는데 이런 촉망을 받던 중 대소 등 금와왕의 일곱 아들이 그 재주를 부러워해서 주몽을 죽이려고 하자 이를 피하기 위해 주몽은 이주하였다. 대소의 위협에서 무사히 벗어난 주몽은 유유히 남쪽으로 향하여 마침내 이 졸본에 정착하여 졸본의 둘째 달과 결혼하여 점차 세력을 넓혀나갔다 둘째 딸의 이름 건국 설화에 중에 소서노라고 알려지기도 한다. 또 다른 설화에서는 연타발이라고도 되어 있다. 어찌 됐든 주몽은 결혼하여 세력을 키우고 졸본 부여 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건국한다 고 씨로 전해지지만 주몽의 원래 성씨는 아버지인 해모수에 따른 해 씨이며 고구려 태조왕 당시 계루부 고 씨가 집권하자 정통성을 위해 시조인 주몽의 성씨를 고 씨로 바꾸었다. 그리고 국가의 위상을 일신하기 위해 대대적인 영토 확장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주몽은 영토 확장을 위해서 우선 변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변방에 살고 있던 말갈족 부락을 평정하여 말갈족이 더 이상 국격을 넘보지 못하도록 한다. 또한 기원전 36년에는 비류수 상류에 있던 부족 국가 비류국 또는 송양국이라고 하는 나라의 왕 송양에게 활쏘기 경쟁을 신청하고 경쟁에서 이겨 항복을 받아낸다. 옛땅을 회복했다는 뜻의 고구려 말인 다물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도주로 삼는다. 비류국을 정복한 주몽은 졸본성과 궁궐을 완성하여 나라의 위상을 한층 높이고 오이와 부분노를 보내 태백산 동남쪽에 있던 행인국을 정복하였으며 부위염을 보내 북옥저를 정복한다. 삼국사기에는 주몽의 건국 신화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의 건국 신화는 두 가지의 건국 과정이 존재하는데 첫 번째는 동명 성왕이 졸본에 정착하여 졸본 부여 왕 둘째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고 첫째는 비류 둘째는 온조로 이름을 지어준다. 이후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비류와 온조를 얻기 이전에 주몽과 북부여의 예 씨 사이에 태어난 유리가 고구려에 찾아오자 동명성왕은 돌아온 첫째 아들 유리를 태자로 임명한다. 이에 비류와 온조 형제는 유리가 왕위에 올랐을 때 화를 입을까 두려워 남쪽으로 내려가 새로운 땅을 찾기 시작하는데 후일 온조는 백제를 건국한다. 두 번째 고구려 건국 신화는 중국 사서에서 시작하는데 북부여의 왕인 해부루의 아들 우태는 소서노라고 불리는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과 혼인한다. 이 둘 사이에는 비류와 온조가 태어나는데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으로 망명한 주몽과 재혼하였다고 한다 이제 주몽은 소서노와 두 형제를 잘 보살펴 주고 소서노는 왕비가 된다. 그러니 부여 예 씨와 혼인하여 얻은 유리가 돌아오자 주몽의 마음은 유리 쪽으로 기울고 결국 유리를 태자로 임명한다. 그러자 형인 비류가 말하길 대왕의 업적이 크고 우리를 잘 보살펴 주었지만 나라가 유리의 손에 들어갔으니 다른 나라를 세우자고 다짐한다. 그리하여 두 형제는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대수와 패수를 건너 미추홀에 나라를 건국하였다는 두 번째 설화가 있다 설화는 아니지만 다른 설로는 소서노가 우태와 혼인하여 비류는 낳았지만 온조는 주몽과 재혼하여 낳은 아들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위와 같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주몽은 동부여에서 도망친 후 졸본부여의 귀족인 연타취발과 혼인 관계를 맺은 후 졸본부여의 군주가 되었다고 바라본다. 그래서 고구려의 900년 역사라는 보장왕 대의 말은 주몽 이전 졸본부여의 역사까지 합쳐서 말하는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해모수가 주몽의 아버지로 등장하는데 해모수의 해는 태양을 뜻하며 천손을 의미한다. 따라서 해모수는 고구려의 천손 의식이 의인화된 결과물로 해석할 수 있다. 주몽의 탄생 설화는 강을 다스리는 신 하백의 세 딸 유화, 훤화, 위화가 더위를 피하여 청하의 웅심연에서 놀고 있는데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내려와 연못 안에 있는 세 처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한다 훤화와 위화는 돌아갔으나 유화는 해모수와 만남을 가지게 된다. 하백이 이런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는데 이에 하백은 천제의 아들이라는 해모수와 술법을 겨루어 그의 능력을 시험한 뒤 해모수와 유화의 결혼을 인정하고 해모수를 따르도록 한다 하지만 하백은 해모수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고 다시 시험하자 해모수는 분노하여 홀로 승천한다. 이에 하백은 유화를 귀양 보내는 데 이후 동부여의 왕 금와왕이 유화를 만나고 불쌍히 여겨 궁궐로 데려온다 그렇게 데려온 유화는 기이한 일을 겪는다. 커다란 알을 낳고 이 소식을 듣은 금와왕은 이를 불길하게 생각해 알을 버리는데 돼지우리에 던져도 돼지가 먹지 않고 소와 말과 같이 두어도 알을 피해 다니자 하는 수 없이 유화에게 알을 돌려준다. 알을 잘 간직하자 그 알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나는데 그 아이는 보통 아이들과는 달리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고 백발백중이었다 이에 이 아이의 이름은 부여 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주몽이라고 지어줬다는 설화가 있다 그 뒤 주몽은 대소왕자 등 금와왕의 7명의 아들보다 능력이 좋아 그들의 질투를 받고 호시탐탐 주몽을 죽이려 하자 이를 눈치챈 유화가 주몽에게 동부여를 떠나라고 충고한다
동명성왕(東明聖王 기원전 58년 ~ 기원전 19년, 재위 :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 음력 9월)은 고구려의 초대 국왕이다. 이름은 주몽(朱蒙),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다.[4]《국사》(國史) 고구려본기를 인용한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에는 본래의 성은 해(解)였다가 건국 후 고(高)로 고쳤다, 휘가 주몽(朱蒙)이라 하였다. 또한, 《삼국사기》 등에는 추모(鄒牟)·중모(中牟)·중해(衆解)·상해(象解)·도모(都牟)·도모(都慕)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다.[5] 부여 금와왕의 아들인 대소의 박해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건국하였다.